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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정치인(?) 노무현대통령, 좌익정치인(?) 박근혜대표
1.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되고
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kind=rank_code&keys=3&id=21250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좌파적인 시대에, 좌파정치인이 없어졌다.
‘데일리안’의 경실련 소속 시민운동가 인터뷰를 취재하는 기자나, 머리에 실는 신문사측이나 참으로 한심함의 극치였다.
철저한 우익 정치인 노무현대통령과, 이명박지지패거리들에 곧잘 김정일에 대한 모호한 자세로 좌익 정치인으로 매도되는 박근혜대표의 분류법은, 이 시대를 상징하는 서글픈 기호일 것이다.
언뜻 보면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된 학습의 결과인 듯 한데, 자세하게 보면 한없이 무서운 모습을 드러낸다.
좌파 시민 운동가들이 김대중전대통령을 우익정치인으로 불렀음은 오래된 일이다. 좌파 시민 운동가 뿐만 아니라, 군소 진보(좌익) 정당들도 하나같이 우익 보수 정치인으로 불렀다. 그만큼 김대중전대통령에 쉽사리 우파들은 정신적인 무장해제를 했었고, 그만큼이 현재 벌어진 일이다.
지금의 ‘데일리안’의 노무현대통령 우익론을 주장하는 이는, 철저하게 과거 스타일의 재판이다. 적어도, 이러한 판단을 알 수 있는 이들인 전대협 세대에 책을 보았던 세대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깝게, 그 글을 실어준 매체와 취재 기자의 순수성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회과학표현들의 속내를 읽고 씹어서 분석하게 된다면, 그 글의 취재 기자는 우파 진영을 파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자아정체성을 명백히 드러낸 것이다.
김대중전대통령을 보수 정치인으로 불렀던 이들은, 트로츠키 주의 등 극렬 좌익 이념에 젖어서 뭔가 모자란 좌익으로 좌익이 아니라고 불렀다. 이 차원의 연장선상을 활용하여, 김정일에 뭔가 모자란 공산당으로 단순한 왕조라고 하는 논리가, 얼마나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로 느껴지는가? 전대협 세대라면 김정일이 뭔가 모자란 공산당으로 단순한 왕조라고 주장하는 바에, 전향이 절대적으로 의문시되는 홍진표씨등이 개입되어 있는 바를 보면, 김대중대통령을 후원했던 진보좌익정당과 시민단체의 역할만큼, 김정일에 무장해제의 여론을 의도하는 속내를 읽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김대중전대통령을 ‘보수 정치인’으로 불렀을까? 그렇게 규정되도록 최선을 다했을까?
2. 여의도연구소의 해당 사태 이후에 박근혜대표의 북한에 대한 온화적 발언은, 한나라당의 위기 사태 때마다 북한에 온화적 자세와 연속선.
야당의 야성? 야성은커녕 살아온 만큼의 다른 생활양식 안다치고 잘 살 수 있는 길 찾기가 더 급했었다.
김대중전대통령 지지자들은 ‘좌파적 정체성’으로 동화되지 않을 수 있도록 뒤를 받추어질 정치인을 애타게 찾았다. 즉, 살아남기 자체가 가장 커다란 화두였을 것이다.
오늘의 한나라당의 정국 대처 해법을 보면, 김대중전대통령이 보수 정당이 되어야 했던 이유가 보인다. 작년 연말의 보수정치의 중심으로 최대치를 이루었던 반응 이후에, 전체적으로 여론이 좌경화된 사회에서 용쓰며 나서지 않고, 타협적인 부분에서 많은 타협을 하면서도 보호해야 할 부분에서 목소리를 외친다.
‘야당 다운 야당’이란 말을 주장하는 이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야당을 따졌던 것인가? 우리 네 정치판은 늘 ‘승자’가 모든 것을 먹는 체제였다. 그렇다고, ‘승자’가 덜 먹게 내각제 해야 한다는 말도 안된다. 그렇게 고칠 수 있는 자는 승자의 위치일 것이다. 승자가 뭐하러 그 짓을 허락하겠는가?
시민단체와 진보좌파 정당이 왜 출범했는가가 드러난다.
김대중전대통령은 때에 따라서 좌파정체성의 사람들의 부아를 끓게 하는 보수주의로 일관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김대중전대통령이 틀렸다고 주장하면서도 김대중전대통령을 지지하는 은폐된 여론 만들기가 있었다. 이는 2002년 대선에서 대선 전날에 ‘민노당’아 이번에 양보하라! 노무현후보 지지하자는 것으로도 역시 드러났다. 표면으로는 제도권 정당과 다른 과격 노선을 가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제도권 정당이 못하는 제약을 넘어서서 온전히 누리고 싶은 그들의 이념치를 구현하고, 그것을 하도록 결사적으로 그들의 ‘보스’를 지지했던 것이다.
