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 司馬懿傳
- [진서] 권1 선제기 + 교감기 입니다. 교감기는 중화서국에서 전대의 각 판본들을 종합하여 현대식 구두점을 넣고 출판할 때 그 교감한 경위를 설명한 것인데, 그냥 제가 진서 본문에다 주석 형식으로 덧붙였습니다. [진서]는 당태종 때 방현령 등 20여 인이 공동집필한 책이며, 이에 관한 해제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history.go.kr/front/dirservice/chinacho/viewDocumentChinacho.jsp?pGubun=VIECH&pLevel=4&pDatabaseID=jo_005_001&pRecordID=jo_005_001b_hj&pDocClass1ID=&pFlge=T") - 원문은 한적전자문헌(http://www.sinica.edu.tw/~tdbproj/handy1")에서 가져왔고 오탈자는 중화서국 점교본(1974년)을 참조해 수정했습니다. 해석은 신동준 역 자치통감 삼국지, 자치통감전역, 24사전역 등을 참고했구요. 그리고 본문 중에 ※로 표시된 부분은 제가 임의로 보충설명을 덧붙인 부분입니다. 宣皇帝諱懿,字仲達,河內溫縣孝敬里人,姓司馬氏。其先出自帝高陽之子重黎,爲夏官祝融。歷唐、虞、夏、商,世序其職。及周,以夏官爲司馬。其後程伯休父,周宣王時,以世官克平徐方,錫以官族,因而爲氏。楚漢間,司馬卬爲趙將,與諸侯伐秦。秦亡,立爲殷王,都河內。漢以其地爲郡,子孫遂家焉。自卬八世,生征西將軍鈞,字叔平。鈞生豫章太守量,字公度。量生潁川太守儁,字元異。儁生京兆尹防,字建公。帝即防之第二子也。少有奇節,聰朗多大略,博學洽聞,伏膺儒教。漢末大亂,常慨然有憂天下心。南陽太守同郡楊俊名知人,[1]見帝,未弱冠,以爲非常之器。尙書淸河崔琰與帝兄朗善,亦謂朗曰:「君弟聰亮明允,剛斷英特,非子所及也。」 校勘記/[1] 南陽太守同郡楊俊 「南陽」,各本皆作「南郡」。錢大昕廿二史考異以下簡稱考異:「魏志俊爲南陽太守,非南郡。」今據改。 선황제(宣皇帝)는 휘(諱)가 의(懿), 자(字)는 중달(仲達)이고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사람으로 성(姓)은 사마(司馬) 씨다. 그의 선조는 제(帝) 고양(高陽)(전욱 고양씨)의 아들인 중려(重黎)로부터 나왔으며 (중려는) 즉 하관(夏官) 축융(祝融)이다. ※ 사마천 [사기] <초세가>에 의하면 중려(重黎)는 전욱(顓頊) 고양(高陽)의 증손자인데, 제곡(帝嚳) 고신(高辛) 때에 화정(火正)으로 임명되어 천하를 밝혔으므로 축융(祝融)으로 불리었다 합니다. 참고로 [사기]의 설에 따른 삼황오제의 ‘오제’는 황제(黃帝) 헌원, 전욱 고양씨, 제곡 고신씨, 요, 순…입니다. 당(唐-요임금), 우(虞-순임금), 하(夏)나라, 상(商)나라 때를 거치며 대를 이어 그 직책을 세습했고,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 하관(夏官)을 사마(司馬)로 바꾸었다. 그 뒤 정백휴보(程伯休父)가 주(周) 선왕(宣王) 때 서방(徐方-서이徐夷)을 평정하니 관족(官族)이 되어 (사마司馬를) 씨(氏)로 삼았다. 초(楚), 한(漢) 사이에(진한 교체기) 사마앙(司馬卬)은 조나라 장수(趙將)가 되어 제후들과 함께 진(秦)나라를 토벌했고, 진(秦)나라가 망하자 은왕(殷王)으로 세워져 하내(河內)에 도읍했다. 한나라가 그 땅에 군(郡)을 설치하니 자손들이 마침내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사마앙으로부터 8세(世-대) 뒤 정서장군(征西將軍) 사마균(司馬鈞)을 낳으니 자(字)는 숙평(叔平)이다. 사마균이 예장태수(豫章太守) 사마량(司馬量)을 낳으니 자는 공탁(公度)이다. 사마량이 영천태수(潁川太守) 사마준(司馬儁)을 낳으니 자는 원이(元異)이다. 사마준이 경조윤(京兆尹) 사마방(司馬防)을 낳으니 자는 건공(建公)이다. 선제(宣帝)는 즉 사마방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기절(奇節-빼어난 절조)을 갖추고 총랑(聰朗-총명)하며 많은 대략(大略-원대한 지략)을 지녔고, 박학흡문(博學洽聞-학문에 박식하고 널리 들어 많이 앎.박학다식)하고 유교(儒教)를 복응(伏膺-가슴에 간직함;마음을 기울여 흠모함)했다. 한나라 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항상 개연(慨然)해 하며 천하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었다. 같은 군(郡) 사람인 남양태수(南陽太守) 양준(楊俊)이 [1] 사람을 잘 알아보기로 유명했는데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르기 전인 선제(宣帝)를 만나보고는 비상한 그릇(非常之器)이라 말했다. 청하(淸河) 사람인 상서(尙書) 최염(崔琰)은 선제의 형인 사마랑(司馬朗)과 서로 친했는데 또한 사마랑에게 이르길, “그대의 동생은 총명하고 성실하며 강단(剛斷)이 있고 영특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에 미치지 못하오.”라고 하였다. [1] 본문 중 <南陽太守同郡楊俊>에 관한 교감기 - 남양(南陽)은 각 본에서는 모두 남군(南郡)으로 적혀 있다. 전대흔(錢大昕)이 입이사고이(廿二史考異)[이하 고이考異로 간칭(약칭)]에서 이르길, “위지(魏志)(삼국지 권23 양준전)에서 양준이 남양태수(南陽太守)가 되었다 하고 남군(南郡)이 아니다.”고 했다. 이제 이에 근거해 (남군을 남양으로) 고친다. (※ 남군 → 남양) 漢建安六年,郡舉上計掾。魏武帝爲司空,聞而辟之。帝知漢運方微,不欲屈節曹氏,辭以風痹,不能起居。魏武使人夜往密刺之,帝堅臥不動。及魏武爲丞相,又辟爲文學掾,敕行者曰:「若復盤桓,便收之。」帝懼而就職。於是使與太子游處,遷黃門侍郞,轉議郞、丞相東曹屬,尋轉主簿。 한나라 건안 6년(201년), 군(郡)에서 상계연(上計掾)으로 천거했다. (당시) 위무제(魏武帝-조조)는 사공(司空)이었는데 그에 관해 듣고는 선제를 벽소(辟召)하려 했다. 선제는 한나라의 명운이 바야흐로 쇠미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조씨(曹氏)에게 절의를 굽히지 않으려 하니 풍비(風痹-관절통) 때문에 기거(起居)할 수 없다며 이를 사양했다. 위무제는 사람을 시켜 밤중에 몰래 선제를 엿보게 했는데 선제는 꼿꼿이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위무제가 승상이 되자 (※조조가 승상이 된 것은 208년의 일)다시 벽소해 문학연(文學掾)으로 삼고는 (명을 받들어) 떠나는 자(行者)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만약 다시 반환(盤桓-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림)한다면 곧바로 잡아 가두도록 하라.” 선제가 두려워하며 그 직에 취임했다. 그리하여 선제로 하여금 늘 태자(太子)와 함께 유처(游處-출입기거;교제, 교유)하게 하였고,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올렸다가 의랑(議郞), 승상 동조속(丞相東曹屬)으로 전임시키고 뒤이어 주부(主簿)로 전임시켰다. 從討張魯,言於魏武曰:「劉備以詐力虜劉璋,蜀人未附而遠爭江陵,此機不可失也。今若曜威漢中,益州震動,進兵臨之,勢必瓦解。因此之勢,易爲功力。聖人不能違時,亦不失時矣。」魏武曰:「人苦無足,既得隴右,復欲得蜀!」言竟不從。既而從討孫權,破之。軍還,權遣使乞降,上表稱臣,陳說天命。魏武帝曰:「此兒欲踞吾著爐炭上邪!」答曰:「漢運垂終,殿下十分天下而有其九,以服事之。權之稱臣,天人之意也。虞、夏、殷、周不以謙讓者,畏天知命也。」 장로(張魯) 정벌에 종군했을 때 위무제에게 말했다. (※ 조조의 장로공격은 215년의 일) “유비(劉備)는 속임수와 무력으로 유장(劉璋)을 붙잡아 촉인(蜀人)들이 아직 귀부하지 않았는데 멀리서 강릉(江陵)을 다투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제 만약 한중(漢中)에서 위엄을 떨친다면 익주가 진동할 것이고 진병하여 임한다면 사세상 필시 와해될 것입니다. 이러한 형세에 의거한다면 공력(功力)을 이루기는 쉽습니다. 성인(聖人)은 천시를 거스르지 않고 또한 놓치지도 않습니다.” 위무제가 이르길, “사람의 고통은 만족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더니, 이미 농우(隴右)를 얻었는데 또 다시 촉을 얻기를 바라는구나!”라 하며 그 말에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뒤 손권(孫權) 토벌에 종군하여 이를 격파했다. (※ 216년 겨울~217년 봄 사이의 손권 공격과 유수구 전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군이 돌아오자 손권이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니 표를 올려 칭신(稱臣)하고 천명(天命)에 관해 진술했다. 위무제가 이르길 “이 아이가 나를 화로 위에 앉히려 하는구나!”라 하니 (선제가) 대답했다. “한나라의 운수가 거의 끝나 전하(殿下)께서 천하의 10분의 9를 차지하여 천자를 섬기고 있습니다. 손권이 칭신(稱臣)한 것은 하늘과 사람의 뜻입니다. 우(虞), 하(夏), 은(殷), 주(周)가 겸양(謙讓)하지 않은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천명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魏國既建,遷太子中庶子。每與大謀,輒有奇策,爲太子所信重,與陳群、吳質、朱鑠號曰四友。遷爲軍司馬,言於魏武曰:「昔箕子陳謀,以食爲首。今天下不耕者蓋二十餘萬,非經國遠籌也。雖戎甲未卷,自宜且耕且守。」魏武納之,於是務農積穀,國用豊贍。帝又言荊州刺史胡脩粗暴,南鄕太守傅方驕奢,並不可居邊。魏武不之察。及蜀將關羽圍曹仁於樊,于禁等七軍皆沒,脩、方果降羽,而仁圍甚急焉。 위국(魏國)이 세워진 뒤 태자 중서자(太子中庶子)로 승진했다. (※ 조조의 위공 즉위는 213년 5월 ; 위왕 즉위는 216년 5월 ; 조비가 태자가 된 것은 217년 10월) 늘 중대한 모의(大謀)에 참여하여 매번 기책(奇策)을 내어놓아 태자에게 중한 신임을 얻으니, 진군(陳群), 오질(吳質), 주삭(朱鑠)과 함께 4우(四友)라 불리었다. 승진하여 군사마(軍司馬)가 되자 위무제에게 말했다, “옛날 기자(箕子)가 모책을 진술하며 이르길 먹을 것이 그 으뜸이라 했습니다. 지금 천하에 농사짓지 않는 자가 대략 20여 만 명에 이르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방책(經國遠籌)이 아닙니다. 비록 융갑(戎甲)을 벗진 않더라도(or 비록 전란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지만) 의당 스스로 농사지으며 둔수해야 합니다.” 위무제가 이를 받아들이니 이로써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비축해 국용(國用)이 넉넉해졌다. 선제가 또 이르길, 형주자사(荊州刺史) 호수(胡脩)는 거칠고 난폭하고 남향태수(南鄕太守) 부방(傅方)은 교만, 사치스러워 둘 다 변경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했으나 위무제가 이를 살피지 않았다. 촉장(蜀將) 관우(關羽)가 번(樊)에서 조인(曹仁)을 포위하고 우금(于禁) 등 7군(七軍)이 모두 패몰하자 호수, 부방은 과연 관우에게 항복하니 조인이 포위당한 일이 더욱 위급해졌다. 是時漢帝都許昌,魏武以爲近賊,欲徙河北。帝諫曰:「禁等爲水所沒,非戰守之所失,於國家大計未有所損,而便遷都,既示敵以弱,又淮沔之人大不安矣。孫權、劉備,外親內疏,羽之得意,權所不願也。可喻權所,令掎其後,則樊圍自解。」魏武從之。權果遣將呂蒙西襲公安,拔之,羽遂爲蒙所獲。 당시 한나라 황제가 허창에 도읍하고 있었는데 위무제는 적(賊)이 가깝다 하여 하북(河北)으로 천도(遷都)하고자 했다. 선제가 간언했다, “우금 등이 수몰당한 것은 전수(戰守-나아가 싸우거나 물러나서 지킴)하다 실책한 것이 아니며 국가 대계(大計)에 손실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천도한다면 적(敵)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며 또한 회수(淮水), 면수(沔水) 인근의 백성들을 크게 불안하게 할 것입니다. 손권, 유비가 겉으로는 친하나 안으로는 소원하니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손권이 할 바를 깨우쳐주어 그로 하여금 관우의 배후를 기각(掎角–협공하거나 견제함)하게 하면(掎) 번(樊)의 포위는 절로 풀릴 것입니다.” 위무제가 이에 따랐다. 손권은 과연 장수 여몽(呂蒙)을 서쪽으로 보내 공안(公安)을 기습하여 함락했고 관우는 마침내 여몽에게 붙잡혔다. 魏武以荊州遺黎及屯田在潁川者逼近南寇,[2]皆欲徙之。帝曰:「荊楚輕脫,易動難安。關羽新破,諸爲惡者藏竄觀望。今徙其善者,既傷其意,將令去者不敢復還。」從之。其後諸亡者悉復業。 [2] 屯田在潁川者逼近南寇 張熷讀史擧正以下簡稱擧正:「南寇」謂吳,潁川未爲逼近,資治通鑑以下簡稱通鑑六八作「漢川」,是也。 위무제는 형주의 남은 백성과 영천(潁川)에서 둔전하던 자들이 남쪽 도적(南寇-오나라)에 핍근(逼近)하다 하여 [2] 이들을 모두 옮기려 했다. 선제가 말했다, “형초(荊楚) 사람들은 경탈(輕脫-경망,경박)하여 동요시키기는 쉬우나 안정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관우가 이제 막 격파되어 악행을 저지른 많은 이들은 몸을 숨기고 관망하고 있는데, 이제 착한 이들을 옮긴다면 그들의 뜻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차 떠난 자들이 감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2] <屯田在潁川者逼近南寇> - 장증( 張 熷) 의 독사거정( 讀史 擧 正)(이하 거정 擧 正으로 간칭)에서 이르길 “ 남구(南寇)는 오나라를 일컬으니 영천(潁川)은 이에 가깝지 않다. 자치통감(이하 통감으로 간칭)에는 漢川(한천)이라 적혀 있는데 이것이 옳다. ” 고 했다. (위무제가) 이에 따랐다. 그 후 도망한 자들이 모두 돌아와 생업에 종사했다. 及魏武薨于洛陽,朝野危懼。帝綱紀喪事,內外肅然。乃奉梓宮還鄴。 위무제가 낙양(洛陽)에서 훙(薨)하자 (※ 조조의 죽음은 220년의 일)조야(朝野)가 놀라고 두려워했는데, 선제가 장례 치르는 일을 다스리자 안팎이 숙연해졌다. 그리하여 재궁(梓宮-임금의 관)을 받들고 업(鄴)으로 돌아왔다. 魏文帝即位,封河津亭侯,轉丞相長史。會孫權帥兵西過,朝議以樊、襄陽無穀,不可以禦寇。時曹仁鎭襄陽,請召仁還宛。帝曰:「孫權新破關羽,此其欲自結之時也,必不敢爲患。襄陽水陸之衝,禦寇要害,不可棄也。」言竟不從。仁遂焚棄二城,權果不爲寇,魏文悔之。 위문제(魏文帝-조비)가 즉위하자 하진정후(河津亭侯)에 봉해지고 승상 장사(丞相長史)로 전임되었다. 때마침 손권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하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번(樊), 양양(襄陽)에는 곡식이 없어 적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당시 조인(曹仁)이 양양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조인을 불러 완(宛)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청했다. 