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4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탈출기 16,1-5.9-15
마태오 13,1-9
<사람이 변하지 않는 이유>
존 에프 케네디는 미국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와 미국에서 양조장을 경영해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여러 아들 중, 하나는 중풍에 걸렸고, 하나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었으며, 대통령이 된 아들도 암살당했고,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도 총에 맞아 죽었으며, 상원의원으로 있던 에드워드도 여비서 익사 스캔들에 휩싸여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아들들이 이렇게 비참한 생애를 마치거나 어려움에 빠지는 것을 본 아버지는, “내가 수십 년 간 술을 만들어 팔아 많은 가정을 불행하게 했고, 분쟁을 일으켰으며, 사람들을 죽게 했으니, 이렇게 죄 값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술장사해서 돈 번 것이 뭔 잘못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또한 가톨릭 신자로서 그런 이유로 죄책감을 전혀 갖지 않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죄책감이 믿음이 되어버리면 실제로 그 죄에 대한 보속이 일어납니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변화는 나로부터, 우리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내 나라로부터 일어나야합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면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가 변하고 싶어도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외적인 것에서부터 변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회의 안소니 드 멜로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청년 시절에는 세계를 변화시키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중년이 되어서는 내 이웃을 변화시키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70세가 된 오늘은 오직 하나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청합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서는 대통령이 되어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는 나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일어나야합니다.
돈을 좋아하고 술과 쾌락, 권력을 추구한다면 그런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는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욕구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의 가장 내적인 곳에는 ‘욕구’가 있습니다.
가장 외적인 곳은 ‘말과 행동’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행동을 변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욕구에서 말과 행동이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본성에 관련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길 위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마음이 굳고 완고한 사람을 말합니다.
즉, ‘교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복음을 들어도 자기 주관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 정작 자신을 변화시킬 요소들은 무시해버립니다.
돌밭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쉽게 뜨거워졌다가 쉽게 차가워지는 사람의 마음을 말합니다.
‘육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감정은 죄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복음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다가도 쉽게 죄에 떨어집니다.
가시밭에 떨어진 씨는 가시나무가 자라면 숨이 막혀 죽어버립니다.
가시나무는 세상 걱정입니다.
돈에 대한 걱정이고 ‘소유욕’에서 비롯됩니다.
복음 말씀을 따르려고 하지만 돈이 좋아서 소득의 십분의 일도 주님께 봉헌할 수 없는 처지의 신앙인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욕구, 즉 삼구(三仇: 세속[돈]-육신[성욕]-마귀[교만])가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는 한 복음말씀은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비록 이 세 가지 욕구를 조금씩 죽여 나간다 하더라도 사람 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30배, 60배, 100배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삼구는 자아의 욕구입니다.
자아의 욕구를 먼저 죽여야지 행동만 변화시키려 해서는 절대 복음말씀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 존재들입니다(2코린 5,17).
옛 본성은 살아있는데 행동만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또 그 죄에 떨어집니다.
내가 죽으려면 내 본성이 죽어야하고, 내 본성이 죽으려면 예전의 욕구가 죽어야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욕구가 죽을 수 있습니다.
나무토막에 계속 불을 지피면 그 안에 있든 물이 빠져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물이 빠져나오기 전까지는 불이 나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무가 숯불이 되려면 먼저 이전의 욕구가 성령의 불로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변하고 싶다면 행동을 변화시키려하지 말고 욕구를 변화시키려 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더라도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미사에 아무리 자주 참여하더라도 계속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면 신앙인다운 신앙인의 모습을 갖출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인들의 책을 많이 읽어도 계속 남 판단하기를 좋아하면 그 얻는 지식이 오히려 더 큰 교만만 키울 뿐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욕구이지 행동이 아닙니다.
행동은 가장 속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욕구는 속일 수 없습니다.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신앙인이 아니라 욕구를 변화시키려는 신앙인이 되어야합니다.
