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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TV 앞으로 다가가 옆면의 단자함을 보라. 비교적 최신 모델이라면 더 좋다. 몇 개의 HDMI와 USB 포트가 설치돼 있는가. 또 그 가운데 몇 개가 점유돼 있는가. 아직 비어 있는 포트가 있다면, 그 빈 HDMI 단자가 TV의 미래를 향한 관문이라고 한다면 믿겠는가?
넷의 아버지 빈트 서프는 말했다. “우리는 곧 인터넷을 통해 대부분의 TV를 시청하게 될 것이다.” 그의 예측은 7년이 지난 지금에도 실현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TV를 지상파나 케이블TV 셋톱박스로 시청하는 패턴은 여전하다. 그 비중이 줄어들고 있을 뿐이다.
사실 TV 종말론은 영미권에선 생소한 단어가 아니다. 코드 끊기(Code Cutting), 제로TV 등은 전통적인 TV가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현실을 상징하는 키워드이자, 동시에 TV 종말을 예고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빈트 서프의 예측에 서서히 힘이 실리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 또 하나의 전쟁이 불붙었다. ‘OTT(Over The Top) 박스’라 불리는 소형 스마트TV 박스 간 HDMI 선점 경쟁이다. 애플TV, 로쿠, 크롬캐스트, 파이어TV까지. 그야말로 ‘백가쟁명’이라는 표현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다. 저 멀리 미국에서나 터질 것 같은 전쟁이 지금은 국내로도 옮겨붙을 전망이다. 그 선두에 크롬캐스트가 서 있다.
지상파·케이블TV 독점 구조 깬 OTT
△미국 광고 시장 현황 및 전망(자료 : 이마케터)
TV 스크린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IT 거인들의 욕망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구글은 ‘구글TV’를 내세웠다가 실패의 쓴맛을 봤다. 애플은 취미 수준이라고 언급하긴 하지만 지속적으로 ‘애플TV’를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X박스’도 호시탐탐 거실 TV를 겨누고 있다. 거대한 인터넷쇼핑 기업인 아마존도 ‘파이어TV’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IT 분야에서 웬만한 규모를 자랑하는 기업들은 너도나도 TV 화면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그들은 왜 TV를 바라보고 있을까.
답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곳에 광고가 존재하고 돈이 풀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용자의 안정적인 시선이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TV 광고는 전체 광고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미국 시장을 기준으로 대체로 39% 안팎에서 안정적으로 형성돼 있다. 규모가 큰 만큼 성장세가 높진 않지만 2017년까지 3%대 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디지털 비디오 시장도 점차 성장률이 둔화되고는 있지만 10% 성장세는 3년 뒤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과 모바일 광고를 장악한 IT 거인들이 놓쳐서도, 놓칠 수도 없는 노른자위다.
하지만 여태까지 TV 스크린으로의 진입로는 늘 막혀 있었다. 이성춘 KT경영경제연구소 박사는 이를 두고 “병목 현상”이라고 표현했다. 들어가고 싶은 플레이어는 많은데 지상파와 케이블TV가 전파와 셋톱박스로 막아서면서 교통체증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이들은 TV 스크린으로 들어가는 길을 틀어막아 통행료를 받는 식으로 접근의 독점을 누려왔다.
이러한 독점 구도가 서서히 깨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TV 옆면, HDMI 포트가 새 길을 제시한 것이다. 구형 TV에서 만날 수 없었던 HDMI 포트는 인터넷과 TV 스크린이 도킹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그저 액세서리로만 보였던 이 포트가 TV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할 힌트가 되고 있다.
현재 출시되고 있는 대부분의 OTT 박스는 모두 HDMI 접속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애플TV, 크롬캐스트, 파이어TV에 심지어 국내에서 출시된 애브리온TV캐스트까지. 전파나 케이블TV의 셋톱박스의 담벼락이 너무 높아 넘어서지 못하는 시간이 계속되면서 새로운 우회로를 발견한 것이다.
선수는 애플TV가 쳤다. 애플은 ‘에어플레이’ 기술로 TV로 곧장 진입했다. 동일한 와이파이에 연결돼 있으면 iOS 기반 기기의 콘텐츠를 애플TV라는 소형 박스를 거쳐 TV 스크린으로 직행할 수 있게 했다. 경쟁 사업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넷플릭스와 유튜브는 ‘DIAL‘(Discovery and Launch)이라는 기술을 개발해 TV 스크린으로 곧장 진입을 시도했다. 이들은 프로토콜도 오픈소스로 공개했다. 더 많은 사업자가 TV 스크린으로 다가설 수 있는 경로를 열어두기 위해서다. 크롬캐스트와 로쿠 스트리밍 스틱, 파이어TV가 그 적자이다. DIAL은 ‘스마트폰에서 TV에 있는 앱을 찾아 활성화시킬 수 있는 프로토콜’을 의미하는 기술 용어이다.(이성춘·박유진 보고서 전문 보기)
△미국 광고 시장 현황 및 전망(자료 : 이마케터)
크롬캐스트 vs 국내 OTT
국내에서도 서막이 올랐다. OTT 박스 가운데 처음으로 크롬캐스트가 5월14일 국내에 출시됐다. 가격은 4만9900원이다. 콘텐츠 사업자와 손도 맞잡았다. CJ헬로비전의 ‘티빙’과 네이트 ‘호핀’이다. 출시 전부터 크롬캐스트를 사용해 왔다는 이찬진 전 한글과컴퓨터 대표는 자기 블로그에 “푹과 티빙 등 다양한 서비스가 아직 지원되지 않는다”라고 크롬캐스트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구글은 일단 티빙, 호핀과의 제휴로 최소한의 콘텐츠는 확보한 셈이다.
