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학창시절의 새벽기도회와 여성결사대 활동
- 임영신은 1899년 11월 20일 충남 전북금산읍 상옥리에서 12남매중 2째딸로 태어났다. 1910(11살)년 한일합병의 소식과 함께 금산군수로 있던 홍범석이 스스로 목을 맨 사건은 임영신의 학창생활의 반일활동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13년 미국선교사들이 설립한 전주 기전(紀全)학교를 입학한 후 기독교사상의 흡수는 그의 친미적 성향을 형성시키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임영신은 같은반 김연실의 부 김인전목사를 통해 이승만, 김구 등 독립활동상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 1914년 임영신은 박현숙, 유현정, 오자현, 송귀내, 유채용과 함께 새벽기도회를 조직하였다. 새벽기도를 통해 나라를 구해보자는 소박함에서 시작된 조직이었다. 회원이 점점 들기 시작한 새벽기도회는 일본어를 배우는 것과 천황사진에 절하는 것을 거절하였고 거기에 수반하여 동국역사와 만국지리를 가르쳐 줄 것을 요구했다. 이런 형태의 조직은 1918년(19살) 졸업을 한후 천안군 양대(良代) 조그마한 소학교에서도 기도동지회를 만들었다. 월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국내의 독립활동을 고무시켰으며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이 계획되었다.
전부터 연락이 되었던 함태영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양대로 와 임영신에게 건네주면서 3.1운동거사동조와 남한일대 독립선언서전달을 그 임무로 내주었다. 기도동지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3.1운동계획은 3월 13일 장날을 계기로 독림만세를 부렸다. 만세에 앞장선 기전 여학교 결사대원은 임영신, 김공순, 김인애, 최금주, 최요안나, 김나현, 최애숙, 정복수, 김신희, 함연순, 함연희, 송순희, 송귀내 등 13명은 소욤 및 보안법위반으로 영장이 발부되어 구속되었다. 임영신은 3년 6개월의 집행유예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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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3명의 남자와의 불행한 만남
- 임영신일생에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신일용, 이승만, 한순교였다.
전주지역에 독립선언문을 전달하기 위해 간 임영신은 바로 전주에서 병원을 차리고 있던 첫 번째 남자 신일용의 병원에서 비밀회합을 가졌다. 신일용은 당시 24살로 임영신과 함께 이 일에 적극적이었다. 이때 김인전목사, 김진상, 박정근 등 함께 일을 했다. 이때를 계기로 알게 된 신일용은 임영신이 구속된 후 보석기간동안 그녀를 매일같이 찾아왔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돌봐주는 신일용과 사랑을 하게 되었지만 그는 이미 기혼자임을 알려져 임영신은 배심감에 다음해 일본 광도(廣島)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22살) 3월 졸업후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동안 그 일생에 마지막으로 신일용을 만날 기회를 가졌는데 그는 병환중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임영신은 "나의 첫사랑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앞날을 설계했으며 많은 꿈을 키웠다. 그러나 부모들의 반대로 우리는 결합되지 못했으며 그가 6.25때 괴뢰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라고 말하였다. 임영신과 이승만의 만남은 임영신일생에 커다란 전환점이다. 그녀는 평생을 이승만을 위해 활동하였다해서 과언은 아니다. 임영신이 이승만을 만나게 된 계기는 일본관동대지진이 있어났을때(1923년, 24살) 일본한인학생회 YMCA총무 김낙영이 찍은 관동대지진을 통해 억울한 누명으로 죽은 한인들의 처참한 모습의 사진을 만국에 알리기 위해 구미구락부에 보내는 일을 임영신이 맡았던 것이다. 임영신은 이 사진과 기밀문서를 이승만에게 넘기면서 처음으로 대면한것이다. 이후 임영신은 1925년(26살)남가주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였고 한편은 흥업(과일도매장사으로 돈을 모았다. 임영신은 이승만을 돕기 위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로스앨젤러스에서 독립운동회를 조직, 양희, 상희오빠를 회장으로 만들어 교포들에게 독립자금을 모아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이때 마침 한국인 교회 이순길장로가 초대하여 [이승만과 의 결혼]을 제안하였다. 나이 차이가 30년정도가 되는 데도 불구하고 임영신에게 구혼한것은 애정보다는 임영신의 자금동원력에 대한 신뢰감때문인것으로 보인다. 임영신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나 동지로 평생같이 하자며 거절하였다. 임영신은 이때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평생을 그를 보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호도 이승만의 승을 따서 '승당'으로 지었다. 또한 해방후 이승만이 귀국한후 윤치영과 그의 비서일을 도맡아하였다. 돈암동으로 집을 옮긴후 임영신은 아내로서, 비서로서, 가정부로서의 일을 하였다. 이승만을 애인처럼, 남편처럼, 오빠처럼 대하였다. 이런 모습은 해방공간에서의 이상한 소문의 근원이 되었으며 이후 프란체스카와의 사이가 나빠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37년 나이 40이 다되어서 한순교라는 사업가를 만나 결혼하였다. 행복은 잠시 임영신의 사회활동과 자신의 사업을 위한 자금문제 등으로 불만을 가진 한순교와 잦은 다툼은 결국 1940년 임영신 혼자서 서울에 오면서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의 파이퍼여사가 임영신에게 30만달러를 남기고 죽었는데 남편인 한순교가 30만달러만 챙기고 미국법률 [부부가 4년동안 헤어져 있으면 자동적으로 이혼으로 간주한다]는 조항을 이용하여 이혼신고를 내고 재혼하였던 것이다. 임영신은 이돈에 대한 정당한 판결을 위해 법정투쟁을 벌이기 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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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해방후 반탁투쟁의 기수 대한여자국민당