행동이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켜야합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됩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탈출기 16,1-5.9-15
마태오 13,1-9
<누구나 꿈꾸는 백배의 열매! 관건은 토양입니다!>
누구나 꿈꾸는 백배의 열매! 관건은 토양입니다!
씨나 모종은 영양분이 풍부한 비옥한 땅에 뿌리고 심어야지,
시멘트나 아스팔트 위, 자갈밭이나 잡풀더미 위에 뿌리고 심어서는 허사입니다.
전문직 농부들의 좋은 토양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은 엄청납니다.
미리 미리 양질의 퇴비를 확보해 놓습니다.
부족하다면 거금을 들여서라도 준비합니다.
아깝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퇴비를 투척합니다.
뒤집고 또 뒤집습니다.
방해되는 돌들은 골라내고 또 골라냅니다.
그 결과가 좋은 토양이며, 그런 땅에 작물을 심을 때,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는 따놓은 당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 한 가지!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백배의 열매를 맺는 비옥하고 탐스러운 토양처럼 되고자 한다면, 가만히 앉아있어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우선 인생과 신앙의 농사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가시 덤불들 (불신과 의혹, 미움과 상처)을 걷어내야죠.
작물들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돌들(게으름과 나태함, 분노와 악감정)을 말끔히 골라내야 합니다.
양질의 퇴비를 흩뿌린 다음, 뒤집고 또 뒤집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주 우리 인생을 뒤집어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물구나무서기를 해야겠습니다.
기존의 고착화되고 편협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과감히 뒤집어야겠습니다.
그것만이 좋은 삶의 토양을 마련하고, 백배의 열매를 위한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가끔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해 봅니다.
육적으로는 아주 건강하고 멀쩡한데, 내적으로 심각한 질환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육적인 영양 상태는 만점인데, 정신적·심리적·영적으로는 완전 영양실조 상태에 빠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 없고 멀쩡합니다.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자고, 잘 돌아다니고...
그러나 영혼과 정신, 마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다보니, 그저 허깨비처럼 몸만 왔다갔다 합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영혼이 사라진 존재로서, 동식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순간은 기본에 충실하지 못할 때 순식간에 다가오더군요.
한 인간 안에 영육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해야되는데, 영혼과 정신이 죽어있으니,
결국 반쪽만 살아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토양을 어떻게 비옥하게 조성할 수 있겠는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기본에 충실해야겠지요.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은 육체도 건강하지만, 육체를 지배하는 영혼과 정신도 건강한 상태를 의미하겠습니다.
영혼과 육신이 한 인격체 안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서로 보완하고 지지할 때, 그 인생은 활짝 꽃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각자 인생의 나무에는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3,1-9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농부가 뿌린 씨앗을 새들이 쪼아 먹고 햇빛으로 타버리고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 죽여 버리지만 많은 씨앗이 결국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바라는 것은 결국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씨앗을 뿌리는 것이지, 얼마 되지 않는 수확을 위해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없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4절) 여기서 길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넷길 세상이다. 이 길에는 하느님의 것은 조금도 모르고 세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길은 단단하여 씨앗을 덮을 만큼 충분한 흙이 없다. 악의 세력이라고 하는 새가 그 씨앗을 먹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 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6절) 돌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들은 지나가는 악마들에게 채여 간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련의 겨울이라고는 없는 날씨가 맑고 편할 때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고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어려운 시기나 박해가 닥치면 쉽게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절) 신앙인은 가치관이 올바로 서있어야 한다. 이 가시덤불은 하느님보다도 재물을 추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재물에 대한 관심과 욕망이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씨를 고이 보존하고 가꾸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엄청난 결실을 보장받고 있다. 이렇게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여야 한다. 여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씨앗은 금방 효과를 내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열매 맺지 않는다.
오랜 기간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자라야 할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싹을 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라는 밭에 있는 온갖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와 가시덤불을 걷어내어 좋은 땅이 되도록 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삶이라고 살 수 있도록 매일 매순간 노력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