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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마가복음 14장53~72절
제목 : 불법의 재판정에서
한밤중에 대제사장의 뜰에서 공회가 소집됩니다.
재판 자체가 불법이지만 대제사장은 주님께 유죄를 선고합니다.
주님과 제자들은 거듭거듭 상반된 행동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을 걸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아주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나아가셨던 반면, 유다는 삼년 간 함께 지냈던 예수님을 참으로 가증한 방법과 모습으로 배반했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겁에 질려서 모두 도망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크게 상반된 모습을 보여 주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간절히 기도하였고,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연히 기도해야 할 시간에 나태한 모습을 보였고,
위기의 순간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다가 결국은 도망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우리를 통하여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아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부여잡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고,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에 공회로 모인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증언으로 예수님을 고소하고, 사형을 언도합니다.
그 무렵 뜰에 들어와 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1. 공회 앞에 서심(53~59절)
1) 재판 받으시는 과정을 기록(53절).
“[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을 체포한 자들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집으로 예수님을 끌고 갔습니다.
그때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는데 그는 A.D.18~36년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습니다.
가야바라는 사람은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서 성전 안에서 제물 판매를 제도화시킨 안나스라는 사람의 사위입니다.
그런데 안나스라는 사람은 대제사장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자기 대신 사위를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에 앉히고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가야바에게로 데리고 가기 전에 먼저 예비 심문을 위해서 안나스에게 데리고 가서 그의 허락을 받은 다음에 가야바에게 데리고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의 책임을 지고 있던 최고 의결기관이었는데, 이 기관이 그렇게 움직여지는 것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타락하여 자기들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으로 인해 자기들의 권위에 손상을 입고, 자기들의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생활이 드러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내내 예수님을 괴롭히고 죽일 궁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유다가 그들에게 와서 예수님을 팔아넘기겠다고 하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파송했고, 예수님이 잡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때가 밤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잡혀 오니까 대제사장을 포함한 71명의 산헤드린 회원들이 대제사장의 집 다락방에 급히 모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산헤드린 공회가 이때 이렇게 모인 것은 완전히 불법이었습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원래 산헤드린 공회는 해가 지고 난 후에 모여서 회의를 하거나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과 같은 명절 전날에는 모일 수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성전의 성소에서 재판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가야바의 사택에서 모인 것도 불법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철저하게 불법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2)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갔습니다(54절).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베드로는 다시 용기를 내어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제사장 관저 앞 사각형의 정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3)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거짓 증인들도 동원하였습니다(55~56절).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내릴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거짓 증언을 했지만 그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서 그들의 증언을 증거로 삼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두 명 이상의 일치된 증거가 있어야 죄인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동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많은 거짓 증언들이 서로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4) 어떤 사람들이 성전과 관련해서 예수님을 고발하였습니다(57~59절)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 대한 것으로 죄목을 삼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고 다른 성전을 짓겠다”고 말씀하셨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요2:19을 보면 주님께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지 주님 자신이 성전을 헐겠다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해지는 성전은 예수님의 편에서 보면 그의 몸 된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말을 오해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배 처소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고대 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범죄였습니다.
2. 대제사장의 심문(60~65절)
1) 네가 그리스도냐?(60~62절)
(1) 주님의 침묵하고 대답 하지 않았습니다(60~61a절).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61a]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은 죄를 찾기 위해 질문을 했으나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불법과 거짓 증언으로 죽이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거짓 증인들 앞에서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사53:7).
거짓 증거와 거짓 증인들 앞에서 변론하거나 변증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재판정을 좌절시켰고 재판의 과정을 벽에 부딪치게 했습니다.
(2)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물어봅니다(61b~62절).
“[61b]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은 전술을 바꾸어 “네가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나?”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신약 성경 중에서 여기서만 발견되는 “찬송 받으실 자”라는 칭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용할 수 있는 유대 칭호였습니다.
“찬송 받을 자”는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명확하게 “내가 그니라” 곧 “나는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마가복음에서는 이곳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예수는 자기가 메시아임을 공적으로 천명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것과 나중에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 자신에 대한 변명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진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자기에 대한 모함과 거짓 증거에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일을 시작했고 그들에게서 정의롭고 양심 있는 판단이 불가능한 것을 아셨기 때문에 거짓 증언들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지만 진리에 관한 문제는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정죄 받으시는 예수님(63~65절)
(1)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신성 모독죄로 사형을 선고했습니다(63~64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64]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대제사장이 그의 옷을 찢었다고 할 때 그의 예복보다는 오히려 속옷을 찢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제사장은 자기가 예수님의 담대한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를 옭아매는 대답을 함으로써 더 많은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그는 또한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2) 주님을 욕보였습니다(65절)
“[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산헤드린 회원 몇 명이 그들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모욕하고 침을 뱉기까지 했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며 엄청난 인격적 모욕을 뜻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불법으로 소집된 재판에서 거짓 증인들과 거짓 증인 앞에서 억울하게 죄인으로 취급하고, 사형 언도를 받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모욕을 받으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66~72절)
1) 여종이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할 때 부인합니다(66~68절)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대제사장의 여종 중 하나가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임을 알아봅니다.