선제가 말했다, “손권은 이제 막 관우를 격파하여 지금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와) 결탁하려 할 때이니 필시 감히 우환을 끼치지는(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양양은 수륙(水陸)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要害)이니 이곳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 말을 결국 따르지 않았다. 조인이 마침내 두 성(번,양양)을 불태운 후 버렸는데 손권은 과연 침범하지 않았고 위문제가 이를 후회했다. 及魏受漢禪,以帝爲尙書。頃之,轉督軍、御史中丞,封安國鄕侯。 위(魏)가 한나라의 선양을 받자 선제는 상서(尙書)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 독군(督軍),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전임되고 안국향후(安國鄕侯)에 봉해졌다. 黃初二年,督軍官罷,遷侍中、尙書右僕射。 황초(黃初) 2년(221년), 독군(督軍)의 관직을 파하고 시중(侍中),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올렸다. 五年,天子南巡,觀兵吳疆。帝留鎭許昌,改封向鄕侯,轉撫軍、假節,領兵五千,加給事中、錄尙書事。帝固辭。天子曰:「吾於庶事,以夜繼晝,無須臾寧息。此非以爲榮,乃分憂耳。」 황초 5년(224년), 천자가 남쪽을 순행해 오(吳)와의 국경지방에서 관병(觀兵)했다. 선제는 허창에 남아 진수했는데, 상향후(向鄕侯)로 고쳐 봉해지고 무군(撫軍), 가절(假節)로 전임되어 5천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고 급사중(給事中), 녹상서사(錄尙書事)의 직이 더해졌다. 선제가 굳게 사양하자 천자가 말했다, “내가 서사(庶事-제반 정무)를 보며 밤낮으로 이어 잠시라도 편히 쉴 틈이 없소. 이는 (그대에게) 영예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걱정거리를 나누려는 것일 뿐이오.” 六年,天子復大興舟師征吳,復命帝居守,內鎭百姓,外供軍資。臨行,詔曰:「吾深以後事爲念,故以委卿。曹參雖有戰功,而蕭何爲重。使吾無西顧之憂,不亦可乎!」天子自廣陵還洛陽,詔帝曰:「吾東,撫軍當總西事;吾西,撫軍當總東事。」於是帝留鎭許昌。 황초 6년(225년), 천자가 다시 주사(舟師-수군)를 크게 일으켜 오(吳)를 정벌했는데, 다시 선제에게 명하길 거수(居守-머물며 지킴)하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진무하고 밖으로는 군자(軍資-군수물자)를 공급하도록 했다. 출발할 무렵 조서를 내렸다, “내가 후방의 일을 깊이 걱정하니 이 때문에 이를 경에게 맡기노라. 조참(曹參)이 비록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소하(蕭何)도 또한 중요하도다. 나로 하여금 서쪽을 돌아보는 걱정이 없게 하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천자가 광릉(廣陵)으로부터 낙양(洛陽)으로 돌아오며 선제에게 조서를 내렸다, “내가 동쪽에 있을 때는 무군(撫軍-관직으로 사람을 호칭하는 것으로 여기선 사마의를 가리킴)은 응당 서쪽의 일을 총괄하고, 내가 서쪽에 있을 때는 무군(撫軍)은 응당 동쪽의 일을 총괄하도록 하라.” 이에 선제는 허창(許昌)에 머물며 진수했다. 及天子疾篤,帝與曹眞、陳群等見於崇華殿之南堂,並受顧命輔政。詔太子曰:「有間此三公者,愼勿疑之。」明帝即位,改封舞陽侯。 천자의 병이 깊어지자 선제는 조진(曹眞), 진군(陳群) 등과 더불어 숭화전(崇華殿)의 남당(南堂)에서 보정(輔政)하라는 고명(顧命-임금의 유언)을 함께 받았다. 태자(太子)에게 조령을 내렸다, “이 세 명의 공들과 틈이 생기더라도 결코 의심하지 말라.” 명제(明帝-조예)가 즉위하자 무양후(舞陽侯)로 고쳐 봉해졌다. 及孫權圍江夏,遣其將諸葛瑾、張霸并攻襄陽,帝督諸軍討權,走之。進擊,敗瑾,斬霸,并首級千餘。遷驃騎將軍。 손권이 강하(江夏)를 포위하고 그의 장수인 제갈근(諸葛瑾), 장패(張霸)를 보내 아울러 양양을 공격하자 선제가 제군(諸軍)을 지휘해 손권을 쳐서 패주시켰다. 진격해 제갈근을 격파하고 장패를 참수하고 아울러 천여 급을 참수했다.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승진했다. (※ 조비의 죽음과 손권의 공격은 모두 226년의 일) 太和元年六月,天子詔帝屯于宛,加督荊、豫二州諸軍事。 태화(太和) 원년(227년) 6월, 천자가 조령을 내려 선제를 완(宛)에 주둔케 하고 독형예이주제군사(督荊豫二州諸軍事-형주,예주의 2주 군무를 도독한다는 의미)의 직을 더했다. 初,蜀將孟達之降也,魏朝遇之甚厚。帝以達言行傾巧不可任,驟諫不見聽,乃以達領新城太守,封侯,假節。達於是連吳固蜀,潛圖中國。蜀相諸葛亮惡其反覆,又慮其爲患。達與魏興太守申儀有隙,亮欲促其事,乃遣郭模詐降,過儀,因漏泄其謀。達聞其謀漏泄,將舉兵。帝恐達速發,以書喻之曰:「將軍昔棄劉備,託身國家,國家委將軍以疆埸之任,任將軍以圖蜀之事,可謂心貫白日。蜀人愚智,莫不切齒於將軍。諸葛亮欲相破,惟苦無路耳。模之所言,非小事也,亮豈輕之而令宣露,此殆易知耳。」達得書大喜,猶與不決。帝乃潛軍進討。諸將言達與二賊交構,宜觀望而後動。帝曰:「達無信義,此其相疑之時也,當及其未定促決之。」乃倍道兼行,八日到其城下。吳蜀各遣其將向西城安橋、木闌塞以救達,帝分諸將以距之。 당초 촉장(蜀將) 맹달(孟達)이 항복하자 위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매우 후대했었다. 선제는 맹달의 언행이 간교하여 신임할 수 없다고 누차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맹달을 영(領-겸직의 의미) 신성태수(新城太守)로 삼고 후(侯)에 봉하고 가절(假節)했다. 그리하여 맹달은 오(吳)와 연결하고 촉(蜀)과 관계를 공고히 해 은밀히 중국(中國-위나라를 가리킴)을 도모하려 했다. 촉상(蜀相) 제갈량(諸葛亮)은 그가 반복(反覆-언행을 이리저리 고침)하는 것을 증오하고 또한 그가 화를 일으킬까 염려했다. 맹달은 위흥태수(魏興太守) 신의(申儀)와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제갈량은 맹달의 거사를 재촉하고자 하여 곽모(郭模)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니 신의(申儀)를 방문하여 그 계획을 누설시켰다. 맹달은 그의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말을 듣고 장차 거병하려 했다. 선제는 맹달이 신속하게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서신을 보내 그를 효유했다. “장군이 지난 날 유비(劉備)를 버리고 국가에 몸을 의탁하자 국가에서는 장군에게 변경의 중임을 맡겨 촉(蜀)을 도모하도록 했으니 가히 심관백일(心貫白日)이라 이를 만하오. 촉인(蜀人)들은 어리석거나 지혜로운 자를 막론하고 장군을 절치(切齒-이를 갈며 증오함)하지 않는 자가 없소. 제갈량은 우리를 서로 싸우게 하고 싶었으나 오직 방법이 없어 고심할 뿐이었소. 곽모가 한 말이 작은 일이 아닌데 제갈량이 어찌 경솔하게 누설되게 했겠소. 이는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오.” 맹달은 서신을 받고 크게 기뻐하고, 거병을 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선제가 은밀히 군을 일으켜 공격했다. 제장(諸將)들은 맹달이 두 적(賊)과 결탁되어 있으므로 의당 관망한 뒤에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선제가 말했다, “맹달은 신의(信義)가 없고 지금은 그들이 서로 의심하는 때이니, 응당 결단하지 못하는 때를 틈타 속히 해결해야 하오.” 그리고는 배도겸행(倍道兼行-이틀 길을 하루에 걸음,신속히 행군함)하여 8일 만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오(吳)와 촉(蜀)이 각기 그들의 장수를 보내 서성(西城) 안교(安橋)와 목란새(木闌塞)로 향하게 하여 맹달을 구원하자 선제는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 이를 막았다. ※ 곽모와 신의의 대화 / [전략]戰略 孟達將蜀兵數百降魏,魏文帝以達爲新城太守。太和元年,諸葛亮從成都到漢中,達又欲應亮,遺亮玉玦、織成鄣汁、蘇合香。亮使郭摸詐降過魏。魏興太守申儀與達有隙,摸語儀言:「玉玦者,謀已決;織成者,言謀已成;蘇合香者,言事已合。」〔《太平御覽》三百五十九〕 맹달이 촉병 수 백을 거느리고 위나라에 항복하자 위문제는 맹달을 신성태수로 삼았다. 태화 원년, 제갈량이 성도로부터 한중에 도착하자 맹달이 또한 제갈량에 호응하고자 하여 제갈량에게 옥결(玉玦), 직성장즙(織成鄣汁), 소합향(蘇合香)을 선물로 보냈다. 제갈량은 곽모(郭摸)에게 거짓항복하여 위나라로 가게 했다. 위흥태수 신의(申儀)는 맹달과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곽모가 신의에게 말했다, “옥결(玉玦)은 모책이 이미 결정되었다(謀已決)는 말이고, 직성(織成)은 모책이 이미 이루어졌다(謀已成)는 말이고, 소합향(蘇合香)은 일이 이미 합해졌다(事已合)는 말입니다.” / [태평어람] 권359 중 [전략]戰略 (사마표 찬) 인용 (전략 집본 등 원문출처 http://www.agent-m.net/Book/2/O-1-016-1.htm") 初,達與亮書曰:「宛去洛八百里,去吾一千二百里,聞吾舉事,當表上天子,比相反覆,一月間也,則吾城已固,諸軍足辦。則吾所在深險,司馬公必不自來;諸將來,吾無患矣。」及兵到,達又告亮曰:「吾舉事八日,而兵至城下,何其神速也!」上庸城三面阻水,達於城外爲木柵以自固。[3]帝渡水,破其柵,直造城下。八道攻之,旬有六日,達甥鄧賢、將李輔等開門出降。斬達,傳首京師。俘獲萬餘人,振旅還于宛。乃勸農桑,禁浮費,南土悅附焉。 [3] 爲木柵以自固 何超晉書音義以下簡稱音義「木柵」作「水柵」。 당초 맹달이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완(宛)은 낙양과 800리 떨어져 있고 내가 있는 곳과는 1,200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거사했다는 말을 들으면 응당 천자에게 표를 올리며 서로 왕복해야 하니 한 달은 걸릴 것인 즉, 내 성(城)은 이미 견고해지고 제군(諸軍)은 충분히 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있는 곳은 깊고 험한 곳이라 사마공(司馬公)이 필시 직접 오지는 않을 것인데, 제장(諸將)들이 온다면 내가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사마의의) 군대가 도착하자 맹달이 또 제갈량에게 고했다, “내가 거사한 지 8일 만에 군대가 성 아래에 도착하니 어찌 그토록 신속(神速)할 수 있습니까!” 상용성(上庸城)의 3면은 물에 의지했는데 맹달은 성 바깥에 목책(木柵)을 세워 스스로 굳게 방비했다. [3] 선제는 물을 건너 그 목책을 깨뜨리고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렀다. 여덟 갈래 길로 성을 공격하여 16일 만에(旬有六日) 맹달의 생질(甥)인 등현(鄧賢)과 장수 이보(李輔) 등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맹달을 참수하고 그 수급을 경사(京師-수도)로 보냈다.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진려(振旅-군대를 거두어 개선함)하여 완(宛)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농잠(農桑-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부비(浮費-불필요한 지출)를 금하니 남쪽 사람들이 기뻐하며 귀부했다. [3] < 爲 木柵以自固> - 하초(何超)의 진서음의(晉書音義)(이하 음의音義로 간칭)에는 木柵(목책)이 水柵(수책)으로 적혀있다. 初,申儀久在魏興,專威疆埸,輒承制刻印,多所假授。達既誅,有自疑心。時諸郡守以帝新克捷,奉禮求賀,皆聽之。帝使人諷儀,儀至,問承制狀,執之,歸于京師。又徙孟達餘衆七千餘家於幽州。蜀將姚靜、鄭他等帥其屬七千餘人來降。 당초 신의(申儀)는 오랫동안 위흥(魏興)에 있으면서 변경지역에서 전횡하며 번번이 승제(承制-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함.특히 임의로 관작을 봉배하는 것을 가리킴)하여 인장을 새겨 많이 가수(假授-황제 명의로써 대신해 수여함)하였었다. 맹달이 주살되자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 무렵 여러 군수(郡守)들이 선제가 새로 승리했다 하여 예물을 바치며 축하하자 이를 모두 받았다. 선제는 사람을 시켜 신의에게 (하례하러 직접 오도록) 권유하고, 신의가 도착하자 승제(承制)한 정황을 심문하고는 그를 체포해 경사(京師)로 송환했다. 또한 맹달의 남은 무리 7천여 가(家)를 유주(幽州)로 옮겼다. 촉장(蜀將) 요정(姚靜), 정타(鄭他) 등이 그 부속 7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時邊郡新附,多無戶名,魏朝欲加隱實。屬帝朝於京師,天子訪之於帝。帝對曰:「賊以密網束下,故下棄之。宜弘以大綱,則自然安樂。」又問二虜宜討,何者爲先?對曰:「吳以中國不習水戰,故敢散居東關。凡攻敵,必扼其喉而摏其心。夏口、東關,賊之心喉。若爲陸軍以向皖城,引權東下,爲水戰軍向夏口,乘其虛而擊之,此神兵從天而墮,破之必矣。」天子並然之,復命帝屯於宛。 이 무렵 변군(邊郡)이 새로 귀부하여 호적에서 누락된 호구가 많으니 위(魏) 조정에서 은실(隱實-실태조사)하려 했다. 선제를 경사(京師)로 오도록 하여 천자가 이 일에 관해 선제에게 자문을 구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적(賊)이 밀강(密網-촘촘한 그물,엄격한 법률을 비유)으로 아랫사람들을 속박하니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그를 저버린 것입니다. 의당 너그러이 대강(大綱)으로 다스리면 자연히 안거하며 즐거이 생업에 종사할 것입니다.” 또한 두 적을 의당 토벌해야 하는데 누구를 우선해야 하는지 물으니 선제가 대답했다. “오(吳)는 중국(中國)이 수전(水戰-물싸움)에 익숙지 못하다 여겨 감히 동관(東關-유수구 일대 관문)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습니다. 무릇 적을 공격할 때는 그들의 목구멍(喉)을 누르고 심장(心)을 찔러야 하는데, 하구(夏口), 동관(東關)이 바로 적의 심후(心喉)입니다. 만약 육군(陸軍)을 환성(皖城)으로 향하게 해 손권을 동쪽으로 유인한 뒤 수전군(水戰軍)을 하구(夏口)로 향하게 해 그들의 헛점을 틈타 공격한다면 이는 신병(神兵)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격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천자가 이를 모두 옳게 여겼고, 다시 선제에게 명해 완(宛)에 머물도록 했다. 