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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옛 건물을 보고 겐지 이야기의 무대 이시야마데라 절에서 단풍을 구경하다!
2024년 11월 20일 교토 니시 혼간지 서북쪽에 도요코인 호텔을 나와 비와호수 남쪽에 자리한
이시야마데라 로 가기 위해 시마바라구치 島原口(도원구) 정류소에서 207번 버스를 타고
시조가라스마 四条烏丸 정류소에서 원데이 패스 를 앞쪽 기계에 넣으니 오늘 날짜가 찍힙니다.
지하철 시조 (四条)역 으로 내려가도 되지만 교토 거리를 익힐겸 가라스마거리(烏丸通 오환통)
를 북쪽으로 6블럭을 걷기로 하는데...... 거리에는 왜정시대, 그러니까 일본의 시대
구분으로는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 에 지은 듯한 참으로 고풍스러운 건물 들이 보입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쫓아냈지만 규슈 나가사키 데지마섬 에 종교 전도에는 관심없고
통상만 원하는 네델란드인 들을 상주시켜 유럽과 동남아에 중국과의 무역을 전담시켰으니, 유럽과
중국 사정은 들어서 알고 있었으며..... 인체 해부도 를 사형수의 배를 갈라보고는 번역 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에 대해서는 1840~2년에 벌어진 아편전쟁 에서 하늘 같은 청나라가 영국에 참패한 사실에 대해
조선은 매년 4회씩 정기적으로 중국에 간 사신이 청나라에서 발행한 관보 를 입수
하기는 했지만, 청국의 입장에서 쓴 것이라 중국이 잔쟁에서 이겼는지 졌는지도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래도 저 관보의 행간을 읽어 졌다는 사실 정도는 짐작하고 불안해 하다가 중국 베이징에 다녀온 사신
이 “베이징 시내는 평소 처럼 평안합디다” 라는 보고에 임금 헌종과 대신들은 가슴을 쓸어
내리고는 저런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으니....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국방의 대책 이란건 전혀 없었습니다.
일본은 나가사키의 네델란드인 을 통해 싱가폴에서 발행된 영자지 신문 을 입수하고 중국 상인과
현지인들을 통해 전쟁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 하였으며 이후 중국에서 2년이
지난 1844년에 중국인 웨이위안이 아편전쟁의 과정을 밝힌 “해국도지 (海國圖誌)” 가 나옵니다.
조선은 해국도지 (海國圖誌) 를 이교도인 천주교도들의 사악함과 그 정체 를 밝힐수 있는 책이라며
천주교도 탄압 에 이용하는데 그쳤지만.... 일본은 막부의 로쥬 부터 번주와 사무라이까지 읽고
대책을 논의하니 마츠시로 번주 사나다 유카쓰라등을 서양의 침략에 대비해 해상 방어 에 임명합니다.
그리고 후쿠자와 유기치, 요시다 쇼인과 3대 사상가인 사쿠마 쇼잔 (佐久間象山) 은
고문에 임명된후 아편전쟁 보고서인 해방팔책 (海防八策) 을 작성하고
‘동양의 도덕, 서양의 기술’ 이란 모토로 대포 주조, 유리제작과 종두법 을 도입합니다.
그러니까 일본인들은 저 “해국도지(海國圖誌)” 를 서양의 침략으로 부터 일본을 방어할 비책 으로
여긴데 비해.... 조선은 서양 세력의 침공에 대비할 국방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사교(邪敎)
인 천주교의 정체 를 밝힐 수 있는 책이라 여겨서 반겼는데, 똑 같은 책을 보고도 이처럼 다릅니다.
청나라는 1876년 영국회사가 부설한 상해와 오송(吳淞) 간 철도를 운행했지만 풍수에 안맞는다는 반대로
곧 철거 했으나, 일본은 페리제독이 1854년에 선물한 모형 기차 를 뜯어보고는 영국 런던대학교에
유학한 이노우에 가오루가 책임자가 되어 18년만인 1872년 도쿄와 요코하마간 철도를 자력으로 부설 합니다.
영국은 1863년에 일본의 사쓰마번 을 그리고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델란드 함대는 조슈번을 침공
했으며..... 조선은 1866년 프랑스 병인양요 와 1871년 미국 신미양요 침략 을 당했는데,
전쟁을 치른 후에 대책이 1842년 아편전쟁 때 처럼..... 조선과 일본은 전혀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조선은 대원군 하에서 병인양요 프랑스 함대와 신미양요 미국 함대가 스스호 물러가자 승리했다면서
척화비 를 세우고는 외국과 교섭을 엄금하고 쇄국정책 을 더욱 단단하게 했으나, 일본은 항구를
개항 하고 유학생을 미국과 유럽 에 보내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니 이후 두나라 운명을 바꾸게 됩니다.