오늘의 한나라당은 ‘야당 다운 야당’에 짐승이 되라는 주문은, 시민단체와 진보 좌파들이 걸었던 길보다 한없이 나약한 점을 의미한다. 그도 그러할 것이, 우파 시민 단체의 압도적인 부분은 노인세대 권력 블록이고 진보 좌파가 사회과학과 책을 좋아했던 것고 달리, 책을 가장 등진 이들이 우파를 택하는 일이 많다.
김대중전대통령은 때에 따라서, 최대한 보신주의가 좌파정서의 불특정다수를 위해서 최선의 길이라고 하며, 김영삼전대통령과 합작으로 1983년부터 ‘민주정부’쟁취하자면서, 좌파들 세상 만들기를 문화와 지식과 분위기로 만들어나갔다.
‘레닌이즘’적인 혁명사상을 군인정신과 헷갈리게 하면서, 친북좌파의 덜전향한 사람들을 전방위적으로 앞세우며, 한나라당의 유화적 자세를 비판할 자격이 전혀 없는 어느 언론인의 입장에서, ‘무기를 들자’고 했었을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시간조차, 나는 늘 객관적 이념화로서의 잣대와 기준선의 중요성을 생각했다.
한나라당이지지 없이 국가안보위해서 중요한 입법에 대해서 열린당의 도전에 막다가, ‘에이씨, 좌파 정당 해부러!’하는 반응을 보였었을 때에,
(1) 한나라당 지지자는 승자가 다 훼처 먹는 정국으로 열린당 패권주의에 나약한 입장으로서의 한나라당의 입장을 인정하며
(2) 한나라당은 과거 민주당처럼 일정 수준의 ‘보신주의’가 불특정다수에 최대한의 이익이 될 수 있고
(3) 그러한 사실을 명백히 인지하면서,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표면이면서도, 내면에서는 한나라당 박근혜대표여! 꼭 대권을 쟁취하여 이 억울함과 서러움 끝장내소서! 하는 차원의 분산적 운동을 하는 것을 지지자가 인정하는 단계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더불어,
(4) 불특정다수의 자유주의 확장을 위해서 최대 우선 순위를 점진적으로 쟁취하도록, 순서를 명확하게 꼽아 대중화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이러한 사태자체를 인정하지를 않는다. 더 정확하게는 닥친 사태도 그렇게 현실인정만 하지 않으면, 눈앞에 현실도 없는 것처럼 된다는 ‘최고도의 佛心(?)’에 접어들었다.
국민은 여러 가지로 자기와 다른 코드를 선택하게 되더라도, 많은 인기를 갖는 한나라당의 이익을 절실히 느낀다. 원칙주의로 인기마저 없어지게 되는 상황 속에서의 현실은 예전에 없는 한없는 갑갑함을 준다.
작년 연말 이후에 한나라당이 타협을 더 선택하여 인기 노선으로 나가게 되었음은,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눈앞에 닥친 ‘열린당 정권의 괴상함이 더 벌어지지 않음’으로서의 한나라당 집권 이상의 꿈을 아무것도 꾸지 않는 상태만을 허락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 이상을 꿈꾸는 자가 있다면, 어리석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3. 박근혜대표의 천재적 외국어 능력 홍보는 ‘군왕의 도덕’이 아니다. 군왕의 도덕을 가지길 바라는 시선을 제발 좀 알기를.
나는 정치학자 김영명 교수의 외국어론을 믿는다. 나도 따지면 4개국어를 하는 셈이다. 그러나, 똑똑하지 않은 이들에겐 안 쓰는 외국어는 몇 년 안에 새카맣게 깡통이 된다. 단어를 다 외웠던 것도 순식간에 ‘제로 베이스’로 단어를 잊어먹는다. 프랑스어로 제2외국어로 ‘수’를 꽤 맞았는데 [조선일보]의 ‘칸’영화제란 표기가 못 견디게 불만스러워 ‘깐느’라고 수정해주는 수준만이 남았고, 일본 신문을 사전놓고 영자신문 읽는 속도는 냈었는데 지금은 어림없이 기본단어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자막과 함께 보니 다 이해가 되었다.) 영어와 우리말 더하면 4개국어다. 벼락치기로 한번 책을 싹 훑어내고 ‘공부 끝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총명한 천재적 머리는, 정말 4개국어 한다면 4개국어를 다 똑같이 한다는 말인데, 실제의 범인들은 안 보는 외국어는 금새 퇴화해 버리게 된다.
