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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韓信, ?~196년) 제나라의 왕이 되다
7. 한나라의 신하가 되느냐, 왕의 길을 걷느냐
이때 한신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고, 한신은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 즉 임시적인 왕으로 봉해주기를 청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니 반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또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제가 이곳의 가왕(假王)이라도 되어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정세가 안정이 안 되어 후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한신의 제안이 천하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사나이의 야심인지, 아니면 진실로 그저 일시적인 계책으로 제안을 하는 일인지 그 동기에 대해 사기나 한서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때 유방의 상황을 보자면 사수(汜水)에서 초나라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와 장사 사마흔을 격파했으나, 소식을 들은 항우가 팽월(彭越)을 공격하다 말고 돌아와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미 한신은 역이기 사건으로 유방의 의중을 거스른 전례도 있었고, 이 때문에 유방은 몹시 분개해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한신을 공격해버리려고 했지만, 장량이 유방의 발을 슬쩍 밟고 "지금 한신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습니다."라는 말을 해주자, 열받긴 했지만 사리분별을 할 능력은 충분히 있던 유방은 순식간에 태도를 돌변해서 소리쳤다.
"사내 자식이 왕 노릇을 하려면 진짜 왕을 해야지, 가왕이 뭐라더냐?"
그리고 곧바로 장량을 한신에게 보내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임명했고, 곧바로 초나라를 치도록 명령했다. 밥을 빌어먹고 지내던 회음의 찌질이가 제나라의 당당한 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7.2. 천하 삼분
믿었던 용저까지 죽어버리고 나자, 항우 역시 한신의 기세에 덜컥 겁을 먹었다. 게다가 제나라는 초나라의 바로 머리 위쪽이니, 한신이 항우를 압박하기 시작하면 이미 팽월만으로도 부담스러운 항우에게는 정말 가공할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항우는 우태(盱胎) 사람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회유하려고 시도했지만 한신은 단칼에 거절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이 사람이 항왕을 모실 때는, 관직은 낭중에 불과했고, 하는 일은 극(戟)을 들고 항왕의 신변이나 지켰습니다. 간언을 올려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고, 계책을 내어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를 한왕은 상장군에 임명하고 그 인장과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주었습니다. 또한 나를 대하기를 자기의 옷을 벗어 나를 입혀주고, 자기의 식사를 같이 나누어먹게 했습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려주고 나의 계책을 채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무섭도 대답할 말이 없어 물러갔다. 그런데, 이때 또 괴철이 슬금슬금 한신에게 다가왔다. 괴철이 보기에 천하의 향방이 한신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그를 위해 계책을 한번 내어보기로 한 것. 괴철은 처음에는 '관상을 봐주겠다.'라는 시덥잖은 소리를 하며 한신에게 접근하더니, 곧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천하에 처음으로 일어나 어지러워졌을 때, 영웅호걸들이 제각기 명분을 내걸고 한 번 소리치니 천하의 재사들이 구름과 같이 몰려들어 물고기 비늘처럼 서로 뒤섞이더니, 들불처럼 번지는 화염과 같이, 일진광풍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일어났습니다.
당시 선비들의 관심사는 단지 진나라의 멸망에 대한 것뿐이었으나, 그러나 지금은 초와 한이 나뉘어 다툼으로써, 천하의 죄 없는 백성들은 그들의 간과 쓸개가 땅에 깔리게 되었고, 황량한 교외의 들판에 나 뒹굴고 있는 아비와 자식의 해골은 그 수효가 많아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초나라가 팽성에서 일어나 사방의 적을 쫓아다니다 그 패주하는 적의 뒤를 따라 형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승세를 탄 초군이 천하를 석권하며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초군도 경(京)과 색(索) 사이에서 한군의 반격으로 기세가 꺾이고 성고의 서쪽에 있는 험악한 산세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지가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한왕은 몇 십만이나 되는 인마를 이끌고 공현(鞏縣)과 낙양(洛陽) 일대에서 초군의 서진을 막고, 