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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와 퇴니스의 사회 집단 분류
퇴니스의 『공동 사회 이익 사회』를 중심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러한 집단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분리해 본 학자들이 있는데, 쿨리와 퇴니스가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 쿨리는 이것을 1차 집단과 2차 집단으로, 그리고 퇴니스는 공동 사회, 이익 사회로 분리하였다.
이 글을 통해 집단을 분류하는 일반적인 기준과, 쿨리가 말한 사회 집단을 살펴보고, 퇴니스의 저서 『공동 사회 이익 사회』를 통해 퇴니스의 집단 분류 기준도 함께 알아보자.
“집단은 그 구성 성격에 따라서 공동 사회와 이익 사회, 1차 집단과 2차 집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Tӧnnies, F.)는 구성원의 결합 의지에 따라 집단을 공동 사회와 이익 사회로 구분하였다.…한편, 미국의 사회학자 쿨리(Cooley, C. H.)는 구성원의 접촉 방식에 따라 집단을 1차 집단과 2차 집단으로 나누었다.”
-「사회․문화」(한국 교육 개발원) P.48에서
1. 머리말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보다는 ‘우리’라는 말을 더 중시하고 항상 공동체를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곤 한다. 요즘에 와서 서구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고, 그 결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경우가 가끔 있다. 예를 들면 누구에게 내 친구를 소개하면서 ‘우리 친구’라고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나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전통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발견된다. 서양에서는, 특히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에,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 공동체에 개인이 소속되어 살아갔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다가 그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집단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집단들은 주로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전의 공동체에서 느끼던 소속감보다는 필요할 때만 모이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고, 이 새로운 집단의 성격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학자들도 나타나게 된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퇴니스(F. Tӧnnies, 1855~1936)와 쿨리(C.H.Cooley, 1864~1929)이다.
2. 인간의 사회성과 집단(쿨리의 사회 집단)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일컬어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이것은 인간이 서로 모여 살고자 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 집단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확인받고, 그러면서 참된 인간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이 때 집단은 「사회․문화」교과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두 사람 이상이 어느 정도의 공동체 의식을 갖고 비교적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을 하는 결합’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 집단은 우선 그 속에 소속되어 있는 구성원들의 소속감에 의해서 내집단(內集團)과 외집단(外集團)으로 나뉘기도 한다. ‘내집단’은 ‘우리 집단’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내가 속한 집단을 말하는 것이고, ‘외집단’은 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을 말한다. 그런데 이 내집단에도 두 가지 형태의 집단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쿨리의 생각이다. 쿨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을 구성원들끼리의 친밀감의 정도와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기준으로 해서 두 가지로 분류한다. 그 두 집단이 바로 1차 집단과 2차 집단이다.
쿨리가 말하는 1차 집단은 특별한 이해 관계를 떠나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대할 수 있는 가족과 같은 집단이다. 쿨리는 집단이 갖고 있는 정신적인 특면을 매우 중요시 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인간 본성과 사회 질서」(1902)에서 사회 집단이 유기체와 같다고 말하면서 이 집단 속에서 사람들은 양심과 공동체 의식을 키우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집단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양심의 의미를 깨닫기도 하고, 그들이 주는 칭찬과 비난을 통해서 도덕 의식을 키우기도 한다는 것이다.
‘1차 집단’(primary group)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그의 저서「사회 조직」(1909)에서이다. 쿨리는 이 책에서 사회 집단이 그 구성원들간의 의사 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정신적인 복합체라고 말하면서, 1차 집단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인간으로 성숙하게 되고 또 다른 1차 집단을 만들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에 비해 2차 집단은 어떤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인 성격을 가진 집단이다. 그러므로 그 구성원들간의 관계도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한정되고 깊은 관계를 맺는 일도 매우 어렵게 된다. 2차 집단의 대표적인 예로 회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앞에서 말했듯이 사회를 생명이 있는 유기체로 보았으며, 이 사회를 어떻게 하면 보다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회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하였다. 그 고민의 결과 사람들이 사람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가족과 같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런 집단을 1차 집단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1차 집단에서의 경험을 살리면 다른 목적을 위해 조직된 2차 집단도 보다 도덕적인 집단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현재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이러한 1차 집단의 개념을 만들어 낸 쿨리는 19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으며 실제로 기술자로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다른 분야를 전공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때의 전공은 정치 경제학이었다. 정치와 경제를 연구하던 그는 당시에 새로운 학문 분야로 떠오른 사회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박사 학위 논문을 사회학 분야로 썼고, 대학 교수가 되어서도 사회학 분야를 가르쳤다. 성격이 내성적이여서 그의 강의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이 1차 집단 개념은 학계에 많은 시사(示唆)를 부여했으며, 지금 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쿨리의 사회 집단에 관한 생각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더 오래 살면서, 우리에게 ‘공동 사회’와 ‘이익 사회’라는 말을 남겨 준 퇴니스의 「공동 사회와 이익 사회」라는 저서를 함께 읽어보자.