이와 같은 부분이 김대중전대통령의 1만권에서 1만 5천여권 독서 자랑이다. 도올김용옥씨도 얼추 그 수준의 책 읽기 자랑을 한다. 다독이 자랑이 아니다. 책도 금새 잊어 먹는다. 제대로 읽은 책은 목차에서 개념과 주제 흐름 정도가 겨우 기억나고, 나머지는 노트와 기록에서 기억이 살게 된다.
콘돌리자 라이스의 반기문장관과 회담자리에서, 어느 기자가 우리말로 씩씩하게 물었다. 그러자, 라이스장관이 ‘트랜스레이션~!’하고 답답해 하는 모습이 나왔다. 곧 미국동포란 분이 번역했는데, 번역이 실제론 엉망이었다는 후문이다.
그 기자는 군왕의 도덕으로 생각했다. 부시대통령이 프랑스어 쓰며 프랑스 대통령 만나고, 중국어 쓰며 중국대통령 만나고, 소련어 쓰며 소련대통령 만나지 않듯이, 그 기자는 한국 땅에 온 라이스에게 그냥 우리말로 냅다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자는 기자의 도덕을 함이 맞지 않을까?)
역대, 한국 대통령으로 외국어 잘한다고 외국어 자랑하여 국민에 점수 받은 대통령이 없다. 이승만대통령 박정희대통령의 외국어 능력은 전부가 다 비공식 자리였던 것으로 안다. 노태우대통령만이 유독 공식석상에서 영어실력을 과시해서 국민에 아쉬움을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근혜대표는 군왕의 도덕으로 아직은 익숙하지 않음이 보인다. ‘외국어’는 본시 ‘역관’의 일이었다. 우리 국왕이 우리 말로 외교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굴욕으로 여겨 왔다. 박근혜대표는 외국어를 알아들으면서도, 박근혜대표의 표현을 번역하는 번역사를 썼어야 옳았다.
박근혜대표가 외국어를 잘한다고 자랑하는 것은, 군왕이 되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풀어줄 기대를 받는다는 것을 망각한 처사이다. 하다못해, 구로다 가쓰히로 같은 분의 지지까지(?--침묵하는 게 도와주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도 지지를 했다. 라이스 장관에 거만하게 우리말로 퉁명스럽게 물은 신문기자만큼의 당당함이 없다.
인기주의차원으로서 ‘보신주의’를 택하는 것과, ‘귀차니즘’에 ‘덜 깨우침’이 더해진 것은 명백하게 다르다.
군왕의 도덕이라 한다면, 의당 한국의 ‘역관’양성소인 외국어대학과 외국어교육문제를 일으키면서, 우리 말이 어떻게 바른 외국어 교육의 출발인가를 이야기해야 맞을 것이다.
여하튼, 여의도연구소 사태는 ‘책사’지위로서 군왕의 부족한 머리를 보충하라는 소임을 저버린 상태이다. ‘군왕의 도덕’을 가져야, 어떠한 영역의 ‘양떼’를 이끈다는 책임감이 들고, 그러한 영역에서 미래의 인재를 키워낸다는 책임감이 생길 수 있다.
여의도연구소 사태를 빨리 봉합하고 권력강화를 빨리 이루었으면 하고 바란다.
외국어 능력의 천재성은 정말로 탁월한 것이라도, 사실상에서 훌륭한 외국어능력 소유이되 현실분석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만을 즐기는 많은 서울대학생들을 이미 많이 보았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외국어 잘하는 사람을 쓰는 입장이 빨리 되는 것이지, 천재적 개인임을 문희상의장을 통해서 지지되도록 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렇게 그러한 입장에 설때만, 불량지도자로 세계에서 비판을 많이 받는 김정일이 제대로 보일 것으로 본다. 박대통령은 가난했던 당시의 가장 못한 이들과 정서가 회통되었다.
사실, 이명박시장이 운동권 정권에 진절머리를 겪고서도 또 운동권출신이란 점에서 부정적인 것을 알면서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중에서, 박근혜대표의 이러한 사소한 부분에 실망하는 이들이 적잖을 것으로 본다.
특출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국민들은 국민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이끌어줄 정치를 필요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