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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0
#요한계시록 #Revelation 19:1
#천년왕국
제 19 장
어린 羊의 婚姻 잔치
1 이 일 後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許多한 무리의 큰 音聲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救援과 榮光과 能力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After this I heard what sounded like the roar of a great multitude in heaven shouting: "Hallelujah! Salvation and glory and power belong to our God,
Post hæc audivi quasi vocem turbarum multarum in cælo dicentium : Alleluja : salus, et gloria, et virtus Deo nostro est :
Μετὰ ταῦτα ἤκουσα ὡς φωνὴν μεγάλην ὄχλου πολλοῦ ἐν τῷ οὐρανῷ λεγόντων Ἁλληλουϊά· ἡ σωτηρία καὶ ἡ δόξ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τοῦ Θεοῦ ἡμῶν,
이 일 후는 주님께서 강림하시고 이 땅의 성도들이 죽음에서 부활하고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운 다음에 일곱 대접 재앙들이 이 땅에 부어지고 큰 음녀 바벨론이 권세를 받았던 짐승에게서 버림받아 살이 뜯겨 먹히고 불사름을 당하여 완전히 멸망을 당해 땅의 임금들과 상인들의 애곡이 끝난 후를 말한다. 이 기간은 인류 역사상의 모든 성도들이 하늘의 유리바닷가에 서서 주님께로부터 거문고를 하나씩 받아 유리바다를 통해 일곱 대접 재앙에 불타는 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찬양하는데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천년왕국의 완전한 성취이다. 하늘의 허다한 무리는 천사들이라기보다는 완전히 영화로워진 모든 성도들인 것 같다. 하늘의 성도들은 유리바다를 통해서 이 땅의 심판이 완전히 이뤄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과 영광과 능력이 어떠하신지를 찬양한다. 하늘의 성도들의 찬양에는 군더더기나 미사여구나 가식이나 과장 같은 것이 없고 단도직입적이고 직관적이며 사실적이다. 반면에 오늘날 교회 음악과 노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보다는 자기연민에 치중되어있고 온갖 화려한 기교의 곡조와 미사여구의 가사로 점철되어있다.
#20210810
#신명기 #Deuteronomy 28:45-48
4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
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
여호와께서 범죄하는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전쟁과 침략과 기근과 역병과 독종 같은 재앙들은 백성 한 명 한 명 개인 차원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규모의 재앙이기 때문에 범죄 할 때마다 수시로 당할만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의 분량이 여호와 보시기에 충분히 찼다고 여겨질 때마다 한 번 씩 호되게 당하게 되는 것들이었다. 달리 말하면 여호와께서는 재앙으로 징벌하시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참으시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돌이키기를 원하셔서 한동안 기다려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범죄하는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저주와 재앙의 내용이 매우 가혹해 보일지라도 이는 하나님께서 무자비하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분의 오래 참으심을 드러내며 징벌이 혹독한만큼 이스라엘의 죄악이 얼마나 극악무도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민족적 대규모 재앙의 경우 사람들은 대체로 그 원인을 국가 간 외교 문제나 자연 환경 문제 등으로 찾으려고 하고 해결책도 그렇게 모색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즉 이러한 재앙은 여호와께서 분명히 죄악에 대한 징벌이라는 표징과 훈계로 주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가 워낙에 크다보니까 백성들이 도리어 이를 자기 자신 또는 교회의 문제 때문이라고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기를 돌아보지는 않고 이를 대응하고 처리해야 하는 국가 지도자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원망하기가 일쑤이다. 다윗이 다스리던 때에 극심한 흉년이 3년 동안이나 이어졌을 때에도 다윗은 처음에는 이것이 단순히 자연적으로 으레 오는 그런 흉년인줄로만 알았다가 3년 째에 가서야 그것이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청산하지 않은 죄, 그것도 다윗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고 선대 사울 왕이 지은 죄 때문이란 것을 알고서 조치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교회는 이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극악한 범죄를 더이상 두고 보시지 못하셔서 내리시는 표징과 훈계로서의 징벌의 재앙임을 알고 회개하기에 힘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부 자기들 눈의 들보는 보지 않은채 하루빨리 코로나가 사라지기만을 간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도 긍휼을 베푸셔서 역병을 내리는 천사에게 그만하면 됐다고 하신 것처럼 완화해주실 수는 있으시겠지만 교회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일곱배나 더 강력한 바이러스를 보내실 수도 있는 것이다.
