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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 1004의 섬.
증도., 갯벌 공원길
신안군 증도
2017.3.7 극한 스포츠.,철인 3종경기.
임자도 가는 길.
임자도.
선사시대 황해평야 유적지.,임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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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도 흑암리.,어머리 해수욕장 & 용난굴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임자도 튤립 축제.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해변
신안군 임자도
섬은 물에 잠긴 대륙의 일부분이 솟아있는 땅.
약 2만년 전까지 신안군 부근은 바다가 아니었다.
황해는 현재와 달리 물이 비워진 거대한 대륙이었다.
당시 중국과 한반도,일본 열도는 모두 하나의 땅으로 연결
황해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짐승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사람들이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 동물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때는 빙하기로서 세상의 물 대부분이 결빙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해수면은 지금의 해수면 보다 140m나 낮은 곳(주2)에 위치
얼음이 풀리며 대홍수가 시작되었다.
1만년전 어느때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얼음 녹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들어 갔다.
지구를 덮고 있던 엄청난 양의 얼음이 녹으면서
들과 산은 물론이고 대륙까지 물속으로 들어갔다.
임자도가 속해 있던 대륙도 물에 잠기어 갔고
그 자리에는 황해라는 새로운 바다가 생겨났다.
바닷물은 대륙을 삼키는데 만족하지 않고 계속 상승하여
7000년전~ 2000년 전 현재와 비슷한 해안선이 생겨났다.
구석기,신석기 시대인들은 대홍수를 목격하였다.
그들 중에는 살던 마을이 물에 잠기는 것을 보았고
수백리 넓은 땅이 물속에 잠겨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수천년간 대를 바꿔 고지대로 고지대로 이동.
그들은 대홍수의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였으니
우리나라 민족 설화에 나타나는 홍수 신화의 기원이다.
대범람은 모든 것을 삼켰으나 남겨 놓은 것도 있었다.
높은 산이었다.산들은 봉우리만 바다물 위에 내어놓은채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고 임자도 역시 이렇게 탄생되었다.
신안군 앞바다 다도해에 있는 섬들은 원래 산이었다.
신안군에 속한 임자도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섬이다.
황해의 바닷물은 솟아올라 있던 산머리와 산머리 사이에
갯펄을 두껍게 침전시키고 그위에 은모래들을 날라 쌓았다.
여기에 섬에 갇힌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산머리들 사이에 돌다리를 놓았고
농지를 만들기 위해 제방을 쌓고 또 쌓았다.
섬사나이 한 명이 한 바작의 흙을 지고 와 바다에 부리면
그 뒤를 이어 섬 아낙 한 명도 한 메꾸리의 흙을 쏟아부었다.
그들이 흘린 땀의 결실로 뚝이 만들어지고 섬과 섬을 이었다.
임자도는 수천년 바다와 싸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땅이다.
육섬이라 불렸던 자연물에 '천년의 땀'을 더하여 임자도가 탄생.
한반도 해수면이 가장 낮았던 시기는
약 2만년 전부터 1만 5천년 전 사이로
해수면이 오늘날보다 약 140m 낮았다.
한반도와 산동 반도가 뭍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최대 빙하기 직후부터 4천년 전까지
해수면이 1년에 평균 2mm 이상 계속 상승하여 왔다.
산동반도를 감싸고 흐르는 황하강과 양자강의 범람.
특히, 황하강 타고 흘러내린 토사로 인해 명명된 황해.
제방 운하 공사 이전까지 늘 하류 위치가 뒤바뀐 황하강.
매년 홍수로 중국 지형을 뒤바꿔온 황하강과 양자강
지난 1천년 동안은 지구 평균의 2배인 2m 이상 상승
특히 지난 1백년 동안만 무려 40-50cm가 상승하였다.
임자도 주민들은 임자도가
여섯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옛날부터 육섬이라 불렀다.
임자도
임자도는 불갑산, 한박산,검산이라는 3개의 산이 기본 골격이다
청조형(靑鳥形),행주형(行舟形),패장군형(覇將軍形)이라 불렀다.