-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싸우기 위해 윤치영, 장덕수, 송진우, 임영신 등이 조선국민당을 만들었다. 이승만을 돕기 위한 여성만의 정당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임영신은 1945년 8월 18일 김선, 황현숙, 안순득, 이순길, 김계옥 등 각도대표들이 모여 여자국민당발기인회를 열었다. 9월 9일 미군의 진주로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10월 3일 여자국민당은 중앙여자전문학교에서 창당대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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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언문 -
- 역사의 수레바퀴가 반만년의 거친 풍운을 해치고 우리는 국민자신의 의사를 토대로 하는 민주정당을 수립함으로서 구가 민족의 만년 대계를 확립코자 하는 오늘, 대한여자국민당은 강력 무비한 조직과 철통같은 이론무장과 단련된 투지로 전국여성의 선두에서 서서 이 성스러운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바이다.
- - 당강 -
2. 우리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그릇됨을 배제하고 근로자 및 여성의 생활을 향상하는 건전한 민주경제확립을 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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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국민당은 본부를 서울에 두고, 남한 일대를 돌며 우익반공계몽강연을 하면서 전국 각 시 도 군읍에 지방조직을 건설하였다. 당원은 20세이상의 여성으로서 당원 2명의 추천에 의해 감찰위원회의심사를 거쳐 당원이 될 수 있었다. 당수에 임영신, 부당수에 이은혜, 김선, 총무부장에 박현숙이며, 당사는 임시로 동아일보 옥내에 두기로 하였다. 우익지도자들인 송진우, 김성수 등과 함께 건준의 반대성격인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이것을 모체로 9월 16일 한국민주당을 발족시켰다.
1945년 12월 24일 신탁통치안 발표이후 임영신은 여자국민당의 조직망을 확대하고 지방에 내려가 대중강연을 하면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매일같이 신탁통치반대데모를 벌이고 국민당당수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46년 1월 14일 민주의원이 구성되고 이승만이 의장으로 취임하자 임영신은 비서로, 부당수로 김선과 황현숙을 본당의 추천을 받아 의원으로 피선하였다. 동년 5월 제1차 여자국민당 전국대회를 서울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열고 당의 발전과 시책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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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제2차 유엔총회에 한국문제상정을 위한 민주의원 전권대사로 임명
- 1946년 8월 임영신은 제2차 유엔총회 파견 민주의원대표로 임명되었다. 이승만이 임영신을 미국에 보내려는 것은 미국의 안면있는 실력자들과 접촉해 한국문제에 유엔에 상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엔총회에 참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들뿐이지 한국은 유엔총회에 참여할 자격조차도 없었다. 미국에 온 임영신은 구미위원장 임병직과 유엔문제를 상의하였다. 임영신은 전 루스벨트부인에게 하소연을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10월 20일 유엔총회가 개최되었다. 회원국으로 참여할 수 없음을 안 임영신은 급히 동아일보를 통해 기자증을 만들어 방청만을 할 수 있었다. 46.11.2일 리유엔사무총장은 유엔총회본회의에서 조선민주의원에서 유엔총회에 보낸 탄원서가 유엔에 공식접수되었으며 한국문제를 공식 상정시키겠다고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유엔에서 한국문제가 상정되지 않자 11.25일 이승만은 도미계획을 발표하였다. 12월 7일 워싱턴에 온 이승만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기위해 변호사 존.W. 스태거, 언론인 J.제롬.월렘즈, 미국무성 OSS책임자 M. 프레스턴. 굿펠로대령, 친한파 상원의원 프레드릭 브라운, 미군정청 삽법관인 에모리.우들대령, T.올리버박사, 임영신, 임병직 등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이후 구미구락부를 중심으로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되자 미국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미국무성은 이들에 대한 설득을 전개해야만 했다. 그러나 미국내부에서도 점령군의 여러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국무차관보 존.R.힐드링장군은 이승만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도 있었다. 47년 8월쯤 임영신은 미소공위가 아무성과없이 끝났음을 상기시키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 이것만이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보장하는 일이라고 주장] 미국은 한국에서 미국의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유엔은 드디어 7월 23일 유엔총회에 한국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하였다. 유엔감시하의 총선거 실시가 유엔에서 결정되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구성되었다. 프랑스, 중국, 인도, 시리아, 엘살바드로, 오스트레일리아, 카나다, 필리핀, 우크라이너로 구성되었고 위원장에는 메논인도대표가 선출되었다. 48년 1월초에 유엔한위대표들이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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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의 정치활동
