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절, 불모산 성주사
창원에서 만나고자 한 친구가 일정을 핑계로 오후에 만나잔다. 기왕 나선 김에 가까운 성주사를 찾았다. 이 성주사는 충남 보령의 성주사와 동명이사(同名異寺)다
주차장에디 차를 박아 놓고는 절로 들어섰다. 현수막에 머무는 절, 곰절이란다. 곰과 연관 된 단군의 곰녀와의 사찰인가 하고 말이다. 곰절에는 요즘 그 흔한 일주문 하나 없다. 주차장도 아닌 공간에 대형버스가 2대나 서있다. 불자들이 단체로 행차한 모양이다.
대웅전에 이르는 33계단 길을 정갈하게 잘도 정비해 놓았다. 담장을 덮은 기왓장 마다 구리철사로 얽어 세월이 지나도 흘러내리지 않게 묶어 둔 아이디어며, 담장 벽에 등창을 마련한 것이랑, 담장 위로 농소화를 올려 한껏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런 안목의 불사를 한 주지가 누구인지, 마당에 나온 불자에게 물었더니 답을 않고 머뭇거린다.
33 돌계단 제일 위쪽에 곰도 아닌 화강암 돼지 1쌍이 놓였다, 절터는 풍수상 제비가 둥지에 알을 깐 형상이고, 절의 앞산은 그 제비 둥지를 노리는 뱀의 형국이란다. 하여 비보풍수로 뱀과 상극인 돼지 한 쌍을 배치해 놓은 것이다.
신축한 지장전 뒤로 세 산봉우리가 이어져 있어 그 산 이름을 묻자 불모산(佛母山)이란다 연유인즉 가락국 허 왕후의 사촌오빠인 장유화상이 이 땅에 불교를 처음으로 잉태시킨 산이라 하여 불모산으로 이름이 붙여 진 내력이다, 가락국 수로왕의 열 아들 중에 일곱 아들이 이 절에 출가하여 성인(聖人)이 되었다하여 성주사라 한단다
곰절의 설화, 두 가지
하나는 신라 흥덕왕 때 왜구의 침범이 잣자 도술에 능한 지리산에 사는 무염스님을 부르자 그는 지팡이를 세우고 자기의 배를 툭툭 치자 천지가 요동치고 신병(神兵)들이 나타나 왜구들은 물러 쳐 왕은 무영 스님에게 성주사를 지어주었다 한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절이 소실되자 진염 스님이 중창하려는데 곰들이 밤새 지을 목재를 옮겨 주어 그 공을 기리고자 웅신사(熊神寺), 곰절이라 불렸다 한다.
또 한 가지 설화는 어느 추운 날, 곰 한 마리가 허기가 져, 먹을 찾아 성주사로 내려 왔다. 곰은 재주를 부려 법회 때 승려 뒷자리에 앉아 배고픔도 잊고 참선을 흉내 내었다. 그것이 공덕이 되어 땔나무를 구하는 일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 후에도 곰은 불법에 정진하여 스님이 되었단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닌가. 대웅전 우측 바깥벽에 불을 지피는 곰 한 마리와 바윗돌에 참선하는 곰의 형상을 그린 벽화가 나란히 그려져 있다. 전국의 사찰마다 대웅전 바깥벽에는 그 절에 얽힌 설화들을 그려 놓아 좋은 문화재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음을 눈여겨보았으면 한다.
성주사는 수로왕이 행차하여 물을 마셨다는 ‘어수각’ 이름의 우물이 전해져 오고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이 우물은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 절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그 왕자들이 보고 싶어 이 절에 왔을 때 마신 우물이라 어수각(御水閣)이란 이름이 남은 모양이다. 어수각의 위치를 묻자 저 아래 쪽 연못가로 옮겼다는데 흔적도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흡사 해남 달마산 미홍사 마당의 놓였던 석조에 달마산의 영상을 볼 수 있었는데 어느 불사 때 그 석조를 뜰 아래로 옮겨 그 아름다운 달마산의 그림자를 영영 볼 수 없게 만든 불사(佛事)처럼 성주사의 어수각도 같은 맥락의 무지한 소치로 아쉽다. 전설은 멀어지고 점점 자취도 흔적도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쉽다. 어느 이가 문화유적 답사는 하루라도 빨리 하라고 일러준 말이 빈말이 아니다.
곰절 대웅전의 공포
고색을 지닌 대웅전에 눈여겨 볼 것은 대웅전의 공포다. 대웅전 양끝 기둥 위 전면에 보이는 공포와 측면의 공포가 한데 어울려져 그 크기도 놀랍고 장식도 화려하다. 공포 끝자락에 봉황을 새겨 놓아 얼핏 헤아려도 십 여 개가 넘는다. 어느 각수의 수법인지, 어느 도목수의 안목인지 규모는 작지만 공포 하나만은 장대하고 화려하다. 육중한 무게가 걱정되지만 성주사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이한 작품이다.
마침 참배 드리는 두 아주머니의 뒤태가 대웅전의 공포처럼 좌우 대칭을 이루었다. 이 또한 불가에서 일컫는 귀한 인연은 아닌지!
여섯 문짝의 꽃살문도, 대웅전의 공포도, 어수각 우물도, 법당의 참배객도 성주사가 보여준 보석이었다. 관리소에 들려 안내 팸플릿을 부탁하자 절의 형편이 넉넉지 않아 유인물이 없는 모양이다. 한 보살이 곰의 심성을 지녔는지 그 많은 유인물을 복사하여 준 마음이 지금도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