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고 방어 중심이었던 웅진을 벗어나, 넓은 평야와 강을 끼고 있어 대외 진출에 유리한 사비로 과감히 수도를 옮겼다. 백제의 뿌리가 고구려와 같은 부여씨라는 자부심을 담아,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고 제2의 도약을 선언했다. 중앙 관청을 22부로 나누고, 수도를 5부, 지방을 5방으로 정비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하지만 동맹이었던 신라 진흥왕이 뒤통수를 치며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까지 기습 점령해 버린다. 분노한 성왕은 신라를 보복하기 위해 태자가 이끄는 군대를 격려하러 가던 중, 구천(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을 받아 허망하게 전사하고 만다.(관산성 전투, 554년)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와 신라의 120년 동맹(나제동맹)은 완전히 깨졌고, 이후 두 나라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비록 마무리는 비극적이었지만, 사비 시대를 열어 백제 문화의 전성기(백제금동대향로 등)를 꽃피울 기반을 마련한 성왕은 백제 역사상 가장 유능했던 군주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첫댓글 성왕(聖王, 재위 523~554년)은 무령왕의 아들로, 웅진(공주) 시대를 마감하고 사비(부여)로 천도하며 백제의 중흥을 이끈 뛰어난 군주이다.
비좁고 방어 중심이었던 웅진을 벗어나, 넓은 평야와 강을 끼고 있어 대외 진출에 유리한 사비로 과감히 수도를 옮겼다.
백제의 뿌리가 고구려와 같은 부여씨라는 자부심을 담아,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고 제2의 도약을 선언했다.
중앙 관청을 22부로 나누고, 수도를 5부, 지방을 5방으로 정비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성왕의 가장 큰 목표는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백제의 옛 영토, 한강 유역을 되찾는 것이었다.
신라 진흥왕과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성왕은 한강 하류 지역(지금의 서울·경기 일대)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551년).
하지만 동맹이었던 신라 진흥왕이 뒤통수를 치며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까지 기습 점령해 버린다.
분노한 성왕은 신라를 보복하기 위해 태자가 이끄는 군대를 격려하러 가던 중, 구천(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을 받아 허망하게 전사하고 만다.(관산성 전투, 554년)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와 신라의 120년 동맹(나제동맹)은 완전히 깨졌고, 이후 두 나라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비록 마무리는 비극적이었지만, 사비 시대를 열어 백제 문화의 전성기(백제금동대향로 등)를 꽃피울 기반을 마련한 성왕은 백제 역사상 가장 유능했던 군주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