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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우릴 쳐다보고 있다.'
대통령이 국정현장에 나타나는 것은 여러 모로 중요하다. 대통령 자신은 현장 속에서 국정의 냄새를 생생히 맡을 수 있다. 현장의 사람들은 "대통령이 우릴 쳐다보고 있다"며 긴장하고 힘을 얻는다.
박 대통령은 현장으로 달려갔다. 박 대통령에겐 그것이 무엇보다도 즐겁고 행복한 일인 것 같았다. 그는 나날이 길이 넓혀지고 새마을 운동으로 늘어나는 기와지붕을 보며 생의 동력을 얻었다. 그가 직업훈련원과 기계공고에서 기술을 배우는 청소년의 어깨를 만지면 학생들은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곤 했다.
박 대통령이 현장을 돌며 마치 전쟁처럼 지휘한 것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다. 박 대통령은 선전을 포고하는 전략을 세웠으며 직접 전투병사들을 지휘했다. 67년 4월 29일 박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그 계획을 공표하자 야당은 물론 여당과 공무원 사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외국에에서도 "한국이 벌써 고속도로가 필요하냐"며 냉소적인 시각이 주류였다.
박 대통령의 첫번째 전투는 부족한 예산을 어떻게 적절히 쓰느냐였다. 박 대통령은 4백 28Km를 3백억원에 건설하겠다는 각오였다. 선진국에 비하면 기적같은 일이다.
청와대에 설치된 '전투상황실'
용지매입을 위해 박 대통령은 혼자서 극비작전을 수행했다. 포병장교 출신인 박 대통령은 지도를 직접 읽으며 노선 2__3개를 구상했다. 박 대통령은 1차로 기공할 서울__수원간 후보노선을 그려본 뒤 극비리에 시중은행장 2명을 불러 용지의 시가감정을 부탁했다.
67년 11월 28일 박 대통령은 건설장관, 서울시장, 경기지사를 청와대로 소집했다. 박 대통령은 시가감정서를 내보이며 용지매입을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공사를 감리할 사람을 구했는데 민간기술자가 매우 부족했다. 박 대통령은 강직하고 책임감이 왕성한 육사출신 위관급 독신장교 22명을 군에서 선발했다. 2차로는 ROTC 출신 12명이 뽑혔다.
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 참석했을 때 나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은 젊은 위관급 공사감독관들이 부동의 자세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서운의 영광 때문이 아니었다. 2년 5개월간 갖은 고생을 하며 책임을 완수해냈다는 벅찬 감동과 만감이 교차한 때문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 '전투상황실'을 설치했다. 박 대통령은 건설계획을 분석, 검토하기 위해 공병장교 3명과 건설부의 기좌 1명을 처오아대 신관에 상주시키기도 했다. 회의나 접견 같은 공식스케쥴이 없고 시간이 날 때면 박 대통령은 차를 타고 공사현장으로 달려갔다. 기층공사(흙 다지기)가 완성돼 트럭이 달리는 길이면 박 대통령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렸다.
박 대통령이 고속도로에 대해 종교같은 신념을 갖게 된 것은 64년 12월 서독방문 때였다. 박 대통령은 본__쾰른간 아우토반(독일고속도로)을 시속 1백 60Km로 달렸다. 가고 오는 길에 박 대통령은 두차례나 중간에 내려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시설들을 주의깊게 살피고 앞뒤의 선형을 조망했다고 한다.
'한국도로공사 15년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박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고속도로 건설의 계획과 추진에 깊숙이 그리고 강력하게 개입하여 단군 이래의 대토목공사를 훌륭하게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는 거창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헬리콥터로 혹은 지프를 타고 수없이 현장을 시찰하며 공정을 살피고 현장관계자와 인부들을 격려했다."
추풍령에 세워진 준공기념탑 후면에는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고속도로는 박 대통령 각하의 역사적 영단과 직접 지휘 아래 우리나라의 재원과 우리나라의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에 있어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조국 근대화의 목표를 향해 가는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자랑이다."
출처] 김정렴 정치 회고록 "아, 박정희"
출처] http://www.comj.com/doc/park/main-02k3.htm
朴正熙가 경부고속도로 착공을 앞두고 계획조사단
서울~수원
이어야 피가 흐른다." 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완공 |
건국이래 최대 토목공사로 지칭되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내노라하는 건설관계자와 경제학자등이 대역사의 역군으로 피땀을 흘렸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경제대통령을 꿈꾸던 朴正熙의 작품이었다.
金正濂 前청와대 비서실장의 회고. "朴대통령이 현대식 고속도로를 처음 본 것은 54년 미국의 포병 학교에서 교육받을 때였어요. 그러나 당시는 한 여행객의 입장이었겠지요.
朴正熙는 국빈용 벤츠승용차에 몸을 싣고 서독이 자랑하는 아우토반을 시속 1백60km로 달리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이날 본~쾰른 20km구간을 왕복하며 두번이나 차에서 내려 아우토반을 유심히 살펴봤다.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시설등은 물론이고 앞뒤 선형까지, 아우토반의 모든 것을 머리속에 각인시키려는 듯 했다.
백영훈의 예상대로 朴正熙는 귀국하자마자 고속도로 공부에 매달렸다.
현대건설 사장 鄭周永은 한국도로공사에 기고한 회상기에서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각하께서 밤늦게 불러 들어가보면 많은 고속도로 관련 서적이 쌓여있는 서재로 데려가 손수 인터체인지 구상을 그려보이곤 하는 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고속도로를 가장 적은 경비로 가장 짧은 기간에 완공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구상하면서 여러가지 안을 제시해 의견을 묻곤 했다." 2년반동안의 연구를 끝낸 朴正熙는 67년 5월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발표만 있고, 진행상황은 전혀 없이 5개월여가 흐른 10월하순 어느날 朴대통령은
"늦어도 내년초에는 착공한다. 기존 국도를 확장하는 것도 좋고, 전혀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도 좋다. 구체적인 안을 수립해 보고하라"
우선 1차 공사구간인 서울~수원은 2만5천분의 1 지도에, 이와는 별도로 서울~부산까지는 5만분의 1과 2만5천분의 1 지도를 여러 장 연결해 등고선별로 색칠을 했다. 5일만에 등고선 채색작업을 끝낸 이들은 노선작업에 나섰다. 단 하나의 기준, 최소 공사비를 위해 고지는 가급적 피해 이리저리 선을 긋는 작업이었다.
마침내 68년 2월1일 4백28km 대장정의 첫 삽질이 시작됐다.
"10개월만에 수원까지 뚫어 12월21일 개통식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朱源장관이 朴대통령에게 연말까지는 오산까지 개통하겠다고 보고했다. 오산 인터체인지 공사가 50%밖에 진행이 안돼 있는 상태인데, 朱장관이 일종의 충성발언을 한 것이었다.
朴대통령이 앞장서 팔을 걷어붙이고 경제 개발에 나설 당시 중용됐던 관료들은 대부분 겁 없이 펄펄 뛸 30대 나이였다. 朴대통령은 이들의 패기를 적적히 살려주었고, 그 때문에 시행착오를 겁내지 않는 불도저식 행정이 가능했다.
朴正熙시대의 공과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경제 대통령'이 되고자 매우 애썼다는 점이다. <출처 : 국민일보 - 특집기획 "박정희 시대", 중앙일보사 - 청와대 비서실> |
첫댓글 역시박대통령은 민족의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