아시아 40개 국가 중에 37개국은 나라가 망해 터키, 포르투칼,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반(半) 식민지는 중국과 태국 두나라 이며 완전한 독립을 유지한 나라는
일본 단 한나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여기 건물은 산기즈미 방식으로 쌓은 성 처럼 날렵합니다?
일본은 유학생을 미국과 유럽에 보내 서구 문믈 을 도입하면서 서양식 벽돌 건물 이 세워졌으니... 오늘
가라스마거리(烏丸通 오환통) 에서 교토은행등을 보는데, 일본은 암스테르담역을 그대로 모방해서
도쿄역을 지었으며 이후 조선총독부 는 도쿄역을 모방해서 경성역(서울역 구건물) 을 지었던 것이지요?
이런저런 옛날 생각을 하는 새에 어느듯 우리는 지하철 가라스마오이케역 (烏丸御池駅) 에
도착했기로...... 이제 교토의 동쪽이자 비와 호수의 남쪽 강변에 자리한
이시야마데라 (石山寺) 로 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서는 도자이센(동서선) 지하철 에 오릅니다.
미사사기역 에서 내려 노리바 4번에서 전철에 오르니 지상으로 올라가 동북쪽으로 달리는데 마치
옛날 시가지 전차 같으며.... 여기 집들은 주로 목조 가옥으로 하도 오래된자라 참 낡아
보이는데.... 전철은 15분 만에 6정거장째인 비와호 하마오쓰(浜大津) 에 도착하는지라 내립니다.
하마오쓰 역에서 230엔 전철 요금 을 내고 나가 이번에는 이코카 카드 를 찍고 다시
들어와서는 게이한 이시야마 사카모토선 (石山坂本線) 으로 환승해
11정거장을 가서 종점인 이시야마데라 (石山寺) 역 에 도착해서는 밖으로 나옵니다.
도보로 10분이 걸리는 이시야마데라 절로 가기 위해 역 앞에 안내판을 살펴 보는데 특이하게도
깃발 이 많이 걸려 있으니..... 왼쪽에 비와 호수에서 나오는 강을 끼고 내려가니 깃발에
그려진 여인의 얼굴이 낯이 익어 자세히 보니 겐지 이야기 를 쓴 그 "무라사키 시키부" 입니다?
그런데 깃발이 하나 둘도 아니고 도로를 따라 계속 걸려 있어 살펴보니 바로 1년에 한편씩 대하드라마
를 반드시 제작하는 NHK 에서 금연 대하드라마가 바로 겐지이야기 인 光の君(광노군) 인데....
무라사키 시키부 가 이시야마데라 절에 머물면서 겐지 이야기를 구상해 집필했기 때문인가 봅니다?
최초 여류 시인 은 BC 7세기 그리스 서정시인 사포 라고 합니다만.... 우리나라는 처용가
등 향가(鄕歌) 는 1075년 균여전에 11수와 1281년 삼국유사에 14수등 전부 25수
가 전하는데, 반면에 일본은 759년에 편찬된 만요슈에 노래가 4,516수 가 실려 있습니다!
7세기의 누카다 오키미 額田王(액전왕) 가 빼어난 시인이고 11세기에 무라카키 시키부 는
세계 최초의 여류 소설가 라? 한국 최초의 여류 소설가는 20세기인 1917년 월간
종합지 ‘청춘’ 의 현상 작품 모집에 응모한 단편소설 ‘의문의 소녀’ 를 쓴 김명순 입니다.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청춘’ 에서 이광수가 심사하고 추천해 입선을 시킨 것인데...... 김명순은 일본
유학 중이던 19세 때 이응준에게 데이트 강간 을 당했으니..... 이를 소설가 김동인 이
왜곡해 소설화 하여 김명순의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으니 이 소설이 ‘김연실전’ 입니다.
김명순은 이를 반박하기 위해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 를 내놨고 그녀는 보수적인 시대에도 불구하고 성폭행
을 당한 아픔까지도 용기있게 고백했지만..... 김기진이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 에서 폭행을 당한
김명순에 대해 “성격이 이상하고 행실이 방탕 하기 때문” 이라고 언급했으니 아 남자들이여!!! 하나 같이.....
