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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5. 묵상글 들 ( 대림 제2주일 월요일. - 관상 타령.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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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5. 대림 제2주일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관상 타령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느닷없이 ‘관상’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관상 타령을 할까 합니다.
관상은 하느님 관상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하느님뿐 아니라 나도 보고, 이웃도 보고, 다른 자연도 보는 것이라고
저는 자주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주장합니다.
나를 보더라도 나의 고통을, 욕망을, 갈망을, 보고,
나의 고통을 보면서도 고통만 보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도 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도 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고,
나의 고통만 보지 않고 이웃의 고통까지 사랑으로 보는 것,
뭐 이런 것이, 관상이고 진정한 관상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관상이 아니고,
사랑으로 보는 것이 관상이라고도 얘기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 고통에 나의 시선을 빼앗긴 것이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실은 관상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관상도 하느님을 보는 것이지만
하느님만 보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사로잡힘이지 진정한 관상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얼마 동안 완전히 하느님께 몰입되고
성인들이 탈혼 상태에 있듯이 하느님께 사로잡힐 수는 있어도
계속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런 관상을 진정한 관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느님 관상은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라고 제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오늘 관상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 때문입니다.
Say to those whose hearts are frightened:
Be strong, fear not!
Here is your God.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보면/관상하면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는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 병자와 동료들은 바로 이렇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어느 마음에 들어오셨을 때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은
주님께서 어쩌시나 보려고 왔지만, 이들은 치유를 받기 위해 옵니다.
중풍 병에 맥없이 주저앉아있지 않고 어떻게서든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왜? 물론 치유 받기 위해서지만
그 이전에 주님의 능력을 보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이들이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고, 그런 주님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치유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관상이 치유와 구원에까지 이르는 것을 본 오늘 우리입니다.
어제 강론이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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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5. 대림 제2주일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습니다.”(마태 5,26).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예수님께서는 ‘함께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루카 5,24)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4-25)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일 잇습니다. 그것은 치유 받았어도 “들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이요, 이미 용서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들것'에 메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상처’에 메여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들것'을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할뿐 아니라,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할 일입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 우리의 죄와 인류를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다닙니다. 용서받고 치유 받았음의 표지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치유 입었습니다. 이토록 신령스런 주님의 사랑을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습니다.”(마태 5,26). 아멘.
하오니, 주님!
평상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평상을 들고 가게 하소서.
평상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저도 십자가에서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루카 5,24)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평상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들것을 가지고 가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지니신 십자가의 상처처럼,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라 하십니다.
하오니, 그 상처를 더 이상은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그 구원의 샘에서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픈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들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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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5. 대림 제2주일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좋은 이웃이 되어라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모습이 멀리 있는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살아가면서 이웃을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잘 만나 복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웃에게 복이 되어 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복을 지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 천정을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5,20).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인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병과 허약함 뿐 아니라 그 속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고 판단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영혼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의 뿌리를 다스리시고 부족함을 충만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명의는 원인을 치료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중풍병자는 군중이라는 장벽과 지붕이라는 걸림돌을 넘어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넘어야 할 산을 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에 병자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그리된 것이라 여겼으니 ‘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그는 이웃이 있었기에 능력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만난 이웃사촌이 복덩이 입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웃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믿음을 보고도 은총을 허락하시니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큰 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미심쩍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하시는 데 사람은 용서보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판단하고 심판하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을 드러내셔서 믿도록 해주셨습니다. 판단과 심판에 앞서서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두려움에 차서 신기한 일을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일은 오늘도 믿는 이들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신부님 고맙습니다. 제가 성경에 맛들이게 되었습니다.”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날, 몸이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안수를 받으며‘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몸이 많이 아팠지만, 아픈 것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가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밥 대신 성경을 챙겼고, 성경을 읽는데 말씀이 꿀같이 달았습니다.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저는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성경을 읽게 되었고 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대단한 학자가 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성경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습니다.”
