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91
7월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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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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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ajH3jNVOJA (남창현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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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은 언제나 충실하시지만 인간은 언제나 불충실합니다!>
요즘 우리가 첫 번째 독서로 봉독하고 있는 미카 예언서의 등장 인물인 미카 예언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서쪽 40킬로 지점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 모레셋에서 태어났습니다.
미카는 시골 출신 농부로 살다가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당시 농부들이 겪고 있던 고초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는 농부와 목축업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지주들과 귀족층을 신랄하게 고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카는 예언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때로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소개합니다.
“나는 슬퍼하고 울부짖으며 맨발에 알몸으로 걸어다니고 승냥이처럼 슬피 울며 타조처럼 애처롭게 울리라.”(미카서 1장 8절)
그도 그럴 것이 주님께서 미카 예언자에게 부여한 사명은 바로 타락한 예루살렘의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탐욕스런 부자들의 횡포를 단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네 인간 역사는 대체로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것 같습니다. 미카 예언자의 고발 내용은 어찌 그리도 오늘 우리의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충실하시지만 인간은 언제나 불충실합니다. 미카 예언자 시대 당시 경신례는 호화롭게 거행되었지만, 진정한 마음의 회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목자들은 착한 목자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고, 자기 호주머니만 생각하는 삯꾼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부자들은 주님 두려운 줄 모르고 가난한 백성들을 벼랑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이런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안고 자신의 예언직을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재물이나 권력에 더 방점을 찍는 그릇된 안전 의식, 가식과 허위로 가득한 전례, 그분께는 눈엣가시 같은 우상숭배 행위는 주님 주도 아래 모조리 폐기될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죄와 반역과 불충실의 대명사요 화신인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철저하게도 파괴될 것임을 외쳤습니다.
틈만 나면 멸망을 선포하고, 숨겨둔 죄를 고발하는 미카 예언자를 향한 기득권 세력의 눈초리는 날카로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대한 집단적 악과 맞서 혈혈단신 투쟁하는 미카 예언자의 모습이 참으로 외로워 보입니다.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 쪽에 섰지만, 그들 앞에서도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사제들과 판관들, 권력자들로부터 당한 무시와 냉대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당시 함께 활동하는 다른 예언자들 사이에서도 철저하게 왕따였습니다.
그 끔찍하고 고통스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카 예언자는 최종적으로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에프라타의 보잘 것 없는 부족으로부터 시작될 새로운 부흥이 준비되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서 5장 1절)
다윗의 후손, 메시아 임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서 탄생하실 것이며, 철저하게 파괴될 예루살렘은 다시 한번 당당히 재건되어 온 세상의 중심지가 될 것을 예언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달려와 그분을 뵙게 될 것이며, 끝까지 주님께 충실했던 소수의 남은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미카 예언서를 읽고 묵상하다 보니 하나의 사이클이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악행에 대한 하느님의 단죄와 심판, 그리고 회복과 구원!
주님께서는 공정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비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악인의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반드시 따지시지만, 결국 인간이 회개하고 당신께로 돌아와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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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lvhcrrt4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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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누구에게도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가르침을 주실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머니께서 기분 나쁘실 수도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중략)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사실 어머니는 기분 나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만큼 아버지 뜻을 따르신 분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만이 우리가 세상 모든 것의 휘둘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끔은 부모님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자녀들이 부모가 반대하는데 결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찾아오곤 합니다. 저는 먼저 둘의 만남이 ‘하느님의 뜻’인지 찾으라고 합니다. 심지어 부모의 뜻도 하느님 뜻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님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진리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면 부모님이 반대하더라도 결혼하라고 합니다. 저도 신학교 들어오는 것을 부모님과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반대하셨지만 저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우선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은 나를 부모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심리적으로 지배하려 한다면 먼저 나에게 고마움을 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고마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외롭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를 때 항상 나를 이끌어준 것이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기 연민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빠지면 자아의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청년 버핏’으로 불렸던 박철상 씨가 있습니다. 그는 대학생 때 주식으로 400억을 벌었다며 20억 가까이 기부하여 TV에도 출연하는 등 유명세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수십억 원대의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처음 주식으로 몇억을 벌어서 자선활동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명해졌는데 주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돈을 꾸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걸려든 사람들도 자신이 이 사람의 좋은 이미지에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믿어서 가족의 모든 돈을 끌어모아 13억 9천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고마워하면 그 사람에게 가스라이팅 당합니다. 자아에게 고마워해도 결국엔 지배당합니다. 내가 감사하는 대상에게 지배 당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뜻에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길러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현재를 즐길 수 있습니다. 미국 테니스 선수 ‘잭 삭’은 호프만컵 테니스 대회에서 호주의 레이튼 휴이트 선수와 국가별 경기하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호주의 경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호주 선수의 서브가 아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잭 삭은 비디오 판독을 신청했습니다. 서브를 한 사람은 하지 않고 넘어가는데 오히려 아웃 된 것을 기뻐해야 하는 사람이 비디오 판독을 신청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미국의 모든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비디오 판독을 해보니 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승리보다는 페어플레이에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중압감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족의 모든 애정의 중압감으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 뜻에 가스라이팅 당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에는 지배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피조물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다는 창조자의 뜻에 지배당하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피조물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셨습니다.