풍수지리학상 청조형(靑鳥形)이라는 해석은
커다란 푸른새 한 마리가 두 날개를 힘껏 펴고
바다 위를 날아가는 것 같다는 해석에서 나온 것
행주형(行舟形)은 잔뜩 부푼 돛을 세 개나 감아 올리고
황해 바다를 휘달려 나가는 범선을 연상한데서 나온 것
패장군형은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
왕비가 베풀어주는 주연에 참석하여
왕비에게 보고드리는 모습이란 뜻이다.
즉, 희망,추진,승리 3요소가 핵심.
임자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의 흔적은 신석기 유물.
임자도 대기리 삼막동에서 흑운모 편마암으로 만들고
양날을 예민하게 연마한 양인석부(兩刃石斧)가 발견되고
마제 돌대패날,돌끌,숫돌 등 신석기 유물도 함께 발견되었다.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해서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땅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신석기시대 이전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섬이 대륙의 일부였던 때
황해 바다 밑에서 살았던 구석기인.
빙하기 구석기인에게 태양은 따뜻함을 주던 고마운 존재.
그들의 고마움을 이념화하여 태양을 신으로까지 모시며
동토의 땅에서 돌 나무 몽둥이로 짐승을 쫓고 식물을 채취
B.C 6000년 이전 그들은 태양신의 변심을 목격하였다.
제 4 해빙기 말 기온이 점차 따뜻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빙하가 녹아 엄청난 수량이 강이 되어 저지대로 흘러 들어왔다.
얼음은 차츰 서서히 녹은 것이 아니라 급속하게 녹았다.
그들이 농사짓던 땅과 수렵하던 터전은 바닷물에 잠겼다.
광대한 지역이 하루아침에 물에 잠기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태양신의 저주로 세상은 종말을 고하는듯 했다.
그들은 대대손손 댜를 바꾸어 가며 홍수에 쫓기어
현재의 중국 대륙 한반도 일본 등 고지대로 흩어져갔다.
그들의 뇌리 속에 세상의 종말 같았던 대홍수의 전설들
빙하기 추위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는 정도만큼 비례하여
그들의 절대신이었던 태양도 신으로서의 권위를 잃어갔다.
빙하기에는 곳곳에 얼음 눈이 있어
갈증 해소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여기저기 아무데나 살아도
물을 구하는데 특별한 문제가 없어
소수의 씨족단위생활이 가능 하였다.
먹을 짐승과 식물만 있다면
어디에 가서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해빙기에 들어 얼음이 녹아버리자 사정이 바뀌었다.
식수로 사용하던 얼음이 모두 녹아 저지대로 흘러가버렸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물을 구하려고
하천 주변이나 해안가로 몰려 내려왔다.
그곳에는 그들보다 먼저 내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얼마후에 또는 그후에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처음 보고., 처음 만나는 생소한 이들이었다.
서로 경계하며 하천가 곳곳에 곳곳에 움집을 짓고
가족 단위를 훨씬 넘는 집단으로 어우러 살게되었다.
정착생활은 그들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자연환경의 변화에 의해 채택된 생활 양식.
기온의 상승은 사람의 생활양태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
소수집단의 이동생활이 대규모 집단 정착생활로 대체되었다.
많은 집단의 영속적 집단거주는 만가지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수만년 동안 불과 막대기 돌멩이 정도만을 사용해오던 사람들
집단 거주는 집단의 경험을 공간적으로 전파할 수 있게 되었고
문명의 씨앗을 전수할 수 있게 되어 다양한 지식의 축적 되었다.
집단의 정착 새로운 생활양식은
많은 것을 부수적으로 요구하였다.
보다 복잡한 의사전달 수단이 필요하여
언어가 발달되고 마제석기가 개발되었다.
식량 저장 필요에 따라 토기가 만들어졌다.
수렵과 채취라는 구석기 시대의 생산 양식은
좁은 지역에 집단 거주하는 다수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한 식량을 충분히 제공할 수 없었다.
새 생산방식이 모색되어졌으며
농경과 목축 어업 등이 등장하였다.
정교한 사회생활이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사회적인 규범이 등장하였다.
