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1베드 1,3-9; 마르 10,17-27 / 연중 제8주간 월요일; 2024.5.27.
오늘 복음의 상황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유다인들을 상대로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대단히 이례적인 사람을 만나신 장면을 소개합니다. 바리사이나 그들의 율법 학자들처럼 적대감을 가진 것도 아니고, 무언가 경제적으로 절박한 현세적 청원이 있어서 찾아온 것도 아니며, 오로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젊은이를 만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평균적인 유다인들이 이상적 목표로 삼을 만큼 율법에 충실한 최상급의 유다인을 만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도우시려 행하는 기적들을 보고도 그분께 대한 악소문을 퍼뜨리고 온갖 트집을 잡으며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모함하는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그 젊은이는 그 악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그분의 선의를 올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처음 보면서도 ‘선하신 스승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전까지 예수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은 나름대로 절박한 청원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더구나 그 앞에 무릎까지 꿇고 존경을 표하는 이들은 다 그랬습니다. 나병 환자도, 회당장 야이로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달랐습니다. 현실적인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매우 차원 높은 질문이 있어 찾아온 것입니다. 그 질문이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하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그는 유복하게 자랐고 그 젊은 나이에도 많은 재물을 부모에게 물려받은 드문 청년 부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 하시며 ‘선하신 스승’이라는 호칭을 사양하셨습니다. 대다수 백성이 로마 제국의 억압과 수탈로 가난하게 살던 그 시대에 금수저로 태어난 덕분에 호사를 누리며 유복하게 살던 청년으로부터 ‘선하신 선생님!’ 이라는 호칭을 받는 일이 예수님께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복한 유다인이 생각하는 ‘선’과 가난한 백성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선’은 아무래도 그 격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십계명을 거론하시며 이를 지키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출발임을 상기시키셨습니다. 그 당시에 십계명을 잘 지키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애초에는 열 가지 계명이었던 것이 점차 늘어나서, 그 당시에는 베풂에 관한 사회규정, 성도덕에 관한 규정, 사회정의에 관한 규정, 도피성에 관한 규정, 잡신 숭배 금지에 관한 규정, 위증죄에 관한 규정, 여러 가지 의식과 제사에 관한 규정 등 모두 6백 가지가 넘는 규정을 다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금지 규정 365가지, 행할 규정 248가지).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온 그 청년은,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마르 10,20) 하고 자신 있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비추어 십계명을 다 두 가지의 계명으로 간추려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는 하느님 사랑의 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는 이웃 사랑의 계명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온 그 청년을 대견하게 보시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한 가지가 더 필요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재물에 집착하여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멸시하는 바리사이 같은 삶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분을 직접 뵈오며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삶은 죽기 이전에도 그에 합당한 삶을 요청합니다. 그 조건이,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되 특히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재물이 하느님의 선물이어서 하느님의 것임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재물도 놓치고 싶지 않고 영원한 생명도 얻고 싶었던 그 부자 청년은 그래서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 이는 예언자들도 익히 강조했던 바였지만, 율법만을 중시했던 당시 바리사이들이 놓치고 있던 것이었고, 이는 그 당시 돈을 좋아했던 유다교의 엘리트 계층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루카 16,14 참조) 오늘날에도 영원한 생명은 물론 현세에서도 행복한 삶을 바라는 많은 종교인들과 신앙인들도 잊어버리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점이 회개의 초점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는 물론 신앙고백문이 확정되던 고대 교회 시절에까지도, 가난한 이들과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던 가톨릭 교회의 전통은 너무나 엄중하고 그 기억 또한 생생해서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려는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면제해야 한다던 사도 바오로조차도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일이라고 일깨워주었고(갈라 2,10 참조),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시하는 일이라고 경고한 바도 있습니다.(1코린 11,17-34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것은 곧 그리스도께 바친 것이라는 가르침(마태 25,40참조)은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줄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가정과 직업을 다 버리고 그분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미처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빼먹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려는 것과도 같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3-.25)고 하시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회개한다는 것이 삶의 태도에서 과연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고, 재물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던 바리사이들의 신앙관에 물들어 있었던 듯합니다.
여기서 복음서에서 나오는 예외적인 인물이 있으니,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처럼이나 힘들고 중요한 일을 해 낸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입니다.(루카 19,1-10). 그는 자신의 집을 찾아주신 예수님 앞에서 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공적 기피인물로 따돌림 받던 그를 예수님께서 받아주시자 벌어진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 진정으로 귀의한 사람에게는 가능하다는 예수님 말씀이 입증된 셈입니다.
예수님부터 재물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우셨거니와(마태 8,20), 제자들에게도 집과 직업과 가족까지도 모두 버리고 따르기를 요청하셨습니다.(마태 4,20.22참조) 그들을 전국으로 파견하실 때에도 마찬가지로 철저한 청빈의 태도를 요청하셨던 이유는(마태 10,9-10), 그렇게 하더라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토박이 지지자들이 그들을 환대해 줄 것기 때문이었습니다.(마태 10,11)
이렇듯 재물 소유에 대한 집착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태도와 가르침은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낳았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고”(사도 2,44),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습니다(사도 2,45 참조).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사도 4,34 참조) 이것이 예수님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교회가 걸었던 정통 노선입니다.
사도가 된 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확고한 깨달음이 생겨난 베드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니 즐거워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1베드 1,6-7 참조) 그러니 교우 여러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가난한 이웃과 가진 것을 즐겨 나누는 이들이라면 이미 영원한 생명에 들어와 있음을 기뻐하십시오.
그런데 자기의 양심에 입각한 도덕성만으로 재물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귀가 소유욕을 미끼로 해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도 이러한 어중띠기 인생들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재물의 결핍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려면 소유욕을 미끼로 유혹하는 마귀와의 고리를 끊어내고,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1베드 1,3-4) 그러니까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행위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부활 신앙이고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리라는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이 입증해 보였듯이, 하느님을 믿는 이들끼리 부활 신앙으로 서로 나누는 삶이 그 해답입니다. 교우 여러분! 재물에 대한 집착은 우상 숭배에로 우리 마음을 기울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나눔 이전에 우리를 하느님께로 붙들어 매어 줄,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