四年,遷大將軍,加大都督、假黃鉞,與曹眞伐蜀。帝自西城斫山開道,水陸並進,泝沔而上,至於朐䏰,拔其新豐縣。軍次丹口,遇雨,班師。 태화 4년(230),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하고 대도독(大都督), 가황월(假黃鉞)이 더해지고 조진(曹眞)과 함께 촉(蜀)을 정벌했다. 선제는 서성(西城)에서부터 산의 나무를 베어내 길을 열고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해 면수(沔水-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朐䏰)에 도착하고 신풍현(新豐縣)을 함락했다. 군(軍)이 단구(丹口)에 주둔하다 비를 만나 회군했다. 明年,諸葛亮寇天水,圍將軍賈嗣、魏平於祁山。天子曰:「西方有事,非君莫可付者。」乃使帝西屯長安,都督雍、梁二州諸軍事,[4]統車騎將軍張郃、後將軍費曜、征蜀護軍戴淩、雍州刺史郭淮等討亮。張郃勸帝分軍住雍、郿爲後鎭,帝曰:「料前軍獨能當之者,將軍言是也。若不能當,而分爲前後,此楚之三軍所以爲黥布禽也。」遂進軍隃麋。亮聞大軍且至,乃自帥衆將芟上邽之麥。諸將皆懼,帝曰:「亮慮多決少,必安營自固,然後芟麥,吾得二日兼行足矣。」於是卷甲晨夜赴之,亮望塵而遁。帝曰:「吾倍道疲勞,此曉兵者之所貪也。亮不敢據渭水,此易與耳。」進次漢陽,與亮相遇,帝列陣以待之。使將牛金輕騎餌之,兵才接而亮退,追至祁山。亮屯鹵城,據南北二山,斷水爲重圍。帝攻拔其圍,亮宵遁,追擊破之,俘斬萬計。天子使使者勞軍,增封邑。 [4]都督雍梁二州諸軍事 據三國志魏志以下僅稱魏志、蜀志或吳志。陳留王紀,梁州置於景元四年十二月,在此後三十餘年。司馬懿督二州係代曹眞,景初三年趙儼代懿,魏志曹眞傳、趙儼傳都作「雍涼」。疑當從魏志。 이듬해(231년), 제갈량(諸葛亮)이 천수(天水)를 침범하고 기산(祁山)에서 장군 가사(賈嗣), 위평(魏平)을 포위했다. 천자가 말했다, “서쪽에 일이 생기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한 자가 없소.” 그리고는 선제를 서쪽으로 가서 장안(長安)에 주둔케 하고 옹주, 양주 2개 주의 군무를 도독하게 하니(都督雍梁二州諸軍事-도독옹량이주제군사) [4] 거기장군(車騎將軍) 장합(張郃), 후장군(後將軍) 비요(費曜), 정촉호군(征蜀護軍) 대릉(戴淩), 옹주자사(雍州刺史) 곽회(郭淮) 등을 거느리고 제갈량을 공격했다. [4] <都督雍梁二州諸軍事> - 삼국지(三國志) 위지(이하 위지魏志나 촉지蜀志, 오지吳志로 약칭) 진류왕기(陳留王紀)에 의하면 梁州(양주)는 경원(景元) 4년(263년, 촉멸망 이후) 12월의 일로서 이때보다 30여 년 뒤의 일이다. 사마의가 2주를 도독하며 조진(曹 眞) 의 뒤를 이었고, 경초(景初) 3년(239년), 조엄(趙儼)이 사마의의 뒤를 이었는데, 위지 조진전, 조엄전에는 모두 雍涼(옹량)이라 적혀있다. 응당 위지에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都督雍 梁 二州諸軍事 → 都督雍 涼 二州諸軍事 로 보인다는 말 / 촉 멸망, 진 건국 이후 익주를 분할해 양주(梁州-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한중, 익주, 재동, 파군 등), 영주(寧州-운남, 건녕, 영창 등)가 설치됨.) 장합이 선제에게 권하길 군대를 나누어 옹(雍), 미(郿)에 주둔시켜 후진(後鎭)으로 삼자고 하자 선제가 말했다, “전군(前軍)이 단독으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 헤아린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군을 앞뒤로 나눈다면 이는 즉 초(楚)나라 삼군(三軍)이 경포(黥布)에게 격파당한 원인이었소.” (※) ※ [사기] <경포열전>에 의하면, 한신, 팽월 등 공신들이 차례로 제거되는 데 위협을 느낀 회남왕 경포가 반란을 일으켜 회수를 건너 초나라(당시 하비에 도읍)에 쳐들어갑니다. 이때 초왕 유교가 이를 요격하고 요격군을 지휘하던 초나라 장수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서로 돕는 형세의 포진으로 대항했으나, 경포가 한 갈래 군을 깨뜨리자 나머지 두 군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 초군이 궤멸됨. 그리고는 유미(隃麋)로 진군했다. 제갈량은 대군(大軍)이 곧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뭇 장수들을 이끌고 상규(上邽)의 보리를 수확했다. (※) 제장들이 모두 이를 두려워하자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은 생각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니(慮多決少) 필시 영채를 안돈하여 스스로 방비를 굳게 한 뒤에야 보리를 수확할 것이오. 우리가 이틀 동안 급히 행군하면(兼行) 충분하오.” 그리고는 갑옷을 벗고(卷甲) 밤낮으로 달려가니, 제갈량은 멀리서 먼지가 이는 것을 보고 달아났다. 선제가 말했다, “우리가 급히 행군해(倍道) 피로하나 이는 용병에 밝은 자라면 바라는 바요. 제갈량이 감히 위수(渭水)를 점거하지 못하니 이는 다루기 쉽소.” 진군하여 한양(漢陽)에 주둔했는데 제갈량과 서로 조우하자 진을 치고 맞이했다. 장수 우금(牛金)을 보내 경기(輕騎-경기병)로 유인했는데 군사들이 막 접전했을 때 제갈량이 퇴각하니 이를 추격해 기산(祁山)에 이르렀다. 제갈량은 노성(鹵城)에 주둔하여 남북의 두 산을 점거하고 물을 끊고 두텁게 포위했다.(斷水爲重圍) (※) 선제가 포위망을(or 위圍를) 공격해 함락하자(攻拔其圍) 제갈량이 밤을 틈타 달아나니 이를 추격, 격파해 1만을 헤아리는 적군을 부참(俘斬-사로잡거나 죽임.참획)했다. 천자가 사자를 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封邑)을 늘려주었다. ※ 상규의 보리 / [삼국지] 명제기, 명제기 주 [위서]魏書 秋七月丙子,以亮退走,封爵增位各有差[一]。 [一]魏書曰:初,亮出,議者以爲亮軍無輜重,糧必不繼,不擊自破,無爲勞兵;或欲自芟上邽左右生麥以奪賊食,帝皆不從。前後遣兵增宣王軍,又敕使護麥。宣王與亮相持,賴得此麥以爲軍糧。 (태화 5년=231년) 가을 7월 병자일(6일), 제갈량이 퇴주하자 (공이 있는 자들에게) 각기 차등을 두어 봉작하고 관위를 더해주었다.[1] [1] 위서 왈 – 당초 제갈량이 출군했을 때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길, 제갈량군에 치중이 없어 군량이 필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니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어서 군사들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상규 주변의 보리(生麥)를 (미리) 베어 적의 식량을 없애자고 했는데 황제가 이를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그 앞뒤로 군사를 보내어 선왕(宣王-사마의)의 군을 늘려주었고 또한 보리를 지키도록 명했다. 선왕은 제갈량과 서로 맞서며 이 보리를 얻어 군량으로 삼았다. 時軍師杜襲、督軍薛悌皆言明年麥熟,亮必爲寇,隴右無穀,宜及冬豫運。帝曰:「亮再出祁山,一攻陳倉,挫衄而反。縱其後出,不復攻城,當求野戰,必在隴東,不在西也。亮每以糧少爲恨,歸必積穀,以吾料之,非三稔不能動矣。」於是表徙冀州農夫佃上邽,興京兆、天水、南安監冶。 이 무렵 군사(軍師) 두습(杜襲), 독군(督軍) 설제(薛悌)가 모두 말하길, 내년에 보리가 익으면 제갈량이 필시 침범할 것인데 농우(隴右-농서)에 곡식이 없으니 의당 겨울 동안에 미리 옮겨놓아야 한다고 했다.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은 기산(祁山)으로 두 번 출병하고 진창을 한 번 공격했다 꺾이고 돌아갔소. 설령 그가 뒤에 출병하더라도 다시 공성(攻城)하지는 않고 응당 야전(野戰)을 바랄 것이며, 필시 농동(隴東)에서일 것이고 농서(隴西)는 아닐 것이오. 제갈량은 늘 군량이 부족한 것을 한스러워 했으니 돌아가서는 필시 곡식을 비축할 것이라 내가 헤아려보건대 3년 안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이에 표를 올려 기주(冀州)의 농부(農夫)를 옮겨 상규(上邽)를 경작하게 하고 경조(京兆), 천수(天水), 남안(南安)의 감야(監冶-대장장이 감독)를 흥성하게 했다. 靑龍元年,穿成國渠,築臨晉陂,漑田數千頃,國以充實焉。 청룡(靑龍) 원년(233년), 성국거(成國渠)를 뚫고 임진피(臨晉陂)를 쌓아 수천 경(頃)의 농지에 물을 대니 나라가 충실해졌다. 二年,亮又率衆十餘萬出斜谷,壘于郿之渭水南原。天子憂之,遣征蜀護軍秦朗督步騎二萬,受帝節度。諸將欲住渭北以待之,帝曰:「百姓積聚皆在渭南,此必爭之地也。」遂引軍而濟,背水爲壘。因謂諸將曰:「亮若勇者,當出武功,依山而東。若西上五丈原,則諸軍無事矣。」亮果上原,將北渡渭,帝遣將軍周當屯陽遂以餌之。數日,亮不動。帝曰:「亮欲爭原而不向陽遂,此意可知也。」遣將軍胡遵、雍州剌史郭淮共備陽遂,與亮會于積石。臨原而戰,亮不得進,還於五丈原。會有長星墜亮之壘,帝知其必敗,遣奇兵掎亮之後,斬五百餘級,獲生口千餘,降者六百餘人。 청룡 2년(234), 제갈량이 다시 군사 10여 만을 이끌고 야곡(斜谷)을 나와 미(郿) 땅의 위수(渭水) 남쪽 평원에 영루를 세웠다. 천자가 이를 우려하여 정촉호군(征蜀護軍) 진랑(秦朗)을 보내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가서 선제의 절도(節度-지휘,명령)를 받게 했다. 제장(諸將)들이 위수 북쪽에 주둔하며 적에 맞서려 하자 선제가 말했다, “백성들이 모두 위수 남쪽에 모여 거주하니 이 곳이 필히 다투어야 할 땅이오.” 그리고는 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물을 뒤로 한 채 영루를 세웠다. 그리고는 제장들에게 말했다, “제갈량이 만약 용감한 자라면 응당 무공(武功)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할 것이오.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五丈原)에 오른다면 제군(諸軍)이 무사(無事)할 것이오.” 제갈량은 과연 오장원에 오르고 장차 북쪽으로 위수를 건너려 했는데, 선제는 장군 주당(周當)을 보내 양수(陽遂)에 주둔케 하여 적을 유인했다. 며칠 동안 제갈량이 움직이지 않으니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이 평원을 다투고 싶어하면서도 양수(陽遂)로 향하지 않으니 이 뜻을 가히 알만하오.” 장군 호준(胡遵), 옹주자사 곽회(郭淮)를 보내 함께 양수(陽遂)를 방비하게 하니 적석(積石)에서 제갈량과 조우했다. 평원에서 싸웠는데 제갈량이 진격할 수 없자 오장원으로 되돌아갔다. 때마침 장성(長星-혜성)이 제갈량의 영루로 떨어지자 선제는 제갈량이 반드시 패할 것임을 알고 기병(奇兵-기습군)을 보내 제갈량의 후방을 기각(掎角)하여 오백여 급을 참수하고 생구(生口-포로) 천여 명을 붙잡았으며 항복한 자가 6백여 명에 이르렀다. 時朝廷以亮僑軍遠寇,利在急戰,每命帝持重,以候其變。亮數挑戰,帝不出,因遺帝巾幗婦人之飾。帝怒,表請決戰,天子不許,乃遣骨鯁臣衛尉辛毗杖節爲軍師以制之。後亮復來挑戰,帝將出兵以應之,毗杖節立軍門,帝乃止。初,蜀將姜維聞毗來,謂亮曰:「辛毗杖節而至,賊不復出矣。」亮曰:「彼本無戰心,所以固請者,以示武于其衆耳。將在軍,君命有所不受,苟能制吾,豈千里而請戰邪!」 당시 조정에서는 ‘제갈량이 군을 외지에 거주하게 하며(僑軍) 멀리 침범했으니(遠寇) (※) (제갈량의 입장에선) 급히 싸우는 것이 이롭다’고 보아, 선제에게 늘 명하길 지중(持重)하며 그들의 변화를 살피라고 했다. 제갈량이 수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선제가 출전하지 않으니 (제갈량은) 선제에게 건괵(巾幗-부녀자들이 쓰던 두건과 머리장식)과 부인들이 쓰는 장신구(婦人之飾)를 보냈다. 선제가 노하여 표를 올려 결전(決戰)할 것을 청하자 천자가 불허하고는 골경신(骨鯁臣-강직한 신하) 위위(衛尉) 신비(辛毗)를 보내 부절을 지니고 가서 군사(軍師)가 되어 이를 제지하게 했다. 그 뒤 제갈량이 다시 와서 싸움을 걸자 선제가 장차 출전하여 이에 응하려 했는데,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군문(軍門)에 서서 (막으니) 선제가 이에 그만두었다. 당초 촉장(蜀將) 강유(姜維)는 신비가 왔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에게 이르길,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당도했으니 적(賊)이 다시는 출전하지 않을 것입니다.”라 하니 제갈량이 말했다, “그는 본래 싸우려는 마음이 없는데 (천자에게 결전을) 굳게 청한 이유는 그의 군사들에게 무(武)를 과시하자는 것이오. 장수가 군중에 있으면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을 때가 있는데, 만약 저들이 우리를 능히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리 길을 가서 굳이 결전을 청하겠소!” ※ 여기서 僑軍遠寇(교군원구)는 ‘멀리 침범해 와서 자국을 벗어나 위나라 영토에서 둔전하며 객지생활하는 원정군’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보입니다. 帝弟孚書問軍事,帝復書曰:「亮志大而不見機,多謀而少決,好兵而無權,雖提卒十萬,巳墮吾畫中,破之必矣。」與之對壘百餘日,會亮病卒,諸將燒營遁走,百姓奔告,帝出兵追之。亮長史楊儀反旗鳴鼓,若將距帝者。帝以窮寇不之逼,於是楊儀結陣而去。經日,乃行其營壘,觀其遺事,獲其圖書、糧穀甚衆。帝審其必死,曰:「天下奇才也。」辛毗以爲尙未可知。帝曰:「軍家所重,軍書密計、兵馬糧穀,今皆棄之,豈有人捐其五藏而可以生乎?宜急追之。」關中多蒺藜,帝使軍士二千人著軟材平底木屐前行,蒺藜悉著屐,然後馬步俱進。追到赤岸,乃知亮死審問。時百姓爲之諺曰:「死諸葛走生仲達。」帝聞而笑曰:「吾便料生,不便料死故也。」 선제의 동생 사마부(司馬孚)가 서신을 보내 군사(軍事)에 관해 물었다. 선제가 답장을 보내 말했다, “제갈량은 뜻이 크나 기회를 살피지 못하고(不見機),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으니, 비록 10만 군사를 이끈다 한들 내 계획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대치한지 백여일 만에 때마침 제갈량이 병으로 죽자 (촉의) 제장들이 둔영을 불태우고 달아났고, 백성들이 급히 달려와 알려주니 선제가 출병해 이를 추격했다. 제갈량의 장사(長史) 양의(楊儀)가 군기를 되돌리고 북을 치니 마치 선제와 맞서려는 듯 했다. 선제는 궁지에 몰린 적은 핍박해서는 안된다고 여기니 이에 양의는 결진(結陣)한 채 떠났다. 다음 날 제갈량의 영루(營壘)로 가서 그의 남은 흔적(遺事)을 살펴보고 그의 도서(圖書)와 양곡(糧穀)을 매우 많이 노획했다. 선제는 그가 필시 죽었음을 알아채고는 이르길, “천하의 기재(奇才)로구나”라 하였다. 신비(辛毗)는 (제갈량이 죽었는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선제가 말했다, “군가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군서(軍書), 밀계(密計), 병마(兵馬-병졸과 군마)가 먹는 양곡(糧穀)인데, 이제 이들을 모두 내버렸으니 자신의 오장(五藏)을 (※) 내버린 자가 어찌 살아 있겠소? 