47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48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재앙의 근본 원인과 이유는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여호와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가나안이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을 받아 풍성한 소산물을 거두어 누리면서도 그 받은 많은 것들 중에서 여호와께 드려야 할 그 작은 것들 조차도 내어놓지 않고 내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감사하는 마음과 자원하는 심령이 아니라 이 제사 규례가 번폐스럽다 하면서 억지로 내놓으며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줘도 안가질 그런 최악의 것들로 바치는데다가 여호와께서 반드시 의무적으로 돌보라고 명하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과 고아와 과부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할 것을 베풀지 않는 것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여호와께서는 탐욕적인 이스라엘에게 무자비하고 매우 강력한 적군을 보내셔서 그들의 모든 풍족한 소유를 빼앗아 거렁뱅이처럼 극도로 궁핍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고아와 과부들을 압제한 것처럼 적군이 그들을 극심히 압제하게 하신다.
역사적으로도 큰 전쟁과 침략과 전염병과 기근 등의 재앙은 표면적으로나 형식적으로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던 나라와 국가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발생해왔다. 그런 나라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로부터 처음 얼마동안에는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번성하듯이 드라마틱한 번영을 구가하게 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흑사병이나 세계 대전 등의 참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그래도 끔찍한 일제 시대와 6.25 전쟁의 참화를 겪었어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돌보심으로 전세계에서 주목할만큼 괄목할만한 경제성장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범죄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로서 우리에게 풍성히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하고 교회와 어려운 이들을 위해 넉넉히 베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렇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나누어 베풀지도 않는다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돌보심의 장막을 거두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북한이나 일본이나 중국 등으로부터 언제든지 군사적 위협을 받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어 타국의 식민지 신세가 되거나 6.25 같은 전쟁이 한 번 더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20200810
#레위기 #Leviticus 18:24-30
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26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나 내 규례와 내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라도 행하지 말라
27 너희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29 이 가증한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30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가 들어가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따름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금지하신 온갖 근친상간과 동성애와 수간 등의 가증한 간음과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우상숭배는 당시애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아니, 오늘날에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몸으로 직접 저지르는 간음 뿐만 아니라 음욕을 품는 생각 마저도 간음을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적용 범위가 더욱 광범위해졌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오늘날에는 복음과 죄사함의 은혜로 이런 가증한 죄를 구약시대보다 가볍게 취급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단 하나만 어겨도 여호와께서 백성 중에서 끊으시고 멸하실 정도로 무겁게 다루셨지만 오늘날에는 그렇게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물론 원론적으로는 그 말이 맞다. 그러나 여전히 부패한 죄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주신 죄사함을 죄를 짓는데 합리화한다. 그래서 죄사함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며 그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죄를 지어도 되는 면죄부처럼 여긴다. 하지만 이런 파렴치한 자기합리화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망령되게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겉으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불법적인 음욕을 버리지 못하고 점점 더 추구하게 되어서 결국에는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반면에 참된 신자는 우리가 지금 죄에 대해 즉각적인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은 그 죄가 가벼워져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은 것임을 알고 아울러 율법을 주셨던 구약 시대였다면 마땅히 바로 죽어야 할 무시무시한 죄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행여나 이런 죄를 짓게 되었을 때는 거의 자기가 구원에서 떨어질 것이라는 절망에 사로잡히게 되어 몸부림을 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가 죄를 지어도 너무나 손쉽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시는 방식인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몸으로 죄를 지은 소돔과 고모라가 받은 심판보다 주님과 복음을 저버린 자들이 받을 심판이 더욱 무거울 것이라고 하셨다. 가라지 신자들은 용서받기 쉬운만큼 죄를 가볍게 여기나 알곡 신자들은 용서받기 쉬운만큼 죄를 무겁게 여긴다. 여호와께서 이런 죄를 지은 족속들과 백성들을 그 땅에서 토해내셨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가라지 신자들을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토하여 내치실 것이다.
