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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시 문인협회 추천시 ■
번호 | 시 | 시인 | 쪽수 |
1 | 가벼운 하루 | 김영희 | 2 |
2 | 가을이 기울고 있습니다 | 김종각 | 3 |
3 | 그날의 공상空想 | 김유진 | 4 |
4 | 꽃샘추위 | 박경민 | 5 |
5 | 꽃 짐 지고 걷다 | 지시연 | 6 |
6 | 낚시론 | 김성수 | 7 |
7 | 독백, 그리고 흔적 | 최인혜 | 8 |
8 | 두엄더미 | 임교순 | 9 |
9 | 따로 또 같이 | 이광민 | 10 |
10 | 막걸리 반되 | 김종호 | 11 |
11 | 무심한 딸 | 권순형 | 12 |
12 | 바람냄새 | 윤종희 | 13 |
13 | 반계리 은행나무 | 서봉교 | 14 |
14 | 밤바다에서 | 류각현 | 15 |
15 | 불면 | 양승준 | 16 |
16 | 사재강에서 | 신을소 | 17 |
17 | 산이 바다를 일으킨다 | 원수연 | 18 |
18 | 새벽 | 박주혁 | 19 |
19 | 서해 | 이서은 | 20 |
20 | 아내의 방 –퇴직 | 김기호 | 21 |
21 | 어머니의 감자 | 고창영 | 22 |
22 | 어머니 | 허금숙 | 23 |
23 | 연리지 | 박원영 | 24 |
24 | 온종일 뜨끈한 것들이 | 한기옥 | 25 |
25 | 외상수첩 | 유성철 | 26 |
26 | 차경 借景 외 2편 | 박서현 | 27 |
27 | 출근길 | 이무권 | 28 |
28 | 치매를 배우는 엄마 | 홍연희 | 29 |
29 | 한숨과 기쁨 | 김억수 | 30 |
30 | 할미새는 봄을 노래하네 | 정수일 | 31 |
31 | 항아리 | 손정원 | 32 |
32 | 현수막 – 이름을 묻다 | 최영근 | 33 |
33 | 화인火印 | 안연옥 | 34 |
가벼운 하루
김영희
오늘을 하루씩 늘려가는 것이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커피 한 잔으로
잠 부스러기를 털어낸다 어느 작가의 생각을 몇 장 읽는다
무언가를 한 줄 써보려다 의미에 걸려 그냥 눕는다
한나절을 그냥 보내버린다 하릴없이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 문을 연다 세상이 눈부셔
다시 문을 닫는다 오후의 등뼈는 앉아서 졸기 참 좋은 구조다
무언가를 덜어내려고 머리가 기울어진다 항아리 주둥이처럼,
입을 벌리고 졸아도 쏟아내지 못한 생각들이 차오른다
그냥 한 줄 써본다
카카오 톡의 알림 음처럼 바쁠 일도 없다
빛나는 일은 빛나는 사람들이 빛내고 있다 그리하여
가벼운 하루를 하루씩 늘려가는 것이다
가을이 기울고 있습니다
김종각
개울물 소리가 차갑게 들려오는 계절입니다
모처럼 바람도 잦아든 들녘엔 쓸쓸함과 평화로움이 공존하는 시간입니다
둑길 경사면에는 아직도 끈질김으로 버티는 초록의 생명체가 애처롭습니다
따사로운 햇볕이 그리워지는 시간입니다
멀어져 가는 태양을 향해 애원하고 있습니다
앙상한 벚나무 위에는 까마귀 무리들이 구성진 노래를 들려줍니다
가던 걸음 멈추고 들판을 바라봅니다
낙곡落穀도 없는 들판 위로 철새 무리가 낮게 날아가더니 되돌아옵니다
별 소득이 없었나 봅니다
험하고 힘든 시기의 세상을 살아가려면 많은 난관들을 하나씩 넘어야겠지요
걷다 보니 허허벌판 한가운데 길게 드리운 외로운 그림자 하나 만나고 있습니다
그날의 공상空想
김유진
의당宜當 오십견의 오십도 지났다
희고 서운한 환갑도 잘 흘려보냈다
이젠 장미 가시 같은 뾰족한 사랑은 싫어졌다
모퉁이가 많은 좁은 골목이나 딱딱한 벽도 좋아하지 않는다
낮보다 밤이 자주 왔고 어떤 아침은 눈이 부셨다
더 늙을 마음 없이
물렁한 벽에 낡은 시계를 걸어놓고
분침이나 시침이 건전지에 걸려 넘어지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
위대한 건전지의 세계에서
전압電壓이 상실한 나만의 나라를 꿈꾸어 본다.