조선 조정이 500년간 한결같이 지킨게 “과부재혼금지 제도” 이니 여자들은 과부가 되면 나이가
젊어도 재혼을 할수 없으며 아이가 없어도 시댁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제사 를 지내며
늙어 죽어야 하는데, 사주단자만 받은후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채 신랑이 죽어 얼굴조차 본적이
없어도 평생 수절이 강요 되던 시절이니..... 문단에 속한 남자들이 모두 저런 태도 를 보인 것이지요?
500년간 이어진 과부재혼금지제도가 무느진건, 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청군에 이어 들어온 일본군
은 고 아베 신조총리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 는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을 포로로 잡아 조선군 항복을
받은후 '김홍집 친일파내각' 을 세워 이노우에 공사가 훈수해 과부재혼 금지제도를 폐지하니 "갑오개혁" 이라?
아울러 조정과 왕실 회계를 분리하고 6조를 8아문으로 고치며 과거제 폐지, 조세금납화, 도량형을 통일
하며..... 사법을 행정에서 분리해 재판소를 설치하면서 연좌제를 폐지 하고, 사노비 제도 폐지 와
매매금지, 반상의 신분차별철폐, 천민의 해방, 학교 설립,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답발령을 시행합니다.
겐지 이야기 (源氏物語) 는 11세기초 무라사키 시키부 (紫式部) 에 의해 성립한 세계 최고(最古)
의 근대소설로 당대의 이상적 남성상인 히카루 겐지(光源氏) 의 출생과 시련, 그리고
영화와 죽음 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으니..... 중국으로 치면 홍루몽(紅樓夢) 에 비길만 합니다.
‘무라사키’ 는 "원씨물어" 의 여주인공 무라사키노 우에, ‘시키부’ 는 아버지 관직명, 식무성의 식무대승
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했는데, 여자에게는 가나(문자) 와 와카 (일본 고유 형식의 시) 정도만 교육
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딸의 재능 을 알아본 아버지는 무라사키에게 한문 까지도 가르쳤습니다.
"어느 덴노의 치세였던가. 뇨고· 고이 가 시중들고 계신 분 중에 그다지 고귀한 신분은
아니지만 아름다워 특별히 총애 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이야말로
사랑받을 만한 여자’ 라고 자부하고 계신 분들은 어이가 없다 하여 멸시하고 질투 하신다"
"여류 문인 무라사키 시키부 (紫式部) 는 973년생으로 "겐지모노가타리" 외에 "무라사키시키부닛키" 와
가집 "무라사키시키부슈" 등 작품을 남겼으니.... 어릴 때 부터 한문 서적과 불전, 음악 등을 배웠는
데.... 997년 후지와라 노부타카와 결혼하여 1녀를 얻지만 남편과 사별하고는 겐지 모노가타리 를 썼다."
"겐지 모노가타리 는 54권 으로 구성 되어 있으니 엄청난 분량인데.... 주인공 히카루 겐지
( 光 の源) 의 출생에서 연애, 영화, 만년에 이르는 일생 을 다루는 '기리쓰보
(桐壷)' 에서 '구모가쿠레' 까지를 정편이라 하며 겐지 사후의 이야기를 속편 이라고 한다."
"4백자 원고지 2,600장 에 이르는 장편으로 인생의 무상함 이나 자연의 아름다움 을 접하여
생기는 절절한 감동이나 정취를 말하는 모노노아와레 (もののあはれ)’ 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담아내고 있으며 가나 문장의 모범적인 문체를 완성시킨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헤이안 시대의 미(美) 의식에는 ‘오카시(をかし)’ 와 ‘아와레(あはれ)’ 가 있으니, ‘아와레’ 는
깊은 공감과 우미한 정감 을 말하며 "겐지모노가타리" 가 대표적 작품이다.
‘오카시’ 는 강한 흥미를 일으키는 미적 감각 으로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가 대표적이다."
그러고는 10분 이상을 걸어서 드디어 이시야마데라 (石山寺 ) 에 도착해 500엔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길 양 옆에 "등" 이 설치되어 있으니 그림과 글자를
보니 모두 겐지이야기에 나오는 한 장 씩으로 시간만 있으면 하나하나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1년에 한편씩 대하드라마를 반드시 제작하는 NHK 에서 금년 대하
드라마가 바로 겐지 이야기 인 光の君(광노군) 인데...... 무라사키 시키부가
여기 이시야마데라 절에 머물면서 저 겐지 이야기를 구상해 집필 했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시야마데라 (石山寺 ) 는 11세기초 무라사키 시키부의 장편소설 겐지 이야기에 나오는 꽃 사찰 로
단풍시즌에는 2,000 그루 단풍나무가 있어 라이트업과 저녁 공연 도 하는 환상적인 분위기
를 연출하니.... 바로 매년 개최되는 이시야마데라의 인기 이벤트인 "아타라요 모미지" 라고 합니다.