그곳의 험준한 산과 강의 요충지에 의지하여 초군의 공격에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한왕은 그동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싸움을 치렀음에도 지금까지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패전만 계속하다가 외부로부터 구원도 받지 못하고 결국은 형양과 성고의 싸움에서 타격을 입고 완(宛)과 섭(葉)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이것이 소위 지혜는 바닥이 나고 용기는 다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군대의 사기는 험준한 요새에서 꺾이고 창고의 양식은 다 떨어졌으며 백성들은 고통과 피로에 지쳐 그 원성은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 민심은 동요되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 소견으로는 이러한 형세는 천하의 성현일지라도 그 화란을 그치게 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오늘 결국 한왕과 초왕 두 왕들의 운명은 모두 장군의 손안에 달려있게 되었습니다. 장군께서 한왕에게 협조하면 한왕이 승리할 것이고, 초왕에게 협조하면 초왕이 승리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제 속마음을 피력하여 어리석은 계책이나마 올리고자 하오나 단지 걱정되는 것은 장군께서 제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진실로 능히 장군께서 저의 계책을 받아들이신다면 한과 초 두 나라에 이익을 주어 모두 존속케 하고, 천하를 삼분하여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어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장군의 뛰어난 능력과 성스러운 덕성으로 수많은 무기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강한 제나라를 근거지로 삼고, 연과 조 두 나라를 복종시키고 유(劉)와 항(項)의 군대가 없는 땅으로 나아가 그들의 후방을 압박한다면, 그것은 바로 백성들의 마음에 순응하는 바가 될 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서쪽의 형양성 쪽으로 진격하여 유(劉)와 항(項)의 분쟁을 중지시켜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보전시키라고 요구한다면, 천하 사람들은 바람처럼 달려와 메아리처럼 호응할 것입니다. 누가 감히 장군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큰 나라는 쪼개지고, 강한 나라는 약하게 되어 제후들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제후들이 일단 서게 된다면, 천하는 장군이 베푼 덕에 감격하여 제나라의 명을 받들며 귀의할 것입니다.
이에 제나라의 옛 땅을 안정시키고 교하(膠河)와 사수(泗水) 유역을 근거지로 하면서 덕을 베풀어 감동시킨 제후들을 소집해서 두 손을 높이 들어 읍을 하면서 겸양의 자세로 자신을 낮춘다면 천하의 제후왕들과 그 재상들은 줄을 서가며 제나라에 들어와 조배를 드릴 것입니다.
나는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후에 벌을 받고, 때가 왔을 때 행동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盖聞天與不取 反受其咎, 時至不行 反受其殃)라고 들었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괴철이 설득하고, 한신이 고민하는 이 부분은 회음후 열전은 물론, 사기 전체에서도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부분이다. 한신은 이 말을 듣고, "한왕이 나에게 잘 해주었는데, 내가 배신하는 게 옳겠는가?"하고 고민했다. 그러자 괴철은 문경지교라 일컬어졌지만 파탄난 장이와 진여의 우정, 그리고 월왕 구천을 패자로 만들었지만 의심을 피해 떠난 범려를 언급하며, 하물며 유방과 한신의 관계가 한때의 장이와 진여만큼 각별한 것도 아니고, 한신이 범려가 구천에게 한 것만큼 유방에게 지극하게 충성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유방만이 의리를 지키기를 바라느냐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한신은 "조금 생각해 보겠다."면서 답변을 미루었다.
며칠 뒤, 애가 탄 괴철은 다시 한 번 한신을 설득했다. 그러나 결국 한신은 주저주저하다가 결국 괴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 자신의 공이 워낙에 크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유방이 제나라를 쉽게 빼앗아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괴철은 일이 글렀음을 알고, 일부러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돌아다녔다. 유방이 승리하면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처형감인데, 정신병자 행세를 해서 이를 모면해 보려고 한 것.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의문은, 괴철과 한신의 이 대담은 그야말로 완전히 밀담인데, 어떻게 사마천이 바로 이 이야기를 옆에서 본 것같이 생생하게 기록했냐는 점이다. 일단 회음후열전에서도 '주위의 사람을 물리고' 이야기를 했다고 나온다. 이는 진시황 사망 후, 이사와 조고, 호해가 사구(沙丘)에서 모의를 하는 부분과 더불어 사마천이 절대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손꼽힌다.
