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나라가 물폭탄을 맞은 한 주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인명 피해도 있고 여기저기 피해가 많습니다. 대단하지요. 아무리 대비를 한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자연의 힘을 우리가 다 제어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현상이 기후변화의 일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주에는 아주 제한된 한 지역에 마치 양동이로 물을 붓듯이 비를 쏟아내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예보할 수 있겠습니까? 예측불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가까이 중국 그리고 일본 이웃 나라들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촌 여기저기 난리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나 몰라라 하고 있을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높으신 양반들 높은 곳에 살고 있으니 대수겠느냐 생각하는지도 모르지요. 거참!
이 장마 기간도 질질 끌고 있는 것 아닌가 염려됩니다. 이제 그만 짐 싸서 떠나면 좋겠습니다. 주간예보를 보니 다음 주에도 비 소식이 있는 듯합니다. 걱정되네요. 이러다 농작물 모두 냉해 보는 것은 아닐지 정말 걱정됩니다. 그러잖아도 값이 계속 오른 채로 유지되고 있는데 더 오를까 무섭습니다. 이 주말은 왜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만 나오는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데 말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이겨내야 합니다. 징징대면 더 우울해지기만 하지요. 일단 심호흡 한번 하고 이 주말 아침을 열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주말인 걸요. 아파도 이기고 힘들어도 이기고, 우리 민족성이 그렇잖습니까? 결코 꺾이지 않는다, 이거죠. 모두 힘내시고 복된 주말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파이팅!! *)*
2024년 7월 20일 김종우 목사 드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수기 14 : 8)
<탈주>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전해주는 유튜버가 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초대하여 실제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물론 본인이 여러 번 북송을 당하면서 그 고난을 이겨내고 탋북에 성공하여 우리나라에 자리잡아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튜브를 올리고 있습니다. 수만 명에 이르는 탈북민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제각기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듣고 있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와 얼마나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듣습니다. 그곳을 빠져나오느라 얼마나 위험하고 긴 고난의 길을 지나야하는지 알게 됩니다. 정말 목숨을 걸고 이곳으로 오는 것입니다. 물론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습니다.
꿈을 꿀 수 없는 곳, 꿈을 꾸지 못하는 곳, 아니 꿈을 꿔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냥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곳입니다. 어쩌면 내가 왜 태어났나 하는 질문도 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쉬운 말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태어난 자리에서 주어진 자리대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나름의 욕망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길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우선은 살아야하니 적응해야 하고 남다른 일도 꾀해보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먹고 좀 더 좋은 것을 찾을 수 있다면 찾아내고 그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흙탕 속에서 꽃 피워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철저히 막는다 해도 들어오는 틈새라는 것이 있습니다. 발도 없이 천리를 간다고 하지요. 누군가는 바깥구경을 하고 옵니다. 입이 간지러울 것입니다. 한번 입을 열면 숨기려해도 이렇게 저렇게 번져갑니다. 그렇게 하여 귀동냥이라도 해서 듣습니다. 일단 뭔가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나면 말은 하지 않아도 꿈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철저히 세뇌당하여 있다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지우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현실이 너무 기막히다면 그 꿈을 키워갑니다. 아무리 단속해도 사람 마음 속에 담겨있는 꿈마저 강제로 지울 수는 없습니다. 조금씩 자라다보면 그것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도 생깁니다. 어차피 이렇게 살바에는, 하는 마음도 생기지요.
탈북민 대부분은 일단 중국으로 가서 먼 동남아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들어옵니다. 가깝기야 바로 이웃하여 있는 철책선을 넘으면 됩니다. 그러나 정말 위험하지요. 주변이 온통 지뢰밭입니다. 때문에 먼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길도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당장 폭발하여 죽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두만강을 건넌답니다. 아마도 압록강보다는 수월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땅으로 오려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곳에서 짐승만도 못하게 사느니 목숨을 걸고라도 한번 건너보자 하는 마음으로 탈북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나면 때로는 북한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기도 한답니다.