새로운 종교도 등장하였다.
태양신이 숭배되고는 있었으나
그 권위는 점진적으로 약해져 갔다.
집단 거주과정에서 주도권을 잡게된 집단의 후손들은
주도권 노하우를 상속받게 되면서 남의 씨족에 비추어
우월성을 깨닳으며 자신의 조상들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씨족간 차별화가 시도되며
조상신이 태양신을 대신하여
새로운 숭배대상으로 떠올랐다.
역사는 변화를 받아들인 신석기인들이
새 집단거주 세상에서 주인공이 되었다.
타오르는 문명의 불길은 마제석기에 이어
금속 생활도구 사용이라는 변화로 이어졌다.
인류가 최초로 사용하게 된 금속은 청동이었다.
청동의 사용은 인류의 지혜를 한단계 더 성숙시켰으며
이에 의해 인간 역사는 가파른 물줄기를 타기 시작했다.
청동 주조법을 알게된 이들은 청동기 파괴력에 주목했다.
그들은 그것으로 검과 방패를 만들었다.
청동검은 지금까지 사용되어 오던 목검이나
석검에 비할 수 없는 살상력을 가진 공포의 무기.
청동은 재질이 비교적 무르기 때문에
검과 검을 맞부딪치는제 적합하지 않다.
청동검을 든 전사들은 손잡이 끝부분을 손바닥으로 움켜쥐고
앞으로 내질러 찌르고 한번 더 힘을 주어 깊숙히 칼을 찔러넣어
상대방을 확실히 살상한 다음에 청동검을 90도 돌려 뽑아내었다.
목검이나 돌칼로 무장한 구시대 전사들은
청동검 용사들에게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석검은 100명을 지배하게 하였으나
청동검은 1000명을 지배하게 하였다.
청동검 전사들은 광범위한 지역의 거주민들을
청동검 아래 복종시키고 그들의 복종을 항구화
자기들의 지배를 영속시킬 정치 체제를 만들었다.
정치권력을 기초로 하는 국가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그 정치권력은 청동검으로부터 나왔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이들을 청동기인이라 규정
청동기인들에게 있어 청동은 단순한 금속이 아니었다.
청동기는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힘과 지배자로서의 도구
청동은 만인이 가져보기를 소망하는 성물로 숭배받게 되었다.
청동은 종교까지 변화시켰다.
청동검 보유자가 곧 숭배의 대상.
청동검 방울소리 자체가 신의 음성.
거울 모양 청동기 방패를 만들어
자신의 치명적 급소를 가림으로써
자신이 불가침의 신분임을 과시했다.
청동기를 가진 이들은 싸우는 [전사]에서 [샤만]이 되었다.
청동검과 청동 방울과 청동 거울은 이들의 상징물이 되었다.
청동검 청동방울 청동거울 3종의 청동기를 보유한 자가 샤만
권위가 사라져 버린 태양신이나 조상신 대신
뭇사람 위에 군림하며 세상을 다스려 나갔다.
세상의 이치는 하늘이 관장하고 자신이 하늘의 명을 받아 그를 대신한다
그 증표로서 청동 3기를 내세워 인간의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지배
이러한 세계관을 지닌 청동기인들이 서남해안 육지로부터 섬으로 들어왔다.
1971년 임자도 삼막동 뒷산에서 돌도끼 등
신석기시대의 마제 석기류가 발견 되었다.
삼막산 정상에 군사 시설을 설치하던 중
땅속에서 마제(磨製) 석기류(주3) 다수 출토
발견된 유물 대부분은 이리저리 흩어져 버려
소장처를 알 수 있는 유물은 양날 돌도끼 1점 뿐
임자도 청동기인들은 영광 백수쪽에서 건너와
지금의 임자도 장포만(長浦灣) 일대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목기(木器),토기(土器)와 돌도끼(石斧)를 사용
패총은 임자도의 청동기 유적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임자도 내 지석묘(고인돌)은 4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패총은 구산 염동 마을 뒷산 야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조개껍질은 밭의 표토 층 바로 아래 있다.
출토되는 유물은 주로 토기의 파편들이다.