꽃샘추위
박경민
대지는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다
이른 봄, 언 땅을 골고루 다져놓고
모종할 날만 기다리시는 어머니
나른한 햇살 아래 돌미나리 서양미나리 올라오고
고사리 잔대 싹 서슴없이 올라오는데
어머니는 무엇이 못 미더워
고추 싹만 내려다보며 한숨만 쉬시는지
봄 다녀간 흔적도 없이
옷깃을 여미는 바람이 야속하다
가다가 다시 온 겨울
여린 꽃잎을 떨구고 간 후에야
어머니는 꽃삽을 챙겨 밭으로 나가신다
꽃 짐 지고 걷다
지시연
삶이 시작된
기억의 첫 자리로 거처를 옮기고
등불을 들고 걷는 길이라 해도
무게를 감당할 만큼의 수고는
저마다의 몫으로 오늘을 채워가네
너의 곧음이 나의 겸손이 되어
시간이 녹아든 자리
풀물 드는 나의 수도는 향기로 피고
풀 속에서 꽃을 보고 꽃은 나를 보고
새들보다 이른 찬미는 내 등을 적시고
우리는 어떤 무게라도 꽃 짐이라 말하며
당신을 향해 부는 바람처럼 살고 있네
낚시론
김성수
언어(言語)의 고운 강물 속에서 파닥이는
대어(大漁) 한 마리 낚아 보려고
오랜 세월 나는 가슴 졸이며 기다려 왔었네
시(詩)의 강물은 언제나 설레임으로 출렁거렸고
손끝으로 만져 보는 푸른 물결은
아름다운 꿈으로 가득 차 있었네
형광의 찌가 오르내릴 때마다
내 오감에 찔려 오는 아찔한 현기증
잽싸게 줄을 당겨 보지만
바늘에 걸려 올라오는 고기는 늘
월척을 넘지 못하였네
그러나 그 짜릿함 때문에 꼬박
밤을 지새기도 했고
새벽이 열리는 물이랑 위로
또다시 새로운 줄을 던지기도 했지
고기들은 물살을 가르며 가르며
여명(黎明)의 아침을 헤엄치는데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물을 보면
발목이 잡혀 떠날 수 없는
나의 영혼
백사장에 누우면 나의 핏속으로도
아름다운 물결이 흐른다
생애의 가장 값진 소망들이 물 좋은
선어(鮮魚)가 되어 돌아올
이 욕망의 강가에서 오늘도 나는
대어를 꿈꾸고 있다
독백, 그리고 흔적
최인혜
기다림에 지쳐
사랑의 마음 알알이 담아
노란 해바라기로 태어난
눈물겨운 모습을 보며
내 삶의 흔적을 발견한다.
더 이상 교만하지 않으려
태양 쳐다보지 않고
언제나 겸손히 머리 숙여
내면의 아름다움 채워가는
감동적인 해바라기의 삶이여
여름과 가을의 길목에서
뜨거운 햇살 온몸으로 맞으며
긴 침묵의 시간 속에 잉태한
너의 마지막 삶의 흔적은 끝내
소중한 기름으로 남기었기에
문득 돌아본다.
무시로 달려온 내 삶의 흔적을
교만과 자만, 부질없는 욕망의
노예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두 뺨 스쳐 가는 가을바람은
저마다 주어진 인생
찬란한 자화상의
주인이 되라 전하고 간다.
두엄더미
임 교 순
옛날 사람들은
집집마다
두엄더미를 두고 살았다.
못 먹고, 못쓰고, 더럽다고 여기는 물건은
두엄더미에 버렸다.
부지런한 농부는
쇠똥, 개똥, 돼지 똥도
길거리에서 주어다 모아두었다.
두엄은 썩어서 거름으로 쓰였다.