그렇게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완전히 별나라지요. 드디어 사람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일단 사람이 사는 곳으로 들어왔다 생각하면 안심은 됩니다. 그러나 북에서 교육받은 내용들이 쉽게 가시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마주치는 이곳 공무원들의 태도와 제공되는 식사에 차츰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야말로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조사를 받고 다른 범죄혐의가 없다면 우리나라에서의 생활 적응훈련을 받게 됩니다. 자신에게 맞는 직업도 알선받습니다. 거주할 집도 제공됩니다. 물론 완전 제공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벌어서 갚아가는 임대 형식입니다. 그래도 전혀 경험해보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혜택에 놀람과 감사가 넘칩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들어오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10년 만기 제대를 코앞에 두고 있지만 이 나라에서는 앞날이 없다고 확신한 ‘규남’은 진작부터 탈주를 계획합니다. 그런데 부하 중 하나가 눈치채고 자기가 먼저 나서서 탈출을 시도합니다. 얼떨결에 쫓아 나서지만 얼마 가지 못하여 붙잡힙니다. 실컷 두들겨맞고 상부에 보고된 대로 보위부 상관, ‘현상’이 방문 조사합니다. 그런데 이 녀석 잘 아는 후배입니다. 어려서 책을 선물로 준 적도 있습니다. 사실 규남이는 그 책을 보며 꿈을 키웠는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책갈피에 선배가 친필로 써준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의미 없는 삶을 두려워하라.’ 하지만 두 사람의 길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 사회에서 본다면 귀족과 평민입니다.
현상은 그 상황을 자기 명예와 권세 지키는 기회로 이용합니다. 덕에 규남은 탈주자가 아니라 탈주자를 붙잡은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봤자 언제이고 권력 잡은 자들의 소모품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오히려 영웅의 자리를 이용하여 다시 탈주를 시도합니다. 대충 아는 비무장지대 지뢰밭으로 들어서고 그 지도를 가지고 있던 현상도 뒤쫓습니다. 도대체 죽음을 무릅쓰고 넘어가려는 규남을 이해해주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기야 현상은 오히려 그곳에 사는 것이 더 편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사회 소수에 드는 계급이니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백성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영화 ‘탈주’(ESCAPE)를 보았습니다. 탈북민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공감합니다.
하늘의 음성
성경이 쉬워요, 어려워요?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전체적인 내용이 어려운 것도 있지만 단어의 뜻을 몰라서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 교회를 나가고 신앙생활 따라할 때 사용하는 용어의 뜻을 몰라서 헤맨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걸 시간 내어 가르쳐주지도 않습니다. 참 오랜 동안 그냥 알거나 말거나 따라다니다가 저 자신이 시간을 내어 파고들었습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알아낸 것이 꽤 됩니다. 참 이상합니다. 교회에서 왜 가르쳐주지 않을까요? 그냥 알아서 배워라 하는 식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저는 가르치기로 한 것입니다. 언제요? 주일 아침 예배 마치고 점심 먹고 오후 시간에 교육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실천한 일입니다. 정말 신앙생활 제대로 해야 되겠다 하는 신자는 남아서 배웁니다. 알고 신앙생활 하는 것과 그냥 건성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요즘이야 토요일까지 휴무하는 직장이 많으니까 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주일(일요일) 역시 마음 느긋하게 쉴 수 있는 날이지요. 세상 사람들처럼 집에 편안히 앉아 빈둥빈둥 거리며 지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아니면 자기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산에 가고 낚시 가고 여행 가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사양하고 교회에 옵니다. 대단한 양보를 하신 겁니다. 게다가 헌금까지 챙겨가지고 와서 바칩니다. 시간 드려 몸 드려 돈까지 드립니다. 대단한 희생 아닙니까? 그러면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바치며 교회를 나온 어떤 가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희생을 감내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목적 이유가 무엇입니까? 뭔가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가치가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게 무엇이죠? 우리의 미래입니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불안이고 또 하나는 기대입니다. 앞날을 생각하면 불안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신경 쓰는 미래에 대한 대책이 무엇입니까? ‘노후대책’입니다. 수명은 늘어 가는데 정년퇴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직장을 떠난 후의 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이런 저런 여러 가지 노후대책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 불안하니까.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생각할 때 기대를 많이 합니까, 불안한 마음을 많이 가집니까? 기대보다는 불안해합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현실적으로 마련된 것이 없다면 불안할 수밖에 없지요. 60부터는, 70부터는 어떻게 살지? 몇 억을 은행에 예치해둔 사람일지라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왜요? 화폐 가치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도 불안해합니까? 예, 불안해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과연 믿음이 있다면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라고 명하십니까? 내일 일을 염려하라고 하십니까? 마 6 :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말씀 앞에서 무엇을 이야기하십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등등 생활의 문제로 염려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그런 거 다 아신다, 그러십니다. 아버지가 자식들 굶기겠느냐? 그럴 리 없다. 공중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데 하물며 가장 귀히 여기는 우리일까 보냐?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염려 불안 가질 필요가 있다? 없다? 없다, 그겁니다. 문제는 그런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미래는 우리의 불안의 대상이 아니라 기대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나오는 것도 바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최소한 그런 기대를 가지려고 나오는 줄 믿습니다. 세상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해결합니다.