참 자유는 진리에 있습니다. 하느님 뜻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뜻에 지배당하려면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가스라이팅의 힘은 감사에서 옵니다. 감사하는 것에 지배당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부모에게 감사하고 싶다면 하느님께서 그런 부모를 주셨음에 감사합시다. 그러면 부모에서 벗어날 수 있고 효도도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인데 하느님의 뜻이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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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46-50: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고 반문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49-50절)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되면 누구나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인간적인 혈연관계의 부모와 자녀 간에, 형제간의 정과 예의를 무시하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본분에 대한 완성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가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 즉 그리스도의 형제자매 모습이어야 한다는 진리를 밝혀주시는 것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고 성화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죄를 많이 짓고 부족한 우리를 당신의 형제자매로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칭찬하시는 말씀이 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신앙으로 고백하였기에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온 당신의 어머니를 칭찬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이제는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형제도 될 수 있고, 자매도 된다. 그 어머니는 어떻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님을 낳아줄 수 있을 때, 복음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낳아줄 수 있을 때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그 순간 주님의 어머니가 된다. 이제부터 나 자신의 삶이 마리아가 될 때, 작은 마리아로서 진정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작은 마리아의 삶을 통하여 참다운 신앙인으로 사는 삶을 이루게 된다. 이 세상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듯이, 왜 성모님께서 계실 수 있도록 하지 않으신 이유를 우리를 통하여 마리아를 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어떤 분은 말씀하셨다. 마리아가 되어야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전해줄 수 있음을 잘 알고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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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7-50)
1)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 즉 ‘어떻게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내 가족이냐?”라는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내 가족이 될 수 있느냐?”, 또는 “내 가족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2ㄱ.3)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자녀’로서(‘가족’으로서) 그 집에서 살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은 곧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 말씀을 “예수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예수님의 가족인 것은 아니다.”라고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12장에 있는 말씀과 7장에 있는 말씀은 표현만 조금 다를 뿐이고 ‘같은 말씀’입니다.) 이 두 말씀을 합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예수님의 가족이 되어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예수님의 가족이 되어서 함께 사는 일은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9)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성사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예수님의 가족이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함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그러나 안 믿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거나 거부합니다. 모르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깨닫게 되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살게 될 것입니다. 거부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회개’하고 신앙을 받아들이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4)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자동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답게 살아야 그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먼 고장’으로 떠난 일은(루카 15,13) 스스로 아들 자격을 버린 일이고, 또 가족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일입니다. 그가 떠나 있는 동안 아버지에게 그는 ‘죽은 아들’이었습니다.(루카 15,24) ‘죽은 아들’은 아들이었던 것은 맞지만 함께 살 수 없는 아들, 즉 아들이 아닌 것과 같은 사람입니다. <신앙인이라도 ‘신앙이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있어야 합니다.>
큰아들의 경우에는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면서 살았습니다.(루카 15,29) 이 말은 스스로 아들 지위를 버리고 노예가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사랑 없는 이기심’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노예로 사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보상만 바라고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루카 15,29) 그래서 가족과 함께 살아도 기쁨 없이 살고, 가족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살고 있지만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열심히 일한 것은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것이 아닙니다. 큰아들은 동생이 회개했음을 인정하지 않았고, 동생을 받아 준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있고, 그래서 가족의 잔치를 함께 하지 않고 집의 ‘밖에’ 있습니다.(루카 15,28) ‘밖에’ 있는 그의 모습은, 스스로 아들 지위를 버리고, 가족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모습입니다. (큰아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면,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아니라 ‘아들이면서도 아들이 되기를 거부하는 아들의 비유’입니다.)