큰 믿음에 바탕을 둔 행동에 신기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고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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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5. 대림 제2주일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에 홍보를 갔을 때입니다. 예전에 2달 남짓 지냈기 때문에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홍보가 목적이기도하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온 것을 알고 제게 연락을 주신 분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만남 중에 한 형제님의 ‘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어린 시절 하늘을 나는 조종사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항공대에 가려고 했는데 그만 자전거를 타다 큰 사고를 당했고, 군대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심한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조종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미국에 넘어와서 항공사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였다고 합니다. 정년퇴임을 한 후에 ‘스쿨버스’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딸이 아빠를 응원하면서 비행기를 운전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을 안전하게 등교시키는 스쿨버스 운전사가 되는 것을 축하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3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세계일주 여행을 하겠다고 합니다.
저도 어린 시절 ‘꿈’이 있었습니다. 군인이 되거나 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의 모습이 멋져보였습니다. 사촌형님이 장교가 되어서 왔는데 그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같은 선생님이 담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모든 과목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린 저의 눈에 선생님은 만물박사처럼 보였습니다.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성당의 친구 중에 사제가 되겠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저는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저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의 영향이 컸습니다. 31년 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군복은 아니지만 성직자복과 제의를 입으면서 영적인 싸움에 임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는 않지만 강론과 교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미국 대륙횡단을 한번 하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또 다른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참으로 멋진 꿈입니다. 절망과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는 꿈입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그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위선과 가식을 버려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를 없애야 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자비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지금 이곳에서 현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이웃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저는 봉성체를 다니면서 10년 이상 자리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본인도 힘들지만, 가족들도 함께 아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는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이웃들이 함께 할 때, 중풍병자는 힘을 얻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5년 동안 ‘중풍병자’인 아내를 위해서 헌신 하시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말도 하고,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함께하니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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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5. 대림 제2주일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성지 안에 모과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에서 가을이면 많은 모과가 주렁주렁 달립니다. 그리고 하나둘씩 익어 떨어지면 검게 썩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썩으면서도 방향제로 써도 충분한 향기를 내뿜습니다. 이런 모과를 소재로 시를 쓴 시인이 있습니다. 바로 정호승 시인의 ‘모과’라는 시입니다.
가을 창가에 노란 모과를 두고 바라는 일이/ 내 인생의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때였다
가을이 깊어가자 시커멓게 썩어가는 모과를 보며/ 내 인생도 차차 썩어가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모과의 고요한 침묵을 보며/ 나도 조용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고통을 견디는 모과의 인내를 보며/ 나도 고통을 견디는 인내의 힘을 생각했다
모과는 썩어가면서도 침묵의 향기가 더 향기로웠다/ 나는 썩어갈수록 더 더러운 분노의 냄새가 났다
가을이 끝나고 창가에 첫눈이 올 무렵/ 모과 향기가 가장 향기로울 때/ 내 인생에서는 악취가 났다
나이 듦이 어쩌면 썩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내게는 썩어가면서 어떤 냄새를 낼까요? 향기로움일까요? 아니면 악취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향기인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향기가 풍겨야 우리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 향기는 믿음, 사랑, 희망을 통해 세상 끝까지 뻗어갑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 향기를 가리는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남자 몇이 중풍 걸린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 지붕의 기와를 벗겨내서 예수님 한가운데로 내려보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닌, 병자를 내린 남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을 무효화시키려고 방해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을 모독한다.”라고 말하면서, 믿음의 향기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저주의 악취로 가리고 있습니다.