우리가 얼마 전 아들 곧 예수님의 족보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지만 우리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아담의 씨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씨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를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요. 그렇게 오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오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일단 죄부터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제물입니다. 그 제물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흠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같으면 뭘 드리려고 할까요? 이왕 죽을 건데 아무 거면 어때? 그렇게 생각합니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런 것 드리고 싶지요? 안 그렇습니까? 어차피 곧 죽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면 됩니까? 누구에게 드리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철저히 명하셨습니다. 레 1 :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10절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찌니” 그 뒤로 계속 말씀하십니다. 제물의 조건이 뭐라고요? ‘흠 없는 것으로’입니다. 사람이라면 ‘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죄가 없이 오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죄 값을 치르는 제물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 없이 오셔서 죄 없이 사시다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히 4 :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셨으니 우리처럼 배고프고 우리처럼 아프고 우리처럼 힘들고 우리처럼 화도 나고 우리처럼 슬프기도 하셨습니다. 그 육체를 가지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니 그 고통을 고스란히 다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수고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셨다고 말합니다. 말은 맞는데 그 아픔이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피부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공허해지기 쉽다는 말이지요.
그동안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해보려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우선 우리는 왜 예수님이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당시 하나님 백성이라 자처하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자기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메시야하고 너무 큰 차이가 있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지금 우리도 똑같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주님과 약속대로 오시는 주님과 같을까, 다를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무엇을 기준으로 맞춰야 한다고 배웠습니까? 그렇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약속하셨는지,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약속하셨는지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모르면 오셔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모르니 영접할 수도 없습니다. 믿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면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를 그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그렇지요? 그런데 그 나라가 와도 모를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알고 기다리고 알고 맞이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나이로 30이 될 때까지는 일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생활한 듯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예수님의 그 이전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입니다. 어떻게 시작됩니까? 하나님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를 통하여 약속하셨습니다. 말 4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여기 두 사자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길 예비 사자요 둘째는 언약의 사자입니다. 누가 주님입니까?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하였으니 언약의 사자가 곧 주님입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는 언약의 사자로 오십니다. 그런데 그 앞에 길을 예비하는 사자가 먼저 온다고 하지요. 예수님 앞에 누가 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이 등장하기 앞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마 3장에는 세례 요한의 사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 3 : 1 - 3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세례 요한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도 약속된 ‘길 예비 사자’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백성에게 세례를 주는데 누가 옵니까? 예수님이 오십니다. 마 3 :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그렇지요? 세례 요한은 이미 자신보다 훨씬 큰 분이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주면서도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마 3 :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그 분은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분이다, 그 말입니다. 당연하지요.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자 문제는 그런 분이 지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깜짝 놀라서 막습니다. 마 3 : 13 - 14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당연한 말이지요. 제가 주님에게 세례를 받으면 모르겠거니와 어떻게 제가 주님에게 세례를 줄 수 있습니까? 그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1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랍니다. 무슨 말이지요?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은 다른 쉬운 말로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는 것입니다. 즉 성경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결혼 전에 성당을 다녔습니다. 영세를 받고 세례명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결혼하고 기독교로 넘어왔습니다. 영세도 세례지요. 그런데 우리 기독교가 인정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합니다. 