이 패총은 청동기 시대 말에서
초기 철기 시대에 사용된 패총.
지석묘는 임자도 내 모두 12기가 확인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 후기에서 초기 철기 시대의 유적이다.
대기리 의령 남씨 세장산 비석 바로 옆에 고인돌 2기
1기는 비석을 세울 때 원위치에서 옮긴듯
고인돌 개석(蓋石)이 비스듬히 경사져 있다.
나머지 고인돌 하나는 원위치가 그대로이다.
이것은 지석묘 중 연대가 가장 늦은 개석식 지석묘
임자도 대기리의 또 다른 고인돌군은 대망산에 있다.
이것은 의령남씨와 김해김씨 선산 경계 지점 서쪽에
자연석과 함께 있으며 지석묘 5기가 남북 일렬로 위치
단도리 지석묘는 야산 서쪽 기슭밭 사이에 있다.
하부가 매몰되어 있어 지석은 확인되지 않았다.
화산리에도 3기.,구산리)에도 지석묘 개석이 7개.
위의 지석묘들은 모두 전남의 다른 지석묘들처럼 개석식 지석묘
임자도 지석묘 문화는 인근 영광군의 지석묘 문 영향을 받았을 듯
고인돌은 과거 지배계층 무덤으로 파악하였으나
최근에는 가족묘지나 공동묘지로 생각되고 있다.
이 외에도 임자에는 많은 선사시대의 유적이 있다.
임자도 청동기시대 유물은 서울대학교와 목포대학에 의해 확인되었다.
서울대 최몽룡교수는 삼한 해로답사(三韓 海路踏査)로 임자도를 방문
선사유적을 조사하였고 '임자도의 선사유적' 연구논문)에 결과를 발표
목포대학에서는 '신안군 문화유적' 지면을 통해
임자도 선사 유적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청동기 이후 집단화 정치적 표징은 국가 권력의 등장이다.
국가권력은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에 이르러 강화된다.
기원 전후 한반도 남쪽에는 수십 수백개 소국들이
하천가나 저지대 평야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았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해온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란 없었다.
또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차도간,피도간,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9간이 있었다.
이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백 호로서 7만 5천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
........,,,,,,,,,,,,,,,,,,,,,,,,,,,..................
당시의 생활상을 정감있고 단아하게 표현한 글이다.
역사 서술 중 이만한 문장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我刀干은 '나도 간'이라는 말의 이두식 표기이다.
간은 한과 같은 뜻으로서 추장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汝刀干은 '너도 간',彼刀干은 '저것도 간'이라는 말이다.
五刀干은 '다섯째도 간'이라는 말로 보인다.
이로 볼 때 五刀干 앞에 '此刀干',즉 '이것도 간'
留水干은 '여섯째도 간'이라는 말로 풀이된다.
이렇게 보면 당시 9간이 아니라 10간이 있었던듯.
위 글은 신석기시대 무리의 규모에 대해 대변해준다.
1백호가 7만5000명 1戶 즉 1개 씨족이 약 750여명 정도
(100호×750명=7만 5000명)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또 10간이 1백호라는 말은 1간이
10호 정도 씨족을 지배했다는 말.
이 문헌으로 보면 간은 부족장에 해당하며
1개의 부족은 약 7500여명으로 이루어졌다.
천지개벽 후 나라가 없었을때 당연히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750여명의 사람들이 1개의 호를 이루어 무리생활을 하고 있었고
10호가 또 집단을 이루어 간이라 불리는 사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들 간들은 나도간이요 너도 간이라
서로 부르며 대등한 관계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
이것이 한반도 남단 신석기시대의 모습
임자도 신석기 문화 시대에 한반도 남단에 더 큰 부족 연맹체가 출현
이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서 경기,충청, 전라지역에서 발전한 마한(馬韓)
마한세력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충청도 지역에 있던 목지국(目支國)이었다.
마한 소국에는 지배자 외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지역으로 소도(蘇塗)라는 별읍을 두었다.