두엄냄새 맡고 자란
울타리 호박꽃이 활짝 웃으면
굼뱅이 파먹던 장 닭은
목을 길게 빼고
두엄더미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
따로 또 같이
이광민
온탕과 냉탕을 오갈 땐 마음을 비우자
삶이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기에
한 번 더 생각하고 조심할 일이다
서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시원한 바람에 후끈한 바람이 묻어온다
아니 그 바뀜의 차이를 적응 못 해
같이 온다고 느끼는 걸까
바다를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온도도 다르다
사는 곳에 따라
집값 걱정이 다른 것처럼
365계단을 내려 계곡 바위를 축소해 놓은 돌을
파도 교향곡에 등장하는 갈매기 추임새에 맞춰 성큼성큼 건너뛴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어느새 명함도 내밀 수 없는 나이
수평선 너머엔 하늘이 있는데
비가 내리는지 경계가 불분명하다
막걸리 반되
김종호
흰 수염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느닷없이
짚고 있던 주장자 내리치며
이놈아, 그만 일어나 막걸리 반 되만 받아오너라, 일갈하셨다
끝없이 아득한 벌판 안개비 자욱한데
술집 찾아 허둥허둥 달려가다 꿈 깬 새벽,
생전 술 한 잔 못 드신 아버지가 오셨던 걸까
빗속으로 휘적휘적 걸어가시던 뒷모습 눈에 밟혀
슬그머니 문 열고 나와
뿌옇게 밝아오는 치악산을 올려다본다
막걸리 반 되라, 무슨 말씀이신가
오래 떠돌다 발붙인 이곳 산 번지
이웃을 품어 스스로 뜨거워지지 못하고
또다시 떠나려는 마음 알아채신 것일까
산 그림자 깊이 스미어 쓸쓸한 아침
아버지 오신 까닭 언뜻 짐작하겠네
어쩔거나,
내 영혼 아직 맑아지지 못했으니
오늘은 삼짇날, 막걸리 한 병 사다가
집 둘레둘레 한 잔씩 부어야겠네
무심한 딸
권순형
정수리에 검은 머리카락이 새로 나기 시작한
팔순의 아버지
무릎이 아프다는 말에 무릎을 주물러드렸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오셨으면 종일 무릎이 아프실까
눈밭 위에 부러진 나뭇가지 같은 무릎을 만지다가
아버지 무릎 위로 뚝 뚝 떨어지는 눈물
아버지가 아프다는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침대 머리맡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케토톱
왜 그걸 한 번이라도 눈여겨보지 못했을까
파스로 싸맨 아버지 무릎을
처음으로 만져드린 무심한 딸이다
어린 나를 천 번은 넘게 업고 다니셨을 아버지
먼 길 살아오시느라 다 닳아진 아버지의 무릎이
오늘만이라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회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행복한 시간이다
바람 냄새
윤종희
봄부터 호미와 결투를 벌이지만
참외 덩굴과 잡풀이 함께 한다
햇빛과 유난히 인연이 많았는지
노랗게 빛나는 것이 있다
흐르는 바람 속에서 하나 건지겠구나
덥석 잡으니 땅과 닮은 냄새다
들판과 친해지려다 호미가 되어버린 할머니
들꽃 향 잔뜩 품은 참외 뒤집어
한여름 오미가 간 긴 글을 펼쳐 놓는다
땀방울과 한숨으로 지쳐버린 말줄임표
까지, 참새, 때 이른 고추잠자리까지
눈치 살피다 빼먹은 글씨
마저 채워 놓고 간다
푸른 숲이 좋다던 할머니
수목장 나무는 더욱 푸르고
옛 친구들 그리운지 바람에 일렁인다.
반계리 은행나무
서봉교
오래된 그가 보고 싶어서간 것은
아니었다.
그가 불러서 갔을 뿐
말이 그리웠던 그는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초록 이파리의 초대장을 받고 갔더니
연실 이야기한다.
