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조상 추모 성찬례 (9월 21일, 비대면 온라인, 사목단)
<한가위 - 감사와 위로와 베풂> (1요한, 3:17-18, 마태 25:34-40)
주임사제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교우 여러분 평안하신지요? 올해 추석은 여러분을 성당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환한 얼굴로 가족과 함께 올라오던 교우들과 가족 여러분의 얼굴이 선합니다. 다른 곳에 사시다가 고향처럼 성당을 찾는 모습, 안식의 집에 들러서 기도하시던 모습이 그립습니다.
그 얼굴을 떠올리면서 여러분에게 추석 인사를 드립니다. 요즘의 맑고 높은 하늘처럼, 넉넉한 보름달처럼,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하느님의 크고 풍성한 은총이 가득하길 빕니다.
어쩔 수 없이 추석의 풍경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가족이 한꺼번에 모이지 못하고 시차를 두어 분산하여 모이는 지혜를 보여주기도 하십니다. 여러 처지를 서로 배려하면서 이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계십니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참아내며 서로 격려하는 모습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함께 이 상황을 이겨나가는 일로 서로 이해하는 마음이 귀하기만 합니다.
이 어려운 처지에서 추석의 의미는 더 깊어집니다. 우리 선조들은 추석 명절을 준비하고 지낼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하는 덕담을 나누고는 했습니다. 이 작은 소망의 말에는 하느님의 은총을 향한 감사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우리 삶을 함께 이루어가는 모든 사람과 먼저 세상을 떠나신 이들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우리 신앙과 삶에 대한 절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 감염증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예배는 언제나 평안하고 즐거운 상황에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양을 두고 더 감사하거나 덜 감사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어려움의 처지에서도 동행하시며 우리를 헤아리시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신앙으로 우리를 더 깊이 안내합니다. 여전히 궁핍하고 어려운 삶을 함께 견디는 삶을 감사합시다. 함께 고생하며 격려하는 가족과 친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차례상에 올리고,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은 삶의 즐거움과 기쁨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슬픔과 아픔, 땀과 눈물이기도 합니다. 거의 두 해에 걸친 코로나 상황 속에서 우리 교우들, 특히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과 소상공인들, 그리고 젊은이들과 교육을 받아야 하는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연로하신 분들의 외로움을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작은 지역 교회들이 겪고 있는 곤란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감사의 봉헌은 이 어려움의 눈물과 한숨을 모아 하느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감사의 봉헌은 이러한 상황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우리가 가진 것을 더 나누고 손을 내미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 삶을 지탱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추석과 더불어 우리와 사랑을 나누었던 이들을 기억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과 그 생명을 보살펴 키워주신 조상에게 큰 감사의 예를 표합니다. 이 추모의 성찬례 속에서 하느님을 예배하고, 조상과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운명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윤선모 교우의 부친이신 윤경순 가브리엘 신부님의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정만석 교우의 아내인 이순열 사라 교우를 아픈 마음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장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 하느님의 품에 안긴 분들을 기억합니다.
김소희 앵니스, 정운봉 요한, 이규석, 김완영, 이달형, 김기현, 이삼현 베드로, 서정오 요한, 김명환, 원천수, 홍월규 마리아, 진철구, 이순열 사라, 송광호 암브로스, 김경순 가브리엘
이처럼 사랑하는 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가족을 기억합니다.
이생의 이별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운명과 종착지가 모두 같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습니다. 이생의 이별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서 그리워하던 사람을 모두 만나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분들도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삶을 응원하고 축복하는 놀라운 상통의 신비 안에서 교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단계이고, 이 생명은 우리 모두 나누게 될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리움 속에서 우리 삶을 더 단아하게 정돈할 수 있습니다. 한가위는 욕심을 내려놓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스스로 절제하는 삶을 다짐합니다.
‘내가 더 가져가면, 남이 덜 가져갈 수밖에 없다’는 간단한 진리에 대한 생각 때문입니다. 궁핍했던 시절보다 더 풍족해졌다면, 더 움켜잡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이가 ‘덜’ 받아서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는 소망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다시금 깊이 생각해야 할 말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어려운 중에도 언제나 봉헌에 참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봉헌은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서 옛 추석의 풍경을 잘 기억합니다. 없는 살림에 차례상을 정성 들여 차렸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여름의 땀과 수고를 잠시 쉬고, 새로운 곡식과 과일을 맛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수확을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조상의 은덕 탓이라고 감사하면서 즐기고 쉬는 축제였습니다. 게다가 멀리 떨어진 가족과 친지가 함께 찾고 만나는 기쁨의 잔칫상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고 즐겁고 밝은 얼굴을 나누며 시름을 잊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차례상은 가족과 친지들만이 먹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부엌이나 창고에도 작은 상을 차렸습니다. 부엌의 조왕신이나 곳간을 지키는 영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대문 밖에도 상을 차렸고, 동네 어귀에도 작은 음식상을 차렸습니다. 집 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상이었습니다. 또한, 들짐승이라도, 미생물 같은 미물에게도 풍족히 먹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생명은 누구라도 어떤 것이라도 대접하여 서로 화목하려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 추석은 이 복음의 말씀을 잘 간직하고 따르던 명절입니다. 나라를 잃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새로운 약속이 내렸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 안에서 ‘혀끝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나누는 일’을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서로 좀 더 넉넉하게 대하고, 감사와 용서로 더욱 후하게 살아가는 출발이기도 합니다.
오늘 밤 보름달이 뜹니다. 저도 어젯밤 미리 나가 달맞이를 하였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힘을 내라고, 어둡고 힘든 상황 속에도 길을 잃지 말라고 격려하듯이 높고 환하게 뜬 보름달이었습니다. 오늘도 그 보름달이 뜹니다. 높고 환한 달을 맞이하면서, 달에 그리운 사람을 비추어보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곧 이름을 부르게 될 고마운 사람들, 먼저 떠나서 그리운 분들의 얼굴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바랍니다. 이번 추석에는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을 비추어 축복의 기도를 드리기 바랍니다. 여전히 우리 삶은 슬픔과 기쁨, 어려움과 즐거움이 수시로 교차합니다. 이 삶을 늘 함께 견디며 동행하는 가족과 식구들에게 사랑의 인사를 건네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이 하느님께 감사하고 서로 위로하고 함께 베푸는 삶 속에서 펼쳐지기를 빕니다. 감사와 사랑과 축복이 하늘에 뜬 넉넉한 보름달처럼, 한가위처럼 여러분의 삶에 넉넉하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