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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수는 포스트플레이에 뛰어난 정통 스트라이커였다.(사진 이상혁) |
1995~2003년최용수, ‘독수리’ 인생 최고의 비행
FC 서울의 최용수(34) 코치는 선수 시절 ‘독수리’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제공권에 남다른 능력을 보였다.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공중에서 내려 찍는 헤딩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최용수가 뽑은 최고의 골도 1997년 9월 6일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벌어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최종예선 카자흐스탄과의 1차전에서 터뜨린 헤딩골이다. 왼쪽 크로스를 머리로 받아 넣은 최용수는 세리머니를 하려고 광고판 위에 올라서다가 넘어지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6월 25일 FC 서울 훈련장인 구리 챔피언스파크에서 만난 최용수는 겸손했다. 최용수는 “내가 어떻게 한국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에 들어갈 수 있느냐”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용수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1995년 2월19일 다이너스티컵 중국전에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최용수는 은퇴할 때까지 A매치 67경기에 나서 27골을 기록했다. 2003년 12월 7일 중국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A매치에 나서지 못했고 2004년 1월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2001년 11월 13일 크로아티아전에서 A매치 27번째 골을 터뜨린 뒤 2002년 한일월드컵을 포함해 은퇴하는 순간까지 골맛을 보지 못했다. 1997년 하반기에 벌어진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에서 군계일학의 기량을 뽐냈지만 대표팀에서 그의 마지막은 조금은 쓸쓸했다.
최용수를 향한 축구 관계자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대한축구협회 김주성 대외협력국 부장은 “최용수, 김도훈 등은 좋은 공격수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황선홍이라는 뛰어난 공격수가 있었는데 과연 최용수가 한국축구의 한 시대나 역사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조금은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울산 현대미포조선의 최순호 감독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한국축구의 정통 스트라이커 계보를 얘기한다면 이회택-차범근-최순호-황선홍순”이라고 설명했다. 최용수의 이름은 없다.
최용수 스스로도 부정적인 뜻을 나타냈으니 그의 이름을 스트라이커 계보에 올려놓은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축구협회 이회택 부회장의 생각은 다르다. 이부회장은 “모름지기 스트라이커라면 머리가 좋아야 해. 공의 낙하지점을 잘 찾아야 하고 수비수의 다음 동작을 예측하는 판단력이 있어야 하거든. 수비수에 대한 공포를 없애는 것은 더욱 중요하지. 모험적이고 적극적인 플레이를 기복 없이 보여주는 공격수가 뛰어난 공격수야”라고 설명했다.
최용수는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황선홍, 김도훈 등과 자신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황)선홍이 형이나 (김)도훈이 형은 정교한 플레이를 한다. 기본에 충실한 공격수였다. 나는 조금은 다른 스타일이었다. 몸싸움 하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골키퍼가 예측 못하는 순간에 슈팅을 했고 되든 안되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좋은 공격수가 되려면 머리가 좋아야 한다. 난 지능적인 플레이를 좋아했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했다.”
뛰어난 스트라이커에 대한 이회택과 최용수의 의견이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최용수는 선수생활을 통해 손쉬운 득점 기회를 적지 않게 놓쳤지만 반대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과 슈팅으로 그림 같은 골을 많이 넣은 공격수이기도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조별리그 미국전에서 이을용의 완벽한 패스를 하늘로 날려버린 선수로만 최용수를 기억하는 것은 그래서 옳지 못하다. 최용수는 그동안 한국축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포스트플레이에 뛰어난 정통 스트라이커였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에 대한 추억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앞둔 한국축구의 발걸음은 불안했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라는 쾌거를 이뤄냈지만 1996년 12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쿠웨이트에 0-2로 졌고 이란에 2-6으로 무릎을 꿇었다. 4회 연속 월드컵 진출을 장담하지 못할 상황에 놓인 대한축구협회는 1997년 시작된 월드컵예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두고 부랴부랴 차범근 감독 체제를 출범했다.
차범근호는 최종예선에서 일본, 우즈베키스탄, UAE, 카자흐스탄과 한 조를 이뤘다. 고종수, 윤정환, 유상철, 고정운의 잇단 부상과 서정원의 유럽행 파동 등 악재가 겹쳤지만 한국은 카자흐스탄과의 최종예선 1차전 홈경기에서 3-0으로 크게 이기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독수리’ 인생 최고의 비행이 시작됐다. 최용수는 첫 경기인 카자흐스탄전에서 해트트릭을 하는 등 지역예선에서 7골 2도움을 올리는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한국축구사에 길이 남을 ‘도쿄대첩’ 일본전 2-1 승리를 포함해 한국은 6승1무1패의 성적으로 프랑스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최용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 축구인생의 정점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가장 기억 나는 경기는 월드컵 본선행이 확정된 6차전 우즈베키스탄전(한국 5-1 승)이었다. 가장 기억나는 골은 첫 경기인 카자흐스탄전의 첫 번째 골이었다. 그 경기에서 골을 넣고 광고판에 올라가려다 넘어졌는데 조금은 억울하다. 보통 광고판에는 세 개의 받침대가 있다. 당연히 그럴 줄 알고 올라섰는데 하필이면 내가 올라선 광고판은 받침대가 하나밖에 없었다(웃음).”