마한 소국인은 초가지붕 반움집이나 귀틀집에 살며
괭이 낫 도끼 가래 자귀 등 목제 농기구를 이용하여
벼와 오이 참외 박 호두 살구 등 밭농사를 지었다.
나무구멍 마찰로 불을 피웠고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었다.
그들은 해마다 5월 수릿날과 수확기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 날 모두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놀았다.
이 때 급격한 상황변화가 발생한다.
마한 소국 중 하나가 다른 소국들을 접수
그 팽창 주역은 한강 유역에 있던 백제였다.
백제는 세력권을 경기도와 충청도 방면으로 넓혀나갔다.
마한 소국들은 목지국을 마한왕으로 추대해 백제에 대항
그러나, 강력한 문명 체계를 갖춘 백제와의 싸움은 역부족
청동검을 휘두르는 백제에 쫓겨 내려간 마제석검과 돌도끼
전라도 소국들은 유이민을 흡수해 신미제국(新彌諸國)을 형성
나주군 반남면과 무안,영광을 중심지로 하여
뒤늦게나마 청동기를 수입하고 힘을 키워갔으나
백제가 철기문화까지 받아들이며 성장해가자 패망
임자도는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 형성된 신미제국 일원
마한,특히 신미제국과 동일한 생활양식을 갖고 있었다.
마한을 병합한 백제는 그 땅에 자신들의 행정구역을 설치
마한 서편 섬지방도 백제의 통치권력 내부로 편입되었다.
백제는 임자도 주위의 섬들을 하나의 행정단위로 묶었다.
현(縣)은 말단 행정단위
이름은 고록지현이었다.
당나라 역사가 장초금(張楚金)., [한원](翰苑) 저서
남해 가운데 큰 섬이 15개 모두 성읍을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다 - 백제가 현을 설치했음을 대변해준다.
우리는 백제시대 섬 생활상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백제에 대한 기록이 너무도 단편적이고 부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문학작품들이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인 서동요., 백제 가요.
삼국유사는 백제 무왕(재위기간 : 609-642)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를 유혹하기 위해
지은 노래 서동요를 학계에서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 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놓고 맛둥방을 밤에 몰래 안고가다
他密只는 1차적으로 [남 몰래]라는 의미이다.
2차적으로 [남다르게 빽빽하다](남다를 他 빽빽할 密)
只(다만 지)는 무엇을 가리키는 한자인가?
여기에 서동요 작시의 묘미가 압축되어 있다.
只 한자 형태는 양다리 위에 입.,즉 여성의 성기
삼국시대에는 여자가 성기에 털이 많을 경우
남자를 밝힌다는 속설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샛서방을 남몰래 감추어두고서 섹스행각을 벌이는가 하면
성 행위시마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신음소리
신라왕은 시중에 퍼진 노래를 통해 딸의 호색행위를 알게 되었고
밤마다 기성을 질러대는 딸이 부끄러워서 궁중에 둘 수 없었을 것
선화공주의 추방 이유는 밤마다 질러대는 못말리는 기성에 있었다.
임자도 해협은 삼국시대 말기 백제를 돕기 위한 원정군 선단이 통과
망국백제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피난해가며 눈물을 뿌렸던 해협이다.
당은 10만 군사로 서해안을 기습 상륙
신라와 함께 백제를 무너뜨리고(660년)
이어 고구려 정벌 작전을 완수(668)하였다.
백제 멸망의 시기에 임자도해협은 피난과 구국의 통로
백제의 부흥을 위하여 왜의 제명천황과 천지(天智)천황은
대규모 선단을 편성하여 나당연합군에 맞서 백제를 지원했다.
이 수군 선단은 임자도 해협을 거쳐 북상하여 올라갔으나
얼마후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해 수장되고 말았다.
이어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 주유성마저 신라에 함락되어
사비성 함락 후 3년만에 전쟁은 끝나고 백제부흥 꿈도 수포
백제 부흥을 위해 대당 전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임자도 해협을 통하여 백제의 분국 왜(倭)로 건너갔다.
이때 원인(圓仁) 일본인 승려는
백제멸망 190여년이 지났을 무렵
신안 지역을 지나 당나라에 들어가면서
이곳이 백제의 세번째 왕자 피난처 였음을
임자도 주민들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임자도 주변 주민들의 구전....................
