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매니아 밀생은 매바윗골에 살았다. 곧장 북한산 밑에 닿으면, 지하철 통풍구 위에 오래 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은행나무를 향하여 사립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구형막사는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밀생은 군사잡지 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군복 오바로크를 해서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고시를 보지 않으니, 책을 읽어 무엇합니까?"
밀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에어건 수리라도 못 하시나요?"
"건수리 일은 본래 배우지 않았는 걸 어떻게 하겠소?"
"그럼 신교대 앞 노점상 일은 못 하시나요?"
"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군사잡지만 읽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건수리도 못한다, 장사도 못 한다면, 도둑질이라도 못 하시나요?"
밀생은 읽던 책을 덮어 놓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군사잡지 천 권을 읽기로 기약했는데, 인제 팔백권인걸……." 하고 획 막사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밀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강남으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누가 서울에서 제일 부자요?"
린다 김씨(璘茶 金氏)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밀생이 곧 김씨의 집을 찾아갔다.
밀생은 김씨를 대하여 고개 한번 꾸벅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나 하니, 5억 원을 뀌어 주시기 바랍니다."
김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5억 원을 내주었다. 밀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김씨 사무실의 직원들과 식구들이 밀생을 보니 거지였다. 하의의 고무링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전투화의 뒷굽이 사라졌으며, 쭈그러진 전투모에 허름한 전투복을 걸치고,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밀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5억 원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을 하겠느냐?"
밀생은 5억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용산으로 달려갔다. 용산은 휴가나온 각종 군인이 나오는 곳이요, 그들을 상대로 하는 마크사들이 밀집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밀생에게 계급장, 고무링, 요대, 박클, 모자, 전투화 등을 팔았던 상인들이 나중에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었다. 밀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5억으로 온갖 군장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 밀리터리 계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그는 트럭을 가지고 청계천으로 건너가서 수입군사서적과 중고군사잡지, 라이프 전쟁시리즈들을 죄다 사들이면서 말했다.
"몇 해 지나면 나라 안의 밀리터리 매니어들이 공부할 교재가 없어질 것이다."
밀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 가서 과연 중고 밀리터리 북 값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밀생은 늙은 택시기사를 만나 말을 물었다.
"서울 밖에 혹시 서블을 할 만한 빈 땅이 없던가?"
"있습지요. 언젠가 원조교제 커플을 태우고 서쪽으로 줄곧 세 시간을 달려서 어떤 폐교에 닿았습지요. 아마 고양시의 외곽 어디쯤 될 겁니다. 꽃과 나무는 제멋대로 무성하여 은폐와 엄폐에 유리하고, 독사와 아디다스 모기들이 떼지어 놀며, 경찰들이 에어건을 보고도 놀라지 않습디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자네가 만약 나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면 함께 부귀를 누릴 걸세."
라고 말하니, 택시기사가 그러기로 승낙을 했다.
드디어 택시를 타고 가서 그 학교에 이르렀다. 밀생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실망하여 말했다.
"땅이 만 평도 못 되니 무엇을 해 보겠는가? 토지가 험준하고 물이 더러우니 단지 학생 예비군 교장 으로는 쓸모가 있겠구나."
"텅 빈 섬에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서블을 하신단 말씀이오?" 기사의 말이었다.
"덕이 있으면 사람이 적고 모인다네. 덕이 없을까 두렵지, 사람이 없는 것이야 근심할 것이 있겠나?"
이 때, 플래툰 컨벤션에 수천의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5부합동조사반에서 불법 군장과 에어건을 단속한답시고 수색을 벌였으나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매니아들도 감히 나가 활동을 못해서 곤란한 판이었다. 밀생이 호비스트 편집국을 찾아가서 편집장을 달래었다.
"매니아들이 즐겨 입는 군복이 무엇이오?"
"싸구려 우드랜드이지요."
"모두 갤런드 모델건이 있소?"
"없소."
"윌리스 지프는 있소?"
매니아들이 어이없어 웃었다.
"갤런드 모델건하고 윌리스 지프를 가진 매니아가 뭐가 모자라서 괴로워한단 말이오?"
"정말 그렇다면, 갤런드 모델건하고 윌리스 지프를 사서 드라이브를 즐기며 지내려 하지 않는가? 그럼 길이길이 고수 소리를 들으면서 남부럽지 않은 취미생활을 영위할텐데."
"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돈이 없어 못 할 뿐이지요."
밀생은 웃으며 말했다.
