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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밑에는 더디고 느린 것들이 그립습니다. 치열한 속도 전쟁 시대에 살다보니 시간도 빨라지나 봅니다.아침 저녁으로 모습이 바뀌는 세상에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속도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에겐 늘 뒤처지고 맙니다.어디 세월이 더디 흐르는 곳은 없을까요? 적어도 강원도 정선은 속도에서 해방된 공간입니다. 세월도 아우라지 강물처럼 느릿느릿 흐르지요.
해마다 상전벽해하는 우리 땅에서 아직도 옛모습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양지 바른 구릉 밭에는 아직도 함석집이 앉아있고,저물녘이면 굴뚝에서 모락모락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답니다. 푸릇푸릇 싹을 내민 보리밭이나새마을 운동 때 지붕을 바꾼 슬레이트집은 이젠 훈훈한 옛풍경이 됐습니다.낡고, 투박하고, 촌스럽다며 우리가 허물어버렸던 것들이 거기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정선에 가보시지요.때로는 느리고 더디 변하는 것들도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숙암계곡을 돌고 돌아 아우라지 가는 길. 태풍 루사와 매미로 2년 연속 수해를 당했던 아우라지는 요즘 마무리 제방공사가 한창이다. 무너진 다리가 새로 놓였고, 강변에는 펜션도 들어섰다. 아우라지도 실은 변했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궁벽한 강마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었지만 강줄기는 제방이 쌓여 운치가 없어졌다. 그래도 다른 곳보다 옛것들이 많이 남아있다. 송천을 파고들면 아직도 함석집이나 슬레이트집이 보이고, 골지천을 따라 가다보면 배추밭 가운데 장작을 때는 농가가 나타난다.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도 그리 많지 않다.
“보는 사람이야 좋을지 모르지만 사는 사람은 죽을 맛이래요. 다들 좋은 집 짓고 살고 싶지 누가 다 허물어진 집에서 그렇게 살고 싶겠어요.”
관광객들은 아우라지의 변화가 달갑지 않지만 주민들은 손사래를 쳤다. 그나마 올해는 더욱 버겁다고 하소연이다. 쌀농사는 남도의 너른 평야지대에 비하면 경쟁력이 없고, 날이 추워 특용작물도 힘들다. 비닐하우스 난방비가 훨씬 많이 들기 때문. 배추와 감자가 특산품이지만 그것도 예전처럼 좋지 않다. 김치냉장고 때문에 김장도 제때 하지 않고, 중국산 절임배추까지 밀려들어 온다. 감자도 출하량에 따라 시세 변화가 많다. 올해는 배추값마저 폭락해서 갈아 엎어버린 집들도 있다고 한다. 옛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것도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이다.
아우라지 유적지가 있는 가금마을을 찾았다. 가금은 태백 검룡소에서 흘러나온 골지천과 발왕산 뒤로 흐르는 송천이 합류, 조양강을 이루는 곳이다. 조양강은 동강이 되고 다시 서강과 합쳐져 남한강을 이루니 한강의 첫물줄기인 셈이다. 가금 마을은 탁 트여 있어 바람이 거세다. 바람이 거센날 사람들은 ‘갈금(가금)바람 불듯 한다’고 한다. 논자락 귀퉁이에는 아직도 녹슨 양철판으로 바람을 막고 있는 농가들이 애처롭게 서있다.
이런 바람 속에서 12월초 섶다리가 놓였다. 가금마을과 아우라지 여인상(사진 아래)을 잇는 다리 하나와 아우라지 여인상과 여량마을을 잇는 다리 등 모두 2개다. 길이는 각각 50m쯤 된다.