5)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7-18) 하느님 나라를(아버지의 집을) 향해서 걸어가다 보면, 편안하고 쉬운 길도 만나고, 힘들고 어려운 길도 만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십자가의 길만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편안하고 쉬운 길만 찾고, 힘들고 어려운 길은 피한다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없습니다. 길이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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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어릴 때 슈바이처 박사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박사는 멀리 아프리카로 가서 척박한 환경에 있는 주민들과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박사를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의사였던 그는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박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나의 형제요 어머니다.’라는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도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들을 형제요 자매로 맞아들였습니다. 꽃동네의 수도자와 성직자들은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와 오웅진 신부님은 ‘여기 있는 가장 헐벗고, 가난하고, 굶주리고, 아프고, 갇힌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세상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중심은 화려하고 깨끗한 선진국도 아닙니다. 세상의 중심은 권력의 핵심이 있는 백악관도 아닙니다. 세상의 중심은 부유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사는 부자 동네도 아닙니다. 세상의 중심은 지금 내가 있는 곳입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걸’로 말을 마치는 사람은 늘 후회하거나, 불평하게 된다고 합니다. ‘자지 말고 공부할 걸, 화내지 말고 참을 걸, 교통신호를 지킬 걸,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걸’ 이렇게 늘 ‘걸’을 입에 달고 살면 삶의 그림자만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루를 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반면에 ‘다’로 말을 마치는 사람은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잘했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고맙다는 말도 자주 합니다. 그러면 기분이 나쁘다가도, 속이 상하다가도 마음이 편안해지곤 합니다. 나뭇잎은 부는 바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는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태어났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갈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자신을 맡기듯이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한결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도 결국은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우리 사회는 분열과 대립이 있습니다. 소통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타협과 존중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역, 이념, 세대, 빈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고, 옳다 하여도 나의 편이 아니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예도 있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는 일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소통과 대화를 위한 원칙과 상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세대, 이념, 빈부’의 잣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원칙과 상식이라고 말을 하십니다.
지금은 죽고 못 살 것 같지만 그것도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두운 우주에 아주 작은 별인 지구에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형제와 자매가 되면 좋겠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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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머니’와 ‘형제’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오는데도 매우 차갑게 느껴집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대하셨던 분께서 가족들에게는 참으로 냉정히 대하십니다. 가족 관계를 부정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는 의도였을까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을 핑계로 가족을 뒷전으로 미루는 태도를 합리화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새로운 가족을 초대하십니다. 따라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예수님의 반문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제자들을 첫 번째 가족으로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새로운 가족은 ‘혈연과 혼인’이 아닌 ‘아버지의 뜻’으로 모인 이들입니다.
교회 생활이 갈수록 개인주의화 되고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라는 말도 점차 듣기 어려워지니, 사목자들은 친목 단체를 통하여 관계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새로운 예수님의 가족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울러 피조물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고 이민자들을 환대하는 이들,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이가 예수님의 가족이요 우리의 가족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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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가 되고 나서 새벽 운동으로 ‘수영’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당 근처에 수영장이 있어서 걸어서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워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수영장에 등록하지 못했습니다. 수영을 배우지 못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새벽 미사 끝나고 가야 하는 데 피곤할 것이라는 생각, 수영 못 한다고 수영 강사에게 핀잔 들을 것 같다는 생각, 혹시 성당 교우분을 만나서 서로 민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서른 넘어서 배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 등등…. 고개를 저으며 수영 배우기를 포기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해에 등록했습니다. 또 걱정이 밀려들었지만, 그냥 먼저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걱정의 생각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수영을 통해 정신이 번쩍 들어서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었고, 수영 강사는 제게 잘한다며 칭찬만 해주었습니다. 성당 교우들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수경과 수영 모자를 쓴 상태에서는 누구도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또 할아버지, 할머니도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제일 젊었습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다 보면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어도 해보는 용기가 할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이런 사람만이 불가능은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바쁘다는 이유가 제일 많지만, 그에 못지않은 이유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도 많이 짓고, 기도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열심히 할 자신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과연 자격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가족이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그들을 먼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시는 바쁜 와중에서도 이 소식을 전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어머니와 형제들이 서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을 위한 일 외에는 어떤 것도 중요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족이라서 저절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만, 특별한 자격을 받은 이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가능의 이유를 찾으며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그 주인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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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미카 예언자는 책의 마지막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합니다.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카’라는 이름의 뜻인 이 표현은 하느님의 업적과 그분의 위대하심을 잘 나타냅니다. 대천사 미카엘도 같은 뜻의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실하시며 그들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 전능하시면서도 자애가 가득하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이런 하느님의 업적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 안에서 지속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혈통이 중심이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연결됩니다. 그 뜻을 따르고 실행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이자 새로운 가족입니다. 그들은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마태 7,21 참조), 삶을 통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정체성입니다.