3. 퇴니스의 「공동 사회와 이익 사회」
1)퇴니스(F. Tӧnnies)
페르디난트 퇴니스는 19세기 중반에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홀슈타인(Holstein)주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1873년에 슈트라스부르크(Strasbourg)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독일에서는 대학을 옮겨다니면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베를린(Berlin)대학과 튀링겐(Thüringen)대학 등을 옮겨 다니며 여러 분야를 공부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매우 좋아했던 퇴니스는 젊은 시절에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을 여행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에서는 본래 고전 철학을 전공했지만, 후에는 철학보다 사회학 연구에 더 관심을 가졌고, 그 중에서도 토마스 홉스의 사회 계약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독일에서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박사 학위 논문 이외에, 교수 자격 논문이 통과되어야만 하는데 퇴니스가 1881년에 킬(Kiel)대학에 제출한 교수 자격 논문이 바로 그 유명한 「공동 사회와 이익 사회」이다.
드디어 대학 교수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퇴니스는 킬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또 한 곳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던 성격탓에 굳이 교수가 되려소 애쓰지는 않았다. 강의를 조금만 해도 된다는 계약을 맺고 승락했던 킬대학의 정교수 직위도 3년 후에는 내놓고 연구와 책을 쓰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다가, 조금씩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다가 1921년에는 그 동안의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킬대학의 명예교수로 초빙받게 되었고, 히틀러에 의해 쫓겨나는 1933년까지 그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연구에 종사했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 한 곳에 정착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대학에서 추방당한 이후에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을 여행하면서 계속 연구를 하다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은 1936년의 일이다.
2)「공동 사회와 이익 사회」의 주요 내용
①책의 구성
이 책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퇴니스의 교수 자격 논문을 출판한 것인데, 자격 논문을 쓴 지 6년 후인 1887년에야 출판되었다. 전체적으로 3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제1부에서 공동 사회와 이익 사회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2부에서는 공동 사회와 이익 사회를 이루는 이간의 의지를 각각 살펴보고 있고, 제3부에서는 자연법의 사회학적 근거라는 제목을 가지고 사회를 이끌어 가는 규범의 근거에 대해 살피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전체적인 결론을 내린 후에 앞으로의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 갈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제 제1부부터 그 핵심적인 내용을 함께 읽어 가면서 퇴니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파악해 보기로 하자.
②1부 : 주된 개념의 규정
제1부는 공동 사회와 이익 사회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다시 전체적인 설명을 하는 ‘주제’라는 장과 ‘공동 사회 이론’, ‘이익 사회 이론’이라는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부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인간의 의지는 다른 사람과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존립한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관계는 상호 작용이기 때문에 한쪽에서 행동하고 주는 것이 다른 쪽에게는 당하고 받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상호 작용들은 다른 사람의 의지나 신체를 보호 해주거나, 파괴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적극적인 관계에 의해서 형성된 집단을 대내외적으로 파악해 보면, 그것은 하나의 결합이 된다. 관계 그 자체로서의 결합은 현실적 또는 유기적 생활로 파악되든지, 이념적 또는 기계론적 형성체로 파악된다. 전자가 공동 사회의 본질이 되고, 후자가 이익 사회의 본질이 된다.… 신뢰에 차고 은밀하며 배타적인 모든 공동 생활은 공동 사회 속의 생활로 이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익 사회는 공공 사회(公共社會)이며 세계이다. 사람은 태어남과 더불어 그 자신의 모든 것, 즐거움과 슬픔을 가지고 공동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이익 사회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마치 미지의 사회와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생각한다.… 공동 사회는 연속적이고 진정한 공동 생활이며, 이익 사회는 다만 임시적이고 외양적인 생활이다. 그러므로 고동 생활을 위해서는 공동 사회 자체가 하나의 사아 있는 생명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고, 반명에 이익 사회는 하나의 기계론적 집합체 또는 인공적인 산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첫부분에서 퇴니스가 내린 공동 사회에 대한 정의를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소속되어서 모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진정한 공동 생활이 가능한 살아있는 집단’이라고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이익 사회는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인공적이고 기계적인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정신적인 기초를 인간의 의지라고 생각한 그는 제2부에서 이 의지를 분석하려고 애쓰고 있다. 2부로 넘어가기 저에 퇴니스가 살피고 있는 공동 사회 이익 사회에 관한 이론을 좀더 읽어보도록 하자.
“공동 사회 이론은 원초적이며 본연의 상태로서 인간 의지가 완전히 통일되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이와 같은 관계의 일반적인 뿌리는 출생으로 인한 삶의 관계이다.… 결합이 가장 뚜렷하게 직접적인 상호 긍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래와 같은 세 종류의 관계에 의해서다. 첫째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이고, 둘째는 부부로서의 남자와 여자의 관계이고, 셋째는 형제간, 다시 말해서 같은 어머니로부터 나온 자손으로 서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간의 관계이다.”