"매니아 생활을 하면서 어찌 돈을 걱정할까? 내가 흔히 당신들을 위해서 마련할 수 있소. 내일 전쟁기념관 광장에 나와 보오. 붉은 깃발을 단 것이 모두 밀리터리 콜렉쳐블을 실은 트럭이니, 마음대로 가져가구려."
밀생이 매니아들과 언약하고 내려가자, 매니아들은 모두 그를 미친 놈이라고 비웃었다.
이튿날, 매니아들이 전쟁기념관 앞에 나가 보았더니, 과연 밀생이 트럭 30대 분의 밀리터리 콜렉쳐블을 싣고 온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大警)해서 밀생 앞에 줄지어 거수경례했다.
"오직 장군의 명령을 따르겠소이다."
"너희들, 힘껏 짊어지고 가거라."
이에, 매니아들이 다투어 군장을 짊어졌으나, 한 사람이 20킬로그램 이상을 지지 못했다.
"너희들, 힘이 한껏 20킬로도 못 지면서 무슨 매니아 생활을 하겠느냐? 인제 너희들이 일반인이 되려고 해도, 이미 주위로부터 밀리터리 매니아로 찍혔으니, 갈 곳이 없다.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폐교 부지를 매수했으니, 밀리터리의 저변확대를 위해 그곳을 한국 밀리터리계의 성지로 만들어 보거라."
매니아들이 좋다고 밀생을 따라왔다.
드디어 폐교에서 다들 밀리터리 물품들을 팔고 서블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밀생이 물품들을 몽땅 쓸어가 밀리터리 시장에 더이상 바가지가 없었다.
그들은 밀리터리 콜렉쳐블들을 팔아 부자가 되었고 부자가 된 그들이 책을 보고 인터넷을 섭렵하며 새로운 고수가 되었다.
그리고 화려한 군장과 지식으로 영화사와 방송국 사람들을 홀려 대한민국에는 밀리터리 붐이 일었다.
밀생이 탄식하면서,
"이제 나의 조그만 시험이 끝났구나."
하고 매니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처음에 컨벤션에 올 때 먼저 군인의 기초인 제식동작과 집총을 가르친 이후에 따로 특수전 훈련과 첩보전 교육을 가르치려 했느니라. 그런데 매니아 층이 얇고 열의가 없으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난다.
다만, 앞으로 매니아 세계에서는 상대방의 나이가 나보다 어려도 항상 정중히 예법을 갖추어 대하고, 누구에게나 배우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남은 군장들을 불태워 버리며
"시간이 썩어나면 다시 만들 사람이 있겠지. 이토록 많은 군장은 한국 전체에도 용납할 곳이 없거늘, 하물며 폐교 안에서랴!"
라고 말했다. 그리고 외국어 구사가 가능한 매니어는 모조리 불러 함께 나오면서
"이곳에 후환을 없애야 하지."
했다.
밀생은 한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밀리터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군장과 자료를 주어 '나도 할수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도 돈이 50억이나 남았다.
"이건 김씨에게 갚을 것이다."
밀생이 김씨를 찾아가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묻자, 김씨는 놀라 말했다.
"당신의 군복이 조금도 뽀대가 나지 않았으니, 혹 5억원을 실패 보지 않았소?"
밀생이 웃으며,
"돈으로 폼생폼사하는 것은 당신들 일이요. 어찌 이 예비역의 포스가 느껴지는 물빠진 개구리복을 폼나게 할 수 있겠소?"
하고, 50억원을 내놓았다.
"내가 하루 아침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군사잡지 1000권 읽기를 도중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5억을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김씨는 대경하여 원금만 이자를 쳐서 받겠다고 했다. 밀생이 역정을 내며,
"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
하고 나가 버렸다.
이튿날, 김씨는 그제서야 그의 이름이 밀생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막사를 찾아가 밀생에게 사과하고 50억을 다시 돌려주려 하였으나, 밀생은 거절하였다.
"내가 돈을 벌고 싶었다면 5억을 빌려서 50억으로 갚았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와 와서 보고 MRE나 떨어지지 않고 일계장이나 챙겨 주시오. 일생을 그러면 족하지요. 뭐하러 돈을 얻고 욕을 얻어먹을 것이오?"
김씨가 밀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했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김씨는 그 때부터 밀생의 막사에 배급이나 군복이 떨어질 때쯤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 주었다. 밀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많이 가지고 가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
하였고, 혹 마리화나를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서로 피우면서 부적절한 관계를 즐겼다..