저러면서
입이 간지러워 8백년을 어찌 살았을까
수 년 동안 묵었던 이야기는 말고
최근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지 위 비둘기는 추임새를 넣고
앞집의 쇠비듬댁들은 기립을 하는데
너희는 내 뿌리위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된다고
본디 인간이 갈 길과 내 가야 하는 길들이 다르니
그냥 그렇게 들어주기만 해도 된다고
그러나
내게 들은 말은 옮기지는 말라고
그래도 또 듣고 싶으면
다시 와도 된다고.
밤바다에서
류각현
성난 코브라가 흰 천을 휘감고
검은 해변으로 돌진한다.
하얀 포말이 어둠을 밀어내는
저 백사장 너머의 숨가쁜 시간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새털구름을 희롱하며
어둠을 키워가던 밤의 심장
그 힘찬 고동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무엇이 바다를 잠들지 못하게 했는가,
누가 저들을 저토록 성나게 했는가,
아직도 화난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들고
저 바다 속을 휘젓고 있는가.
아 그러나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바다는
불면의 밤을 지새고도 그 넓은 가슴에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여명의 휘장이 걷히면
새로운 태양을 출산할 푸른 바다
수평선 멀리 들려오는 묵시의 말씀에 귀
기우리며
아직도 푸른 바다는
그의 오감의 돌기를 통해
또 다른 아픔을 감지하고 있었다.
내 안에서도 성난 물결은 출렁이고
그 물결을 타고 표류하던 내 생애의 작은
화물선은
북극성을 나침반으로 삼아 다시 뱃길을 찾았고
우리들이 도착해야 할 유토피아
미지의 푸른 언덕을 향해
의지의 배를 몰아가고 있었다.
불면
양승준
생각해보니 이미 나는
아버지보다 이십 년을 더 사록 있었다
흑백사진 속 아버지는 겨우 마흔,
그것만으로도 아버지가 살다 간 시간은
충분히 춥고 삭막했을 것이다
어느덧 나는 등도 굽고 뼈도 삭은 채
아버지가 경험하지 못한 나이를
이따금씩 이렇게 덜컹거리며
빠르게 나아가는 중이다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목숨이 다하던 그 순간까지
남겨진 식솔들을 안타까워하며
단 하루만이라도 더
그들 곁에머무르고 싶었을 것이다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아버지처럼
눈물 흐를 새도 없이
슬픔 닦아낼 틈도 없이
한밤중 잠을 깨는 일이 더욱 빈번해졌다
겨울 달빛이 한결 더 좋다고 했으나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중앙선 열차 소리를
다섯 번이나 듣고서야
다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덜컹이며 어둠 속을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꼭 나와 같았다
아버지는 이런 나를 무어라고 했을까
사재강에서
신을소
비가 내린다
사재강 물살은 더 빨라지겠다
스스로 조각된 제멋대로의 크고 작은
바위들
와류(渦流)에 패인 온몸의 상흔,
세월이 다듬어준 하얀
곡선의 무리가
비에 젖는다
얼마나 슬프고 억울한 사연 많았으면
모래 몇 알 불러들여 돌개구멍 되도록
저토록 오랜 가슴앓이로
야위어 왔을까
찾아와 비는 사람마다 가슴 속에
돌개구멍 하나쯤 없는 사람 없더라고 웃는
요선정 마애불상이 비에 젖는다
구경꾼인 나도 비에 젖고.
산이 바다를 일으킨다
원수연
늘 누워 앓던 바다,
산이 나서 일으킨다
나무는 산의 손길 혼을 꺼내 씻고 나면
바다는 아픔을 털고 갈매기와 춤을 춘다
산마을 물마을은 바다와 산의 합창
절대로 놓지 말자 함께 살자 다짐했다
하나여!
산과 바다는 둘일 수는 없었지
백사장 많은 사연 산이 나서 들어주고
남몰래 가슴 치던 후회를 걸러내는
바다의 무수한 아픔 지난날을 다독인다
새벽
박주혁
별빛 가득 채우고 덮어 준
새벽이 오는 길목에 서보라.
눈보라 비바람 무서리도
맑은 바람 되어
허전한 가슴에 잦아들고
기다리는 이에게 달려갈 길을 만든다.
한결같은 별들의 이야기
참아주는 가슴, 감사하는 머리
품어주는 풀처럼 사랑의 길 만들라 한다.