다만 사구정변 쪽도 항목도 나오듯이 사마천이 '절대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다'는 부분에 반론이 있으며, 괴철의 대담 쪽은 오히려 이런 의문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우선 한신과 괴철이 대담을 가졌던 사실 자체는 확실하다. 한신의 사망 후에 유방은 괴철을 잡아들였으며, 이때 괴철은 "내가 한신에게 반란을 권했다."고 인정했기 때문. 자세한 대화 내용이 문제인데, 괴철이 결국 죽지 않고 풀려났음을 생각해본다면 괴철이 상황을 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우선 유방이 괴철을 잡아들여 신문하는 과정에서 자세한 대화의 내용도 당연히 조사했을 것이고, 괴철은 그런 권고를 했다는 것을 당당하게 자백한 만큼 자세한 대화의 내용도 숨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공식적으로 괴철이 한신에게 그런 권고를 했다는 것이 공개된 상태에서 황제가 괴철을 친히 석방했으므로, 이후에 괴철이 대화 내용에 대해 계속 함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
8. 해하 전투
한신·팽월·영포를 대장으로 봉하다
항우는 팽월과 유방의 협공 때문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군량도 부족해졌으며, 또한 한신의 기세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항우는 먼저 유방에게 홍구(鴻溝)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여 천하를 양분하자는 제안을 내었다. 유방도 이에 승낙하여, 두 사람은 각자 동쪽과 서쪽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떠나던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제안으로 항우의 뒤를 치기 시작했고, 동시에 팽월과 한신에게도 연락하여 움직이기를 권하였다. 그런데 한군이 고릉(固陵)에 이르렀음에도 불구, 팽월과 한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기만 했고, 유방은 초나라의 반격을 받아 큰 패배를 당했다.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하고,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영포(英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써,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때, 한신은 무려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과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이후 항우의 괴력의 밀려 후퇴하다가, 측면 부대를 이용해 초나라 군대를 요격했고, 다시 본대가 뒤돌아 공격을 퍼부어서 초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항우가 도주하다 자결함으로서 전쟁은 드디어 종결을 맞이했다.
유방은 최후까지 버티던 노현(魯縣)을 굴복시켜, 완전한 끝을 장식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후 서쪽으로 가던 유방이 산둥성 딩타오(定陶) 부근에 이를 무렵, 유방은 또 갑자기 한신의 진영으로 달려가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 이미 한번 당해본 일이었지만 이미 전쟁도 끝난 마당에 갑작스런 기습에 한신은 놀랐는지 제대로 반항도 못해보고 고스란히 병권을 넘겨주었다(...). 유방은 한신을 본거지인 제나라에서 초나라 왕으로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邳)에 정하게 하였다. 제왕은 1년 정도 공석으로 두었다가 BC 201년에 유방의 서장자 유비가 맡았다.
9.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
9.1. 밥값을 갚다
졸지에 제왕에서 초왕이 되긴 했지만, 초나라 지역은 한신의 고향이기도 했다. 한신은 위풍당당한 왕이 되어, 과거 자신을 찌질이로 여겼던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한신은 자기에게 밥을 주던 아낙네들을 찾아나서 천금(千金)을 주었고, 밥을 빌어먹었던 정장에게는 백금(百金)을 주면서 이런 소리를 덧붙였다.
"공은 소인이다. 덕을 베풀면서 끝까지 하지 않고 중도에서 그만두었다."
밥 한 그릇의 은혜를 천금으로 보답하니 일반천금의 고사다.
그리고 과거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걸어가게 했던 사람도 찾아내서, 초나라의 중위(中尉)에 임명하였고, 이번에는 이런 말을 부하들에게 하였다.
"이 사람은 장사다. 그가 나를 욕보였을 때,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한들 이름을 얻을 길이 없어, 오랫동안 참아 공을 이루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다라는 명언을 몸소 실현한 것이었다. 즉, 이 이야기들은 한신의 대인배스러움 등을 나타내는 일화로 설명된다. 다만 한편으론 유방과 여후가 한신에게 꿍꿍이가 있어서 저런 식으로 인기를 끌려 한다고 의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초한전기 80화에서 이 두 고사를 볼 수 있는데, 밥을 준 노파는 내 밥 먹은 사람이 많다며 한신을 기억 못했지만 한신은 내가 기억한다며 보답하고, 옛 정인을 만난 한신이 밥을 얻어먹다 정인의 남편, 즉 옛날 자신을 모욕한 사람이 나타나 한신이 돌아왔다며 며칠 숨어있겠다고 호들갑떨다 마침 밥 먹고 나온 한신에게 딱 걸려버렸다. 하지만 한신은 그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준다.
개중에는 유방이 장량의 충고에 따라 자신이 제일 싫어한다는 옹치를 개국공신에다 앉힌 것을 따라했다는 설도 있을 정도.
여하간에 용저 등에게 조롱받았던 답이 안보였던 막장 시절의 생활이, 왕이 되고 난 후의 한신에게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인고의 과정이었던 점만은 알 수가 있다.