백제의 왕족들이 배를 타고 남쪽으로 탈주하다가
낙월도에 이르렀을 때 하늘의 달이 나라의 운명처럼
가라앉았다고 해 섬의 이름이 [진다리가 되었다]는 전설
패망 백제.부흥 운동의 주인공들은 배를 타고 왜국으로 이주
그때까지 우리 민족사의 일원이었던 왜는 임자도 해협을 빠져나간
백제의 유민들과 힘을 합쳐 [일본]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다.
왜국은 백제패망(663년)후 우리 민족으로부터 분리
임자도 해협은 일본이 빠져나간 산도에 해당되는 곳.
패망 백제인들은 왜국 정치중심지 아스까네 정착.
아스까는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가 형성된 곳이다.
신라는 백제의 옛땅에 자신들의 통치기구를 설치
전라남도 광주 땅에 통치 중심지인 무주를 두었고
나주땅에는 미다부리정이라는 군사 중심지를 설치
전남 서해지방 섬들 만 모아 독립된 군을 설치하였다.
이 도서 군이 압해군이며 지금의 신안군의 전신에 해당
압해군에는 염해현, 갈도현 ,안파현이 소속되어 있었다.
신라는 漢化政策의 일환으로 토착지명을 개정하였다.
백제국 고록지현은 가락지를 뜻하던 우리말에서 염해현
임자도는 신라 무주 압해군 염해현 행정체계에 편입된 것
섬의 이름과 지배자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섬의 소유도 주민들의 손에서 떠나갔다.
섬은 신라 재상들의 소유로 떨어졌다.
그들은 차지하게된 섬에 목장을 설치.
섬은 말을 방목하기에는 최적지였다.
300-400호 주민들이 말과 함께 생활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신라는 문화 절정기
그후 체제 피로 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왕위계승을 둘러싼 중앙귀족들의 내분으로
변방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현저히 약해졌다.
주민 유민화 현상이 나타난 지역에 해적들이 창궐
그들은 백성들을 약탈하여 중국에 노예로 매매.
당시 해적들은 서해 도서지역 주민들이 주요 표적
이러한 시대 [장보고]라 불리는 영웅이 출현하였다.
그는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에서 출생
생활고로 당나라 강소성 금산현 서주로 이주
당시 산둥반도는 고구려 유민 후손 이사도 일가가
55년간 치외법권적 번진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서주지역의 이사도 토벌 당나라 관군에 입대
당 현종은 이사도 토벌군을 동원하는 한편
당은 819년 7월 신라에도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에따라 신라장군 김웅원이 삼만을 이끌고 출병
김웅원이 당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사도 일파가 관군에 의해 제거후
이곳에서 김웅원은 당에서 이사도 진압의 공을 세우고
소장이라는 직책으로 승진한 장보고를 접촉할 수 있었다.
현지 사정에 어두운 김웅원이 장보고 도움과 정보를 받았다.
그후 두사람의 인연은 깊어지게 되었다.
신라에 귀국한 김웅원은 김우징(훗날 신무왕)과 함께
822년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고 군사적 최고 실세로 떠올랐다.
한편 고위장군의 후원을 얻게된 장보고는 그의 지원을 받아
당나라 적산현 신라방에 법화원을 건설한 후에 귀국하였다.
그는 군사적 실세 김웅원과 정치적 실세 상대등 김우징 도움으로
828년 4월 흥덕왕으로부터 군사 1만을 받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
해적을 소탕하고 신라 말경에는 대표적 지방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던 중 중앙의 정치 상황이 급변하였다.
그의 후원자였던 김우징이 왕위 쟁탈전에서 패배
겨우 죽음을 모면한 채 청해진의 장보고를 찾아와
"불구대천의 원수들을 제거 하여주시오.
내가 왕위에 오르면 그대 딸을 태자비로 삼겠오"
라며 지원을 요청하였다. 장보고는 쾌히 승낙하였다.
장보고는 군사를 일으켜 무주에서 경주 민애왕 군사를 격파
대구에 이르자 이번에는 민애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다.