새로운 관계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은, 나약하지만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런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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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동원 요셉 신부님]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님과 가족이 된다 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과 상관없다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아버지의 뜻이 모든 것에 우선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고. 하늘 아버지의 뜻은 이렇듯 모든 것에 앞서는 절대적인 목적이고 최상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기도한다면서도 우기곤 합니다.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도 이것을 원하시지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강요합니다. 너무 자주 하느님이 내게 종속된 분이시듯 그렇게 기도합니다.
포콜라레의 금언은 나의 기도가 온전해지려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 이것입니까? 저도 그것을 원해요.’ 내가 하느님께 순명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하여 분별없는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은혜로운 당신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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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참가족>
-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공동체 -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 깊고 풍부합니다. 공동체 일치의 원리, 다양성의 일치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가정,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공동체,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은 예수님 안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그 “삶의 중심”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다양성의 일치를 위해 네 요소가 중요합니다.
“1.삶의 중심,
2.삶의 의미,
3.삶의 목표,
4.삶의 방향” 넷입니다.
바로 믿는 이들이 진정한 의미의 다양성의 일치를 이뤄 살 수 있는 것은 이 네 요소가 분명할 때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파스카의 예수님이 네 요소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삶이 혼란하고 복잡한 것은 이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향이 실종失踪됐기 때문입니다.
참 좋은 책을 본 소감을 수도형제와 나눴습니다. 책에 나오는 분들이 참 진지하고 의식이 있고 생각이 있는 분들인데 뭔가 결정적인 하나가 빠진 듯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중심에 있는 정답을 찾지 못하고 웬지 모르게 중심 주변만 뱅뱅도는 느낌입니다. 중심에 있는 샘터를 발견하여 생수를 마시면 근원적 목마름은 일거에 해결될 터인데 말입니다. 삶의 중심이신 영원한 안식처 파스카 예수님을!”
또 병은 없는데 늘 온몸이 아프다는 어느 수도형제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뚜렷한 병 없이 온몸이 아픈 것은 영혼이 중심을 잃었기에 온몸이, 온육신이 반란叛亂을 일으킨 결과라 봅니다.”
“삶의 방향이 사라져서 오는 무기력증이라고 심리학에서 말하더군요.”
참으로 영육의 온전한 건강을 위해 궁극의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되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하느님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이는 제 수도공동체 체험을 통해서 늘 깨닫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며칠전 써놓은 ‘수도자修道者의 성소聖召’라는 고백의 글도 생각납니다.
“참 좋다
참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연인戀人의 모습
부부夫婦의 모습
그러나
추호秋毫의 부러움은 없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일 거다
결혼結婚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이래서
수도자修道者의 성소聖召인가 보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참 다양한 수도형제들입니다. 일치를 이뤄 살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는, 다 다른 사람들입니다.
수도복은 똑같지만 얼굴, 성격, 취향은 물론 모두가 다릅니다.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아침 식사후 자유시간의 모습을 봐도 다양함이 재미있습니다.
누구는 산책하고 있고,
누구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고,
누구는 쉬고 있고,
누구는 일하고 있고 참 다양합니다.
그래도 다 하느님, 예수님 중심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기에 다양성의 일치에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바람이 없는 곳이 지옥이라 합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바람까지 없으면 숨막힐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분위기를 상쾌하게 만듭니다. 순수한 우리 말 ‘바람’과 ‘희망’이 일치됨이 참 신기했습니다. 삶의 중심인 살아 계신 주님으로 부터의 바람이, 희망이 공동체를 시원한, 상쾌한 천국 공동체로 만들어 줍니다. 이런 바람의 진원지는 바로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 전례기도입니다. 참으로 중심인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은 공동체에 시원한 주님의 바람, 주님의 희망이 됩니다.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수도공동체를 이뤄 하느님의 가정을 이뤄 살아가는 모습에서 저는 공동체의 신비에 늘 감격하곤 합니다. 정말 형제들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 같다는 생각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물보다 진한게 피이며 피보다 진하게 하느님 중심의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혈연血緣 공동체보다 무궁한 깊이의 신연神緣 공동체입니다.