9.2. 반란혐의와 회음후
그렇게 무탈하게 지내던 BC 201년 음력 12월 황제 유방에게 한신이 모반을 꾸민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신하들이 한신을 토벌해야 한다고 하자, 유방은 진평의 계책에 따라 남방의 운몽택(雲夢澤)으로 놀이를 나간다고 하면서 제후들을 모두 진현으로 모이게 했다. 물론 이는 한신을 사로잡기 위한 계책이었다.
한신 열전에 따르면 처음에 한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게 되었는데, 당초에는 놀라 아예 한번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와 전쟁을 벌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괴철의 제안에 우물쭈물했던 그때처럼 머뭇거리다가 직접 나서서 억울함을 밝히면 유방이 용서해 줄거라고 믿고 그만두어버렸다. 그때, 마침 한신에게는 과거 항우의 부하였던 종리말(鍾離昧)이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방은 종리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어 그를 사로잡으려고 하던 처지였다. 종리말이 초나라 지역에 숨어있다는 사실은 작년 겨울쯤에 밝혀져 있었고, 당연히 초왕인 한신에게 수색 명령이 내려와 있었는데 사실은 자기가 감춰놓고 이때까지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것.(...)
이에 누군가가 '종리말의 목을 가져다 바치면, 황제가 용서해줄 것'이라고 말하자 한신은 그 이야기를 종리말에게 꺼냈다. 그러자 종리말은 한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황제가 초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를 바치면 나도 죽지만, 곧 너도 죽을 것이다. 너 같은 자를 어찌 장자(長者)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목을 찔러서 자결해버렸다. 한신은 종리말의 목을 베어 바리바리 싸들고 유방을 만나러 갔는데, 당연히 유방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근흡(靳歙) 등은 한신을 사로잡아 수레에 태워버렸다. 한신은 이렇게 한탄하였다.
"과연 사람들이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좋은 사냥개가 삶기운다(狡兎死 走狗烹)라 한 것과 같구나!"
이에 대한 유방의 대답은 회음후 열전에서는 "고발이 있더라."고 겸연쩍은 듯 변명하는 뉘앙스라면 진승상세가에선 "네가 뭐가 억울하냐!"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낙양에 도착해서는 한신을 풀어주었다. 다만, 한신을 초왕이 아니라 회음후에 봉했고, 한신은 이번에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막대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초왕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한신의 옛 봉국은 회수를 경계로 둘로 쪼개고 동쪽을 형나라로 떼어내 유방의 사촌 형 유가를 왕으로 삼았다. 서쪽은 초나라로 남겨두어 유방의 동생 유교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이는 전긍이란 사람의 간언으로, 유방이 관중에 도읍하고 지금 한신을 사로잡은것은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하면서 이후로도 동서쪽의 진이라 할 수 있는 제나라 땅에선 유방의 친가족 외엔 누구도 왕이 될 수 없어야 한다고 말한 것에 유방이 따른 것이다. 참고로 유가는 이 탓에 나중에 영포한테 걸려서 죽는다.(...)
9.3. 다다익선
유방(劉邦)
그 이후로 한신은 유방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기고, 병을 칭하면서 조정의 조회나 행사에 전혀 참석하지 않으면서 방안에 틀어박혔다. 그러다보니 불만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내가 주발이나 관영 같은 놈들하고 동급이 되다니!"하고 불평했다. 어느날 번쾌의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번쾌는 후작으로 강등당한 한신과 동급이었지만, 연신 굽신거리며 한신에게 왕대우를 했다. 그러자 뭔가 꼬인 한신은 번쾌의 이런 행동도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하여, "살다 보니 번쾌 따위와 같은 항렬이 되었구나!"하고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날은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는지, 유방을 만나 각 장수들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도 있었다, 이때, 유방이 한신에게 "내가 어느 정도 숫자나 이끌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묻자, 한신은 "10만 정도."라고 대답했고, "그럼 니는?"이라는 유방의 질문에, 한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신(臣)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이에 표정이 썩은 유방이 그렇게 잘났으면서 왜 자신에게 사로잡혔는지 물어보자,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비록 군사를 많이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은 부족하시지만, 그 군사들을 잘 통솔할 수 있는 장군들을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폐하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는 하늘의 도움을 받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말은, 유방이 실제로 재주는 없는데 운이 좋았다는 식의 조롱일 수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한신을 몇 번이나 간단하게 요리해버리는 유방에 대한 한신의 솔직한 감정일 수도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한 해석이야 각자 알아서 해보자.