그 여자는 분명히 베드로의 신분을 파악하였으나 베드로는 그것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안전을 위하여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했습니다.
더 이상 발각되는 것이 두려워 그는 길거리로 통하는 포장된 길 곧 앞뜰로 나아갔습니다.
2) 베드로가 두 번째, 세 번째도 부인합니다(69~71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동일한 계집종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폭로하였습니다. 다시 그는 부인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고소하여 “확실히 너는 그들 중의 하나니 너는 갈릴리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아람 방언을 말할 때 그 발음에 있어서 현저히 구별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단자인 예수님의 제자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했다는 말은 그가 신성 모독적 발언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며 법정에서처럼 부인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맹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닭이 곧 두 번째 우니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기에 하신 말씀이 기억되어 울었습니다(72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두 시간이 채 못되어 베드로가 세 번째로 예수를 부인하자 그 즉시 닭이 정확히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통곡하였습니다.
4.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받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면 무조건 형통하고 잘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온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과정에서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벧전2:18절 이하입니다.
*벧전2:18~21절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오히려 부당한 대우와 고난을 받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애매한 고난의 본이 되셨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3:12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복음은 부당한 대우나 애매한 고난을 동반한다고 말씀합니다.
나아가서 성경을 보면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애매히 고난을 당했습니다.
요셉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랬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고,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애매한 고난을 당합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론부터 정해 놓고 무엇을 시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줍니다.
2)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시의 지도자들이 주님을 괴롭히고 죽인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자기들이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셉이 어려움을 다했던 것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도 시기와 질투 대문이었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다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주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교회 안에서 이럴 수 있느냐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가짜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착각 속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도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애매한 고난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교회 안에서 부당하게 대우를 받거나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의 문제와 위기는 부당한 대우와 고난을 각오하는 크리스찬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각오와 의지가 있으면 무조건 잘되고 형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조금만 부당하게 대우를 받거나 조금만 어려워도 쉽게 포기하고 시험에 듭니다.
더구나 그런 것을 경험한 다음에는 적당하게 거리를 두며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부당한 대우를 좋아하고 애매히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것을 각오하고 애매한 고난을 각오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온전히 주님을 섬기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이웃을 위해서 섬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께 맡기고 묵묵히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고난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불필요하게 변명하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대개 오해받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 몸 가운데 가장 먼저 행동하는 부분이 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입으로 죄를 짓지 말고 묵묵히 참고 나아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아시고 주님께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위로와 힘이 됩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우리는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3) 입을 열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자신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진리에 관한 것이기에 그 부분에서는 주님께서도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관한 것은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아야 하지만 진리만은 분명히 선포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바른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를 보면서, 교회를 보면서 바른 말은 해야 합니다.
바른 말을 해야 할 때도 참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4)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뻐해야 합니다.
마5:11,12을 보면 예수님께서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요15:19~20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20]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예수님을 믿는 특권 가운데 하나는 어려움 가운데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애매히 핍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진정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억울하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바로 믿는다는 표시이고, 또한 하늘에서 상이 크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우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애매히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주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주님의 칭찬과 상을 받을 것입니다.
묵상 Point
1) 종교지도자들의 거짓 증언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숱한 증거들을 무시한 채 예수를 종교적 정적(政敵)으로 가주하여 제거하려한다.
거짓 증인들을 고용하는 비열함까지 보인다.
하지만 거짓 증인들은 많이 모았지만 그 증거들 중 어느 한 쌍도 일치하지 않아 증거로서의 효력을 확보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 죽이는 데만 마음이 모아졌을 뿐 제 욕망을 숭배하는 자들일 뿐이다.
정적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불의든 거짓이든 개의치 않는 자들이다.
예수를 죽어야 할 존재로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모든 짓을 다 정당한 일로 만든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자신들이 정한 채 갖은 기행과 만행을 일삼는 종교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2) 예수님의 참된 증언
대제사장이 직접 나서서 예수더러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지를 묻자 놀랍게도 예수는 이에 긍정한다.