이런저런 공동체에 관한 묵상후 오늘 복음을 살펴 봅니다. 예수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제자가 밖에서 예수님 가족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을 때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결정적 답을 줍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신 다음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참가족의 정체가, 하느님 가정의 정체가 환히 드러납니다. 삶의 중심인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들이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좁게는 수도공동체, 교회공동체일 수 있고, 넓게는 세상 어디에 살든 인종에, 국적에, 종교에 상관 없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모든 진리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가정에,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한가정을 이루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어 사는 교회의 사람들에게 기도는 필수입니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중심이신 주님과의 소통에 주님과는 물론, 형제들과의 날로 깊어가는 신뢰와 사랑의 우정 관계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미카서의 예루살렘의 기도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로써 미카서는 끝납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찬미가에 이어 용서와 자애를 청하는 참 아름답고 깊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고백한후 바치는 간절한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저희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가 바쳐도 좋을 기도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날마다 함께 바치는 공동 미사전례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공동체는 물론, 하느님의 가정에 속한 세상 모든 이들과 일치를 이뤄 주시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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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가족>
마태오 12,46-50 (예수님의 참가족)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참가족>
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당신의 사람이
되어 드릴게요
당신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나의 사람이
되어 주세요
하느님과 함께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느님께서
참가족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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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형제와 자매를 얻다>
우리는 부모와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 혈연관계를 통하여 형제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자매를, 어머니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자체이신 분과 하나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4-15)
그리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 3,26)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폐 5,8)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 5,1)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2,11-13)
하느님께 향한 믿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부모 형제의 관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남자 분들이 가끔 “아내가 열심히 해서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반 천당은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주님과 맺은 관계와 내가 맺는 관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아내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묵주반지를 끼고 신자라고 폼냅니다. 그것도 금으로 만들고, 때로는 보석을 박아 자랑합니다. 자동차 안에는 십자가나 묵주를 걸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달고 다니고 간직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면 부적이나 다름없죠.
스승과 제자, 스승과 나의 관계는 어떤 물질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혈연이나 가정, 민족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가족을 미리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은 이미 한 가족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실이 하나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는 차원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사는 가운데(갈라2,20) 형제자매, 어머니를 많이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언합니다. “함께 사는 것이 어렵더라도 형제애 없이 복음화 사명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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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형제들이냐?"(마태12,4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과 만나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어떤 이가 예수님께 이런 사실을 알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쓴 소리로 들려오기도 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관계를 혈연관계를 훨씬 뛰어넘는 관계로 확장해 주십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어머니요 형제요 누이가 되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오늘 다시 태어난 이들이 모두,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깊이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혈연관계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나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내 어머니요 형제요 누이들이 주변에 많다는 사실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마음 안에서 보면 그들에게 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먼저 서로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이 뜻을 실행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이들이 바로 나의 어머니요 형제요 누이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합시다!
"저에게도 어머니요 형제요 누이들이 되어 주십시오."
소박한 저의 복음묵상글을 받아보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려고 애쓰고 있는 여러분들은 저의 어머니요 형제요 누이들입니다. 저는 그런 여러분들을 늘 기도 중에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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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n8vytgu5u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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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마태 12, 49)
마음을 낮추어야
함께 사는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어머니와 형제는
마음의 영역이며
실천의 영역이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기에
우리자신이
있을 수 있다.
생활 속의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다.
모든 만남이
이와같이
은총이다.
믿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하느님 중심적인
관계가 참으로
건강한
관계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건강하지 않는
관계를 올바른
실천을 통하여
새롭게 하는
것이다.
혈연중심의
가족공동체는
서로를 가슴으로
보듬어 주는
수도공동체로
이어지듯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공동체는
우리들 관계처럼
편협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소외된 이들과
함께 지내셨다.
나눔의 실천
사랑의 봉사가
우리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게한다.
제자들의
어머니
성모님과
인도 캘거타의
마더 데레사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실천은
모든 구분과
모든 경계를
뛰어넘으며
우리모두를
주님의 형제가
되게한다.
주님의 어머니
주님의 형제가
되는 길은
진심을 다하여
주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실천이 없는 가족
실천이 없는 관계는
죽어있는 삶같이
차고 차다.
실천을 향해
뜻을 향해
열려있어야 할
오늘이다.
같이 할 수
있는 실천이
우리에게
가장 큰
은총이다.
실천의 부활이
어머니와 형제
공동체의 참된
부활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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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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