속삭이는 영혼 마음에 드는 몸짓
지친 나약한 영혼들
자유로운 길 만들라 한다.
부족함 안쓰러워
돌에 새겨주는 새벽 이야기
주고받을 수 있는 벗을 안겨준다.
우리가 만드는 길
심연의 소용돌이
고요로 옷을 벗는다.
서해
이서은
고요한 풍경 앞에서,*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외로운 사람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그윽한 풍경을 보면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 시절이 있었다
20대의 오랜 자취 시절,
편의점 폐기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울 때 그랬고,
냉랭한 도시의 길 위를 홀로 걸을 때 그러했다
이제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과
멋진 풍경을 선물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서해바다를 발라먹고
하루일과를 마친 낚시 배 위로 떠오른
그리운 이의 노을을 건져 올리며 생각한다
풍경 하나에 맛 하나,
그리움 하나가 결국
같은 무게였다는 것을
아내의 방
-퇴직
김기호
아내의 방에 닿았어요
헤어지기 못내 서운해
달빛 바래주던
청춘 골목길 지나
아침 혼자 빈 방에서
날 저물도록 그대 바라보기
19공탄 따뜻하던 사글세방
순정 골목길도 지나
막내 업고 큰 놈 손 꼭 잡고
옷가방 챙겨 들고 타던
태백행 초록 기찻길도 지나
눈물 한 방울 떨구며
헤어지던 주말부부 아득한데
단소 불던 위안의 시간
훌쩍 지나가고
꿈결인 듯 아이들도
어느새 떠나가고
혼자 남아 돌보는
아내의 식물나라에
마침내 닿아
더는 이별하지 않는 어느 날
예전에 몰랐던
아내의 낯선 빈자리에 앉아
돋보기 쓰고
날마다 수놓고 있는
아내의 꽃들 보아요
외로웠을 아내의 시간들
수 놓여 촘촘하게 박혀 있는
붉게 물든 남천 단풍잎들 보아요.
어머니의 감자
고창영
‘세상에 버릴 것이 어딨냐’
크고 굵고 잘난 놈 말고도
어머닌
작고 상처 나고 썩어 볼품없는 것들조차도
몽조리 귀하게 거두셔서는
삼복더위 내내 잠기도록 물을 부어
푹푹 구린내 나도록 묵혀 두었다
‘세상사 쉽게 얻어지는 것치고 중한 것 읍다’
지독한 냄새에
손사래 치며 손등으로 코를 막고 다닐 즈음
어머니는
감자 무고리가 빠진 물을 싹싹 주물러가며
새물을 붓고 앙금 받는 일을
수백 번 쯤
‘야야,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비단 장시가 칼 장시랑 싸워 이겨봐야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보름 만에 앙금을 우려내
햇볕에 말리고 비비고 비벼서 은빛 감자분을 얻으시고는
팥소 듬뿍 넣고
쫀득쫀득 시상에 둘도 없는 속살 훤한 감자떡을
한여름 밤 평상 가득히 내놓으셨다
‘두고 봐라, 굽은 나무가 길맛가지가 된다.’
별 볼일 많았던 그 시절
말린 쑥 태우는 연기처럼 퍼지던
가끔씩은 별똥별로 쏟아지던
법문 같은 어머니 말씀
어머니
허금숙
“그리움”이라는 글자가 눈앞에 보이면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밭둑을 거닐 다 보면 밭둑가에 앉아 계시는 뒷모습에
깜짝 놀라 허공을 바라보곤 합니다.