어느 날, 김씨가 어떻게 5억을 50억으로 늘렸는가를 묻자 밀생이 대답하기를,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밀리터리라는 것은 잘 하면 철모 하나에 3000달러요, 못 하면 같은 철모에 10달러인, 한마디로 극과 극의 장사외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인들이 너도나도 비싸게 팔기만을 원하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현용을 재현하면 유치하다고 외면하고 2차대전을 재현하면 돈지랄이라고 코웃음치기에, 진정한 밀리터리의 고수는 아무도 손대지 않는 장르를 탐식하는 것이외다.
만일 모두가 나처럼 밀리터리를 좋아한다면 반드시 밀리터리 계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
"처음에 내가 돈을 선뜻 내줄줄 알고 요청을 했습니까?"
"꼭 당신만이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국회 텔레토비들이나 타락한 재벌 2세 등 골이 비고 돈만 많은 사람이었다면 누구나 빌려 주었을 것이오.
그 중에 당신이 가장 머리가 나쁜지라, 내가 달라 하면 어찌 주지 않았겠소?"
김씨가 이번에는 다른 얘기를 꺼냈다.
"지금 대한민국 밀리터리계는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때에 선생과 같은 분이 군사잡지 편집장이나 밀리터리 소설가가 된다면 반드시 큰 힘이 될 터인데 어찌 혼자 MRE취식에만 만족하시오?"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매니아가 한둘이겠소? 우선, 뛰어난 매니아인 이대영씨는 높은 지식과 뛰어난 모형솜씨를 가지고 계시나 잡지에만 열중하다 이민가셨고 신이 내린 군사번역가인 유승식씨 또한 지금 일체 밀리터리에 손을 대지 않고 본업에만 열중함을 모르시오? 활동도 안하면서 남 씹기만 좋아하는 지금의 '자칭' 고수들은 가히 알 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단지 책읽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 나의 글이 족히 톰 클랜시에 필적할 만하였으되 그만둔 것은, 도대체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김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김씨는 원래 국방부 장관과도 부적절한 사이였다.
국방부 장관은 새로운 국방력 강화 프로그램에 혹시 쓸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김씨가 밀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장관이 깜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가?"
"소인 그분과 상종하여 3년이 되도록 이름조차 모르옵니다."
"그분은 이인(異人)이야. 나와 함께 가 보세."
장관이 밀생의 막사를 찾아갔다.
밀생은 김씨의 장관 이야기를 듣고도
"당신 가져온 소밥이나 내놓으시오."
그리고 소밥을 만들어 먹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가자 밀생은 장관을 안으로 들였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어떤 지위에 있느냐?"
"이 나라의 국방부장관이오."
"그렇다면 너는 필시 김씨와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겠군."
"-_-;;"
"내가 니미쉘 선생 같은 이를 천거할테니, 국방일보 편집장을 맡길 수 있느냐?"
장관은 어이가 없어서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은 모른다."
그러나 장관이 계속 부탁하자 다시 말을 꺼냈다.
"한국군장이 지금껏 이토록 엿같은 이유는 군수품 단속법 때문이다. 군수품 단속법을 없애고 군장 재래시장을 관광특구로 만들 수 있느냐?"
장관이 다시 곰곰히 생각하다 말했다.
"어렵습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니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가장 쉬운 방법이 있는데, 네가 능히 따를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지금 한국 군인의 인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군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사회 풍토에 기인하고 있다.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라는 자의 자제들부터 현역장교로 군에 입영시키고, 직업군인의 처우개선 및 병들의 봉급 현실화, 군 의식주 개선 등을 이룩한다면 굳이 모병제로 바꾸지 않아도 각군 모병소에 지원자가 쇄도하고, 어떤 최신무기보다도 국방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장관이 힘없이 말했다.
"군의관에게 3000만원만 먹여도 보충역으로 빠질 수 있는데, 누가 장교로 지원입대 하려 하겠습니까?"
그러자 밀생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소위 국방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참신하고 합리적인 의견 수렴엔 관심도 없고 고귀한 국민의 자제들을 군대에 데려다 놓고는 물건 마냥 죽건 다치건 나몰라라 하는 데다, 말끝마다는 어렵다, 어렵다 뿐이니 어찌 우리나라의 안보가 튼튼하기를 바라는가? 너 같은 자가 한국 국방부 장관이란 말이냐? 너 같은 자는 당장 총살형에 처해야 할 것이다."
하고 극악 튜닝된 TOP M60기관총을 집어들고 사방팔방으로 휘두르니 장관이 놀라 뛰쳐나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막사 안에는 BB탄만 잔뜩 나뒹굴고 있고 밀생 또한 간 곳이 없었다.
첫댓글 푸우하하하~ 배꼽빠져따~
ㅋㅋ 밀생전... 대박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