의당 급히 추격해야 하오.” 관중(關中)에 질려(蒺藜-남가새;마름쇠)가 많다는 말을 듣고 선제는 군사 2천명에게 부드러운 목재로 된 바닥이 평평한 나무신을 신게 해 앞장서게 하고 질려가 모두 나무신에 박힌 뒤 마보(馬步-기병과 보병)가 함께 진격했다. 추격하여 적안(赤岸)에 도착한 뒤 제갈량이 죽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당시 백성들이 이에 관해 속어(諺)를 지어 이르길, “죽은 제갈(諸葛)이 산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死諸葛走生仲達)고 하였다. 선제가 이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으나 죽은 자를 헤아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앞의 군서, 밀계등과 연관되어 五라는 숫자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오장육부할 때 오장처럼 ‘중요한 것’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촉군이 퇴각하며 병마를 내버렸을 리는 없으므로 兵馬糧穀을 兵馬 / 糧穀으로 나누지 않고 ‘병마가 먹는 양곡’으로 풀었습니다. 先是,亮使至,帝問曰:「諸葛公起居何如,食可幾米?」[5]對曰:「三四升。」次問政事,曰:「二十罰已上皆自省覽。」帝既而告人曰:「諸葛孔明其能久乎!」竟如其言。亮部將楊儀、魏延爭權,儀斬延,并其衆。帝欲乘隙而進,有詔不許。 [5]食可幾米 太平御覽以下簡稱御覽三七八引魏明帝詔曹植云「食幾許米」,幾許即幾何,爲漢魏常語,「幾」下疑當有「許」字。 그 이전에 제갈량의 사자가 도착했을 때 선제가 물었다, “제갈공(諸葛公)의 기거(起居-일상생활)가 어떠하고 음식은 얼마나 드시오?” (食可幾米) [5] 사자가 대답했다, “3-4 승(升)을 드십니다.” 이어 정사(政事)에 관해 물으니 대답했다, “스무 대 이상의 형벌은 모두 직접 챙기십니다.” 그 뒤 선제가 다른 이에게 말하길, “제갈공명이 어찌 오래 가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제갈량의 부장(部將)인 양의(楊儀)와 위연(魏延)이 권력을 다투니 양의가 위연을 참수하고 그의 군사를 아울렀다. 선제가 이를 틈타 진격하고자 했으나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5] <食可幾米> - 태평어람(太平御覽) (이하 어람御覽으로 약칭) 권378에서 위( 魏) 명제( 明帝) 가 조식(曹植)에게 보낸 조서를 인용하여 “食幾許米(식기허미)”라 했으니 幾許(기허)가 즉 幾何(기하-얼마 만큼인가)라는 말이며 한나라, 위나라 때 보통 쓰던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幾 아래(뒤)에 응당 許 자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食可幾米 → 食可幾許米…로 보인다는 말) 三年,遷太尉,累增封邑。蜀將馬岱入寇,帝遣將軍牛金擊走之,斬千餘級。武都氐王苻雙、强端帥其屬六千餘人來降。[6]關東饑,帝運長安粟五百萬斛輸於京師。 [6]武都氐王苻雙强端帥其屬六千餘人來降 據蜀志張嶷傳、華陽國志七,武都氐王苻健降蜀,其弟率衆就魏。苻雙並非氐王,疑「王」字衍。 청룡 3년(235), 태위(太尉)로 올리고 봉읍(封邑)을 더욱 늘려주었다. 촉장(蜀將) 마대(馬岱)가 침범하니, 선제가 장군 우금(牛金)을 보내 이를 공격해 패주시키고 천여 급을 참수했다. 무도(武都) 저왕(氐王-저족의 왕) 부쌍(苻雙), 강단(强端)이 그들의 부속 6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6] [6] <武都氐王苻雙强端帥其屬六千餘人來降> - 촉지 장의전, 화양국지 권7 에서 (건흥 14년=236년) 무도 저왕 부건(苻健)이 촉에 항복했고 그의 동생은 무리를 이끌고 위나라로 갔다고 했다. 부쌍(苻雙)은 저왕(氐王)이 아니니 王 자는 연문(衍文-잘못 덧붙여진 군더더기 글자)으로 보인다. (※ 武都氐王苻雙→武都氐苻雙..으로 보인다는 말) 관동(關東)에 기근이 들어 선제는 장안(長安)의 곡식 5백만 곡(斛)을 경사(京師)로 보냈다. 四年,獲白鹿,獻之。天子曰:「昔周公旦輔成王,有素雉之貢。今君受陝西之任,有白鹿之獻,豈非忠誠協符,千載同契,俾乂邦家,以永厥休邪!」 청룡 4년(236), 흰 사슴(白鹿)을 잡아 헌상했다. 천자가 말했다, “옛날 주공(周公) 단(旦)이 성왕(成王)을 보좌할 때 흰 꿩을 바친 일이 있다. 이제 그대가 섬서(陝西)에서 대임을 맡아 흰 사슴을 헌상하니, 충성(忠誠)이 서로 부합하여 천년이 한 마음으로 방가(邦家-국가)를 다스리는 것으로 어찌 길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及遼東太守公孫文懿反,徵帝詣京師。天子曰:「此不足以勞君,事欲必克,故以相煩耳。君度其作何計?」對曰:「棄城預走,上計也。據遼水以距大軍,次計也。坐守襄平,此成擒耳。」天子曰:「其計將安出?」對曰:「惟明者能深度彼己,豫有所棄,此非其所及也。今懸軍遠征,將謂不能持久,必先距遼水而後守,此中下計也。」天子曰:「往還幾時?」對曰:「往百日,還百日,攻百日,以六十日爲休息,一年足矣。」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문의(公孫文懿-공손연.※)가 모반하자 선제를 경사(京師)로 불렀다.천자가 이르길, “이 일은 족히 그대를 수고시킬 일이 아니나 이 사안에서 반드시 이기고자 하여 이 때문에 그대를 번거롭게 했소. 그대가 헤아리기에 그가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소?”라 하자선제가 대답했다, “성을 버리고 미리 달아나는 것이 상계(上計-상책)입니다. 요수(遼水)에 의지해 대군(大軍)에 맞서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은 계책(次計)입니다. (그러나) 만약 앉아서 양평(襄平)을 지키려 한다면 사로잡히게 될 뿐입니다.” 천자가 이르길 “그 계책 중에 장차 어떤 것을 쓸 것 같소?”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오직 현명한 자만이 능히 자신과 상대방(의 역량)을 깊이 헤아려 미리 포기할 수 있으나 이는 그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정벌하면 (공손연은 우리가) 장차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여겨 필시 먼저 요수(遼水)에서 맞서고 그 뒤 (물러나 양평을) 지킬 것이니, 이는 중책과 하책입니다.” 천자가 이르길, “갔다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소?”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가는데 백일, 돌아오는데 백일, 공격하는데 백일이 걸리며 휴식하는데 60일을 잡으면 1년이면 족합니다.” ※ 당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 공손연의 자(字)인 문의(文懿)로 표기한 것 같고, 이후로도 [진서]에서는 계속 공손연을 (공손)문의로 적고 있습니다. 是時大修宮室,加之以軍旅,百姓饑弊。帝將即戎,乃諫曰:「昔周公營洛邑,蕭何造未央,今宮室未備,臣之責也。然自河以北,百姓困窮,外內有役,勢不並興,宜假絶內務,以救時急。」 당시 궁실(宮室)을 크게 수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군려(軍旅-전쟁;군대)가 더해지니 백성들이 굶주리고 피폐해졌다. 선제는 장차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이에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옛날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영건(營建)하고 소하(蕭何)가 미앙(未央)(궁)을 지었으니 오늘날 궁실(宮室)이 미비한 것은 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수 이북으로 백성들이 곤궁하고 안팎으로 노역이 많아 사세상 이들을 함께 병행할 수는 없으니, 의당 안의 일(內務→궁실 수축)은 잠시 그만두어 한 때의 위급함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景初二年,帥牛金、胡遵等步騎四萬,發自京都。車駕送出西明門,詔弟孚、子師送過溫,賜以穀帛牛酒,敕郡守典農以下皆往會焉。見父老故舊,宴飲累日。帝嘆息,悵然有感,爲歌曰:「天地開闢,日月重光。遭遇際會,畢力遐方。將掃群穢,還過故鄕。肅淸萬里,總齊八荒。告成歸老,待罪舞陽。」 경초(景初) 2년(238년) 우금(牛金), 호준(胡遵) 등과 보기(步騎) 4만을 이끌고 경도(京都-수도)를 출발했다. 거가(車駕-임금의 수레)가 이를 전송해 서명문(西明門)을 나왔고, 동생 사마부(司馬孚), 아들 사마사(司馬師)에게 명해 전송하며 온(溫)현을 지나게 하고 곡식과 비단, 소와 술(穀帛牛酒)을 하사하고 군수(郡守), 전농(典農)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방문하도록 명했다. (고향인 온현에서) 부로(父老-노인)와 고구(故舊-옛 친구,지인)들을 만나 여러 날 동안 잔치를 열었다. 선제는 탄식(嘆息)하고 창연(悵然)해하다 감흥이 일자(有感) 노래(歌)를 읊었다.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하여 해와 달이 다시 빛나는구나. 좋은 기회를 만나 힘을 다해 멀리 원정하노니. 장차 뭇 더러운 것들을 쓸어 없애고 돌아와 고향을 지나겠노라. 만리를 깨끗이 하고 팔황(八荒-온 세상)을 총제(總齊-통일)하리니. 공이 이루어진 것을 고한 뒤 귀로(歸老-관직을 사양하고 노인으로 여생을 보냄)해 무양(舞陽)에서 대죄(待罪)하겠노라.” (※ 당시 사마의는 무양후) 遂進師,經孤竹,越碣石,次于遼水。文懿果遣步騎數萬,阻遼隧,堅壁而守,南北六七十里,以距帝。帝盛兵多張旗幟出其南,賊盡銳赴之。乃泛舟潛濟以出其北,與賊營相逼,沈舟焚梁,傍遼水作長圍,棄賊而向襄平。諸將言曰:「不攻賊而作圍,非所以示衆也。」帝曰:「賊堅營高壘,欲以老吾兵也。攻之,正入其計,此王邑所以恥過昆陽也。古人曰,敵雖高壘,不得不與我戰者,攻其所必救也。賊大衆在此,則巢窟虛矣。我直指襄平,則人懷內懼,懼而求戰,破之必矣。」遂整陣而過。賊見兵出其後,果邀之。帝謂諸將曰:「所以不攻其營,正欲致此,不可失也。」乃縱兵逆擊,大破之,三戰皆捷。賊保襄平,進軍圍之。 그리고는 진군하여 고죽(孤竹)을 지나고 갈석(碣石)을 넘어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문의(文懿-공손연)는 과연 보기(步騎) 수만 명을 보내 요수(遼隧)에 의지해 견벽(堅壁)한 채 수비하며 남북으로 6-70리에 걸쳐 선제에게 맞섰다. 선제가 대군을 결집해(盛兵) 많은 기치를 펼쳐 그들의 남쪽으로 출군하자 적(賊)이 정예병을 다하여(盡銳) 이를 향해 나와왔다. 그러자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 그들의 북쪽으로 출격하였고, 적(賊)의 둔영과 서로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뒤 요수(遼水) 가에서 길게 포위하고는(作長圍) 적(賊)을 내버려두고 양평(襄平)으로 향했다. 제장들이 말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하기만 하니(作圍) 이는 군사들에게 보여줄 만한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선제가 말했다, “적(賊)이 둔영을 견고히 하고 보루를 높이는 것은 우리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려는 것이오. 적을 공격하면 그 계책에 곧바로 떨어지게 되니 이는 바로 왕읍(王邑)이 곤양(昆陽)에서 치욕을 당한 원인이었소. 옛 사람이 이르길, 적이 비록 보루를 높이고 있다 하더라도 부득불 나와 더불어 (성을 나와) 싸우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들이 구원해야 할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라 했소. 적의 대군이 이곳에 있으니 즉 그 소굴(巢窟)은 비어 있을 것이오. 우리가 곧바로 양평(襄平)으로 향한다면 내심 두려움을 품을 것이고 두려움을 품으면 싸우러 나설 것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소.” 그리고는 진(陣)을 정돈하여 나아갔다. 적(賊)은 선제의 군대가 그들의 배후로 출격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를 요격했다. 선제가 제장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둔영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소.” 그리고는 군대를 풀어 역격(逆擊)하여 적을 대파하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적이 (물러나) 양평(襄平)에 의지하니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初,文懿聞魏師之出也,請救於孫權。權亦出兵遙爲之聲援,遺文懿書曰:「司馬公善用兵,變化若神,所向無前,深爲弟憂之。」 당초 문의(文懿-공손연)는 위나라 군대가 출격한다는 말을 듣고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했다. 손권이 또한 멀리 출병하여 그를 위해 성원(聲援)하고 문의(文懿)에게 서신을 보냈다. “사마공(司馬公)은 용병에 능하고 변화(變化)가 신(神)과 같아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所向無前) 동생(→공손연)이 심히 염려되오.” 會霖潦,大水平地數尺,三軍恐,欲移營。帝令軍中敢有言徙者斬。都督令史張靜犯令,斬之,軍中乃定。賊恃水,樵牧自若。諸將欲取之,皆不聽。司馬陳珪曰:「昔攻上庸,八部並進,晝夜不息,故能一旬之半,拔堅城,斬孟達。今者遠來而更安緩,愚竊惑焉。」帝曰:「孟達衆少而食支一年,吾將士四倍于達而糧不淹月,以一月圖一年,安可不速?以四擊一,正令半解,猶當爲之。是以不計死傷,與糧競也。今賊衆我寡,賊飢我飽,水雨乃爾,功力不設,雖當促之,亦何所爲。自發京師,不憂賊攻,但恐賊走。今賊糧垂盡,而圍落未合,掠其牛馬,抄其樵采,此故驅之走也。夫兵者詭道,善因事變。賊憑衆恃雨,故雖飢困,未肯束手,當示無能以安之。取小利以驚之。非計也。」朝廷聞師遇雨,咸請召還。天子曰:「司馬公臨危制變,計日擒之矣。」既而雨止,遂合圍。起土山地道,楯櫓鉤橦,發矢石雨下,晝夜攻之。 때마침 큰 비가 연일 내려(霖潦) 홍수가 나 물이 평지에서도 수 척에 이르자 삼군(三軍)이 두려워하며 둔영을 옮기고자 했다. 선제가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감히 둔영을 옮기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한다고 했다. 도독영사(都督令史) 장정(張靜)이 영을 범하자 그를 참수했고 이에 군중이 안정되었다. 적(賊)이 물을 믿고 태연히 나무를 하고 방목했다. 