좋은 향기는 어떤 악취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특히 그 좋음이 진하면 진할수록 향기로움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병자를 당당하게 고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향기를 품고 있나요? 세상의 어떤 악을 물리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강한 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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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용기를 내어 노력하면 결국 가장 행복해지는 건 나 자신이다(박성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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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5. 대림 제2주일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치유와 찬양
-믿음이 답이다-
세계 장애인의 날을 아시나요? 엊그제 12월3일은 제30차 세계 장애인의 날이었고 교황님도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두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상처받은 인간성의 부분이다.” 잘 들여다 보면 인간 모두가 정도의 차이일뿐 장애인입니다. “행복은 혼자 먹을 수 없는 빵이다”, 행복 역시 혼자가 아닌 빵처럼 더불어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의 행복입니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나눌 때 비로소 행복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이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슬픈 인생이요 연민의 대상인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모두가 치유받아야 할 장애인 인생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삼종기도 강론 서두 제목도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바로 만나야 할 궁극의 분은 주님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 역시 주님과의 살아 있는 만남을 목표로 합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요 방향이자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만남을 통해 치유받고 더불어 많은 은총의 선물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힐링의 집이라 부르고, 수도원을, 미사를 치유가 일어나는 힐링 센타라 부릅니다. 치유보다는 힐링이라는 영어 단어가 많이 회자됩니다. 왜 힐링의 천주교를 놔두고 엉뚱한 밖에서 힐링을 찾느냐고 말하곤 합니다. 어제 나눴던 행복기도중 한 대목이 다시 생각납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다음 이사야서 말씀대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용기의 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이게 말하여라. ‘굳세어 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위로와 격려의 주님이시며 이런 주님을 닮아 이웃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또한 기쁨의 샘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기쁨입니다. 이사야서 서두가 주님을 만날때의 기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 사막이 상징하는 바, 힘든 광야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상징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고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오늘 제1독서 이사야처럼 아름답고 고무적인 시를 본적이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야 말로 대 신비가인 영성가요 하느님의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만날 때 영육의 온전한 치유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중풍병자의 치유과정이 은혜롭습니다. 새삼 주님과 만남의 치유에 믿음이 궁극의 답임을, 공동체 형제들의 믿음이 치유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중풍병자 동료를 치유시키려는 도반 형제들의 지극 정성의 사랑과 믿음이 놀랍습니다. 궁즉통, 간절한 믿음에 눈이 열린 동료들은 군중 때문에 주님을 뵈올수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이들의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우선 죄를 용서받음으로 영혼이 치유되는 중풍병자입니다. 몸과 마음은, 육신과 영혼은 하나입니다. 온갖 죄들은 육신을 통해 병으로 들어나기 마련입니다. 죄가 많기에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이래서 영육의 건강에 고백성사가 우선적 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치유받은 중풍병자를 생각하면 미사시 주님의 기도후 영성체전 주례 사제의 다음 기도문이 생각납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주님의 교회와 하나될 때 비로소 진정한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부족해도 교회의 믿음은 부족함이 없이 강합니다. 교회공동체의 믿음에 뿌리내릴 때 좋은 믿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임을 제1독서의 이사야가 감동깊고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그분께서 오시어 너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그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대로 이사야의 예언은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의 치유를 통해 실현되고 이 은총의 대림시기,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인적 치유요, 무지의 병으로부터의 치유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참 고무적이고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동료들 덕분에 죄를 용서받아 영혼이 치유된 중풍병자는 이어 육신의 치유를 통해 전인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치유받은 중풍병자의 찬양의 반응도 주목됩니다. 찬양으로 표현되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완전히 부활하여 피스카의 기쁨을 살게 된 중풍병자요, 평생 잊지 못할 치유와 찬양의 추억이 되었을 것이며 선종의 죽음도 맞이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치유와 찬양보다 더 좋은 선종의 죽음 준비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마지막 주님과의 만남이 됩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주님과의 만남의 여정, 치유의 여정, 찬양의 여정임을 봅니다. 치유의 기적을 목격한 이들도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하느님 찬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요, 믿음과 찬양은 함께 갑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이 우리 믿음을 날로 붇돋웁니다. 새삼 찬양과 감사의 공동전례 은총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말씀이 치유받은 중풍병자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그대로 주님을 만나 치유받은 이들의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는 대목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만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육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어 우리 모두 기쁨과 찬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알렐루야 환호송이 바로 대림시기 은총을 상징합니다.
“보라, 세상의 주인이신 임금님이 오시어, 사로잡힌 우리의 멍에를 몸소 벗겨 주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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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5. 대림 제2주일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루카 5,17-26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믿음>
너를 살리고픈
그분을 향한
나의 믿음
나를 살리고픈
그분을 향한
너의 믿음
그분께는
갈림 없는
하나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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