9.4. 성야소하 패야소하
성공도 소하 덕이요, 실패도 소하 탓이다
이렇게 불만이 쌓이는 와중에, 진희(秦豨)라는 인물이 거록군의 태수로 임명되는 일이 생겼다. 진희는 유방이 직접 "무척이나 믿음직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신임받던 인물. 그런데 한신은 진희를 따로 만나더니, 하늘을 우러러 보고 탄식하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 속내는 바로 반란에 관한 일이었다. 진희가 부임하는 거록에는 강병들이 많으니 진희가 반란을 하고, 한신 본인이 내부에서 흔들어버리면 일은 쉽다는 게 요지였다. 이에 진희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BC 197년 8월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9월 달에 진희를 진압하러 떠났지만, 한신은 병을 핑계로 같이 나서지 않았다.
한신은 몰래 진희와 연락을 계속하면서 조서를 가짜로 꾸미고 사람들을 움직일 계획을 세우고는, 먼저 여후부터 족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한신의 밑에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죄를 지어 한신이 가두어 놓았는데, 그 사람이 여후에게 도망쳐 이 모든 일을 고해버리고 말았다.
계책을 알았어도 한신의 이름이 워낙 대단하니 함부로 적대의사를 표방하고 잡으려고 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이때 여후가 계책을 물어본 사람이 바로 소하였다. 소하는 이미 진희가 패배했다고 거짓 정보를 꾸몄고, 한신에게 "축하하러 오는 게 몸보신에 좋을 것"이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이에 한신은 의심없이 궁으로 나왔다가, 여후가 준비해놓은 무사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결국 장락궁(長樂宮)에서 참형을 당하게 된 한신은, 일이 이렇게 된게 어이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내가 괴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참으로 원통하구나! 내가 한낱 아녀자에게 속임을 당해 죽게 되었으니, 이것은 분명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참수를 당하고, 그의 삼족도 멸해졌다.
한신의 모반은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소하가 관여한 사실은 분명하다. 한신은 소하의 추천으로 인해 한나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소하 때문에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송(宋)나라 사람 홍매(洪邁)는 자신의 저서인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천거했기 때문이요, 이제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소하의 꾀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항간에 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信之爲大將軍, 實蕭何所薦, 今其死也, 又出其謀. 故俚語有成也蕭何敗也蕭何之語)"라고 기록하였다.
9.5. 실제로 한신은 모반을 일으키고자 했는가?
일세 영웅의 최후라고 보기에는 뜬금없이 나타난 너무나 어이없는 죽음이라 이 한신의 반란 의도 자체에 대해 당시의 상황과 신빙성, 근거가 적고 설득력이 낮아 옛날부터 사기에 쓰여 있음에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한신에게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면 이미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았다. 특히나 제나라 정벌 후 제왕 시절에는 명성과 위세가 천하를 진동시켜 항우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군세나 세력이 커져서 유방과 항우를 합친 것보다 크거나 비슷할 정도였기에 괴철이 천하삼분을 제시하고 항우는 자신에게로 회유시키고자 하였으며 유방은 가왕을 요청하는 사신에게 화를 냈다가 장량의 조언에 가왕이 아닌 진짜 제왕으로 봉했다. 게다가 조나라 정벌 시절 때에도 일으키고자 하였으면 반란 자체는 충분히 가능했으며 제왕시절 때부터 해하 전투가 끝나고 난 후, 그리고 제왕에서 초왕으로 강등되었을 때에도 충분히 반란을 일으켜 성공시킬 기회는 수없이 많았으나 단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유방에게 당했다.
한신의 참수 이유는 '진희의 모반에 가담했다'라는 명분이었는데 당시 진희의 행적을 보면 한신과 한 번 만났다는 기록조차 엇갈리고 친분 등 다른 연계되는 부분이 전혀 없으며 진희가 한신을 거론한 적도 없고 내부동조임에도 불구하고 문서 같은 것 하나 없었다. 사기에서 진희와 내응했다는 부분을 보면 모순되는 부분과 이상한 점이 너무나도 많다. 사기에서 둘이 만났을 때 진희가 아닌 한신이 먼저 진희에게 모반을 부추겼다는 식으로 나와있으나 실제로 모반을 꾀한 주범은 진희였다. 그 또한 그를 따르는 행렬에 수많은 빈객들과 수레로 인해 주창에게 의심을 받다가 유방의 지시에 따라 조사했더니 실제로 수레와 빈객들의 불법적 내용이 들키면서 유방으로부터 의심을 받기 시작해 진희가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고 그 무렵부터 모반을 꾀해 실제로 왕황, 만구신등과 내통했다.