제장들이 이를 취하고자 했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사마(司馬) 진규(陳珪)가 말했다, “예전 상용(上庸)을 공격할 때는 8부(部)로 아울러 나아가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능히 5-6일 만에(一旬之半) (※) 견고한 성을 함락하고 맹달(孟達)을 참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와서 다시 편안하고 느슨하게 하니 저는 당혹스럽습니다.” 선제가 말했다, “맹달의 군사가 적어 그 식량이 1년을 지탱할 수 있었으나 우리의 장사(將士-장병)들은 맹달의 군사보다 네 배에 달해 한 달을 버틸 수 없었소. 한 달로 1년을 도모하는 셈이니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었겠소? (병력은) 넷으로 하나를 공격하는 것이니 설령 그 중 절반을 잃더라도 도리어 당적할 수 있었소. 그리하여 사상자를 헤아리지 않았으니 이는 군량으로 더불어 경쟁한 것이오. 지금은 적의 군사가 우리보다 많아 적은 굶주리고 우리는 배부르며, 큰 비가 내리는 것이 이와 같아 공력(功力)을 펼칠 수 없으니, 비록 급히 서두른다 한들 또한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경사(京師)를 출발한 이래 적이 공격하는 것을 우려하진 않았으나 다만 적이 달아나는 것을 걱정했소. 적의 군량이 거의 소진되었고 (우리의) 위락(圍落-울타리,포위망;위圍+락落)이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우마(牛馬)를 약탈하고 땔나무캐는 것을 노략질한다면 이는 일부러 그들을 내몰아 달아나게 하는 것이오. 무릇 병(兵)은 궤도(詭道-속임수,기만술)이고 일의 변화에 잘 대처해야 하오. 적이 그들의 군사수 많음과 비오는 것을 믿고 이 때문에 비록 굶주리고 곤궁해도 속수(束手-손을 묶고 항복함)하려 하지 않으니, 우리는 응당 무능함을 보여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오. 작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 조정에서 군대가 비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원정군을) 소환하도록 청하니 천자가 말했다, “사마공(司馬公)은 위기에 처해 변화를 제어할 수 있으니, 오래지 않아 공손연을 붙잡아 올 것이오.” 얼마 뒤 비가 그치자 마침내 포위망이 완성되었다.(合圍)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땅굴을 파고 순(楯), 로(櫓), 구(鉤), 동(橦)을 쓰며 (※) 화살과 돌을 비오듯 쏘아 부으며 밤낮으로 공격했다. ※ 사마의가 상용의 맹달을 공격한 기간 / 앞에 맹달공격을 다룬 부분에서는 “八道攻之, 旬有六日 , 達甥鄧賢、將李輔等開門出降. 斬達, 傳首京師.”라 하여 16일이라 했으나, 여기서는 “ 一旬之半 , 拔堅城, 斬孟達” 열흘의 절반, 즉 5-6일 이라 해서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 이에 관련된 위략(삼국지 명제기 주)의 기술은 이렇습니다. “선왕( 宣王- 사마의)이 맹달의 장수 이보와 생질 등현을 꾀자 등현 등이 성문을 열고 (사마의)군을 맞아들였다. 맹달은 포위된 지 16일 만에 ( 旬有六日) 패망했고, 그의 수급은 낙양의 사방으로 뚫린 대로(四達之衢)에서 불태워졌다.”(魏略曰:宣王誘達將李輔及達甥鄧賢,賢等開門納軍.達被圍旬有六日而敗,焚其首于洛陽四達之衢.) 따라서 사마의 군이 성을 공격한 기간은 16일이 맞는 것 같고(진군기간 8일을 포함하면 통틀어 한달 정도가 걸린 셈), 여기서 사마 진규의 말은 글자가 잘못 전해졌거나 or 대화 상대방인 사마의를 의식해 다소 과장해서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 楯櫓鉤橦(순로구동)을 [자치통감] 해당 대목에서는 楯櫓鉤沖(순로구충)으로 적었는데, 자치통감전역에서는 이를 ‘用干, 櫓車, 鉤梯, 沖車’라 풀어 놓았습니다. 즉, 楯=방패 / 櫓= 櫓車(노거-망루가 있는 수레) / 鉤=鉤梯(구제-사다리) / 橦=沖=沖車(충거.충차)…로 본 것. 時有長星,色白,有芒鬣,自襄平城西南流于東北,墜於梁水,城中震慴。文懿大懼,乃使其所署相國王建、御史大夫柳甫乞降,請解圍面縛。不許,執建等,皆斬之。檄告文懿曰:「昔楚鄭列國,而鄭伯猶肉袒牽羊而迎之。孤爲王人,位則上公,而建等欲孤解圍退舍,豈楚鄭之謂邪!二人老耄,必傳言失旨,已相爲斬之。若意有未已,可更遣年少有明決者來。」文懿復遣侍中衛演乞剋日送任。帝謂演曰:「軍事大要有五,能戰當戰,不能戰當守,不能守當走,餘二事惟有降與死耳。汝不肯面縛,此爲決就死也,不須送任。」文懿攻南圍突出,帝縱兵擊敗之,斬于梁水之上星墜之所。既入城,立兩標以別新舊焉。男子年十五已上七千餘人皆殺之,以爲京觀。僞公卿已下皆伏誅,戮其將軍畢盛等二千餘人。收戶四萬,口三十餘萬。 이무렵 색이 희고 망렵(芒鬣-빛나는 갈기털? 꼬리?)이 있는 장성(長星-혜성)이 있어 양평성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양수(梁水)에 떨어지자 성 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 문의(文懿)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자신이 임명한 상국(相國) 왕건(王建), 어사대부(御史大夫) 유보(柳甫)를 보내 항복을 구하며 포위를 풀면 면박(面縛-양손을 결박하고 얼굴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임)할 것이라 청했다. (선제는) 이를 불허하고 왕건(王建) 등을 붙잡아 모두 참수했다. 격문을 보내 문의(文懿)에게 고했다. “옛날 초(楚)나라와 정(鄭)나라는 대등한 나라(列國)였으나 정백(鄭伯)은 도리어 웃통을 벗고 양(羊)을 끌며 초나라 군을 영접했다. 나는 왕의 신하(王人)로 지위가 상공(上公)인데 왕건 등은 나에게 포위를 풀고 물러나라고 요구하니 어찌 초나라, 정나라의 전례에 비기리! 두 사람이 늙고 흐리멍텅하며 필시 말을 전하며 본뜻을 그르쳤을 터이므로 내가 이미 그대를 위해 모두 죽였노라. 만약 할 말이 더 남았다면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젊은이를 다시 보내도록 하라.” 문의(文懿)가 다시 시중(侍中) 위연(衛演)을 보내 기일을 정해 볼모를 보낼 것을 청했다. 선제가 위연(衛演)에게 말했다, “군사(軍事)의 대요(大要)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달아나는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오직 항복하거나 죽는 것 뿐이다. 너희는 면박(面縛)하지 않으려 하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일 터, 볼모를 보낼 필요는 없다.” 문의(文懿)가 남쪽 포위망을 공격해(攻南圍) 돌출(突出)하자 선제가 군대를 풀어 이를 공격해 격파하고 양수(梁水) 가의 장성(長星)이 떨어진 곳에서 (문의를) 참수했다. 성으로 들어간 뒤 두 개의 표지를 세워 신구(新舊)를 구별했다.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이고 경관(京觀-인골을 쌓은 것.일종의 전승기념비)을 만들었다. (공손연이 임명한) 공경 이하 가짜 관원들을 모두 복주(伏誅-처형)하고 공손연의 장군 필성(畢盛) 등 2천여 명을 주륙했다. 4만 호(戶), 30여 만 구(口)를 거두었다. 初,文懿篡其叔父恭位而囚之。及將反,將軍綸直、賈範等苦諫,文懿皆殺之。帝乃釋恭之囚,封直等之墓,顯其遺嗣。令曰:「古之伐國,誅其鯨鯢而已,諸爲文懿所詿誤者,皆原之。中國人欲還舊鄉,恣聽之。」時有兵士寒凍,乞襦,帝弗之與。或曰:「幸多故襦,可以賜之。」帝曰:「襦者官物,人臣無私施也。」乃奏軍人年六十已上者罷遣千餘人,將吏從軍死亡者致喪還家。遂班師。天子遣使者勞軍于薊,增封食昆陽,并前二縣。 당초 문의(文懿)는 숙부인 공손공(公孫恭)의 지위를 빼앗고 그를 가두었고, 장차 모반하려 할 때 장군 윤직(綸直), 가범(賈範) 등이 (모반하지 말도록) 고간(苦諫-간절히 간언함)하니 문의(文懿)가 이들을 모두 죽였다. 이에 선제는 공손공을 석방하고 윤직 등의 묘(墓)를 봉(封-흙더미를 쌓아 북돋음)하고 그들의 후손을 현창했다. 영을 내려 말했다, “옛날 나라를 정벌할 때는 그 경예(鯨鯢-흉포한 악인)를 주살할 뿐이었다. 문의(文懿)에게 괘오(詿誤-연루되어 그르쳐짐)된 자들은 모두 그 죄를 용서한다. 중국인(中國人)이 옛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원하는대로 들어주도록 하라.” 이 무렵 병사들 중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어 저고리(襦)를 청했으나 선제는 주지 않았다. 어떤 이가 말하길, “다행히 헌 저고리가 많이 있으니 줄 수 있습니다.”고 하자 선제가 말했다, “저고리는 관물(官物)이니 신하된 몸으로 사사로이 베풀 수 없다.” 그리고는 상주하여 군인 중에 나이 60세 이상 천 여명의 군역을 파하여 되돌려 보내고, 장리(將吏-군관) 중 종군하다 사망한 자는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천자는 사자를 보내 계(薊-유주 광양군 계현)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을 늘려 곤양(昆陽)을 수여하니 예전과 합쳐 2개 현이 되었다. (※ 무양, 곤양. 둘다 예주 영천군 소속) 初,帝至襄平,夢天子枕其膝,曰:「視吾面。」俛視有異於常,心惡之。先是,詔帝便道鎭關中;及次白屋,有詔召帝,三日之間,詔書五至。手詔曰:「間側息望到,到便直排閤入,視吾面。」帝大遽,乃乘追鋒車晝夜兼行,自白屋四百餘里,一宿而至。引入嘉福殿臥內,升御床。帝流涕問疾,天子執帝手,目齊王曰:「以後事相託。死乃復可忍,吾忍死待君,得相見,無所復恨矣。」與大將軍曹爽並受遺詔輔少主。 당초 선제가 양평에 이르렀을 때 꿈을 꾸었는데, 천자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이르길, “내 얼굴을 보시오”라 하여 고개를 숙여 보니 평소와 다른 점이 있어 내심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초 선제에게 조령을 내려 편도(便道-지름길, 빠른길)로 가서 관중(關中)을 진수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백옥(白屋)에 이르렀을 때 선제를 소환하는 조서가 내렸는데 사흘 동안에 조서가 다섯 번 도착했다. 수조(手詔-임금이 손수 쓴 조서)에서 말했다, “그간 두렵고 불안해하며(側息) 그대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으니, 도착하거든 곧바로 합(閤-협문)을 밀치고 들어와 나를 만나도록 하라.” 선제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추봉거(追鋒車)를 타고 밤낮으로 겸행(兼行)하여 백옥(白屋)에서부터 4백여 리 되는 길을 하룻 밤을 묵은 뒤에 도착했다. 가복전(嘉福殿) 와내(臥內-침실 안)로 인도되어 어상(御床-임금의 침상)에 올랐다. 선제가 눈물을 흘리며 천자의 병세에 관해 관해 물으니 천자가 선제의 선제의 손을 잡고 제왕(齊王-조방曹芳)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뒷 일을 맡기오. 죽으려는 것을 겨우 견뎠으니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소이다.” 대장군 조상(曹爽)과 함께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주인을 보좌했다. 及齊王即帝位,遷侍中、持節、都督中外諸軍、錄尙書事,與爽各統兵三千人,共執朝政,更直殿中,乘輿入殿。爽欲使尙書奏事先由己,乃言於天子,徙帝爲大司馬。朝議以爲前後大司馬累薨於位,乃以帝爲太傅,入殿不趨,贊拜不名,劍履上殿,如漢蕭何故事。嫁娶喪葬取給於官,以世子師爲散騎常侍,子弟三人爲列侯,四人爲騎都尉。帝固讓子弟官不受。 제왕(齊王-조방曹芳)이 황제로 즉위하자 시중(侍中), 지절(持節), 도독중외제군(都督中外諸軍-중앙과 바깥의 여러 군무를 도독),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올라 조상(曹爽)과 함께 각기 군사 3천명을 통수하며 함께 조정(朝政)을 관장하고 대궐 안에서 번갈아 숙직하고 수레를 탄 채 대궐로 들어올 수 있었다. 조상(曹爽)은 상서(尙書)가 일을 아뢸 때 먼저 자신을 통하도록 하기 위해 천자에게 말해 선제를 대사마(大司馬)로 전임하도록 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그 앞뒤로 대사마가 누차 재위 중에 죽었다 하여 이에 선제를 (대사마로 임명하지 않고) 태부(太傅)로 삼았다. 입전불추(入殿不趨-어전에 들어올 때 종종걸음하지 않음), 찬배불명(贊拜不名-임금을 알현할 때 호명하지 않음), 검리상전(劍履上殿-어전에 오를 때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음)하도록 하니 한나라 때 소하(蕭何)의 고사(故事-전례)와 같았다. 혼인과 장례 비용은 관(官)에서 대어주었고, 세자(世子) 사마사(司馬師)를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고 자제(子弟-아들에 대한 경칭) 세 명을 열후(列侯)로 삼고 네 명을 기도위(騎都尉)로 삼았다. 선제는 굳게 사양하며 자제(子弟)의 관직은 받지 않았다. 正始元年春正月,[7]東倭重譯納貢,焉耆、危須諸國,弱水以南,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初,魏明帝好修宮室,制度靡麗,百姓苦之。帝自遼東還,役者猶萬餘人,雕玩之物動以千計。至是皆奏罷之,節用務農,天下欣賴焉。 [7] 正始元年 「正始」上各本皆有「魏」字。周家祿晉書校勘記以下簡周校:「『魏』字衍文,蓋前有『魏國既建』,『魏文帝即位』,黃初以下皆蒙上爲文。」今據刪。 정시(正始) 원년(240년) 봄 정월, [7] 동왜(東倭)가 중역(重譯-여러나라 말을 거쳐 거듭 통역함)하며 납공(納貢)하고 언기(焉耆), 위수(危須)의 여러 나라들(※ 언기, 위수는 서역방면의 나라)과 약수(弱水) 이남의 선비(鮮卑) 명왕(名王)이 모두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천자는 이를 재보(宰輔-재상)의 공으로 돌려 다시 선제의 봉읍을 늘려주었다. [7] <正始元年> - 각 본에는 正始 위(앞)에 모두 魏 자가 있다. ( 魏 正始元年) 주가록(周家祿)의 진서교감기(晉書校勘記)(이하 주교周校로 간칭)에서 이르길, “魏 자는 연문(衍文-군더더기 글자)이다. 대저 앞에서 魏國 既 建, 魏文帝即位 라 했으니 황초( 黃初) 이후로는 모두 위에 덮어씌워서(魏를 생략해서) 글을 지었을 것이다” 이제 이에 근거해서 (魏 자를) 삭제한다. (※ 魏正始元年 → 正始元年) 당초 위(魏) 명제(明帝)는 궁실 수축을 좋아하고 제도(制度-규격,양식)가 미려(靡麗-화려)해 백성들의 고통이 컸다. 선제가 요동(遼東)에서 돌아왔을 때 부역하는 자가 만여 명에 이르고 아름답게 꾸며 감상용으로 만든 물건(雕玩之物)이 천 개에 달했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모두 파하도록 상주하고 비용을 절약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하니 천하가 기뻐하며 의지했다. 