프랑스월드컵 본선은 순탄하지 않았다. 최용수는 조별리그 첫 경기인 멕시코전에서 예상과 달리 벤치를 지켰다. 대신 김도훈이 기용됐다. 한국은 하석주가 선취골을 넣었으나 1-3으로 역전패했다. 최용수는 후반 교체투입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뜻하지 않은 하석주의 퇴장으로 그런 기회는 사라졌다. 언론과 팬은 당시 차범근 감독이 최용수를 기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졌다. ‘차감독과 최용수의 관계가 껄끄러운 것 아니냐’는 얘기도 많았다. 그러나 최용수의 말은 달랐다.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 역시 당연히 멕시코전에서 선발로 뛸 줄 알았으니까. 그 때문인지 다음 경기부터 계속 힘이 들어갔다. 제대로 플레이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최종예선 활약으로 내가 많이 노출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감독이라면 충분히 그런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한다. 차감독님에게는 가끔 연락 드린다. 전혀 불편한 관계가 아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차감독님은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을 통해 내게 소중한 기회를 주셨다.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을 기회를 주신 은인이다.”
후배들을 향한 의미 있는 조언
최용수는 지난해 8월 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도쿄 FC와 친선경기를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최용수는 하프타임에 열린 은퇴식에서 “축구팬들의 사랑으로 원 없이 축구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지금 위치까지 올라섰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3분 남짓의 짧은 인터뷰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12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1994년 K리그 신인왕에 오르며 비상을 시작한 최용수는 MVP가 된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일본프로축구에 진출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교토 퍼플상가(당시 J2 리그), 주빌로 이와타 등에서 통산 130경기에 나서 77골을 뽑았다. “골을 넣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수비수와 싸우는 동물적인 본능이 통한 것 같다. ‘예쁘게’ 공을 차는 일본 공격수와는 달랐다.” 최용수가 밝힌 J리그 성공의 비결이다.
두 차례의 월드컵 본선과 1999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진출 실패는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최용수는 “내 복이다. 1999년에는 (잉글랜드 진출이)거의 성사 단계인 줄 알았다. 입단테스트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 차례 월드컵에 나섰지만 팬들이 만족할 만한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 한일월드컵 미국전에서 (이)을용이의 패스를 놓친 직후에는 ‘내 운이 여기까지인 모양이구나’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모두가 내 복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얘기한 ‘복’이란 대체 무슨 의미일까. 무슨 뜻인지를 묻자 그는 “내 복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최용수는 후배들을 향한 따뜻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지금 대표팀에서 뛰고 있는 공격수들을 보면 조재진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조)재진이는 선 굵은 플레이를 한다. 키핑력이 좋고 헤딩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현재에 만족하면 안 된다.
재진이가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활약한 살바토레 스킬라치의 플레이를 닮았으면 한다. 스킬라치는 스피드는 없지만 수비를 따돌릴 수 있는 민첩성이 있다. 또 스트라이커는 머리가 좋아야 한다. 지능적인 플레이를 못하는 공격수는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
'일본 킬러' 최용수의 진가
최용수는 승부욕이 강했다. 심한 반칙을 당하면 유난히 큰 몸짓으로 쓰러졌고 어김없이 보복행위를 했다. TV를 통해 전해지는 그의 욕설에 일부 팬은 통쾌해 했고 혹자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 때문에 그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컸을지는 몰라도 일본을 상대로 한 최용수의 활약에 팬들은 즐거워했다.
1997년 9월 28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과의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에서 0-1로 뒤진 후반 막판 서정원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한 게 최용수다. 서정원이 노마크 득점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한 최용수의 헤딩 패스는 절묘했다. 한국은 곧이어 터진 이민성의 역전골로 한국축구사에 길이 남을 '도쿄 대첩'을 완성했다.
최용수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팀이나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한일전만큼은 거의 매 경기 골을 터뜨리며 '일본 킬러'의 이미지를 다졌다. 최용수는 "일본은 물론 누구에게도 지기 싫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는 것을 싫어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이들이 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많이 싸웠다.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맞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동네에서 싸움 잘하기로 꽤나 유명했다. 학교 가서 싸우는 게 일이었으니까"라고 했다.
최용수는 일본 벤치를 향해 공을 걷어내는가 하면 일본대표팀 골키퍼 가와구치 요시카쓰의 물을 빼앗아 먹을 만큼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SPORTS2.0 제 58호(발행일 07월 02일) 기사
김덕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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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래고 행님 ㅋㅋㅋ 마누라 졸 이쁘던데 ㅎㄷㄷㄷ
이혼하셨는데...꽃뱀...
위자료 왕창 받고 이혼하신 마누라는 이제 된장녀 ㅡ.ㅡ
최용수형님 정말 최고
222222222 정말 좋아했었는데 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A보드 올라가다가 아래로 구른거 말이죠? 그거보고 좋아하고 있다가 엄청웃은기억이ㅋㅋ
초등학교때 축구할때면 난 항상 최용수........ㅋㅋㅋㅋㅋㅋ
아 나 절라 좋아했는데..... 02년에 욕 그렇게 먹으셧지만 그래도 난 선홍이횽 보다 용수횽이 더 좋앗엇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