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오늘을 빼고 나면 꼭 사흘 남았다. 책상 앞에 놓여진 탁상용 달력 날짜 밑에는 그날 그날의
중요한 메모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주로 해야할 일들을 미리 적어 놓고 수행한 것들은 그 위에
붉은 잉크로 X자를 그어 놓는다. 나이가 들면서 깜박하고 잊어 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매달 내는 아파트 관리비, 건강보험료도 제때에 내는 것을 잊어버렸다가 하루 이틀 지난 뒤에 과태료
까지 낸 적도 몇번 있었다.
내 어릴 적 살던 시골 까막골에선 두메산골인데다가 아버지가 독신으로 집안이 단촐하였으므로 찾아오는
손님으로는 제삿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고모님들뿐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은 달력이 있으나
없으나 날짜를 잘 알고 계실뿐 아니라 동네 누구누구의 제삿날까지 다 기억하고 계셨다. 당시에 국민학교를
다녔던 우리는 음력이 아닌 양력을 썼고 공일에는 학교를 가지 않으니 요일이 필요하였다. 토요일은
반공일이라 하여 오후엔 수업을 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면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많이 기다려졌다. 학교에 가지 않고 종일 놀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학이라 학교에는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골에선 농사철엔 아이들도 소먹이고 꼴 베고 심부름하고 또 춘하추동
땔감 나무를 해야하기 때문에 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방학 숙제는 개학 며칠을 앞두고 부랴부랴 벼락치기로
하기 일쑤였다. 개학 일짜는 달력을 보고 몇일이 남았는지 가름하였는데 당시에는 달력이 국회의원 구태회가
자기 사진을 달력 한 가운데 동그랗게 넣은 12달이 들어있는 한 장 짜리가 유일하였다.
아버지가 마산 고모부의 로프 공장 짓는다는 꾀임에 빠져 까막골 문전옥답을 팔고 고향을 등진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논 열 마지기면 시골에선 그런대로 배 곯지 않고 먹고 살 정도는 됐는데 논 판 돈을 몽땅 주고 나니
하루 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었다. 수중에 남은 돈을 긁어 모아 변두리 산호동 바닷가 돼지우리옆 골방을 하나 얻어
일곱식구가 오골오골 살았다. 농사만 짓던 아버진 취직자리 구하기도 어려웠고 어머니가 어시장에서 해산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기차를 타고 멀리 시골에 가서 팔았다. 입에 풀칠 하기도 어려웠고 방세도 밀려 골방에서도 쫓겨나 바닷가
한쪽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 얼마후 동생이 하나 더 태어나 식구는 여덟이 되었다. 입을 하나 덜려고 중학교 갓 입학한
둘째를 서울로 보냈다. 약국에서 낮에는 약을 파는 심부름을 하고 밤에는 야간 중학교에 보내준다는 조건이었다.
동생은 서울로 올라간 그해는 학교를 가지 못하고 그 다음 해에 숭실중학교 야간에 들어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고된 생활을 했다 1067년 년말이 다 돼 갈 무렵 집으로 달력 하나가 부쳐왔다. 당시 약사 남편이 제일은행에
다니고 있었는데 동생이 하나 얻어서 집으로 보낸 것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객지에 홀로 보내 놓고 얼마나
가슴 아프셨는지... 우리집에는 전화가 없었지만 약국에는 전화가 있어 내가 전화국에 가서 통화하기 위해 일반전화를
신청하면 적어도 네 시간은 앉아서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라도 동생 목소리를 듣고 부모님께 소식을 대신 전해 드리면
잠시동안이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다. 그 후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 동생은 혼자 자면서 밤중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그가 보낸 1968년도 달력은 펴보지도 못한채 지금까지도 돌돌 말려 있다. 가난했지만 부모형제
함께 오손도손 살아왔던 지난 나날을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해서....
년말이 되고 해가 바뀌면 날짜가 지난 달력들은 쓰레기장으로 버려진다. 벽걸이용 달력들은 경치가 좋은 풍경사진이나
예쁜 모델의 인물들이 많아 종이 질이 좋고 대개 한쪽면만 인쇄되고 뒷면은 백지로 남아 있다. 예전에 우리가 어릴 때는
다 쓴 달력은 신학기 새책을 받으면 책표지를 입히는 데 썼다. 종이가 두껍고 매끄러워 책 표지를 싸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책 표지를 쌀 일도 없으므로 딱히 쓰일 데도 없지만 그냥 쓰레기로 버리기엔 아까운 생각이 들어 한장
한장 뜯어서 접어 가위로 잘라 메모지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