이 관계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을 대표적인 공동 사회로 보는 퇴니스는 가족들간의 공동 사회적인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라고 불리우는 작은 도시도 역시 공동 사회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현대의 대도시들은 공동 사회적 인간 관계보다는 주로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집단으로 변해 가고 있다고 강조한다.
제2부의 2장은 이익 사회의 본질을 자세하게 다루는 곳이다. 그 첫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함께 읽어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도록 하자.
“이익 사회의 이론은 공동 사회와 같이 평화적으로 서로 공동 생활, 공동 거주를 하기는 하지만, 결코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는 않고 오히려 분리되어 있는 일련의 인간들을 전제로 한다. 이익 사회 속에서는 인간들이 분리될 때도 있고, 결합될 때도 있다.… 교환이 대표적인 이익 사회적 행위이다. 이 교환은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 계약은 교환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고, 교환을 성립시키는 두 개의 행위를 요구한다.…”
이익 사회를 대표하는 행위인 교환에서 서로간에 교환되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현대의 이익 사회에서는 특히 상품이 교환된다. 이 상품은 나름대로 목표를 갖고 있으며, 그 목표들을 서로 교환하고 나면 계약도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③제2부 : 본질 의지와 선택 의지
퇴니스는 제2부에서 공동 사회와 이익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정신적인 영역인 ‘인간의 의지’를 다루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제1부에서 정의한 것과 같이 공동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의지를 본질 의지라고 부르고, 이익 사회에서 나타나는 의지를 선택 의지라고 부르면서 이 두 개념을 자세하게 살피고 있다.
“이 논문을 통해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목적은 ‘인간의 의지’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 의지는 이중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정신 활동은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활동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나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는 의지와 의지가 내포되어 있는 생각을 구별하고자 한다. 이 둘은 다 같이 서로 관련되는 하나의 전체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속에서 감정, 충동, 욕구의 다양성이 단일성을 갖게 되다. 그런데 이 단일성은 첫째로는 현실적이고 자연적인 특성으로 나타나고, 둘째로는 관념적이고 인위적인 특성으로 나타난다. 나는 앞의 것을 포함하는 인간의 의지를 본질 의지라고 부르고자 하고, 뒤의 것을 포함하는 인간의 의지를 선택 의지라고 부르려고 한다.”
그러면서 퇴니스는 인간의 본질 의지의 표현이 습관이고, 기억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즉 인간이 자연스럽게 갖게 된 의지가 본질 의지이고, 이 의지가 표현되면 습관과 기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선택 의지는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선택 의지를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피고 있다.
“공동 사회적 생활과 노동의 영역들이 부녀자에게 우선 적합하고 필요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시장보다는 집이 자기와 친구의 취미에 알맞으며, 거리보다는 활동을 위한 자연 처소가 알맞다. 촌락에서는 가정이 독립적이고 단결적이다. 도시에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시민적 가정으로 유지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된다. 그러나 대도시에서는 그것은 황량한 것으로 되고 좁고 실속 없는 것으로 되며, 단순한 거처의 기능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몇 푼의 돈으로 주 받는다. 그것은 여행을 하다가 들르는 숙소에 불과하게 된다. 모든 향토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여성적인 것이며, 전통적인 민속 감정을 떠나서 헤매는 일은 비여성적인 일이다.…교양인은 대도시적이고 국민적이며 국제적이다. 또 상업은 본래 토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질적이고 낯선 산업이다. 동시에 상인은 전형적인 교양인이기도 하다. 그는 고향이 없고 여행자이며, 다른 지방의 풍습과 예술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지방 사람들에 대해 사랑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그는 토지에 얽매여 사는 농민이나 고집세고 수공업을 장려하는 시민들과 대립한다.…”
다시 말하면 여성적이고 농민적인 의지인 본질 의지에 토대를 둔 사회가 공동 사회이고, 남성적이고 상인적인 선택 의지에 토대를 둔 사회가 이익사회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제3부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부분은 우리에게 좀더 많은 이해를 바라는 부분이므로 생략하고, 결론 부분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자.
“공동 생활을 말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질서가 대비되고 있다. 그 하나는 공동 생활이 의지의 합치나 본질적인 결합에 입각하고 관습과 종교에 의해 형성되어 이끌어지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이해 관계로 연합하려는 선택 의지나 협상 위에 성립되어, 정치적인 법률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고 유지되는 질서이다.…”
4. 맺는 말
우리는 사회 속에서 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살아간다. 이 사회가 없다면 인간이 될 수도 없고 제대로 살아갈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속한 사회는 다양한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집단 중에서 특히 현대에 와서 부각된 것이 이해 과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회사와 같은 이익 사회 또는 2차 집단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전문화될수록 이러한 2차 집단의 출현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더욱 필요하게 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완전한 이익 사회나 2차 집단은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이해 관계 때문에 만들어진 회사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공동 사회적이고 1차 집단적인 성격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쿨리와 퇴니스가 만들어 사용한 말들을 사회나 집단을 보기 위한 이론적인 것이지 그 자체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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