곧 인자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영광 중에 등극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신성모독 죄목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사실이고 진리다.
메시아는 바로 자신처럼 말하고 사는 자여야 한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결코 유대인들도, 온 인류도 구원할 수 없다.
저 로마까지 구원할 수 없다.
메시아 상을 제시하여 죽음으로써 거짓 메시아 시대를 죽여야 했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을 죽이고 싶었던 이들을 만족시키는 대답이자, 동시에 자신이 죽어야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대답이었다.
3) 베드로의 거짓 증언
베드로는 도망했지만 너무 멀리까지 달아나지는 못했다.
끌려가는 예수를 멀찍이서 따른다.
대제사장의 뜰 안까지 왔지만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존재였다.
예수 편에 속하지도, 그 반대편에 속하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결국 세 번이나 예수와 상관없는 자라고 그 관계를 부인한다.
그렇게 부인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데도, 인정한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도 그는 조금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고, 손해를 감수할 만큼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제입으로 예수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자로 인정했고, 그를 저주하여 맹세함으로써 저주 받아 죽을 그의 운명을 예고했다.
말씀 가이드
거짓 증언 속에서도 예수님은 참된 증언으로 구원의 길을 가신다.
선택적 수사와 선택적 정의는 예수님이 살던 시기에도 여전했다.
진실과 진리는 존재하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과 진리이기에 넘어질 때까지 짓밟고 죽을 때까지 가격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에 찔린 진실로, 못에 박힌 진리로 정의를 증명하고 구원을 이루어내셨다.
비열한 결탁. - 대제사장과 유대 의회는 공모하여 예수께 사형을 선고할 증거를 찾으려 했지만 하나도 찾지 못했다.
게다가 고용한 거짓 증인들마저 증거가 일치하지 않았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 나라의 뜻과 법에 따라 십자가 길을 가실 것이다.
당당한 증언.-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부인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 사지에 몰아넣으려 했다.
예수님도 이를 모르실 리 없으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요, 영광 주에 강림할 것이라고 덧붙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ㅖ수를 죽일 증거를 얻었을지 몰라도, 종교의 부산물인 권력의 하수인일 뿐이다.
부끄러운 부인. -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던 베드로는 그 분을 부인하다 못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저주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어떠한 변명도 전가도 하지 않으셨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살기 위해 예수를 버렸다.
우리라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조그만 숯불은커녕 온통 사방에서 뿜어내는 냉대와 냉기로 혹독한 겨울을 맞고 계셨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걷는 그 걸음에서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예수를 따르는 길에 무엇이 우리를 두럽게 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60-65절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십니다.
공회는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찾지만, 서로 모순되어 채택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적극 변호하셨다면 재판의 결과가 달라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증거를 찾지 못해 직접 심문에 나선 대제사장의 함정에 스스로 걸려드십니다.
줄곧 자신의 정체에 대해 잠잠하길 명하신 분이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스스로 신분을 밝히신 것은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할 때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53-59절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해 공회가 열립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밤중을 노렸듯이, 예수님을 정죄하려는 재판도 한밤중에 열립니다.
사형판결을 내리는 재판을 밤에 열지 못하도록 한 법을 공회 스스로 어긴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모으려고 거짓 증인들을 매수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재판이 불의할수록 예수님의 의로우심은 더 확고하게 드러납니다.
우리 사회의 불법과 불의가 극심한 곳일수록 주의 백성이 드러내는 의도 그곳에서 더 밝게 빛나야겠습니다.
63-65절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자, 즉시 사형판결을 내립니다.
주위의 사람들도 주님께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면서 능욕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눈앞에 계신데도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말로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내심 주님을 반기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세상의 기득권을 너무 누리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66-72절 예수님 말씀대로, 베드로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그는 겟세마네에서 겁에 질려 도망쳤지만, 주님을 버릴 수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 대제사장의 뜰까지 쫓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곁에서 주님을 변호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도 자신에 찼던 그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주님의 잔(고난)을 마시고 당할 세례(죽음)를 받겠다고 하던 세배대의 아들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지금은 부인하지만 훗날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공동체-제 약점과 한계를 발견할 때라도 베드로처럼 통곡할 수 있는 정직한 영을 허락하소서.
열방-세계적으로 매년 10만 명 이상이 홍역으로 희생되고 있는데, 대부분 개발도상국의 유아들이다.
개발도상국에 예방접종이 널리 실행되어 희생자의 수가 감소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