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형수의 손 편지
<2016. 5. 3 전남도민일보>
황영준 < 캐나다 밴프국립공원에서 만난 행운의 쌍무지개>
사형수.
목을 조이는 칼을 쓰고 앉아, 문 앞에 서있는 죽음의 사자가 언제 손을 내밀지 몰라, 짓눌리는 공포와 불안한 영혼일 것이다. 미집행 사형수의 처지, 그런 사형수와 손 편지를 주고받았다. 평범한 한 성도와 주고받는 대화 같아 큰 감동이었다.
“샬롬! 평안하시지요? 보내주신 편지를 받아보고 많이 기뻤습니다.”
그의 인사이다. 좁은 공간에서 제한된 생활을 하면서 보내는 인사가 평범하다. 공포나 불안 같은 것은 읽히지 않는다.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니 ‘형제’라 불러야 하겠네요. 목사님께서 제게 주신 편지 속에 말씀입니다. 저를 ‘형제’로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보냈던 편지에 이렇게 썼던 모양이다. 그렇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형제, 새로운 피조물 아닌가. 인종을 초월하고,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믿음 안에서 ‘형제’라 호칭함이 마땅한 일이다.
이분은 특별하다. 사형수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있다. 이분 바로 전에 언도를 받은 사형수까지 사형이 집행되었고 그 후로 사형 집행이 중단되었다. 기적 같은 은총이 아니가.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려는 뜻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 편지를 받은 때는 사형수로 16년째 감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금년이면 20년을 훌쩍 넘고, 나이도 60이 넘는다. 내가 목회를 은퇴하고는 교도소 사역을 끊었기 때문에 그와의 관계도 단절되었다. 그에게 누가 될까 싶어 죄명을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변화된 그의 고백을 함께 읽고 기도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16년 4개월째 살고 있으면서 만남의 축복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눈으로 보았고, 저도 체험을 했으니까요. 한 사람을 잘못 만나서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지금 누구보다도 큰 죄인이고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켜야 된다고 사형선고를 받고서 16년을 살고 있지만. 만나는 사람(물론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지만)에게 ‘죄의 결과’와 ‘자유의 소중함’, ‘만남의 축복’, ‘말의 신중함’에 대해서 사람이 바뀔 때마다 전하고 또 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 함이 얼마나 소중하고 제게 힘을 주시는지 모릅니다. 모든 날이 힘든 날이지만 예수님께 소망이 있기에 기쁨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라는 말에 몸서리쳤던 사람이었다. 이단종교에 빠진 아내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성실한 공무원이었다. 그런 그가 한 전도자를 통해 주님을 영접했다.
복음성가 가수 김석균을 통해 큰 은혜를 받은 것 같다.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그의 찬양집회에 참석했고, 만나서 간증도 했단다. 나의 졸저 『이름 없이 빛도 없이』를 그에게 보내주었는데 그 책에 기록된 김석균의 간증을 읽었다며 이런 글을 썼다.
“목사님이 쓰신 칼럼 속에 김석균 전도사님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서울구치소를 참 자주 오셨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도 많이 해주셨고. 좋은 테이프, CD도 보내주셔서, 기독교 예배실에 녹음기를 한 대 사놓고, 듣고 배우고 했었거든요. 편지도 서로 왕래하였었는데 요즘은 끊어졌습니다. 찬양을 듣고, 간증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믿음을 다졌는데 여기 와서는 집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 해서 제 영혼의 갈증에 빠졌습니다... 제게 늘 기쁨을 주시고, 행복하다 고백할 수 있도록 함께해주신 주님, 내 생명을 찾으시는 그날까지 찬양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 속에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그 향기를 내려고, 낮은 자로, 겸손한 자로, 나누는 자로 본이 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믿음과 고백이 아름답다. 성령님이 심령에 내주하심일 것이다.
“제게 ‘형제’라고 불러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이 ‘설날’인데 목사님, 주님 주시는 복 많이 받으십시오. 소식 주셔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〇〇식”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
피로 사신 주의 은총,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를 거듭나게 하신 성령의 권능이다.
“믿음으로 소망을 붙들고, 성령 안에서 평안하게 하옵소서.”
새벽 기도에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