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창문과 펄럭이는 커튼, 그 사이에서 시원하게 부는 바람은 크리스토퍼를 단잠에서 깨웠다.
“…”
“아직 7신데..”
언제나 늦잠 자던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일찍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왕녀님..”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그는 주방으로 향했다. 아직 불을 켜지 않은 상태라 어둑어둑한 거실의 창문 사이로 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아르키도스 가문,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주방에선 요리사 매이(May)가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주방안을 들여다보자 빨간 머리에 16살쯤 되어보이는 여자 한명이 재료를 다듬고 있었다. 16세의 귀여운 아이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벌써 30세를 넘었다. 원래 나이에 비해 활기찬 사람이었으나 부모의 사망의 충격으로 인해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자, 매이는 고개를 들고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머릿속에서 울리는 전언..역시 1)세프러스(Sephruss)답다. 비록 실제로 말을 하진 못해도, 실제 생활엔 아무 지장도 없었다.
가족 구성원 중에 유일하게 일찍 일어나는 것은 의외로 에리카였다. 잘 삐지고 잘 토라지는 성격이지만 부지런한 모친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
[아가씬 아직..]
“그런가요…”
호랑이도 저 말하면 온다더니………말이 끝나자 마자 약간 잠옷 위에 가운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충혈된 눈을 비비고 들어오는 에리카가 보였다.
“!”
‘애가 왜 이래..요즘 잠을 못자나?’
[아가씨가 근래에 들어 아침마다 저렇게 기운이 없어요.]
“매이, 리카를 방에 다시 데려다 주고 난 다음 도와 드릴께요.”
[전 괜찮아요, 도련님.]
세상 모르게 잠을 자는 동생을 업고 크리스토퍼는 계단을 올라가 침대에 눕혀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거니…?’
2)아르케(Arke) 왕가 첮번째 왕녀인 소피, 올해로 17살인 그녀는 아침 일찍 옷을 갈아입고 정원의 호숫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은 하늘을 연상시키는 맑은 푸른색이었고, 머리칼은 흰빛, 가장 아름다운 백설(白雪)도 추해 보일 정도로 아름다운 머릿결이었다. 이른 시각이지만, 해가 떠 세상에 빛의 손을 뻗어가고 있었다.
“오늘..올까..”
“올거야.”
언제 왔는지 동생 실비아가 대답했다. 초롱초롱한 녹색 눈망울, 아빠를 닮아 다소 작은 1.32wis의 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대조적인 검은색의 머리카락.
“어떻게 아니?”
“내가 크리스챤을 콱 잡아났거든~오늘 온데.”
“그래..하지만 그 사람은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스타일이 아닐탠데..”
“아냐.”
실비아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소피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생을 쳐다보았다.
“뭐?”
“이리저리 끌려 다니지는 않지만, 크리스챤 말에 의하면, 크리스토퍼경은 분명 언니에게 마음이 있어.”
아직도 동생의 말을 이해 못한 소피, 동생을 보며 다시 물었다.
“응?”
“그러니까, 좋아하고 있지만, 주위에 지크프리드 황태자나 변태 황태자가 있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포기한걸거야.”
실비아는 에브리즈(Ebriese)국의 에드먼드 황태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변태 황태자라고 불렀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니?”
“응? 그거 근위병 아저씨들이 에드먼드 오빠를 그렇게 부르는걸 들었어.”
“왜 변태라고 하는지는 알아?”
“그건, 에드먼드 오빠가 여자들이 사는 큰집(하렘(Harem), 입니다…쿨럭쿨럭)을 지어서 매일 여자랑 같이 자기 때문에, 변태에 저질, 그리고 왕족답지 못한 녀석이라고 근위병 아저씨들이 말하는걸 들었어.”
“여자랑 같이 자는게 왜 나쁘니?”
동생을 떠보는 말이었다. 실비아는 아직 12살이라 잘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소피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시집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소피는 괴로웠을 것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귀족, 특히나 왕족은 사랑이나 감정으로 결혼할 처지가 못 된다. 단지, 권력과 영토 확장, 그리고 생계를 위해서 결혼 할뿐이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귀부인은 결혼한 남편을 폼으로 세우고 젊은 기사들과 사귀고 또한 은밀한 시간을 즐기다 들켜 망신을 당하는 것이다.