게다가 사기의 내용을 보면 진희가 밖에서 모반하고 한신이 내부에서 동조하겠다 했는데 내통을 했다면 당연히 연락 등을 했을 것이며 상황을 살펴보았을 텐데 실제 한신이 죽은 것이 진희가 군사를 일으킨 후인지 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군사에 있어서는 정점급인 그가 모반을 위해 진희를 믿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한거라면 진희의 회답을 기다리는 사이에 벌써 그렇게나 빨리 진압되었다는 거짓을 모를리가 없다. 게다가 정말 가담했다면 최소한 도망의 시도라도 하는 것이 정상인데 한신은 그냥 소하를 따라가기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한신이 배신하려고 했다면 여후와 태자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군병력을 일으켜서 나라를 세우거나 한고제를 암살했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한고제의 신상을 위협하거나, 가신을 제거하거나, 병력을 일으킨 것이 아닌 여후와 태자에 대한 습격이 한신의 역모의 근거가 되었다. 허나 이 방법은 한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용병술에 있어서 극에 달했던 한신이 한나라를 배신하려고 하는데 고작 여후와 태자를 죽이는 방법으로 역모를 시작할리 없이 병력을 일으켜 주요 거점을 공격/장악 하는 게 제대로 된 방법이다. 따라서 한고제가 사망하자 여후가 한나라 개국공신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모습에 비추어 한신이 모반을 꿈꾼 것이 아니라 배신의 근거조차 여후가 조작하여 여씨천하의 최대 방해물인 한신을 숙청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애초에 확실한 기회가 있을 때에도 시도하지 않았고 한신이 불만과 원망으로 모반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치에 대해서는 까막눈이었으나 군사에 대해서는 통달한 그인데 갑자기 미치지 않고서야 진희가 유방을 상대로 성공할 리가 만무한 무모한 계획을 짜 제안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힘들다. 게다가 당시 상황으로는 유방은 반란을 제압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모두 진압하였으며 여후는 권력을 잡기 위해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짜고 실제로 옮기고 있었다. 특히나 여후는 모략으로 많은 이들을 죽였는데 그 대표적인게 팽월이다. 물론 팽월은 한신보다 후에 죽었지만. 그래서 회음후로 강등되어 실권조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두려운 존재였기에 여후가 가장 먼저 한신을 죽이기 위해 모략으로 진희의 반란에 연루시켰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한신이 정말로 모반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한신이 미쳐서 진희에게 가담했고, 경비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정보가 여후에게 흘러들어갔으며, 거짓 조서를 내려 각 관아의 죄인들과 관노를 풀어주고서는 순순하게 소하를 따라가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갔다는 소리가 된다.
실제로 당시 유방은 진희를 토벌하러 갔으며 후에 돌아올 때 한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실상 유방 또한 한신이 많은 심기를 건드리긴 했지만 엄청난 공적과 오래동안 함께 해온 것에 대한 것 때문에 어떤 정이 생긴 것인지 항상 유방 자신은 한신으로부터 군권을 박탈하고 강등을 시킬지언정 직접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유방 자신 또한 한신이 위협은 되지만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며, 그렇기에 회음후로 강등시켜놓고 계속 구금시켜 놓은 것이다. 게다가 한신은 모반을 꾀했다고 그냥 참수만 했는데 실제 모반은 일으키지 않고 고향으로나 되돌아가게 해달라는 팽월은 죽일 뿐만 아니라 젓갈까지 담그어 제후들에게 보내었으니... 그리고 오히려 사실상 그 시기에 한신으로부터 가장 위험을 느낀 것은 유방이 아닌 여후였다. 유방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은 짐작하는 내용이고 유방이 죽고 나면 자신이 권력을 잡고자 하는데 거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게 한신이니... 여튼 한신의 최후는 유방이 아닌 여후가 계략을 짜서 소하를 이용해 한신을 죽인 셈.
소하가 여후 등에 의해 죽음을 면했던 근거도 "애초에 배신하려면 한참 전에 했을 것이다"라는 말로 의혹을 면하는데, 한신 또한 배신하려면 가왕이 되었을 시절이나 초왕시절에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한신이 한나라 영토의 2/3을 정벌하고 항우와 유방의 군력을 합친 것보다 많거나 또는 비슷했기 때문이다. 소하가 위 발언으로 숙청을 면했는데, 한신이 위에 해당하지 않았던 것도 한신의 배신이 진실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