작은 오솔길 걷다가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꽃봉오리 보면
당신 모습이 그리워 다시금 허공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그렇게 가만히
그림자처럼 다가오곤 하지요
자식들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시던 당신
언제나 선물은 아름다운 옷보다는 돈을 받고 싶어 하시던 당신
선물은 어느새 외손자 책상 위에서 보곤 하지요
당신을 오솔길 옆 작은 숲속에 두고 옵니다
괴로움과 그리움이 살며시 고개 들고 인사하면
당신 계신 곳으로 소풍을 갑니다
소풍 가는 길에 아름다운 꽃이랑 풀이랑 바람이
속삭이면 가슴이 더욱 아프답니다
그 모든 것이 당신과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연리지
박원영
하나인 듯, 둘인 듯
사랑인 듯, 구속인 듯
저 난해한 문장 읽을 수가 없다
견우직녀의 필적일까
저렇게 살이 섞이고 피가 흐르려면
이생만은 아닐 게다
전생이 궁금해진다
깊은 사랑 해보지 못한 나
너의 껍질을 깨고
그 깊이 확인하고 싶구나
다가서는 만큼 멀어지던
잔인한 거리에서 머뭇거리던
알 듯, 모를 듯 묘연한 행간
평생 물음표를 달아준 너
끝내 혼자 마침표를 찍은 너
우리 이런 절절한 문장 쓸 수 없었을까
오작교를 놓고 은하를 넘나들 수는 없었을까
알 수 없는 까막까치 두 마리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저 가지에서 이 가지로
한 권의 눈물로 쓰여 진 순애보를 읽는다
온종일 뜨끈한 것들이
한기옥
목숨 줄 같은 밧줄에 의지해
아파트 외벽을 오르던 남자
더워 힘드시죠?
물 한 모금 드실래요?
창문 열고 물 한 컵 건네자
금세 컵을 비우고
주방 창 앞을 잠시 머뭇거리다 사라졌었다
베란다 외벽 갈라진 곳을 메우기 위해
관리소에서 미리 주문받은 일이란 걸
사내를 통해 알았지만
마감을 넘겼으니 어찌해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 달 뒤
장대비 오는 날
주방 외벽 쪽 틈이 걱정돼
마른 수건을 들고 창 쪽으로 갔던 것인데
물 한 방울 스며들지 않는 것이었다
산다는 건
그대와 나 사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틈새 하나 찾아내
물 한 컵 붇는 일
꽃잎 같은 안부의 말 한 두 마디 얹는 일이겠다는
온종일
뜨끈한 것들이
밀려왔다
외상수첩
유성철
항상 친구들 부러움을 사던 석이네 구멍가게엔
손바닥만 한 모나미 회색 수첩이 꽂혀 있었다.
정성스럽게,
때로는 귀찮은 듯 흩날린 글씨로
내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그 이름을 열면
엄마의 사랑으로 둘러앉아 먹던 저녁 반찬들과
생활에 지친 아버지의 막걸리 한 되가 있고,
여자가 무슨 공부냐던 성화 속 누나의 집념 어린 공책들과
입에 막대사탕을 물고 딱지먹기에 빠져 있는 나도 있었다.
철부지에겐 화수분이었지만
쌓여 가던 수첩 속에 그어지지 못하고 남아
늘어만 가던 숫자의 짐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항상 막내에게는 너그럽던 엄마가 월말이 다가오면
적잖이 신경을 곤두세우던 이유가 그 속에 숨어 있었다.
심부름 온 아이에게 차마 말을 못 하고 머뭇거리다
물건을 내어주시던 석이 엄마의 눈빛과
취로사업에 나갔다가 가게 근처에 다가설라치면
멀찍이 돌아오시던 엄마의 쫓기듯 급한 발걸음,
차경 借景 외 2편
박서현
그 건물 속은 만남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두 면이 붙은 통창
창 밖 은행나무들 차르르르 인사하지
잎, 햇살을 업고 춤을 추면
반짝이는 창은 초록 크리스털 액자
나에게 고개 끄덕이는 몸짓을 본다
손으로 잡을 수 없어 존재로 담는 너
사람이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기다리는 너여서, 찾아야 하는 나라는 것을
소유 없이 바라보며 알게 되었지
오늘은 정문부터 초록물결 불어오고
내딛는 발걸음에 기분이 일렁인다
그 건물 속은 기억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두 면이 붙은 통창
창밖의 사계절을 펼쳐서 우리들의 시간을 엮는다
출근길
이무권
한 주간의 삶을 속옷이랑 구겨 넣고
강릉행 첫차를 탄다
둔내령쯤에서
삶의 무게는 가는 눈발로 날리다가
대관령 고갯마루에 이르면,
우리의 애증(愛憎) 과 원망(原望)은
폭설이 되어 내린다.
누가
이렇게 많은 하늘 기도의 불꽃으로 태워
끝 간 데 없는 인자의 손길을 재촉했을까.