“궁금해서 근위병 아저씨들에게 물어보니까, 갑자기 당황하면서 나중에 크면 알게 될거라고 말하더라?”
아직 순진한 그녀, 소피는 더 이상 말하면 자신도 모르게 동생에게 말해 버릴 것만 같아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실비아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계속 물어왔다.
“왜 그런거야 언니? 꼭 어른이 되어야만 알수 있는거야?”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알게 될거야..언니도 잘 몰라.”
실비아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성인식 치르고 나면 꼭 말해줘, 응?”
“아, 알았어..”
새끼 손가락을 걸면서, 소피는 한숨이 나왔다. 실패다..일찌감치 포기하게 만드는건데..나중에 되면 약속 했느니, 어쨌느니 하면 결국은 대답해줘야 하는데....
“정말 오지 않는건가…?”
“너무 일찍 나온거야, 언니. 아직 9시도 안됐는데, 게다가 아르키도스 가문 사람들은 늦게 일어난데.”
“참 많이도 아는구나..”
의외로 조숙한 면이 실비아에게서 소피는 많은걸 배운다. 아직도 철 없는 자신, 하지만 유일하게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때는, 지금의 아르키도스의 대공, 크리스토퍼 경과 함께 있을 때다.
“주워 들었어. 언니, 그럼 난 그만 가볼게. 오늘 철학 선생님 온데.”
“응, 열심히 하고~”
실비아는 정원 저편으로 사라지고, 소피는 정원의 잔디 위에 누워버렸다. 아침 이슬은 그녀가 입고 있던 노란색 드레스를 적시며,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올려 보았을 때, 보인 것은…그녀의 초조한 마음과는 달리, 흰 구름이 섞여있는, 평온한 하늘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더욱 섞어 놓아, 한숨이 나오게 만드는..
“후우..”
계속 부는 동풍(東風)에 소피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휘날렸다. 신경 써서 기름 머리카락이지만, 지금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순간, 뒤에서 누군가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카락,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면 상해요.”
청년은 코트 속에서 큰 하늘색 태두리에 금색 장식이 된 리본 하나를 꺼내서 머리카락을 묶어 주었다. 그것이 끝나자 소피는 돌아보았다. 백발에 사파이어빛의 하늘 같은 눈을 가진 청년이 흰 예복을 입고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대로다. 들려오는 소식과 조금도 틀리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정감어린 목소리, 조각 같은 얼굴..
“크리스토퍼…왔구나..”
“오늘 부르셔서, 왔습니다..”
“응, 곧 보게 되겠지만, 그래도 단둘이서 만나고 싶었어..”
“네?”
크리스토퍼의 물음에, 소피는 얼굴은 새파란 눈과는 대조적인 붉은 빛을 머금었다. 보통 ‘단둘이서 만나고 싶었어..’하면, 웬만한 기사는, 그 뜻을 알아차린다. 이렇게 되면..하나씩 물어봄으로써, 그의 마음을 확인하는 수 밖에 없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불렀어. 괜찮지?”
“물론입니다.”
“크리스토퍼, 혹시, 좋아하는 귀부인이나, 그런 사람 있어?”
“귀부인이 아니라도 좋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아무래도 크리스토퍼는 ‘좋아한다’의 의미를 착각한듯하다.
“그런거 말고,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 말인가요?”
“응…”
“있습니다.”
소피의 마음은 ‘희망’과 ‘불안’이라는 정령의 싸움터가 되고 말았다. 누가 이기냐는, 크리스토퍼의 대답에 달려있다.
“그래..? 누군지, 물어봐도 될까?”
“그건,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세프러스(Sephruss) – 염력을 사용하는 마인의 한 종족. 마인드 플래이어(Mind Flayer)와는 천적 관계이며, 텔레키네시스(Telekinesis), 텔레히네시스(Telehinesis), 그리고 심령술(Mind Magic)을 비롯해 정신이나 마음에 관한 마법에 밝다. 또한 지능이 무척 높아 아루아들 사이에서 학자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다.
2) 아르케(Arke) – 신성 왕국 아르케, 크기는 슈발츠의 반, 이올리아의 5분의 1정도 밖에 안되고, 아레아(AREA)의 개수 역시 슈발츠에는 못 미치지만,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강력한 아레아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