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or Never
아프리카 현대미술제
아프리카 예술은 주술을 위한 춤과 각종 행위로부터 얻어진 동작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모습을 하나의 형상으로 나타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그만큼 정신이 자유롭기에 가능하며, 또 바쁘지 않기에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글 : 박재현(국립진주산업대학교 교수, 시인)
[2010. 11. 17 - 12. 14 갤러리통큰]
[갤러리 통큰]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74번지 2층 T.02-732-3848
아프리카 예술의 익명성과 영혼의 자유로운 표현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 아비뇽의 처녀들. 첫눈에도 뭔 처녀들이 저렇게 생겼어? 하는 의외와 놀람과 이상스러움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뭔가 모르는 낯설고 어색함 그러면서도 색다름. 그것은 아프리카 미술의 순수성이 서구에 철저하게 왜곡되도록 알려지게 된 새로운 사건임에 틀림없다. 코는 비뚤어지고 눈은 해골에서 금방이라도 차용해 온 것처럼 뻥 뚫려 있고 몸은 단련된 근육이 각지고 마디지고 둔탁하다. 이런 몸을 가진 처녀들이란 영락없이 잘 단련된 육상선수이거나 수영선수에 다름 아닐 것이다. 피카소가 보고 싶었던 인체 회화는 무엇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시원(始原), 그것이었을 것이다. 인류가 처음으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한 사건은 동굴벽화일 것이다. 사슴과 코끼리 말과 그들을 사냥하는 사람들. 원하던 고기를 얻기 위해 내달려야 했을 생존전략의 법칙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바로 동굴벽화였고, 그것의 진화가 아프리카 미술이었다. 그것을 피카소는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당시 서구 평론가들은 말한다. 인체의 철저한 왜곡이라고. 자코메티 또한 그러하지 않았던가. 자유스러운 영혼으로부터 순수의 눈으로 바라본 인체, 그것은 왜곡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인체의 원형질 아닌가. 아프리카 미술 그 가운데서도 평면적 회화를 뛰어넘은 것이 필자는 조각이라 여긴다. 사람의 오감을 모두 만족시켜줄 수 있는 것이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차원적으로 입체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4차원적으로는 제작자의 영혼이 감상자와 신체적으로 교류하기 때문이다. 마티스가 아프리카 미술로부터 입체를 형상화하지 않을 수 없던 것도 바로 스스로의 오감을 만족하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예술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손과 몸으로 만지고 눈과 영혼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조각했을 이름 모를 어떤 예술가의 영혼과 교류하고, 그로 하여 영혼의 배부름으로 예술의 참맛을 느끼며 오로지 순수한 자아로 돌아오는 것.
세네갈-두츠(120x120)
세네갈-케베(95x125)
이디오피아-아세파(85x200)
케냐-카툰(145x180)
탄자니아-릴랑가(145x179)
탄자니아-팅가팅가(60x60)
그것이 아프리카 조각에서는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자코메티나 브랑쿠시 피카소 .... 수많은 거장들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들이 왜 아프리카 미술에 빠져들었는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익명성. 그것은 순수와 무위의 정신에서 나오게 된다. 익명으로 기부하는 현대의 봉사자, 기부자들은 내면으로부터의 행복을 갈구하고 또 그것이 종교로까지 승화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아프리카 조각의 시원(始原)이 동굴벽화이고 테라코타고 돌조각이었던 것이 나뭇조각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순수는 바로 자연 그대로였음을. 현대 조각의 발원이 되었던 어떠한 작품도 작가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익명성. 그것은 자연의 영혼과 인간의 영혼을 순수하게 이어주는 무위의 행위였고, 가봉의 마홍웨(Mahongwe) 같은 조상을 상징하는 영혼과 현세를 살고 있는 자손의 영혼을 한 면에 나타낸 것처럼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역사의 진정성의 갈구였다.
그것은 또 철저히 익명성에 가치를 두고 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조각과 그림에 나타나는 인물의 형상이 익명성이지만 그 속에는 언젠가 살았던 그들의 조상 아니면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 그것이 그대로 살아있기에 익명성이란 어쩌면 철저한 표현 속에 살아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기에 철저한 익명성은 역으로 철저한 표현성에 그 가치를 두고 있다. 예술이 철저하게 표현해야 하는 것을 근간으로 하는 것처럼 아프리카 예술의 근간 역시 표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 예술에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조상과 현세대를 잇고 있는 연결성이 표현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이 현세 인류가 찾아야 할 도덕적 가치를 부각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예술은 주술을 위한 춤과 각종 행위로부터 얻어진 동작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모습을 하나의 형상으로 나타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그만큼 정신이 자유롭기에 가능하며, 또 바쁘지 않기에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느림의 미학을 강조하는 시대에 진정한 느림은 아프리카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렵고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지만 내면으로부터 그대로 드러난 얼굴의 표정에는 때 묻지 않은 정신이 살아있고, 그것은 화려한 색이 자연스럽게 화면을 지배하고 자연과 우주 그리고 인간의 영혼을 이어주는 온전한 정신을 표출한 오감의 성지 조각에 자유로운 정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아프리카 예술이다. 원시적이라 비난 받고 더럽다 내팽개쳐지고 무지하다 약탈당했던 수많은 아프리카 예술품들이 지식인이고 현대인이라 자부하는 우리들에게 애지중지 깨우침을 주는 것은 바로 그곳에 그들의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원시적이나 원시적이지 않은 초현실적 표현, 무지하지만 무지하지 않은 과학적 선과 다양성,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화려한 색과 창조의 각(刻), 자유로운 영혼만이 그려낼 수 있는 무한의 익명성, 그 속의 현실성. 그것은 아프리카 예술이 추구하는 정신이고 이상이고 또 현실인 것이다. 서구 유럽과 미국미술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저명한 평론가들의 논지가 수많은 평론서들을 도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새로운 예술의 돌파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유로운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묻고 싶다. 현재에도 자유로운 정신으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예술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첫댓글 순수가 느껴지네요.색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