- 첫 개각 후 이승만은 임영신의 귀국을 지시하였다. 첫개각은 한민당이 원하는데로 되지 못하고 국무총리로 김성수를 원했으나 이승만은 이윤영을 지명하였다. 그러나 부결되고 이후 이범석을 지명하여 가결되었다. 내무장관에 윤치영, 외무장관에 장택상, 농림부장관에 조봉암, 사회부장관에 전진한, 재무장관에 김도연, 문교부장관에 안호상, 법무부장관 이인, 교통부장관 민희식, 체신부장관 윤석구, 무임소장관 이청천, 이윤영, 귀국후 초대상공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상공부는 귀속재산의 처분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철저히 이승만사람을 심어야 하는 이승만입장에서 임영신이 적격이다. 상공부는 우선 전국의 귀속재산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상공부장관이 된 이후 임영신의 정치적 미숙함은 여러사건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우선 임문환을 차관으로 지목하였으나 같은 성씨인 것이 정치문제화되었다. 같은 성씨라는 것을 핑계삼아 임영신의 세력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 한민당의 의도였을 것이다. 임영신은 1949년 1월 경북 안동지구 국회의원 정현모가 경북지사로 임명되어 보궐선거를 실시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상공부장관 임영신은 48년 12월 경북 안동지구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면서 정부귀속재산사업체인 대구 메리야스 공장 관리인 이순희로부터 2백만원을 받아 선거비용에 사용했으며 또 다른 귀속업체에서 백50만원 상당의 뇌물을 받았다. 한편 한국 광업진흥공사에서 대통령 탄신에 금반지를 뇌물로 바치기위해 받아 가졌다]라는 감찰위원회에 정보가 입수되어 내사에 들어갔다. 이후 이 사건은 검찰로 이관되어 이인성에서 마무리하려 하였으나 검찰총장인 권승렬에 의해 기소되었다. 6월 6일 상공부장관에서 경질되고 윤보선이 제2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검찰은 임영신에게 징역 3년과 벌금 30만원을 구형했다. 그러나 9월 17일 결심공판에서 무죄로 선고받았다. 당시 정인보는 이사건을 계기로 검찰위원장에서 사임되었는데 이는 이승만이 임영신에 대한 신임과 독단이 어디까지 있는 보여주는 것이다. 임영신의 국회의원활동은 고작 우방원수들에게 감사메시지보내자는 결의안 정도였다. 제2대 국회의원은 금산에서 당선되었는데 이는 임씨가문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전남편인 한순교와의 재산문제로 미국에 간 임영신은 전쟁의 수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임영신은 1951년 5월쯤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 귀국하였다. 임영신은 군인들을 위로 하기위 여자국민당을 활용하였다. 1952년 5월 부산에서 열린 여자국민당 전국대의원에서 임영신을 부통령 출마후보자로 선출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부통령에 함태영이 당선되었다. 정부수복후 서울에 온 임영신은 상공일보와 여성계라는 잡지의 창간 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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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나는 왜 군사혁명을 지지하는가?
- 4.19혁명, 제2공화국이 군사쿠테타에 점령되자 임영신은 또 다른변신을 하였다. 이제는 군사쿠테타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것이다. 임영신은 {1961년 5월 16일 젊은 사자들이 피흘려 쟁취한 제2공화국의 무능과 부패한 정권을 지켜보던 군인들이 군사혁명을 일으켰다. 질서를 위해 일어선 애국군인들을 나라의 치안과 모든 부조리를 과감히 수술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는 입장을 밝히고, 자기 스스로가 미국의 많은 친구들과 필리핀, 아프리카, 남미 등 엣날 유엔에서 활동하였던 각국의 국회의원, 장군들에게 편지를 보내 군사혁명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우리국민모두가 지지한다고 써보냈다. 전국대학총학장회의가 있은 후 중앙대학교총장자격으로 군사혁명을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군사혁명을 [혼돈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필연적인 일]이라고 강조하고 각계에 자신의 주장을 호소, 군인들이 나라를 위해 일어선 새나라건설에 호응하자고 호소하였다. 임시교육조치법에 따라 대학의 총.학장과 재단이사장의 직책을 분리시켰는데 임영신도 잠시 총장자리를 떠났다. 61년 11월 25일에는 총장자리를 사임하고 명예총장에 취임했다. 63년 3월 임영신은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이 되었다. 윤치영은 의장서리가 되고 임영신은 당의장 고문직을 수락했다. 이제는 철저한 군사쿠테타의 협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임영신은 정치활동과 중앙대의 교육사업을 활성화할 수 있는 또 다른 발판을 만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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