그래서 다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이제 천주교가 아니라 기독교 교단에 속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세례를 받는 그 교단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세례 요한의 교단 즉 그 교회에 속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셨지요. 눈여겨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봅니다. 말 4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언약의 사자 곧 메시야가 ‘그 전(殿)에 임한답니다.’ 그 전은 누구 전입니까? 누가 있는 교회입니까? 길 예비 사자가 있는 교회입니다. 길 예비 사자가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생각해봅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지요? 그들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라고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물어보시죠? 마 21 : 24 -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그들은 세례 요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하나님 보내신 사자로 인정하신 것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당신 앞에 보내진 ‘길 예비 사자’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자 하나님이 성령으로 강림하십니다. 마 3 : 16 - 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로써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작하기 앞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시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으시고 성령과 하나 되신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마귀의 시험을 받으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니 당연히 마귀의 시험을 통과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약속하신 메시야로서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은 오직 말씀입니다. 무당굿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적과 기사를 펼치는 것도 아닙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의 검인 하나님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사단 마귀도 하나님 말씀 가지고 우리를 대적해온다는 사실입니다. 마귀가 세 가지 시험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보겠습니다. 마 4 : 5 - 6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귀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바로 시 91 : 11 - 12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다면 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잘 아는 대로 이단들도 우리와 똑같이 성경 가지고 다닙니다. 우리와 다른 것은 문자에 매여 있든지 지엽적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혹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성경을 가르치려고 발버둥 칩니까?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인 여러분을 하나라도 마귀에게 빼앗길까 염려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은 마귀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왔고 이 세상이 마귀의 손아귀에 넘어갔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줄 압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마귀 사단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백성에게 구원의 소망을 갖도록 해주셨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의 사역에 앞서 그 준비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까?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마 1 :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다윗의 자손이 한둘이 아닌데 왜 하필 예수입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성경대로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오시고 성경대로 일하시고 성경대로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확인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라기 선지자를 통한 예언대로 세례 요한의 전에 약속의 목자로 오신 것입니다. 다시 오실 때도 성경대로 오십니다. 바르게 알고 신앙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마 3 :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 음성을 누가 들었습니까?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하였습니다. 마태가 이 말씀을 기록하며 누가 들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다시 봅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물론 그 당시 마태는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들었을까요? 예수님? 세례 요한? 주변에 있던 사람들? 분명 소리는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들은 사람도 있겠지요. 누가 들었을까요? 참 애매합니다. 물론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예수님을 그렇게 거부하고 핍박하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들었다면 오죽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놀라운 현장을 보고 들었다면 예수님을 거부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래봤자 안 믿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세상 무슨 기적을 경험한다 해도 안 믿을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 때 거기서 보고 들었다고 말해주어도 무슨 헛소리하냐고 밀쳐낼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설령 죽은 자가 살아와서 말해준다 해도 안 믿을 것이다,(눅 16 : 31) 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예수님을 믿는 것도 다 봐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말씀을 따라 믿는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말씀대로 이루실 것을 믿기에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막연히 다시 오신다, 하면서 기다리면 설령 눈앞에 오셔도 못 알아봅니다. 초림 때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런 신앙은 헛것이란 말입니다.
하늘의 음성을 들으려하지 말고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니, 정말 구름인가? 나팔소리와 함께 오신다니 정말 나팔소리인가? 그 때에 왜 산으로 도망하라시는지, 그 산은 도대체 어느 산인지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막연히 다시 오신데, 하면서 기다리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지 말자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