섶다리는 겨울에 놓았다가 장마철에 떠내려보내는 임시 다리. 콘크리트 다리가 놓인 뒤 사라졌던 것을 6~7년 전 다시 놓기 시작했다. 섶다리를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 올해도 매운 바람을 맞고 시린 강물에 나무를 꽂아 다리를 만들었지만 정작 관광객들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아우라지는 지난 3년간 수해가 극심한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2002년에는 루사 피해가 컸고, 피해복구도 끝나기 전인 지난해에는 매미로 다시 망가졌다. 포스코 광고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돌다리는 개통식도 못하고 떠내려 갔다. 올해는 경제가 엉망이었다. 올겨울은 그래서 더 버거워보인다.
힘겹게 만든 섶다리 끝에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아우라지 여인상이 서있다. 루사 때 떠내려갔던 것을 다시 주워와 세운 것이다. 여인상은 1930년대 여량마을 총각이 사랑에 빠진 송천마을 처녀다.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뗏목을 탔던 총각이 여울에 휩쓸려 죽고 처녀도 몸을 던졌다는 슬픈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아우라지에서 송천 물줄기를 타고 들어가면 구절리로 이어진다. 제법 너른 들을 끼고 있어 벽촌에서 쌀밥깨나 먹었다는 흥터마을, 이율곡이 갓을 걸고 쉬었다는 갓거리, 겨울에도 풀이 자란다는 동초밭 등 이름마다 구구한 이야기들이 얽여있다. 구절리도 아홉 굽이를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구절리는 정선선 열차의 종점이지만 아우라지~구절리 구간은 열차가 다니지 않는다. 구절리를 관광지로 개발한다는 계획 아래 자전거처럼 페달로 밟아 달리는 레일바이크를 설치할 예정. 요즘 주변정리 작업이 한창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사도 돌고도는 모양이다. 100년 전 구절리는 꽤나 번성한 마을이었다. 대관령에서 넘어오는 지름길. 구절리 인근에 양조장이 2개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하지만 일제 때 임계 쪽으로 도로가 뚫리면서 한동안 잊혀져버렸다. 60년대 중반 정선선 열차가 개통되고 석탄산업이 활기를 띠면서 구절리는 저잣거리처럼 흥청거렸다. 구절리 분교에만 학생 700명이나 됐단다. 94년 페광이 되자 다시 사람들이 떠났고 현재 분교에는 학생이 10여명에 불과하다.
여울조차 잦아들어 강물도 숨을 죽인 채 흐르는 정선의 강마을. 산도 강도 마을도 동면준비를 하고 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하다.
▲여행길잡이
▶교통
영동고속도로 진부IC에서 빠진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만나는 3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정선 가는 길. 숙암계곡을 따라 가는 강변길이라 드라이브 코스로도 좋다. 나전에서 철교밑 굴다리를 지나 좌회전하면 삼척 가는 국도 42호선. 여량교를 건너지 않고 좌회전하면 구절리로 이어진다. 아우라지 유적지라는 돌표지판이 서있는 시멘트길로 들어서면 섶다리와 아우라지 여인상을 볼 수 있다. 마을을 빠져나와 송천쪽으로 더 달리면 구절리다. 골지천 쪽은 아우라지 유적지를 빠져나와 여량교를 넘어 달리면 된다. 태백방면으로 달리면 골지천을 따라 가게 된다. 청량리역에서 증산까지 하루 6편 열차가 다닌다. 증산에서 아우라지까지는 오전 6시45분, 오후 2시, 오후 6시15분 세차례 열차가 다닌다. 철도청 홈페이지(www.korail.go.kr)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 철도고객센터 1544-7788
▶숙박
구절리에 있는 알프스휴양지(033-562-9885)가 깨끗하다. 콘도형으로 취사가 가능한 숙소와 일반객실로 나뉘어 있다. 일반객실도 장급여관 못지않게 깨끗한 화장실이 붙어 있다. 정선읍과 진부, 임계에도 여관이 꽤 있다. 골지천길에서는 여관이나 민박집을 찾아보기 힘들다.
▶먹거리
정선읍내에 동광식당(562-0437)은 황기를 넣어 쪄낸 황기족발과 콧등치기를 내놓는다. 콧등치기는 국수를 후루룩 빨 때 콧등을 친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