휴게소 안에서 만나는 생활과
악수를 하고,
자식놈 입시 안부를 묻고,
출근 시각 걱정을 하다가,
바깥으로 나서며 한 손을 펴고
은총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는다.
지우고 싶어라,
비틀거리며 달려온 발자국들에
담긴
오욕과 모멸의 잔해들을.
그리고 이제는
지워지지 않을 새로운 발자국을
이 눈 위에 남기고 싶다.
잠시 하늘은 모든 사고를 중단한 채
가슴을 열어
용서와 자비를 흩뿌리고,
나는
손바닥에 쌓이는 회오의 온도만큼
일상으로 돌아와
눈발을 턴다.
치매를 배우는 엄마
홍연희
밤이 하얗다고 하더니
이제는 지난날들이 하얗게 바랬다
창가 지키는 작은 장미 넝쿨을 보며
소녀 적 당신만 우기는 것은
하얀 기억속
아직은 남아 있는 따뜻한 추억
검지가 잘려도
단숨에 끝내 버리던 짭짤한 살림 솜씨는
달래기만 하는 투정으로 돌아 앉아
어미인 것이 두렵고
아내였던 것을 밀치고
여자인 것에 사래질 쳤다
흔들림 안에
아련히 비추는
기억하기 어려운 정체성으로
이제 다 섭렵 해 가는 치매는
어미 손 끝으로
내 가슴으로 기어든다.
한숨과 기쁨
김억수
살면서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이 나오는 날은
삶이 지치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 날은 몸도 움직이기 귀찮고
한 치 혀조차 놀리기 싫어
멍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 해가 서산에 걸려
하루 일과를 마칠 때는
몸과 마음이 파김치가 됩니다
그때 소주나 한잔하자는 친구의
전화 한통은 지친 몸과 마음을
풍선이 되어 날게 합니다
할미새는 봄을 노래하네
정수일
나뭇가지마다 봄눈 톡톡 튀면
때를 놓칠세라 찾아와
화창한 햇살을 등에 지고
할미새 한 쌍 노래한다.
베란다 난간에서 통통 뛰다
갸웃거리다 포로롱~ 포로롱~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찍 찌르르
날아오르며 파도를 탄다.
귀를 씻어주는 맑고 고운 노래
날렵한 날갯짓도 가볍다
통통 튀는 발걸음도
봄을 노래하는 노래 소리도
항아리
손정원
나는 알고 보면
나를 채우지 못하고 비우지도 못한다
담겨지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의 이름은 붙여진다
알고 보면
내 속에 든 것이 모두
내 것은 하나도 없다
전부 밖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나도
내 안에 좋은 것
가치 있는 것 담고 싶지만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다
나를 깨끗하게 비워두어야
좋은 것을 넣어주지 않겠는가
나에게 최선은 비우는 일
그리하면
나에게 보물을 넣고
제 몸보다 귀하게 대하리라
현수막-이름을 묻다
최영근
오후의 적막 한 쪽 호명의 순번대로
혀 짧은 환호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맞잡은 눅진 허공에 펄럭이는 갈증들
아스팔트 견뎌온 물집이 깨어졌다
주황빛 상처들이 수족을 거느리고
횡단의 신호 대기에 점멸을 반복한다
욕망의 휘호 아래 반복되는 일상들
한 번도 듣지 못한 손짓은 귀가 멀고
이름을 잊은 바람만 긴 저녁을 헤맨다
화인火印
안연옥
자신의 온도에
자신이 데어 죽는 일엔
반드시 화인이 찍혀 있다
그건 당신이 언젠가 산길에서 따 먹은
덤불딸기 한 알 같고
처음으로 배운 날의 반짝이던 담뱃불
혹은 처음으로 품었던
빛나던 눈동자 같은 화인
설사 죽지 않고 살아있더라도
당신은 이미 당신의 생애에
도장을 찍은 사람
돌이킬 수 없는 날인을 한 사람
묵묵히 계약을 이행해야만 하는
당신의 온도에 묶인 사람
화상은
식은 뒤끝의 통증이어서
이미 지나간 일들로 아프다면
그건, 당신의 생애에
깊은 화인이
찍혀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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