#레위기 #Leviticus 19:1-2
너희는 거룩하라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여호와께서 얼마나 어떻게 거룩하신지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에게 당신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백성이 여호와의 거룩함을 따라 거룩할 수 있는 방법은 여호와의 명령과 율법과 규례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외적으로만 지키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시고 마음으로부터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자기들의 마음으로 깊게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써 거룩해야 했다. 그 여호와께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라 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양이신 성령께서 보혜사로 내주하시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따라 세상과 구별된 가치관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거룩함의 정도는 그리스도인마다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 거룩함은 각자의 수준에 맞춰서 반드시 성장하고 성숙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거룩함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거룩함이 자라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반드시 주변과 이웃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성령의 열매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민폐를 끼치는 교회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악령의 열매를 맺는 거짓 교회이고 그런 신자는 거짓 신자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과 목사들과 신학자들과 교인들은 이처럼 성령이 아니라 악령에 사로잡혀 있다.
#20190810
#매일성경 #에스겔 20:33-44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 줄 알고, 권리가 계속 되면 호구인 줄 아는 것은 인간의 죄악 된 본성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 것은 오직 그분의 값없는 은혜 덕분인데도 백성들은 그 은혜의 호의가 진짜로 값없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그런 백성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한동안 목숨보다 소중한 배우자나 자녀와 같이 참으시지만, 끝까지 백성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제서야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공의를 시행하신다. 하나님의 호의가 무한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무한한 진노로, 그러나 한치도 어긋남 없는 공의로움으로 시행된다.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풀던 이가 어느 순간 돌아서게 되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차갑고 매섭게 배척하는 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써 흩어진 백성들을 끌어모으신다. 역사적으로는 예루살렘 멸망 후 70년이 지나고 나서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명에 의해 포로 귀환이 이루어진다. 이와 더불어 왕궁 신하이던 느헤미야와 학사 에스라가 앞장서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여 다시 하나님 앞에 모이게 된다. 비록 외형과 규모는 왕국 시대의 그것보다는 초라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초라한 성전을 통해 포로 된 백성들에게 더욱 큰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신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속사람은 더욱 새로워진다. 이는 포로 귀환 사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그분 스스로는 하나님의 완전한 성전이시나 육적으로는 포로 귀환 때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지어진 성전보다도 더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다. 예수님께서 사도로 부르신 자들 중에는 에스라 같은 학사도, 느헤미야 같은 고관도 없었다. 단지 가난하거나 죄인 취급 받는 이들 중에서 고르신 것이다. 나중에 따로 부르신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 철저하고 박식했으나 그는 원래 예수님을 핍박하던 괴수 중의 괴수였다. 그렇게 비천하고 연약한 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당신의 참된 백성들만 부르시고 모으시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이고 육적인 백성들 또한 부르신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다른 온갖 잡족들도 있었던 것처럼, 외적으로 이스라엘의 혈통을 지닌 자들 또한 모으신다. 이는 교회에 참된 신자들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교인들도 모이는 것과 같다. 어떤 모임이건 간에 참된 신자들보다는 형식적인 자들이 더 많은 법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참된 신자만 모으시지 않고 형식적인 자들도 모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주님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여전히 이 땅이 죄악 중에 있어서 참된 신자들만으로는 교회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으로는 교회에 참된 신자들만이 있으면 더욱 경건하고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참된 신자들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신앙이 깊어갈수록 하늘의 것을 바라고 소망하느라 이 땅의 삶에 쉽게 소홀해 질 수 있다. 그렇게 참된 신자들이 죄성으로 인해 놓치는 실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형식적인 교인들의 봉사와 섬김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의 모든 봉사가 전부 형식적인 자들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점검해야 할 것은 교회에서의 나의 봉사가 과연 신앙의 선한 열매로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맹목적인 열심인 것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형식적인 교인들의 섬김은 하나님께는 선행으로 인정되지 않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도 교회를 유익하게 하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물을 드리다가 성령을 속인 죄로 죽었지만, 그 재물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불완전한 교회를 위해서 형식적인 교인들을 남겨두시더라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에는 그런 형식적인 교인들은 내어 쫓으시고 참된 신자들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이실 것이다. 