겐지 이야기 외에도 절은 "마쿠라노소우시 (枕草子)" 와 "사라시나 일기 (更級日記)" 등의
유명한 서적에도 나오니 헤이안 시대 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으며.....
"안산, 액막이, 행복, 인연" 에도 좋아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위해 찾아온다고 합니다.
또한 이시야마데라는 "꽃의 사찰 " 이라는 별명도 있어 겨울에는 모란과 매실꽃, 봄에는 벚꽃, 여름
에는 진달래와 붓꽃, 가을에는 단풍 등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감상할 수 있는데
밤에는 "아타라요 모미지" 라고 하는 라이트업 이벤트가 개최되 조명이 비치는 단풍이 볼만 합니다.
교토의 단풍명소인 사찰들 중에서도 여기 이시야마데라 (石山寺 ) 는 사람이 그렇게 만지 않은 편
이라 "단풍은 보고 싶은데 사람이 많은 곳은 사람에 부대껴서 싫다" 는 사람들
에게 추천하고 싶은 단풍의 명소인데..... 금년은 무더위로 인해 아직 단풍이 덜 든게 아쉽습니다?
무라사키 를 보려고 700엔 추가 요금을 내고 특별실로 들어가서 구경을 하는데..... NHK
에서 금년에 방송중인 대하드라마가 바로 겐지이야기 源氏物語 (원씨물어,
겐지모노가타리) 인 光の君(광노군) 인데 그 내용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둘러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겐지(源氏) 는 일본의 4대 본성(혼세) 중에 하나로 보통 일족을 가리키거나,
설명을 할 때는 '源氏 '(원씨) 라 쓰고는..... '겐지' 또는 '미나모토' 로 읽는데
'미나모토노' 라고 할 때, '노(の)' 는 '~의' 라는 뜻으로 '미나모토 가문의' 라는 뜻이 됩니다.
겐지 (源氏 원씨) 는 타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 와 함께 4대 본성, 즉 겐페이토키츠
(源平藤橘) 로 칭해지는데..... 원래는 일왕(천황) 의 아들이나 손자가 신적강하 할 때
주어지던 씨(氏, 우지) 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족으로는 타이라씨와 타치바나씨가 있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위에서 선비계 황족인 탁발(拓拔)씨 가 한화 정책의 일환으로 원(元)씨 로 바꿀 적에
방계인 남량의 독발(禿髮) 씨를 소리가 같은 '원'(源) 씨로 바꾼 일을 본떠서 간무왕(천황) 의 차남이자
제52대 덴노였던 사가왕(천황) 이 아들들에게 '미나모토노 아손(아소미)' (源朝臣) 을 준 일이 처음 입니다.
겐지(源氏) 는 21류파가 존재하며, 세이와 겐지 (清和 源氏) 계열이 널리 알려져 있으니, 제56대 덴노인
세이와왕(천황)의 자손 들로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이 이 계열이었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가 아시카가 가문과 에도 막부의 쇼군가 도쿠가와 가문도 카와치 겐지 분파 입니다.
무가정권 시절에도 황실 가문과 연결된 일족 이 아니면 고위직에 오르기는 쉽지않았으니 막부를 수립한
가문은 모두 천황가와 연관 되어 있었으며,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를 개막한 정이대장군
가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니 실력자들이 족보 조작(?) 을 통해서 미나모토 일가임을 자칭했습니다.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후손 이라며 외국에 보내는 문서에는
자신들의 성을 미나모토로 표기했으니 미나모토씨(源氏) = 쇼군가 라는 상징이 되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 에는 "원가강(原 家康)" 이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에 가장 많이 기록된 일본 영주는 대내전(大內展) 으로 무려 250회 나 나오는데...... 대내전,
다시 말해 오우치씨의 조상은 백제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 태자 이니 611년 야마구치현 동부
스오쿠니(周防國 주방국) 다타라하마 (多々良浜) 에 상륙해 쇼토쿠 태자 를 만난후 다타라 성씨를 칭합니다.