二年夏五月,吳將全琮寇芍陂,朱然、孫倫圍樊城,諸葛瑾、步騭掠柤中,帝請自討之。議者咸言,賊遠來圍樊,不可卒拔。挫於堅城之下,有自破之勢,宜長策以御之。帝曰:「邊城受敵而安坐廟堂,疆埸騷動,衆心疑惑,是社稷之大憂也。」 정시 2년(241) 여름 5월, 오나라 장수 전종(全琮)이 작피(芍陂)를 침범하고 주연(朱然), 손륜(孫倫)이 번성(樊城)을 포위하고 제갈근(諸葛瑾), 보즐(步騭)이 사중(柤中)을 약탈하자 선제가 몸소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르길, 적이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으니 창졸간에 함락시킬 수 없고, 견고한 성 아래에서 꺾이어 스스로 무너지는 형세(自破之勢)가 될 것이니 의당 장책(長策)으로 이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선제가 말했다, “변경 성이 적의 침범을 받았는데 묘당(廟堂)에 편안히 앉아 있구려. 변경이 시끄럽고 동요되면 민심이 혼란해질 것이니 이는 사직의 큰 근심거리요.” 六月,乃督諸軍南征,車駕送出津陽門。帝以南方暑溼,不宜持久,使輕騎挑之,然不敢動。於是休戰士,簡精銳,募先登,申號令,示必攻之勢。吳軍夜遁走,追至三州口,斬獲萬餘人,收其舟船軍資而還。天子遣侍中常侍勞軍于宛。 6월, 그리하여 제군(諸軍)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니 거가(車駕)가 진양문(津陽門)을 나와 전송했다. 선제는 남쪽 지방이 덥고 습기가 많아 오래 끌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경기병으로 싸움을 걸었으나 주연(朱然)은 감히 출동하지 못했다. 이에 전사(戰士-군사)들을 쉬게 하고는, 정예(精銳)를 뽑고 선등(先登-선봉)을 모집하며 호령(號令)을 분명히 해 반드시 공격하겠다는 태세(必攻之勢)를 보여주었다. 오군(吳軍)이 밤중에 달아나자 이를 추격해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렀고 만여 명을 참획하고 주선(舟船-배), 군자(軍資-군수물자)를 거두고 돌아왔다. 천자가 시중상시(侍中常侍)를 보내 완(宛)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秋七月,增封食郾、臨潁,并前四縣,邑萬戶,子弟十一人皆爲列侯。帝勳德日盛,而謙恭愈甚。以太常常林鄕邑舊齒,見之每拜。恒戒子弟曰:「盛滿者道家之所忌,四時猶有推移,吾何德以堪之。損之又損之,庶可以免乎!」 가을 7월, 봉읍을 늘려 언(郾), 임영(臨潁)을 내리니 예전과 합쳐 모두 4개 현(※ 무양, 곤양, 언, 임영)에 식읍이 1만 호가 되었고, 자제(子弟) 11명을 모두 열후로 삼았다. 선제의 훈덕(勳德)이 날로 높아졌으나 더욱 겸손하고 공손하게 처신했다. 향읍의 구치(舊齒-덕망있는 원로)인 태상(太常) 상림(常林)은 그들이 매번 벼슬을 받는 것을 보고는, 늘 자제들을 타이르며 말했다, “가득 찬 것은 도가(道家)에서 꺼리는 바다. 사시(四時)가 변화하는 것을 내가 무슨 덕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덜어내고 또 덜어내야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으리!” 三年春,天子追封諡皇考京兆尹爲舞陽成侯。三月,奏穿廣漕渠,引河入汴,溉東南諸陂,始大佃於淮北。 정시 3년(242) 봄, 천자가 황고(皇考-죽은 부친의 존칭) 경조윤(京兆尹-즉, 사마방)을 추봉(追封)해 무양성후(舞陽成侯)의 시호를 내렸다. 3월, 주청하여 광조거(廣漕渠)를 뚫고 하수의 물을 끌어 변수(汴水-황하의 지류)로 유입시키고 동남쪽 저수지들에 물을 대니 비로소 회북(淮北-회수 이북)에서 크게 농사지었다. 先是,吳遣將諸葛恪屯皖,邊鄙苦之,帝欲自擊恪。議者多以賊據堅城,積穀,欲引致官兵。今懸軍遠攻,其救必至,進退不易,未見其便。帝曰:「賊之所長者水也,今攻其城,以觀其變。若用其所長,棄城奔走,此爲廟勝也。若敢固守,湖水冬淺,船不得行,勢必棄水相救,由其所短,亦吾利也。」 당초 오나라가 장수 제갈각(諸葛恪)을 보내 환(皖-양주 여강군 환현)에 주둔케 하여 변경지역에 이에 괴로움을 받으니 선제가 몸소 제갈각을 공격하고자 했다. 의논하는 자들 여럿이 이르길, ‘적(賊)이 견고한 성에 의거해 곡식을 쌓아놓고 관병(官兵-위나라 군대)을 유인하고자 하는 것이며 지금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공격해왔으니 그들의 구원군이 필시 당도할 것이라 진퇴(進退)가 쉽지 않고 유리한 점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선제가 말했다, “적(賊)의 장점은 물에서 싸우는 것이니 이제 그들의 성(城)을 공격해 그 변화를 살펴야 하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장점을 쓴다면 성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니 이는 조정(廟)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오. 만약 감히 (성을) 고수한다면 겨울이라 호수가 얕아 배가 다닐 수 없어 사세상 필시 물을 버리고 서로 구원할 것이니 이는 그들의 단점을 쓰는 것이 되어 또한 우리가 유리하오.” 四年秋九月,帝督諸軍擊諸葛恪,車駕送出津陽門。軍次於舒,恪焚燒積聚,棄城而遁。帝以滅賊之要,在於積穀,乃大興屯守,廣開淮陽、百尺二渠,又修諸陂於潁之南北,萬餘頃。[8]自是淮北倉庾相望,壽陽至於京師,[9]農官屯兵連屬焉。 [8] 又修諸陂於潁之南北萬餘頃 吳仕鑑晉書斠注以下簡稱斠注:食貨志作「大治諸陂于潁南潁北,穿渠三百餘里,漑田二萬頃」。紀文「萬餘頃」上似脫「漑田」二字。 [9] 壽陽至於京師 「壽陽」,食貨志作「壽春」。按:東晉時始改壽春爲壽陽,此處當作「壽春」。書中壽春、壽陽雜出,類此以下不再校。 정시 4년(243) 가을 9월, 선제가 제군(諸軍)을 이끌고 제갈각(諸葛恪)을 공격하니 거가(車駕)가 진양문(津陽門)을 나와 전송했다. 군이 서(舒-여강군 서현)에 당도하자 제갈각은 비축해둔 군량을 불태우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선제는 적을 멸하는 요체는 군량을 비축하는 데 있다고 여기니 이에 둔수(屯守)를 크게 일으키고 회양(淮陽), 백척(百尺)의 두 수로(渠)(회양거, 백척거)를 널리 열고 또한 영수(潁水)의 남북에 있는 저수지들을 수리하여 (개전漑田이) 만 여 경(頃)에 이르렀다. [8] 이 이후로 회북(淮北)에 창유(倉庾-쌀창고)가 도처에 많게 되었고 수양(壽陽-수춘)에서 경사(京師)에 이르기까지 [9] 농관(農官), 둔병(屯兵-둔전병)이 서로 잇달았다. [8] <又修諸陂於潁之南北萬餘頃> - 오사감(吳仕鑑)의 진서각주(晉書 斠 注) (이하 각주( 斠 注)로 간칭) 에서 이르길, (진서) 식화지에는 ‘영남(潁南) 영북(潁北)에서 여러 저수지들을 크게 수리하고 수로(渠)를 3백여 리 뚫으니 개전(漑田-물대는 논)이 2만 경(頃)에 달했다.’고 적혀있으니 선제기 글의 萬餘頃 위(앞)에 漑田이란 두 글자가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 萬餘頃 → (漑田)萬餘頃..으로 보인다는 말) [9] <壽陽至於京師> - 壽陽(수양)은 (진서) 식화지에는 壽春(수춘)으로 적혀 있다. 살펴보건대, 동진( 東晉) 때 처음으로 壽春(수춘)을 壽陽(수양)으로 고쳤으니 이곳에서는 응당 壽春(수춘)으로 적어야 한다. 진서 중에서 수춘, 수양이 뒤섞여 나오는데, 이와 비슷한 경우는 이하에서 다시 교정하지 않는다. 五年春正月,帝至自淮南,天子使持節勞軍。尙書鄧颺、李勝等欲令曹爽建立功名,勸使伐蜀。帝止之,不可,爽果無功而還。 정시 5년(244) 정월, 선제가 회남(淮南)으로부터 (경도에) 도착하자 천자가 사자에게 절(節)을 들려보내(持節)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상서(尙書) 등양(鄧颺), 이승(李勝)등은 조상(曹爽)이 공명(功名)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촉(蜀)을 정벌하도록 권했다. 선제가 이를 반대했으나 막을 수 없었는데 조상은 과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六年秋八月,曹爽毁中壘中堅營,以兵屬其弟中領軍羲。帝以先帝舊制禁之,不可。冬十二月,天子詔帝朝會乘輿升殿。 정시 6년(245) 가을 8월, 조상(曹爽)이 중루중견영(中壘中堅營)을 없애고 그 군사들을 자신의 동생인 중령군(中領軍) 조희(曹羲)에게 속하게 했다. 선제는 전대 황제 때부터의 오랜 제도라 하여 이를 제지했으나 막지 못했다. 겨울 12월, 천자가 선제에게 조서를 내려 조회할 때 수레를 타고 어전에 오르도록 했다. 七年春正月,吳寇柤中,夷夏萬餘家避寇北渡沔。帝以沔南近賊,若百姓奔還,必復致寇,宜權留之。曹爽曰:「今不能修守沔南而留百姓,非長策也。」帝曰:「不然。凡物致之安地則安,危地則危。故兵書曰『成敗,形也;安危,勢也』。形勢,御衆之要,不可以不審。設令賊以二萬人斷沔水,三萬人與沔南諸軍相持,萬人陸梁柤中,將何以救之?」爽不從,卒令還南。賊果襲破柤中,所失萬計。 정시 7년(246) 봄 정월, 오나라가 사중(柤中)을 침범하자 이민족과 중국인(夷夏) 만여 가(家)가 침범을 피해 북쪽으로 면수(沔水)를 건넜다. 선제는 면수 이남이 적과 가까우므로 만약 백성들을 되돌려보낸다면 필시 침범받을 것이므로 의당 임시로 백성을 (면수 이북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했다. 조상(曹爽)이 말했다, “지금 면수 이남을 잘 닦아 지키지 못하고 백성을 머물게 하는 것은 장책(長策)이 아니오.” 선제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무릇 물건은 안전한 땅에 두면 안전하고 위태로운 땅에 두면 위태로운 법이오. 그런 고로 병서(兵書)에서 이르길, ‘성패(成敗)는 형(形)에 달려있고 안위(安危)는 세(勢)에 달려 있다’고 했소. 형세(形勢)는 어중(御衆-여러 사람을 부림)의 요체이니 상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소. 만약 적이 2만 군사로 면수(沔水)를 끊고서 3만 군사로 면수이남의 제군(諸軍)과 서로 대치한 채 1만 군사로 사중(柤中)에서 마음대로 날뛴다면 장차 어찌 구할 수 있겠소?” 조상(曹爽)이 이에 따르지 않고 끝내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과연 적이 사중(柤中)을 습격해 격파하니 희생당한 자가 만명을 헤아렸다. 八年夏四月,夫人張氏薨。 정시 8년(247) 4월, 부인(夫人) 장씨(張氏)가 훙(薨)했다. 曹爽用何晏、鄧颺、丁謐之謀,遷太后於永寧宮,專擅朝政,兄弟并典禁兵,多樹親黨,屢改制度。帝不能禁,於是與爽有隙。 조상(曹爽)이 하안(何晏), 등양(鄧颺), 정밀(丁謐)의 모책을 써서 태후(太后)를 영녕궁(永寧宮)으로 옮기고 조정을 전천(專擅-전행,전횡)하니 형제가 함께 금병(禁兵-친위군)을 관장하고 친당(親黨)을 많이 심어놓고 제도를 여러 차례 고쳤다. 선제가 이를 제지할 수 없었고 이에 조상(曹爽)과의 사이에 틈(불화)이 생기게 되었다. 五月,帝稱疾不與政事。時人爲之謠曰:「何、鄧、丁,亂京城。」 5월, 선제는 병들었다 칭하고 정사(政事)에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이에 관해 노래하길(謠), “하(何), 등(鄧), 정(丁)이 경성(京城)을 어지럽히는구나”라고 했다. 九年春三月,黃門張當私出掖庭才人石英等十一人,與曹爽爲伎人。爽、晏謂帝疾篤,遂有無君之心,與當密謀,圖危社稷,期有日矣。帝亦潛爲之備,爽之徒屬亦頗疑帝。會河南尹李勝將莅荊州,來候帝。帝詐疾篤,使兩婢侍,持衣衣落,指口言渴,婢進粥,帝不持杯飮,粥皆流出霑胸。勝曰:「衆情謂明公舊風發動,何意尊體乃爾!」帝使聲氣纔屬,說「年老枕疾,死在旦夕。君當屈幷州,幷州近胡,善爲之備。恐不復相見,以子師、昭兄弟爲託」。勝曰:「當還忝本州,非幷州。」帝乃錯亂其辭曰:「君方到幷州。」勝復曰:「當忝荊州。」帝曰:「年老意荒,不解君言。今還爲本州,盛德壯烈,好建功勳!」勝退告爽曰:「司馬公尸居餘氣,形神已離,不足慮矣。」他日,又言曰:「太傅不可復濟,令人愴然。」故爽等不復設備。 정시 9년(248) 봄 3월, 황문(黃門) 장당(張當)이 사사로이 액정(掖庭-비빈, 궁녀들의 거처)의 재인(才人-궁녀의 관직명) 석영(石英) 등 11명을 뽑아 조상(曹爽)에게 바쳐 기인(伎人-가녀歌女)으로 삼게 했다. 조상(曹爽)과 하안(何晏)은 선제의 병이 위중하다 여겨 마침내 무군지심(無君之心)을 품으니 장당(張當)과 더불어 은밀히 공모해 사직에 해를 끼치려 도모하여 그 기일이 멀지 않았다.(期有日矣) 선제 또한 이를 은밀히 방비하니 조상(曹爽)의 무리들도 선제를 자못 의심하게 되었다. 때마침 하남윤(河南尹) 이승(李勝)이 형주(荊州)에 부임하게 되자 선제에게 와서 통태를 살폈다. 선제가 병이 깊은 것처럼 속이니 2명의 계집종에게 시중들게 하고 옷을 잡고 있었으나 옷자락이 땅에 끌렸다. 입을 가리키며 목이 마르다고 하니 계집중이 죽을 올렸는데 선제는 죽그릇을 잡지 못했고 죽이 모두 흘러 가슴자락을 적셨다. 이승(李勝)이 말했다, “많은 이들이 명공(明公)께서 예전 풍(風)이 재발했다고 하더니, 존체(尊體)가 이 지경일 줄 어찌 짐작했겠습니까!” 선제가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했다,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코앞에 닥쳤소. 그대가 병주(幷州)에 가게 되었구려. 병주(幷州)는 호(胡-흉노)와 가까우니 잘 방비하도록 하시오.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으니 아들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 형제를 부탁하오.” 이승이 말했다, “송구하게도 본주(本州)로 돌아가게 된 것이지 병주(幷州)가 아닙니다.” (※이승이 형주 남양군 출신이므로 형주를 본주本州라 표현) 그러자 선제가 이를 혼동하며 말했다, “이제 막 병주(幷州)에 도착했다고?” 이승이 다시 말했다, “송구하게도 형주(荊州)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선제가 말했다, “내가 늙고 기운이 쇠해 그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소. 이제 본주로 돌아간다니 성덕(盛德) 장렬(壯烈)히 공훈(功勳)을 잘 세우도록 하시오!” 이승이 물러나와 조상(曹爽)에게 고했다, “사마공(司馬公)은 시체와 다름없어 기운이 겨우 남아 있고 형신(形神-육체와 정신)이 이미 분리되었으니 족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뒷날 또 말했다, “태부(太傅)가 다시 회복되기 어려우니 가히 애처로운 일입니다.” 이 때문에 조상 등은 다시 선제를 방비하지 않았다. 嘉平元年春正月甲午,天子謁高平陵,爽兄弟皆從。是日,太白襲月。帝于是奏永寧太后廢爽兄弟。時景帝爲中護軍,將兵屯司馬門。帝列陣闕下,經爽門。爽帳下督嚴世上樓,引弩將射帝,孫謙止之曰:「事未可知。」三注三止,皆引其肘不得發。大司農桓範出赴爽,蔣濟言於帝曰:「智囊往矣。」帝曰:「爽與範內疏而智不及,駑馬戀短豆,[10]必不能用也。」於是假司徒高柔節,行大將軍事,領爽營,謂柔曰:「君爲周勃矣。」命太僕王觀行中領軍,攝羲營。 [10]駑馬戀短豆 武英殿本以下簡稱殿本及魏志曹爽傳注引干寶晉紀、資治通鑑七五「短豆」作「棧豆」,御覽八九五引干寶晉紀作「芻豆」。 