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의 여러 경전들을 돌이켜 보라.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지 않았는가.
주역(周易)은 태호 복희씨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고, 도덕경은 왕필이 덕경과 도경의 본래 순서를 뒤집어 재구성한 것이다.
동양의학의 성서인 황제내경은 황제 헌원을 가탁하여 전국시대를 거쳐 한 대에 성립되었고, 불교의 화엄경도 분리되어 있던 경전들이 수차례의 결집을 거쳐 후대에 합쳐진 것이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다섯 권의 역사서가 천 년에 걸쳐 쓰인 사실과 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태백일사가 나온 지 400년이 지나 환단고기가 묶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원래 다섯 분의 저자들이 쓴 원본이 무수한 전란과 외세의 사서 강탈을 무사히 피하여 전해졌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계연수 선생이 모은 다섯 권은 필사 과정에서 인물, 연대, 장소가 오착되기도 하고 부족한 내용에 가필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들과 다소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민족의 국통 맥과 우리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가 전적으로 매도 될 수 는 없다.
『환단고기』를 읽어가면서 그 극적 클라이막스가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 선생이 쓴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이다. 단군세기 서문에 대해서도 위서론자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대한민국의 강단사학의 태두들이 자리 잡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너무 근대사의 술어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계만방이라는 말이 옛날에 쓰던 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국유형(國猶形) 사유혼(史猶魂)”하니,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 이게 박은식 선생의 한국 통사(韓國痛史)에 있는 얘기를 끌어다 썼다고 한다.
그런데 박은식 선생의 책 원본, 한자로 된 책을 보면 "내가 옛사람의 글을 인용해서 이런 얘기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박은식 선생이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보고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인용했다"는 한 구절을 빼고서 거꾸로 한국통사에 있는 내용을 단군세기에다 끌어다 썼다고, 그래서 이유립이가 조작을 했다고, 그런 것을 보면 위서론자들의 심성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행촌 이암이 국록을 먹은 사람이 몽고니, 고려니 이런 말을 직설적으로 쓸 수가 있느냐’라고 묻는다.
행촌 이암은 고려말 사람으로 여섯 명의 왕을 모신 사람이다.
지구촌의 3분의 1을 통일한 원나라 대제국이 고려를 쳐들어 왔을 때, 원나라의 시녀로 전락한 고려의 오잠吳潛, 유청신柳淸臣 같은 역적이 나와 가지고 고려란 나라 간판을 떼고서
전부 보따리 싸들고 원나라 조정으로 귀속해버리는 이런 역적들이 날뛸 때다.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 행촌 이암 선생이 어린 시절 자기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 위에서 하늘에 맹세를 했다. 그 시詩에 제가 동방의 빛을 꼭 회복하겠나이다. 그런 젊은 날의 순정이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에 보면 너무도 명쾌한 논리로 정리 돼 있다.
그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태도부터가 잘못되었다.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꼬투리를 잡다보니 ‘잠청배(潛淸輩)’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잠청배(潛淸輩)”는 원래 행촌 이암(李嵒,1297~1364)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인데 원나라 간섭기 때 고려 인물로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 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위서론자들은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하여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 지식의 부족을 스스로 드러낸 주장이다.
그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과 인명의 실제 사용연대가 저술 연대보다 훨씬 후대이므로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고탑이라는 지명과 잠청배라는 용어를 들어 단군세기나 북부여기가 청나라 이후에나 저술될 수밖에 없는 책이므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청나라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억지스러운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고탑은 그들의 주장처럼 청나라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명대明代의 기록에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그들은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를 문제 삼는 것이다.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라는 『세조실록』의 기록은 보지 않고
그보다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한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몇 가지만 지적하더라도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양심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동경대에서 나와 있는 1904년도 삼국유사본을 보면 거기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아주 뚜렷하게 나와 있다. 이마니시 류가 그걸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조작을 했는데, 우리나라에 여러 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 야, 그것은 國 자나, 因 자나 그때 같이 그런 서체로 썼다고 한다. 조작한 게 아니라고 한다. 그걸 가만히 보면 심성이 잘못돼 있다.
아시아경제 신문기사 내용: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100914095253368&nvr=Y
첫댓글 '국가(國家)''문화(文化)''세계(世界)'와 '만방(萬方)''인류(人類)' '산업(産業)' 등은
조선 시대를 '중세사'로 분류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중, 몇 개만 살펴보면
'문화(文化)'라는 용어는 <정종실록>의 정종 2년 7월 2일을 비롯하여 <성종실록>의 성종 10년 8월 25일,
'국가(國家)'라는 용어는 <태종실록>의 태종 5년 6월 3일,
'세계(世界)'와 '만방(萬方)'은 <세종실록>의 세종 20년 2월 19일,
'인류(人類)'는 <세종실록>의 세종 21년 12월 17일,
'산업(産業)'은 <정종실록>의 정종 2년 7월 2일,
<태종실록>의 태종 2년 11월 8일 등 <조선왕조실록> 기록만 봐도
그들이 환단고기 책을 부정하기 위해 '국가(國家)''문화(文化)''세계(世界)'와 '만방(萬方)''인류(人類)' '산업(産業)' 등을 근대의 용어라고 하는 주장이 얼마나 억측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온누리
@온누리
@온누리
동서양의 경전들
온누리님 덕분에..
오늘도 즐감 합니다
고맙습니다..
시원한 밤 보내세요..^^
네,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