불완전한 교회에는 양과 염소가, 알곡과 쭉정이가 함께 있더라도 마지막 때 완전한 교회에는 오로지 양과 알곡만 있게 될 것이다. 염소가 쫓겨나고 쭉정이가 뽑혀 영원한 불에 던져지더라도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 핑계를 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믿음이 없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세속적인 덕행은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리 이 땅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섬기며 희생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들로 인해서 교회가 성장하였더라도 이는 그들의 공로나 상급이 될 수 없다. 믿음으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죄이므로 그들의 섬김 또한 자기에게 죄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가지고 교회에 선을 이루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동안 범죄한 백성들에게 돌아올 것을 애끊는 마음으로 호소하시나, 그 정하신 기간이 지나면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매몰차게 돌아서신다. 그리고 그들이 죄를 짓건 말건 상관하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신다. 하나님의 예정을 왜곡하는 자들은 그들이 돌이키지 않고 범죄하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셔서 그런 것 아니냐고 하나님께 죄책을 돌리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감히 이해하지 못할 신묘막측한 방식으로 자신의 선하심을 유지하시며 죄인들에게 죄책을 담당하게 하신다. 그들이 비록 영원 전에 버림 받기로 정해졌다 하더라도 그들의 범죄와 멸망 당함은 오로지 그들 자신의 죄악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기준을 두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자들,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님이 없다 하여 패역을 행하는 자들, 하나님께서 그들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셔서 온갖 더러운 일을 즐겨 행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 죄로 인해서 멸망을 당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당시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독사의 자식, 마귀의 자식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여러 성읍들에 대해서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극심한 심판을 받을 것을 예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잡아죽인 유대 백성들의 죄를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으로 갚으셨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당신의 백성, 자녀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조리 구원하실 것이다. 이는 분명 신자들에게 보혜사로서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자 자신의 자발적 의지로 믿어 순종하는 것처럼 이끄신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입으로 구주이심을 고백했다면 좁고 협착하며 험한 십자가의 길을 인내하면서 즐거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 하면서 불평불만이 떠나지 않는 자, 믿는다 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자, 선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자들은 실상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참된 신자들의 이 땅에서의 성령의 열매는 어쩌면 초라해 보일 수 있다. 다른 이에게 드러나지 않고 아무 것도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가뭄에 콩나듯 하는 미약한 신자의 선행을 기억하시고 비교할 수 없는 상급으로 갚아주신다.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이보다 더 큰 이익을 내는 투자가 어디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비참하고 부끄러운 죄인임을 깊게 인식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얼마나 무지하게 더러운 죄를 지었는지를 깨달아 알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악된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더럽고 흉측하여 미워할 수 밖에 없으며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회심과 중생의 순간에는 죄의식의 크기가 각자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오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드라마틱하게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죄의식의 크기만으로 신자의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 크기가 어떠하든간에 중생 이후에 신자는 매순간 나날이 평생 동안 거룩해 가야 하므로,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죄에 대해 민감해 질 수 밖에 없다. 예전에는 100 정도 되는 죄에만 반응했다면 오늘은 50 정도에도 반응하게 되고, 내일은 30 정도에도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신자의 일상은 더욱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회개하며 회복하는 것의 반복과 진전이다. 그러나 신자라고 하면서 점점 죄에 무뎌지고 죄의식도 상실해가며 회개도 형식적이 되어간다면, 그는 참된 신자임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양심이 마비되어 결국에는 담임목사가 교회를 말아먹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못하고 뻔뻔해지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떠밀려 억지로 회개하는 척 한다. 피해를 입은 교회와 당사자에게는 일말의 사과도 없이 자기 혼자 하나님께 회개하여 용서 받았다고 정신승리에 도취되어 있다. 이런 자들은 참된 신자라고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