그러나 민애왕도 일패도지 하여 곧 군사들에 잡혀 살해되었다.
김우징은 왕으로 즉위하면서 장보고에게 감의군사 칭호를 제수
식읍 이천 호를 봉하여 주었으나 즉위 몇개월 후에 등창으로 사망
김우징의 아들이 신라의 문성왕으로 즉위하였다.
문성왕은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았다.
또 아버지와 장보고 간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반대하여 약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장보고는 불편해진 마음으로 청해진에서 두문불출하자
문성왕은 장보고를 제거할 목적으로 자객 염장을 보낸다
하여, 장보고는 피살되고 그가 이룩하였던 청해진은 풍비박산
청해진 주민들은 벽골군(김제)으로 옮겨졌다.
완도읍 장좌리 서북쪽 장좌 계곡 동백림 구릉
여섯 기의 묘 가운데 목 없는 무덤이 그의 무덤
신라말 후삼국시대 견훤과 궁예 양인은 숙명적으로 적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충청도 지방을 대체적인 경계로 하고 있어
두 사람의 본격적 접전은 충청도와 경기도 일원에서 일어나야 했고
전쟁의 불똥은 신안군 지역에서 먼저 튀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궁예군은 전주에 도읍을 정한 견훤의 견제를 위해 배후지로 상륙작전
궁예는 909년 부하 왕건에게 군사를 주어 전남 서해안 지역을 공격했다.
당시 33세 수군 장수 왕건은
수군선단을 동원 한강 하류지역에서부터
서해를 타고 내려와 신안군 맞은편 서남해안에 기습 상륙
이어 왕건은 금성(현재 나주)을 함락하고
부근 10여개 군을 빼앗아 교두보로 삼았다.
견훤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패망
909년 서남해안을 둘러싼 궁예와 견훤의 대해전이 시작되었다
왕건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일단의 군사는 광주 견훤군을 압박
한편 또 다른 왕건의 군사는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도록 하였다.
왕건은 먼저 임자도 해역(당시 압해군 염해현)에 무력 진출해
견훤이 중국의 오나라와 월나라로 보내는 교역선을 나포하였다.
이어 왕건은 남으로 전선을 확대해 고이도와 진도까지 함락시켰다.
궁예군 작전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던 견훤이 기민하게 대응
육군을 남하시켜 영산강에 집결후 자신도 수군을 거느리고 궁예를 뒤쫓아
내려와 영산강 하구에서 견훤과 왕건 두 기린아의 결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견훤은 전함을 벌여세워 위력시위를 벌였다.
군세는 목포에서 덕진포(영암군 덕진면)까지
배가 서로 잇닿을 정도였고 사기가 충천하였다.
왕건 군사들은 견훤군 세력 앞에 전의를 상실
왕건은 [싸움의 승패는 인화에 달려있지
군사가 많고 적은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부하 군사들의 선두에 서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왕건은 때마침 바람이 등뒤에서 불어오자 화공을 명하였다.
왕건 측에서 쏘는 불화살이 견훤군 배에 맹렬히 옮아 붙었다.
견훤의 대군은 태반이 우왕좌왕 불에 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왕건군이 500여명의 목을 자르니
견훤은 조그만 배에 옮겨타고 탈출
왕건은 견훤의 체포와 잔적소탕에 나섰다.
이 때 견훤의 군에 압해현(신안군) 출신인 능창(能昌)이라는 수군장수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모으고 갈초도 주민들과 연합하여 왕건에 맞섰다.
왕건은 능창의 반격에 패주하던 견훤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그는 휘하장수들에게 [능창이 섬 주민들과 연합하여 변란을 꾀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수는 적지만 우리의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를 알 수 없게 될 것
헤엄을 잘치는 자 10여명을 무장시켜 밤중에 작은 배에 태워
갈초도 나루에 보내 그를 잡아 계획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왕건의 부하들이 갈초도에서 능창이 타고 있는 배를 나포하였다.
생포된 능창은 궁예에게 압송되어갔다.
