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인들의 풍속
김성문
가야인들의 풍속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풍속은 개인 혹은 공동체의 삶 속에서 행해지는 지속적인 습관이다. 그 사회 속의 특별한 모습이 반영된다. 가야인들의 혼인과 장례의 풍속을 알아보았다.
혼인은『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의 기록에 보면, ‘소나 말을 타고 시집가고 장가를 든다. 예절은 남녀의 구별이 있다.’라고 했다. 이를 볼 때 그 당시 혼인의 풍속을 알 수 있다. 말은 군사들이 주로 싸움에서 활용했기 때문에 장가들 때 신랑이 말을 탄다는 것은 이제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신부가 시집가는데 소나 말을 탄다는 것은 오늘날과는 매우 다르다. 하기야 가야 시대 때는 여전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당시도 남녀의 구별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남녀가 하는 역할이 다르다고 해석된다. 예나 지금이나 남녀는 여러 가지로 다른 면이 있다고 본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조에 나와 있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혼인 절차는 귀족 계층이나 왕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비슷하게 행해졌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수로왕과 허왕후는 사전에 혼인 예약이 된 것으로 본다. 혼인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수로왕은 신하를 시켜 김해 바닷가 망산도로 가서 기다리게 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허왕후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로서 머나먼 항해를 해서 망산도에 도착했다.
수로왕은 허왕후를 기다리면서 도착 소식을 들었다. 망산도에 나가 있는 신하로부터 연락을 받고, 직접 나가 임시 궁궐을 만들어 허왕후를 기다린다. 허왕후는 배에서 내려 높은 언덕에 올라 산신령에게 무사히 항해해 온 것에 대한 감사와 옷에 붙어 있는 악귀들을 정화하기 위해 비단 바지를 벗어 받쳤다.
그 후 허왕후는 수로왕이 기다리는 임시 궁궐로 가서 이틀 밤을 지내고 하룻낮을 함께 지낸 후 가락 왕궁으로 들어간다. 허왕후는 가지고 온 예단을 공개했다. 오늘날과 같이 혼인 약속을 하고 신부가 시집갈 때 예단을 보내는 것과 똑같은 풍속이다.
장례는『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의 기록에 보면, ‘큰 새의 깃을 장례에 부장품으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올라 가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 무덤에서 새의 유체가 발굴된 예는 없으나, 오리 모양 토기는 발굴되고 있다.
이집트 등 고대 문명의 사후 세계관이나 불교의 윤회 사상 등에는 사람이 죽으면 육신을 벗어난 영혼이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고 생각했다. 가야인들도 큰 새의 깃을 함께 넣어 장례를 치른 것으로 보면, 영혼의 존재와 사후 세계를 인정한 것 같다.
가야인들의 장례 풍속을 보면, 무덤 안에 음식과 그릇을 함께 묻었다. 그릇은 현실 세계와 사후 세계의 경계선을 인정하기 위해서 토기를 깨뜨려서 넣었다. 오늘날에도 상여가 떠난 뒤에서 망자가 사용하던 그릇을 던져 깨트리는 풍속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토기를 그대로 넣는 경우는 음식 의례를 행하고 난 뒤 사용한 토기를 죽은 자에게 봉헌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토기 속에는 여러 가지 음식물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망자가 저승에서도 음식을 섭취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뼈가 붙어 있는 고깃덩어리로 시신 위를 덮어 주어 죽은 자의 양식으로 삼게 했다.
장례를 치른 뒤에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시체의 살이 완전히 썩어 뼈만 남은 것을 모아 다시 장례 의식을 치렀다. 수로왕의 경우 붕어 후 빈궁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빈궁을 나중에 사당이라 불렀다는 것은 무덤을 다른 곳에 조성했다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말이나 개 등 동물을 함께 묻는 것은 동물이 죽은 자를 저세상까지 무사히 이끌고 가도록 하는 바람일 것이다. 분묘는 연결하여 만든 곳이 많은데, 이는 혈연적 관계 혹은 세대 간 계승 관계를 강조하는 행위로 해석하기도 한다.
가족이나 주군(主君)이 사망한 후는 슬픔에 못 이겨 치아를 뽑거나 마모시켜 그 슬픔을 나타내는 예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풍속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순장(殉葬)은 주인공을 모시던 시종이나 신하를 죽여 함께 묻는 장례 방식으로 통치자가 행사하는 강력한 권력의 표현으로 본다. 즉 생전의 권력관계가 죽음 이후까지 이어지게 하는 장례 풍속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순장된 사람의 신분은 노비부터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순장 당할 처지에 있는 사람이 도망을 갔다니 주군은 생명의 존엄성을 경시한 것 같다.
김해시 대성동 고분이나 대가야 고분에서 순장자가 많이 확인되었다. 순장자는 덧널 안 또는 구덩이형 딸린덧널 안에 매장되었다. 대가야 지역에서는 순장자 수가 10명~60명 정도이나, 김해 지역의 대성동 고분에서는 5명 이하이다.
가야 시대 때는 순장을 금지하는 조치를 찾아볼 수 없으나, 신라의 경우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명씩을 순장했다. 그러나 신라는 서기 502년 지증마립간 때 순장을 금지하는 조치가 나왔다. 그 후 순장자 대신에 토용이 대용품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한 것 같아 다행이다.
풍속은 그 사회의 생활 모습이다. 옛날의 풍속이 오늘날까지 전해 지고 있는 것도 있다. 좋은 풍속은 더욱 발전시켜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하겠다. 내가 가야 시대 때 살았다면 순장자나 주군이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대가야 고분 속 순장자의 돌덧널, 촬영: 서기 2017.10.27.(금) 출처: 대가야박물관
첫댓글 사후세계를 어느 시대 어느 나라도 믿었다는 것을 잘 알수가 있네요.
그릇을 깨뜨려서 넣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이집트, 중국, 신라 등의 무덤에는 그대로 넣었는 줄 알고 있는데 가야가 특이하네요.
신라쪽의 문화도 이승과 저승을
구분 짓기 위해 떠나는 상여 뒤에서 그릇을
던져 깨뜨리는 풍속이 있다고 봅니다.
농촌에서 살 때 본 기억이 납니다.
귀한 시간 내시어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