가평(嘉平) 원년(249년) 봄 정월 갑오일(6일), 천자가 고평릉(高平陵)을 참배하자 조상(曹爽) 형제가 모두 따라갔다. 이날 태백(太白-금성)이 달을 범했다.(太白襲月) 이에 선제는 영녕궁의 태후(太后)에게 상주해 조상 형제를 파면하도록 했다. 당시 경제(景帝-사마사司馬師)는 중호군(中護軍)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사마문(司馬門)에 주둔했다. 선제는 궐 아래에서 열진(列陣-포진)하고 조상(曹爽)의 문(※조상 세력이 관장하거나 장악하고 있던 문?)을 지나려 했다. 조상(曹爽)의 장하독(帳下督) 엄세(嚴世)가 문루에 올라 노(弩)를 당겨 선제를 쏘려 하니 손겸(孫謙)이 이를 제지하며 말했다, “사태가 어떠한지 아직 알 수 없소.” 화살을 시위에 세 번 얹었으나 세 번을 말리며 매번 그의 팔꿈치를 당기니 발사하지 못했다. 대사농(大司農) 환범(桓範)이 성문을 나가 조상에게로 나아가자 장제(蔣濟)가 선제에게 말했다, “지낭(智囊-꾀주머니)이 갔습니다.” 선제가 말했다, “조상은 환범과 더불어 안으로 소원하고 지혜가 미치지 못하며 굼뜬 말은 작은 콩에 연연하는 법이니(駑馬戀短豆-노마연단두) [10] 필시 그를 제대로 쓰진 못할 것이오.” [10] <駑馬戀短豆> - 무영전본(武英殿本)(이하 전본殿本으로 간칭)과 위지 조상전(曹爽傳) 주에서 인용한 간보(干寶)의 진기(晉紀), 자치통감 권75에는 短豆(단두)가 棧豆(잔두)로 적혀있고, 어람 권895에서 인용한 간보(干寶)의 진기(晉紀)에는 芻豆(추두)라 적혀있다. 그리고는 사도(司徒) 고유(高柔)에게 부절을 내려(假節) 대장군(大將軍)의 사무를 대행하여 조상(曹爽)의 영(營)을 거느리게 하며 이르길, “그대가 바로 주발(周勃)이오.”라고 했다. (※) 태복(太僕) 왕관(王觀)에게 명해 중령군(中領軍)의 직을 대행하며 조희(曹羲)의 영(營)을 관장하도록 했다. ※ 주발(周勃)은 한나라 건국공신으로 여태후가 죽은 뒤 진평, 관영 등과 더불어 여씨 일족을 제거해 한나라 초 전횡하던 외척세력을 제압했는데, 그 사건을 염두에 두고 주발이라 칭한 것으로 보입니다. 帝親帥太尉蔣濟等勒兵出迎天子,屯于洛水浮橋,上奏曰:「先帝詔陛下、秦王及臣升於御床,握臣臂曰『深以後事爲念』。今大將軍爽背棄顧命,敗亂國典,內則僭擬,外專威權。群官要職,皆置所親;宿衛舊人,並見斥黜。根據槃互,縱恣日甚。又以黃門張當爲都監,專共交關,伺候神器。天下洶洶,人懷危懼。陛下便爲寄坐,豈得久安?此非先帝詔陛下及臣升御床之本意也。臣雖朽邁,敢忘前言。昔趙高極意,秦是以亡;呂霍早斷,漢祚永延。此乃陛下之殷鑒,臣授命之秋也。公卿群臣皆以爽有無君之心,兄弟不宜典兵宿衛;奏皇太后,皇太后敕如奏施行。臣輒敕主者及黃門令罷爽、羲、訓吏兵,各以本官侯就第。若稽留車駕,以軍法從事。臣輒力疾將兵詣洛水浮橋,伺察非常。」 선제가 친히 태위(太尉) 장제(蔣濟) 등을 거느리고 군대를 지휘해 천자를 영접하기 위해 출군하고 낙수(洛水) 부교(浮橋)에 주둔한 뒤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선제(先帝-전 황제, 즉 명제)께서 폐하와 진왕(秦王-조순曹詢), 그리고 신을 불러 어상(御床)에 오르게 해 신의 팔을 잡고 이르길 ‘심히 뒷일을 염려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대장군 조상(曹爽)은 고명(顧命)을 저버리고 국전(國典-나라의 전례,제도)을 어지럽히니, 안으로는 참의(僭擬-참람되게 스스로를 윗사람에 견줌)하고 밖으로는 위권(威權-위엄와 권력)을 전단하고 있습니다. 백관의 요직에는 모두 자신과 친한 사람을 두고 예전부터 숙위(宿衛)하던 자들은 모두 내쫓겼습니다. (조정에) 뿌리를 내리고 점거해 서로 결탁하니(根據槃互) 그 종자(縱恣-제멋대로 방자하게 굶)함이 날로 심해졌습니다. 또한 황문(黃門) 장당(張當)을 도감(都監)으로 삼고 오로지 함께 교관(交關-결탁,내통)하며 신기(神器)를 정탐하니 천하가 흉흉하고 사람들마다 두려움을 품게 되었습니다. 폐하가 다만 기좌(寄坐-남에게 빌붙어 있음, 손님의 지위에 있음)하니 어찌 오래도록 안전하겠습니까? 이는 선제(先帝)께서 폐하와 신을 어상(御床)에 오르게 한 본뜻이 아닙니다. 신이 비록 늙고 쇠약한 몸이나 어찌 감히 지난 날 (선제의) 말씀을 잊겠습니까. 옛날 조고(趙高)가 전횡하니 진(秦)나라가 이 때문에 망했고, 여씨와 곽씨(呂霍)를 일찍 끊어냈기에 한나라 제업은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폐하가 본보기로 삼아야 할 전대의 일이며 지금은 신이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공경(公卿) 군신(群臣)들이 모두 이르길 조상(曹爽)이 무군지심(無君之心)을 지녔고 그 형제가 군사를 거느리며 숙위(宿衛)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하여 황태후께 상주하니 상주한 대로 시행하라고 황태후께서 명하셨습니다. 주관하는 자(主者)와 황문령(黃門令)에 신이 임의로(輒) 명해 조상(曹爽), 조희(曹羲), 조훈(曹訓)의 관직과 병권(吏兵)을 파하고 각기 원래 관직과 후(侯)의 신분으로 사저로 돌아가게 하고, 만약 거가(車駕)를 계류(稽留)시킨다면 군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신이 병든 몸으로 임의로(輒) 군사를 거느리고 낙수 부교(浮橋)로 온 것은 비상(非常)한 사태를 살피기 위함입니다.” 爽不通奏,留車駕宿伊水南,伐樹爲鹿角,發屯兵數千人以守。桓範果勸爽奉天子幸許昌,移檄徵天下兵。爽不能用,而夜遣侍中許允、尙書陳泰詣帝,觀望風旨。帝數其過失,事止免官。泰還以報爽,勸之通奏。帝又遣爽所信殿中校尉尹大目諭爽,指洛水爲誓,爽意信之。桓範等援引古今,諫說萬端。終不能從,乃曰:「司馬公正當欲奪吾權耳。吾得以侯還第,不失爲富家翁。」範拊膺曰:「坐卿,滅吾族矣!」遂通帝奏。旣而有司劾黃門張當,并發爽與何晏等反事,乃收爽兄弟及其黨與何晏、丁謐、鄧颺、畢軌、李勝、桓範等誅之。蔣濟曰:「曹眞之勳,不可以不祀。」帝不聽。 조상(曹爽)이 상주문을 천자에게 올리지 않고 거가(車駕)를 이수(伊水) 남쪽에서 유숙하게 하고는 나무를 베어 녹각을 만들고 둔병(屯兵-둔전병) 수천 명을 징발해 수비했다. 환범(桓範)은 과연 천자를 모시고 허창(許昌)으로 행차해 격문을 돌려 천하의 군사를 부르도록 조상(曹爽)에게 권했으나 조상이 이 계책을 쓰지 않고, 밤중에 시중(侍中) 허윤(許允), 상서(尙書) 진태(陳泰)를 선제에게 보내 선제의 의중을 살폈다. 선제가 그의 과실(過失-과오)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에 관한 처벌은 면관(免官)하는데 그친다고 했다. 진태(陳泰)가 돌아와 조상(曹爽)에게 보고하고 상주문을 천자에게 올리도록 권했다. 선제는 또 조상(曹爽)이 신임하던 전중교위(殿中校尉) 윤대목(尹大目)을 보내 조상(曹爽)을 효유하게 하여 낙수(洛水)를 가리키며 맹세하니 조상(曹爽)이 이를 믿었다. 환범(桓範) 등이 고금의 사례를 인용하며 백방으로 간언하고 설득했으나 끝내 따르지 않고 이르길, “사마공(司馬公)은 정히 내 권력을 뺏고자 할 뿐이오. 내가 후(侯)로서 사저로 돌아간다면 부가옹(富家翁-부자)의 지위를 잃지는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환범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경에 연루되어 내 일족이 멸해지게 되었소!” 마침내 선제의 상주문을 천자에게 올렸다. 얼마 후 유사(有司-담당관원)가 황문 장당(張當)의 죄상을 아뢰고 아울러 조상(曹爽)이 하안(何晏) 등과 함께 모반을 꾸민 일을 발고하니 이에 조상(曹爽) 형제와 그 일당인 하안(何晏), 정밀(丁謐), 등양(鄧颺), 필궤(畢軌), 이승(李勝), 환범 등을 체포(桓範)하고 모두 주살했다. 장제(蔣濟)가 이르길, “(조상의 부친인) 조진(曹眞)의 공훈을 볼 때 제사를 잇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고 했으나 (※ 조상은 살려주자는 말) 선제가 들어주지 않았다. 初,爽司馬魯芝、主簿楊綜斬關奔爽。及爽之將歸罪也,芝、綜泣諫曰:「公居伊周之任,挾天子,杖天威,孰敢不從?舍此而欲就東市,豈不痛哉!」有司奏收芝、綜科罪,帝赦之,曰:「以勸事君者。」 당초 조상(曹爽)의 사마(司馬) 노지(魯芝), 주부(主簿) 양종(楊綜)이 궐문의 군사를 베고 조상(曹爽)에게로 달아났었다. 조상이 장차 죄를 받으려 하자 노지, 양종이 울며 간언하길 “공이 이윤, 주공과 같은 대임(伊周之任)을 맡아 천자를 끼고 천위(天威)에 의지하는데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를 버리고 동시(東市-처형장)로 나아가려 하시니 어찌 통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사(有司)가 주청하여 노지, 양종을 체포해 과죄(科罪-죄를 결정함)하라 하자 선제가 이들을 용서하며 말했다, “이는 주인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권하기 위함이오.” 二月,天子以帝爲丞相,增封潁川之繁昌、鄢陵、新汲、父城,并前八縣,邑二萬戶,奏事不名。固讓丞相。冬十二月,加九錫之禮,朝會不拜。固讓九錫。 2월, 천자가 선제를 승상(丞相)으로 삼고 영천(潁川)군의 번창(繁昌), 언릉(鄢陵), 신급(新汲), 부성(父城)을 봉읍으로 더해 예전과 합쳐 모두 8개 현에 2만 호가 되었고, 주사불명(奏事不名-상주할 때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음)하게 했다. 승상 직은 굳게 사양했다. 겨울 12월, 구석(九錫)의 예(禮)를 더하고 조회불배(朝會不拜–조회할 때 절하지 않음)하게 했다. 구석(九錫)은 굳게 사양했다. 二年春正月,天子命帝立廟于洛陽,置左右長史,增掾屬、舍人滿十人,歲擧掾屬任御史、秀才各一人,增官騎百人,鼓吹十四人,封子肜平樂亭侯,倫安樂亭侯。帝以久疾不任朝請,每有大事,天子親幸第以諮訪焉。 가평 2년(250) 봄 정월, 천자가 선제에게 명해 낙양(洛陽)에 종묘(廟)를 세우도록 하고, 좌우 장사(長史)를 두고, 연속(掾屬-관속)을 늘리고, 사인(舍人)은 10명을 채우고, 매년 연속(掾屬) 중에서 천거해 어사(御史), 수재(秀才) 각기 1명씩을 임명하고, 관기(官騎) 1백 명과 고취(鼓吹) 14명을 늘리고, (선제의) 아들 사마융(司馬肜)을 평락정후(平樂亭侯)에, 사마륜(司馬倫)을 안락정후(安樂亭侯)에 봉했다. 선제가 오랜 병으로 조청(朝請-조현朝見.황제를 배알함)하지 못하자 매번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천자가 친히 선제의 사저로 행차해 자문을 구했다. 兗州刺史令狐愚、太尉王淩貳於帝,謀立楚王彪。 연주자사(兗州刺史) 영호우(令狐愚), 태위(太尉) 왕릉(王淩)이 선제를 배반하고 초왕(楚王) 조표(曹彪)를 옹립할 계책을 꾸몄다. 三年春正月,王淩詐言吳人塞塗水,請發兵以討之。帝潛知其計,不聽。 가평 3년(251) 봄 정월, 왕릉(王淩)이 오나라가 도수(塗水)를 막았다고 속이며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선제가 비밀히 그 계책을 알아채고 들어주지 않았다. 夏四月,帝自帥中軍,泛舟沿流,九日而到甘城。淩計無所出,乃迎於武丘,[11]面縛水次,曰:「淩若有罪,公當折簡召淩,何苦自來邪!」帝曰:「以君非折簡之客故耳。」即以淩歸于京師。道經賈逵廟,淩呼曰:「賈梁道!王淩是大魏之忠臣,惟爾有神知之。」至項,仰鴆而死。收其餘黨,皆夷三族,并殺彪。悉錄魏諸王公置于鄴,命有司監察,不得交關。 [11]武丘 魏志王淩傳、通鑑七五作「丘頭」。魏志文帝紀甘露三年「魏帝命改丘頭曰武丘」,高貴鄉公紀同。改名在後,此時當作「丘頭」。 여름 4월, 선제가 친히 중군(中軍)을 통수하며 배를 띄워 물을 따라내려가 9일 만에 감성(甘城)에 도착했다. 왕릉(王淩)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무구(武丘)에서 선제를 영접했는데 [11] 물가에서 면박(面縛)한 채로 말했다, “저 왕릉에게 죄가 있으면 공이 서신을 보내(折簡) 저를 부르면 되지 어찌하여 몸소 오셨습니까!” [11] <武丘> - 위지 왕릉전, 통감 권75에는 丘頭(구두)로 적혀있다. 위지 문제기 감로 3년(258년) 조에서 위나라 황제가 명해 구두(丘頭)를 무구(武丘)라 고쳤다 했고 고귀향공기에서도 동일하다. (※[삼국지] 고귀향공기, [진서] 문제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으나 문제기(조비)에는 없는데, 진서 문제기(사마소)를 위지 문제기로 잘못 적은 거 같습니다) 이름을 (무구武丘로) 고친 것은 이후의 일이니 이때에는 응당 丘頭(구두)로 적어야 한다. (※ 武丘 → 丘頭 로 고쳐야 당시 지명에 더 맞다는 말) 선제가 말했다, “그대는 서신으로 불러서는 오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리고는 왕릉을 경사(京師)로 송환했다. 도중에 가규(賈逵)의 묘(廟-사당)를 지나자 왕릉이 외쳤다, “가양도(賈梁道)! 나 왕릉이 대위(大魏)의 충신임을, 그대의 신령이 있다면 잘 알 것이오!” (※ 가규의 자가 양도梁道. [삼국지] 왕릉전에 의하면 왕릉이 가규와 서로 친했다고 함) 항(項-예주 여남군 항현)에 이르러 짐독을 먹고 죽었다. 그의 남은 일당을 체포해 모두 삼족을 멸하고 아울러 조표(曹彪-왕릉이 옹립하려던 초왕 조표)를 죽였다. 위나라의 여러 왕공(王公)들을 모두 붙잡아 업(鄴)에 두고는, 유사(有司)에게 명해 이들을 감찰(監察)하여 서로 교관(交關)하지 못하게 했다. 天子遣侍中韋誕持節勞軍于五池。帝至自甘城,天子又使兼大鴻臚、太僕庾嶷持節,策命帝爲相國,封安平郡公,孫及兄子各一人爲列侯,前後食邑五萬戶,侯者十九人。固讓相國、郡公不受。 천자가 시중 위탄(韋誕)을 보내 지절(持節)하여(부절을 지니고) 오지(五池)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게 했다. 선제가 감성(甘城)으로부터 (경도에) 도착하자 천자가 또 겸대홍려(兼大鴻臚), 태복(太僕) 유의(庾嶷)를 보내 지절(持節)하여, 선제에게 책명을 내려 상국(相國)으로 임명하고 안평군공(安平郡公)에 봉하고 선제의 손자와 형의 아들 각기 1명을 열후로 삼았으며, 그 앞뒤로 식읍이 5만 호, 후(侯)로 봉해진 자가 19명에 달했다. 상국(相國), (안평)군공(郡公)은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六月,帝寢疾,夢賈逵、王淩爲祟,甚惡之。秋八月戊寅,崩於京師,時年七十三。天子素服臨弔,喪葬威儀依漢霍光故事,追贈相國、郡公。弟孚表陳先志,辭郡公及轀輬車。 6월, 선제가 병으로 앓아 누워 가규(賈逵), 왕릉(王淩)에게 해를 입는 꿈을 꾸니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 가을 8월 무인일(5일), 경사(京師-수도)에서 붕(崩-천자의 죽음)하니 이때 나이 73세였다. (※사마의 생몰: 179-251) 천자가 소복(素服)을 입고 조문하고 상장(喪葬)의 위의(威儀-예법,의례)는 한나라 곽광(霍光)의 고사(故事-전례)에 의거하고 상국(相國), 군공(郡公)을 추증했다. 동생인 사마부(司馬孚)가 표(表)를 올려 고인의 뜻을 진술하며 군공(郡公)과 온량거(轀輬車)를 사양했다. 九月庚申,葬于河陰,諡曰文,後改諡宣文。[12]先是,預作終制,於首陽山爲土藏,不墳不樹;作顧命三篇,斂以時服,不設明器,後終者不得合葬。一如遺命。晉國初建,追尊曰宣王。武帝受禪,上尊號曰宣皇帝,陵曰高原,廟稱高祖 [12]諡曰文後改諡宣文 各本皆作「諡曰文貞,後改諡文宣」。考異:「按禮志,魏朝初諡宣帝爲文侯,景帝爲武侯。