궁예는 크게 기뻐하면서 묶인채 끌려온
능창장군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해적들이 너를 추대하여 두령으로 하였지만
포로가 되었으니 나의 계책이 신기하지 않으냐"
하고 모욕한 다음 그를 죽이었다.
능창장군은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신안군 출신 수군장수였다.
위기에 몰린 주군을 위해 후방교란 게릴라전을 벌인 그의 행동은
배신을 능사로 하던 당시의 풍토에서는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 되었다.
그의 행동은 기존의 풍토를 대체하였고
적군이던 왕건의 진용에서도 신숭겸 등이
능창의 뒤를 이어 새시대의 도덕률로 정착된다.
대해전의 승리로 궁예는 서남해안 견훤군을 몰아내고 교두보를 구축
궁예는 왕건의 공로를 표창하여 왕건을 대아찬(5등급)의 장군으로 삼았다.
파괴자는 건설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후고구려를 세웠던 궁예에게도 적용되었다.
문란했던 신라 체제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혁명가 궁예
궁예의 실각은 측근과 장졸에 대한 처단은 물론 부인이 간통하였다고
쇠막대기를 불에 달구어 부인의 음부를 지져죽였다는 등 실정에 기인
왕건은 궁예의 포악함에 신변 위협을 느꼈다.
대해전 이후 파진찬(4등급)으로 승진되어
중앙의 내직으로 전보되어 근무하던 왕건
중앙에 있을 경우 자신도 목숨을 잃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
나주로 내려와 유능한 인재들을 얻고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
나주에서 두번째 부인 오씨 왕후
곡성에서는 개국공신인 신숭겸,
영광에서는 김심언,
영암에서 내사령 최지몽,등
핵심인맥이 구축되었다.
새로 갖추어진 측근 인맥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측근 신숭겸이 918년 복지겸등과 함께 거사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4등급 관직 왕건을 왕으로 추대
그러나 삼국통일의 기회는 먼저 견훤에게 다가왔다.
견훤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함락시키고 신라를 접수
신라 경애왕을 국정문란의 책임을 물어 처단하고
점령지 관리자로 경애왕의 친척 김부를 임명.
왕건이 견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대구 팔공산에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왕건은 견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왕건군은 견훤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받아 붕괴되었고
왕건이 위기에 몰리자 왕건의 심복 신숭겸이 나섰다.
신숭겸은 왕건의 옷을 입고 왕건의 수레를 타고
포위하고 있던 군사 가운데로 돌진하였다.
견훤 군사들은 그를 왕건으로 착각하고 그의 목을 베었다.
견훤은 삼국을 통일한 것으로 착각하고 회군을 명하였다.
왕건은 죽음을 모면하고 도주에 성공하여 군사를 정비
경주의 김부는 견훤을 배신한 다음 왕건과 연합하였다.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일진일퇴 소모전이 계속
후백제 지도부에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의 큰아들 신검(神劍)이 견훤을
김제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왕위를 찬탈
견훤은 석달뒤 금산사를 탈주하여 왕건의 영토 나주로 도피
왕건은 병선 40여척을 보내 견훤을 융숭 환대하며 맞이하였다.
견훤은 왕건측의 선박으로 서해를 타고 북상하여 왕건에게 투항
견훤의 고려망명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순왕 김부는
급거 곳간의 열쇠와 미녀(김억렴의 딸)를 데리고
왕건에게 달려와 나라를 바쳤다.신라가 망한 것.
왕건은 936년 9월 견훤을 앞세우고 후백제군과 최후의 결전
후백제군은 어제의 주인에게 대들지 못했고 견훤에 의해 붕괴
견훤은 전쟁 끝난 직후 황산불사(黃山佛寺)에서 등창으로 병사.
평범한 무장으로 수군을 이끌고
신안군 지역을 방문하였던 왕건
이곳에 진출해 일곱가지를 얻었다.
정치 군사적 기반
경제력을 얻었고
측근들을 얻었고
목숨을 구했고
나라를 얻었고
통일을 얻은 다음
후계자까지 얻었다.
신안군은 왕건의 성공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신안군이 없었다면 집권도 건국도 통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