그 16대 후손 오우치 모리후사는 세력을 길러 성을 오우치 大內(대내) 로 바꾸고는 서부 일본 4국에
북규슈 2국등 6개국 을 지배하는 대영주(슈고) 가 된 후에 고려와 조선에 사신 을 파견하여
왜구를 소탕해주는 대가로 불경 을 얻어가고 무역까지 했으며, 중국 영파까지 무역선을 보냈습니다.
30대 오우치 요시오키 는 서부 일본 나가토, 스오, 이와미, 아키에 북규슈 치쿠젠(후쿠오카) 과
부젠에다가 더해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해 야마시로(교토) 까지 점령하여
7국을 지배하며 무로마치 막부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 를 옹립하고 위세를 떨쳤습니다.
31대 오우치(大內) 요시타카 는 빙고(히로시마) 를 거두었으나 교토 정치에 집중 하다 보니
이즈모의 아마고씨 의 침략을 받아 패전하고 쓰키야마 저택에서 시와 유희 에 빠집니다.
“연못은 바다요, 나뭇가지 끝이 여름엔 산이구나” 池はうみ こずえは 夏のみ 山かな
문인, 묵객과 미녀 들에 둘러쌓여 시와 유희로 정사를 소홀히 하니 중신 스에 다카후사 가
모반을 일으키자 패하여 할복자결 하는데, 그전에 문답한 내용이 전하니 타이네이사
주지 이세츠 가 “ 죽음을 앞두고 무념 무상 에 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고 진언하자....
“뭐가 어떻게 되든 좋습니다. 지금은 마음속 하늘에 달 이 보입니다” 라고 달관하니....
훗날에 이르러 세인들로 부터 “말세의 수행자” 라는 평을 얻는데....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 에게 야마구치 백성들에게 예수교 전도 를 허락한 연유를 알만합니다!
대영주 오우치 요시타카 는 할복하기 전에 절명시 를 남겼으니....
“죽이려는자도 죽는자도 모두 이슬 과 같고
번개와 같구나, 부처가 세상을 구하려고 오는 것 또한 이와 같다”
討つ人も 討たる る人も 諸共に如 露如電, 應作 如是觀
후계자 오우치 요시나가 도 죽으면서 5,7,5 조의 하이쿠로 된 절명시 (絶命詩) 를 남깁니다.
( 誘ふとてなにか恨みん時きては 嵐のほかに花もこそ散れ )
데려간들 무엇이 원망스러우랴 갈 때가 된 다음에야,
폭풍이 몰아치는 사이 다른 곳에는 꽃 또한 지노라.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 을 제치고 세계 제일은 은광이 된 시마네현의 이와미 은광 은 아마고 가문과
오우치 가문이 쟁탈하다가 모리 가문이 차지했으나 겱구에는 도요토미 가문 으로 넘어가는데....
전쟁은 돈 으로 하는 것이니, "임진왜란을 일으킨 막대한 군자금은 이와미 은광" 에서 충당됩니다!
그런데 오우치씨를 이은 모리 데루모토는 6국을 지배하니 임진왜란때 30,000명 을 동원했는데, 정유재란시
명량해전에서 죽은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600명 이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500명, 수군 대장 도도
다카토라는 2천명이며,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와 가토 기요마사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1만 또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7천 이고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6천에 비하면..... 모리군의 세력을 알수 있습니다?
이시야마데라 절을 나와 평상에 물을 마시고 있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려 뒤돌아 보니 돌담 위에
옛날 일본 전통 복장을 한 왠 남자 가 앉아서 우릴 내려다 봅니다? 좀 전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럼 일본에는 “ 만자이 漫才(まんざい)” 라고 해서 옛날부터 이야기꾼이라는 직업 이 있었습니다.
기원은 나라 시대의 "萬歳" (숫자의 "만", 나이의 "세".) 에 있으니 신년에 천수만세 (千秋萬歲) 를
기리며 악기 연주와 노래 공연 을 했던 것이니, 음양사의 일종으로서 11세기에는 이를 전문
으로 하는 예능인 "千秋萬歳法師 "( 천수만세법사 ) 가 등장할 정도로 전문 예능으로 자리잡습니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강을 끼고는 왔던길 800 미터를 다시 되짚어 걸어서 10여분만에 이시야마데라에키
(石山寺駅 ) 에 도착해 "히에이산의 연력사" 로 가려는데.... 전철을 타고 하마오쓰(浜大津) 를 지나
사카모토 히에이잔구치 (坂本比叡山口) 에 도착해서 케이블카 를 타고 히에이잔에 올라갈 예정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