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열흘전쯤 우리 동네 농협에 딸린 상점에 가서 대봉감 한 박스(33개 들이 26000원 )를 사왔다.
박스를 들고 오르면 힘이 들었을텐데 다행히 배달까지 해 주어 편하게 왔다. 현관 앞까지 배달한
것을 서재 한 구석에 밀어 붙여놨더니 어느새 홍시가 다 되었다. 홍시는 붉을 홍, 감 시자로 된
한자어지만 단순히 붉은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감이 나무 가지에서 햇볕을 받아 발갛게
잘 익은 다음 시월말이나 11월 초에 수확해서 보관하면 얼마 안 가서 빨간 홍시가 된다.
내 어릴 때 까막골 우리집에는 마당가에 왕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6.25사변때 불 탄 몸채가
있었던 터밭 담장 너머에는 돌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왕감나무에 열리는 감은 크기가 주먹보다
도 컸고 나무도 키가 컸다. 반면에 돌감나무는 키가 조금 작았고 감이 가지에 조랑조랑 많이 열렸지만
크기가 작았다. 둘 다 홍시가 되기 전에는 턻어서 그냥 입으로 베어 먹기는 돌감이 더 고역이었다.
보릿고개 시절 감은 아이들의 반려식품이었다. 봄에 가지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기 시작해서부터
가을에 무서리가 내려 홍시가 되기까지 참 좋은 친구였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떨어진 감꽃을 그냥 주워 먹기도 하고 많으면 줄에 끼워 말렸다가 나중에
먹기도 했는데 풋것을 그냥 씹어먹으면 약간 텁텁한 게 그래도 뒷맛이 달작지근 했었다. 말려서
먹으면 턻은 맛이 없어졌다. 꽃이 지고 나면 가지에 매달린 감은 조금씩 커 가는데 개중에는 떨어지는
감도 많았다. 초복 전에 떨어지는 감은 너무 작아서 먹을 수가 없고 초복을 경계로 구슬보다 커야
먹을 수가 있는데 어릴 때는 너무 턻어서 그냥 먹을 수가 없어 항아리에 미지근한 물을 넣고 며칠간
담궈놓았다가 익으면 내어 먹는데 이때는 턻은 맛이 없어지고 단맛이 나왔다.
봄을 지나 초여름이 되면 모내기가 시작된다. 일손이 부족했던 시골에서는 모내기철에는 품앗이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여러 집안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모내기를 하였다. 모내기철에는 부지갱이도
한몫을 한다고 할만큼 바쁘다. 어머니는 일꾼들의 중참과 점심 준비에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어린 나도
심부름으로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가기도 하였다. 무논에 들어가 하루 종일 허리를 굽혀 모를 심어야 하는
일꾼들에게는 중참이나 점심을 먹을 때가 허리를 펴고 쉬는 시간이다.논 가운데서 밖으로 걸어나와
논두렁에 걸쳐 앉으면 장단지에는 새카만 거머리가 으례 서너마리씩은 붙어서 피를 빨고 있었다.
점심때는 바가지에 퍼 주는 허연 쌀밥과 사발이나 쟁반에 담아주는 김치 그리고 감나무 이파리에 올려주는
간갈치 구이는 꿀맛이었다.
한여름 소나기가 퍼붓고 난 다음 감나무에는 새파란 이파리 사이로 붉으스름하게 변한 감이 얼굴을 살짝
내민다. 벌레 먹은 감이 홍시로 변한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며칠내로 땅바닥으로 떨어져 박살이 날 게
뻔하다. 그렇다고 감나무에 기어 올라가 감을 딸 수는 없었다. 가지까지 손이 닿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나무 장대가 필요했다. 늦가을에 감을 딸 때에도 장대 끝을 열십 자로 쪼개어 감이 달린 가지에 끼워서
비틀면 가지가 꺾여 감이 매달린 채로 내려 온다. 동네 큰 감나무에선 감이 백 접이 넘게 열리기도 하였다.
한 접이 백개니까 한 그루에서 만 개가 넘는 감이 열린 셈이다. 감나무도 해걸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