文王表不宜與二祖同,於是改諡宣文、忠武。然則初諡文,無『貞』字也。禮志及文帝紀並稱舞陽宣文侯,宋書禮志同。此云『文宣』,亦轉寫之誤。」今據改。 9월 경신일(17일), 하음(河陰)에 매장하고 시호를 내려 문(文)이라 하고(무양문후舞陽文侯) 뒤에 선문(宣文)으로 고쳤다.(무양선문후舞陽宣文侯) [12] [12] <諡曰文後改諡宣文> - 각 본에는 모두 “諡曰文貞,後改諡文宣” (시호를 내려 문정文貞이라 하고 뒤에 문선文宣으로 고쳤다)이라 적혀 있다. 고이(考異)에서 말했다, “(진서) 예지(禮志)를 살펴보건대, 위나라 조정에서 처음 시호를 내려 선제(宣帝-사마의)를 문후(文侯)로 삼고 경제(景帝-사마사)를 무후(武侯)로 삼았는데, 문왕(文王-사마소)이 표를 올려 (그 시호가) 2조(二祖-무제 조조, 문제 조비)와 의당 같아서는 안된다 하니 이에 선문(宣文), 충무(忠武)로 고쳤다고 한다. 그런 즉 처음의 시호는 文이며 貞 자는 없다. (또한) 예지(禮志)와 문제기(文帝紀)에서 아울러 舞陽宣文侯(무양선문후)라 칭했고 송서(宋書) 예지(禮志)에서도 동일하다. 여기서 文宣(문선)이라 한 것은 또한 옮기며 베끼다 생긴 오류이다.” 이제 이에 근거해서 고친다. ※ (1) 원래 판본들 : 文貞 - 뒤에 文宣 (2) 입이사고이의 고증 : 文 - 뒤에 宣文 (3) (2)에 의거해 이 대목의 글자를 文貞 → 文 ; 文宣 → 宣文 으로 고침 당초 미리 종제(終制-장례에 관한 유언)를 지어 수양산(首陽山)에 토장(土藏-흙을 파서 매장함)하고 분묘를 만들거나 나무를 심지 말라고 했다.(不墳不樹) 고명(顧命) 3편을 지었는데, 시복(時服-평상복)으로 염(斂)하고 명기(明器-부장품)를 두지 말고 뒤에 죽는 자를 (자신의 묘에) 합장하지 말라고 했다. 진국(晉國)이 처음 세워지고 선왕(宣王)으로 추존되었다. 무제(武帝-사마염)가 위나라의 선양을 받자 존호를 올려 선황제(宣皇帝)라 하고 능(陵)을 고원(高原)이라 하고 묘호를 고조(高祖)라 칭했다. 帝內忌而外寬,猜忌多權變。魏武察帝有雄豪志,聞有狼顧相,欲驗之。乃召使前行,令反顧,面正向後而身不動。又嘗夢三馬同食一槽,甚惡焉。因謂太子丕曰:「司馬懿非人臣也,必預汝家事。」太子素與帝善,每相全佑,故免。帝於是勤於吏職,夜以忘寢,至於芻牧之間,悉皆臨履,由是魏武意遂安。及平公孫文懿,大行殺戮。誅曹爽之際,支黨皆夷及三族,男女無少長,姑姊妹女子之適人者皆殺之,既而竟遷魏鼎云。 선제는 내심 꺼리는 바가 있어도 겉으로는 너그러웠고, 시기심이 있고 권변(權變-임기응변)이 많았다. 위무제(조조)는 선제에게 웅대하고 호방한 뜻(雄豪志)이 있음을 알아채고 그에게 낭고상(狼顧相)이 있음을 듣고는 이를 확인하고자 했다. 이에 그를 불러 오게 하고는 고개를 돌려보게 하니 얼굴은 곧바로 뒤를 향하는데 몸은 움직임이 없었다. 또한 일찍이 세 마리 말이 한 구유(槽-조씨의 조曹를 상징)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고는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래서 태자 조비(曹丕)에게 이르길, “사마의(司馬懿)는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니 필시 너희 집안일에 관여할 것이다.”라 하였다. 태자가 평소 선제와 친하여 늘 서로 전우(全佑-비호)했는데 이 때문에 (총행을) 잃게 되었다. 이에 선제는 관리의 직무(吏職)에 부지런히 힘써 밤에도 잠을 잊을 정도였고 가축을 기르는 일(芻牧)에까지 이르러 이를 모두 임리(臨履-臨深履薄의 줄임말 즉, 신중하고 조심스러움 ; 직접 챙김)하니 이로 말미암아 위무제가 마침내 그에 관해 안심하게 되었다. 공손문의(公孫文懿-공손연)를 평정하자 대거 살륙을 행했다. 조상(曹爽)을 주살할 때는 그 지당(支黨)들까지 모두 삼족을 멸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고자매(姑姊妹-고모) 등 출가한 여자들까지 모두 죽였고, 그 뒤 위나라의 정(鼎)을 옮기기에 이르렀다. 明帝時,王導侍坐。帝問前世所以得天下,導乃陳帝創業之始,及文帝末高貴鄕公事。明帝以面覆床曰:「若如公言,晉祚復安得長遠!」跡其猜忍,蓋有符於狼顧也。 명제(明帝-동진東晉의 명제 사마소司馬紹) 때 왕도(王導)가 시좌(侍坐-모시고 배석함)했다. 명제가 전세(前世-전대)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연고를 묻자 왕도(王導)가 선제가 창업(創業)을 시작한 일을 진술하고 더불어 문제(文帝-사마소司馬昭) 말년의 고귀향공(高貴鄕公)에 관한 일(사마소가 조모曹髦를 죽인 일)을 진술했다. 명제(明帝)가 얼굴을 상(床)에 묻으며 말했다, “만약 공의 말대로라면 진(晉)의 제업이 어찌 장원(長遠-길고 멂)하겠는가!” 그의 의심많고 잔인한 행적을 보면 대저 낭고(狼顧)라는 말에 부합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制曰:夫天地之大,黎元爲本;邦國之貴,元首爲先。治亂無常,興亡有運。是故五帝之上,居萬乘以爲憂;三王已來,處其憂而爲樂。競智力,爭利害,大小相吞,强弱相襲。逮乎魏室,三方鼎峙,干戈不息,氛霧交飛。宣皇以天挺之姿,應期佐命,文以纘治,武以棱威。用人如在己,求賢若不及;情深阻而莫測,性寬綽而能容。和光同塵,與時舒卷,戢鱗潛翼,思屬風雲。飾忠于已詐之心,延安于將危之命。觀其雄略內斷,英猷外決,殄公孫於百日,擒孟達於盈旬,自以兵動若神,謀無再計矣。既而擁衆西擧,與諸葛相持。抑其甲兵,本無鬪志,遺其巾幗,方發憤心。杖節當門,雄圖頓屈,請戰千里,詐欲示威。且秦蜀之人,勇懦非敵,夷險之路,勞逸不同,以此爭功,其利可見。而返閉軍固壘,莫敢爭鋒,生怯實而未前,死疑虛而猶遁,良將之道,失在斯乎!文帝之世,輔翼權重,許昌同蕭何之委,崇華甚霍光之寄。當謂竭誠盡節,伊傅可齊。及明帝將終,棟梁是屬,受遺二主,佐命三朝,旣承忍死之託,曾無殉生之報。天子在外,內起甲兵,陵土未乾,遽相誅戮,貞臣之體,寧若此乎!盡善之方,以斯爲惑。夫征討之策,豈東智而西愚?輔佐之心,何前忠而後亂?故晉明掩面,恥欺僞以成功;石勒肆言,笑姦回以定業。古人有云,「積善三年,知之者少;爲惡一日,聞于天下」,可不謂然乎!雖自隱過當年,而終見嗤後代。亦猶竊鍾掩耳,以衆人爲不聞;銳意盜金,謂市中爲莫睹。故知貪于近者則遺遠,溺于利者則傷名;若不損己以益人,則當禍人而福己。順理而舉易爲力,背時而動難爲功。況以未成之晉基,逼有餘之魏祚?雖復道格區宇,德被蒼生,而天未啟時,寶位猶阻,非可以智競,不可以力爭,雖則慶流後昆,而身終於北面矣。 제(制)하여 말한다. ※ [진서]에서 권1 선제기, 권3 무제기, 권54 육기전, 권80 왕희지전의 논평은 制曰로 시작하여 당태종이 직접 쓴 것임을 표시(制는 황제의 문체 중 하나). 즉,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사마의를 평한 글입니다. 무릇 천지(天地)의 크기에서는 여원(黎元-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방국(邦國-국가)의 존귀함에서는 원수(元首-천자)를 으뜸으로 삼는다. 다스려짐과 어지러움(治亂)이 무상(無常)하고 흥망(興亡)에 운(運)이 있다. 이런 고로 오제(五帝)의 윗대에서는 만승(萬乘)에 처함을(천자가 되는 것을) 근심거리로 여겼으나, 삼왕(三王-하 은왕, 상 탕왕, 주 문왕) 이후로는 이를 근심거리가 아니라 즐거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지력(智力)을 경쟁하고 이해(利害)를 다투어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서로 병탄하고 강하고 약한 나라들이 서로 습격하였다. 위(魏)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세 나라가 솥발처럼 대치하여 간과(干戈-전란)가 그치지 않고 분무(氛霧-안개.난세를 비유)가 도처에 드리웠다. 선황(宣皇-사마의)은 탁월한 재능으로 시운에 응해 좌명(佐命-임금을 보좌함)하고 문(文)으로 이어 다스리고 무(武)로써 위세를 떨쳤다.(문무) 남을 부림이 자신을 대하는 것과 같고 현인을 구함은 늘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의 정(情)은 깊고 험해 헤아리기 어려웠고 그의 성(性)은 너그러워 능히 남을 포용했다.(성정) 화광동진(和光同塵-자신의 빛을 늦추고(재주를 감추고) 세속의 티끌과 함께함)하여 여시서권(與時舒卷-시세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섬)하고 즙린잠익(戢鱗潛翼-비늘을 거두고 날개를 숨겨 때를 기다림)하여 사촉풍운(思屬風雲-풍운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임?)하였다. 이미 속이려는 마음을 품고 충성스러운 것처럼 꾸미고 장차 위태로워지려는 명운에 처해 평안함을 구했다. 살펴보건대 그가 웅략(雄略)으로써 안으로 단(斷)하고 영유(英猷-좋은 꾀)로써 밖으로 결(決)하여(결단), 공손(公孫-공손연)을 백일 만에 죽이고 맹달(孟達)을 열흘 남짓 만에 사로잡았으니, 스스로 군사를 움직일 때는 신(神)과 같고 모책을 씀에 있어 두번 헤아리는 일이 없었다.(謀無再計) 그 뒤 군사를 이끌고 서쪽을 정벌해 제갈(諸葛-제갈량)과 서로 대치했다. 그가 갑병(甲兵)을 단속하며 본래 싸우려는 뜻이 없었으나 (제갈량에게서) 건괵(巾幗)을 전해받자 바야흐로 분심(憤心-분노)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군문에 서서 제지하니 웅도(雄圖-웅대한 계획)로써 뜻을 굽혔고, 천리 길을 가서 싸움을 청해 거짓으로 위세를 보이고자 했다. 게다가 진(秦), 촉(蜀) 땅의 사람들은 용감함과 나약함에 있어 서로 대적할 바가 못되고 도로의 평탄함과 험함에 있어 그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서로 같지 않았으니 이로써 공을 다투었다면 그가 이로웠으리라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위나라는 용감하고 도로가 평탄해 편안하나 촉은 그 반대였으니 적극적으로 쟁봉했다면 이겼으리라는 말.) 그러나 도리어 군문을 닫고 보루를 굳게 하며 감히 쟁봉하지 못하고, 살아서는 실(實)을 겁내어 전진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허(虛)를 의심해 오히려 달아나니(허실), 양장(良將-좋은 장수)의 도(道)가 여기에서 그르쳐졌구나! 문제(文帝-조비) 때에는 (임금을) 보익(輔翼-보좌)하며 권세가 컸으니 허창(許昌)에서 소하(蕭何)와 같은 임무를 맡고 숭화전에서 곽광(霍光) 때보다 더한 부탁을 받았다. 응당 성심과 절의를 다했다면 이윤(伊尹)이나 부열(傅說)과 그 이름을 나란히 했으리라. 명제(明帝-조예)가 장차 임종하려 할 때에 이르러서는 동량(棟梁-대들보.나라의 중임을 비유하는 듯)을 그에게 맡기니, 두 임금(二主-문제,명제)의 유조를 받고 3조(三朝-문제,명제,제왕 조방)를 좌명(佐命)했고, 인사지탁(忍死之託-차마 죽지못하고 오기를 기다렸다 부탁함.명제가 죽을 때의 일을 가리킴)을 받들었으나 일찍이 목숨을 다해 보답하지 않았다. 천자가 바깥에 있을 때 안에서 갑병(甲兵)을 일으키고 (후사를 부탁했던 명제) 능(陵)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급거 서로 주륙하니 정신(貞臣-충정한 신하)의 지체로서 어찌 이 같을 수 있는가! 그가 선(善)을 다했다는 것은 이로 인해 의심스럽다. 무릇 정토(征討)하는 책략에 있어 어찌 동쪽에서는 지혜롭다가 서쪽에서는 우매했겠는가? 보좌하는 마음에 있어 어찌 전대에서는 충성스럽다가 후대에 와서 역심을 품었겠는가? 이 때문에 진(晉) 명제(明帝)는 얼굴을 묻으며 (그의 선조가) 속임수로 공을 이룬 것을 수치스러워 하고, 석륵(石勒-후조後趙의 창업군주)은 거리낌없이 말하며 (사마의가) 간회(姦回-간교)하게 대업을 정한 것을 비웃었다.(※) 옛사람이 이르길, “3년 동안 선(善)을 쌓아도 이를 아는 이가 적으나 하루만 악(惡)을 행해도 천하에 널리 알려진다.”고 했으니 가히 그러하지 아니한가! 비록 스스로 당년에는 허물을 숨기더라도 끝내 후대에는 비웃음을 당하게 되니, 이는 또한 종을 훔치며 (자신의) 귀를 가리고는(竊鍾掩耳) 뭇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여기는 것과 같고, 단단히 마음먹고 금을 훔치고는(銳意盜金) 저자 사람들이 보지 못하리라 여기는 것과 같다. 이로써 가까운 것을 탐하는 자는 먼 것을 잃고 이로움에 탐닉하는 자는 명성을 손상하고, 만약 자신에게 손해를 끼쳐 남을 이롭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화를 끼치고 자신을 복되게 함을 알 수 있다. 천리에 순응해 움직이면 일을 이루기 쉽고 천시에 위배해 움직이면 공을 이루기 어렵다. 하물며 진(晉)의 기업을 미처 다 이루지도 못했는데 복운이 남아있는 위(魏)를 핍박했겠는가? 비록 다시 구우(區宇-천지)에 도를 행하고 창생(蒼生-온 백성)에 덕을 끼쳐도 하늘이 그 때를 열지 않아 보위(寶位)가 저해되면 지력으로 경쟁할 수 없고 무력으로 다툴 수 없으니, 비록 복이 그의 후대에까지 흘렀어도 자신은 끝내 북면(北面)한 채(신하인 채로) 죽었도다. ※ 석륵(石勒)이 조조와 사마의를 비웃은 일 / [진서] 권105 석륵 재기( 載記) 勒因饗高句麗、宇文屋孤使,酒酣,謂徐光曰:「朕方自古開基何等主也?」對曰:「陛下神武籌略邁于高皇,雄藝卓犖超絶魏祖,自三王已來無可比也,其軒轅之亞乎!」勒笑曰:「人豈不自知,卿言亦以太過 . 朕若逢高皇,當北面而事之,與韓彭競鞭而爭先耳 . 脫遇光武,當並驅于中原,未知鹿死誰手 . 大丈夫行事當礌礌落落,如日月皎然,終不能如曹孟德、司馬仲達父子,欺他孤兒寡婦,狐媚以取天下也 . 朕當在二劉之間耳,軒轅豈所擬乎!」其群臣皆頓首稱萬歲 . 석륵(石勒)이 고구려(高句麗), 우문옥고(宇文屋孤)의 사신을 대접하다 주흥이 오르자 서광(徐光)에게 말했다, “짐은 자고이래로 기업을 열었던 임금 중 누구와 나란한가?” 서광이 대답했다, “폐하의 신무(神武)와 주략(籌略)은 고황(高皇-한고제 유방)를 넘어서고 웅예(雄藝-빼어난 재주), 탁락(卓犖-탁월함)은 위조(魏祖-위태조 조조)보다 초절하니 3왕(三王-하 우왕,상 탕왕,주 무왕) 이래 가히 견줄 만한 이가 없습니다. 가히 헌원(軒轅에 버금간다 할 수 있습니다.” 석륵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어찌 자신을 모르리오. 경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짐이 만약 고황(高皇)을 만났다면 응당 북면하여 그를 섬겨 한신, 팽월과 채찍질을 경쟁하며 선두를 다투었을 것이다. 짐이 만약 광무(光武-광무제)를 만났다면 응당 중원(中原)에서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함께 말달렸을 것이나 누구 손에 사슴이 죽었을지는(누가 천하를 차지했을지는) 알 수 없다. 대장부가 일을 행함에 응당 뇌뇌낙낙(礌礌落落-정정당당)하여 해와 달처럼 밝고 환해야 하며, 끝내 조맹덕(曹孟德-조조)이나 사마중달(司馬仲達-사마의) 부자(父子)처럼 남의 고아와 과부를 속이고 여우처럼 아첨하여(狐媚) 천하를 차지할 수는 없다. 짐은 응당 이 두 유씨(한고조 유방, 광무제 유수)의 중간에 있으니 어찌 헌원에 견주겠는가!” 그의 뭇 신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만세를 외쳤다. 출처 http://snakeoil.egloos.com/561838 [출처] 사마의 司馬懿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