국내 업체들의 ‘응전‘ 태세도 본격화하고 있다. 현대HCN과 판도라TV가 공동으로 설립한 에브리온TV는 올해 초 ‘에브리온TV캐스트’라는 스틱형 OTT 박스를 출시했다. 가격은 9만원대로 크롬캐스트보다 높지만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점으로 차별화했다. 초기엔 B2B 전략을 취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판매망을 확대한 상태다.
잠잠하던 ‘다음TV’도 신발끈을 죄고 있다. 셋톱박스를 5만대 이상 판매한 다음TV는 당분간 B2B 시장을 우선 공략한다는 전략이지만, 올 겨울께 크롬캐스트와 같은 스틱형 동글 제품을 내놓으며 경쟁 구도에 가세할 심산이다. 콘텐츠 제휴선도 확대해가며 한국판 ‘코드 커팅’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외에도 가온미디어, 휴맥스 등도 동글형 OTT 박스를 내놓으며 경쟁적으로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한국과 미국, TV 시장 어떻게 다른가
이제 핵심으로 돌아가자. 백가쟁명과도 같은 OTT 박스 전쟁이 과연 국내 전통적인 TV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특히 지상파 방송국과 케이블TV엔 위협적 요소로 자리잡게 될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크롬캐스트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미국 시장과 막 시장이 싹트려고 하는 한국 시장의 차이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 유료방송 시장은 미국과 비교할 때 가입 요금이 저가에 형성돼 있다. 미국은 케이블방송을 시청하려면 매달 100달러 이상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신호철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2012년말 기준으로 전형적인 TPS서비스의 월 이용료는 약 118달러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2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금액”이라고 설명했다.(보고서 전문 보기) 넷플릭스가 7.99달러에 서비스되면서 선풍을 일으킨 배경도 이러한 여건에서 기인한다. 반면 한국은 미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넷플릭스 월 이용료 정도만 지불하면 다양한 콘텐츠를 케이블TV로 볼 수 있다.
신규 진입자와 현 사업자가 동일하다는 점도 미국과 구분되는 한국 시장의 특징이다. 미국은 구글, 애플, 넷플릭스, 아마존 등 신규 진입자들은 컴캐스트, 타임워너케이블과 같은 구 사업자들과 구별돼 있다. 하지만 국내는 크롬캐스트로 진입하려는 사업자와 기존 지상파나 케이블TV 사업자가 동일하다. 같은 식구다. 자칫 같은 식구끼리 TV 스크린의 한정된 시장을 놓고 전쟁을 벌이는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100만대 넘는다” vs “기껏해야 15만대”
두 나라 간 시장 차이를 감안할 때 크롬캐스트의 성공과 실패를 기계적으로 재단하긴 어렵다. 그래서 의견이 엇갈린다. 티빙 서비스를 이끌고 있는 김종원 CJ헬로비전 실장은 “핵심은 크롬캐스트를 포함할 때 총합이 100만대에 얼마나 빨리 도달하느냐”라고 전제하면서 “아주 안될 것 같지는 않다”라고 조심스레 전망했다. 반면 미디어산업분석가 조영신 박사는 “프로모션 물량을 제외하고 15만대 판매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내다봤다.
크롬캐스트의 판매량 여부와 관계없이 당장 지상파와 케이블TV에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해선 의견이 다르지 않았다. 김종원 실장은 “크롬캐스트는 모바일을 통해 TV에 없던 수요를 만들 수 있는 기회이고 새로운 수입원을 창출할 수 있는 시장”이라며 “모바일에 있는 지형을 TV로 연계시켜주는 개념이므로 오히려 소비를 촉진시킬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조영신 박사도 “단기적으로 봤을 때 기존 사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내다봤다. 크롬캐스트 판매량도 판매량이지만, 기존 사업자들이 제살 깎아먹는 카니발 효과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크롬캐스트에 탑재된 티빙 등에 콘텐츠를 공급하는 제작사들이 더 높은 공급료를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사업적 비중을 두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인터넷방송사의 TV 진입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기존 방송사에 소소한 위협 요인이 될 수는 있다. 박유진 KT경제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웹의 UGC보다 월등한 품질을 가지고 있는 기존 콘텐츠 보유사는 DIAL을 통해 직접 콘텐츠 유통에 나설 수 있다는 점에서 OTT나 기존 유료방송 플랫폼 사업자 모두에게 위협적인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보고서 전문 보기) 예컨대 현재 유튜브 등으로 전달되고 있는 ‘뉴스타파’와 같은 중소 규모의 콘텐츠 보유사는 케이블TV SO나 지상파를 거치지 않고 시청자를 직접 만날 수 있게 된다.
5월 14일, 예정대로 크롬캐스트는 출시됐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미국처럼 국내에서도 방송 시장이 요동칠지 아니면 찻잔 속 태풍에 그칠까. 이제 소비자 선택만 남았다. 빈트 서프의 예언이 2014년 한국에서도 들어맞을지 더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