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숙
흑백영화 속
주인공은 왜 자꾸 도시를 헤매는 걸까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볏짚이 탄다 잉걸불이 인다 불씨는 자기가 새라고 불러주는 사람을 만나면 새라고 믿고 날아가, 연기를 꿰어 노래를 만들었다
찻집이 모여 있는 골목을 지나면 공방이 나왔다 손으로 뜬 수세미와 골무를 보고 있었다 옷걸이 모양대로 빨래가 말라 있었다 부들부들했다 멀미가 났다 빚어서 만든 찻잔과 식기들
주인이 웃으며 바라봤다 다음 주에 전시회가 있으니 꼭 오라고
풀려버리고 난 후에도 스웨터의 모양을 기억하는 털실처럼
나는 다시 오지 않을 이 도시에서 약속을 하고
오후라고 말했다 비라고 말했다
수요일이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사람들은 창 너머를 뚤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둠과 더 짙은 어둠이 빠르게 지나갔다 붓 끝을 털거나 손끝으로 밀어서 그린 듯 흘러내렸다
숲은
우는 사람의 옆모습을 닮아 있었다
눈이 쌓이고 난 후의 흰빛이 음악이 된다고 믿었다 눈은 내리고 오래지 않아 더러워 보였다 나는 거기까지를 눈이라고 불렀다
이제와 미래
분갈이를 할 때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빼야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였다 올리브나무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잡아두는 것엔 재능이 없고 외우던 단어를 자꾸만 잊어버렸다
잎이 붉게 타들어간 올리브나무는 방을 정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흙에 손가락을 넣어보면 여전히 축축한, 죽어가면서도 사람을 살리고 있는 나무를, 나는 이제라고 불러본다 흙을 털어낸다 뿌리가 썩지 않았으면 다시 자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제야, 햇볕이 든다
생생해지며 미래가 되어가는
우리는 타고나길 농담과 습기를 싫어하고 그 사실을 잊어버려 하지만
이미 건넜다 온 적 있지 뿌리를 넘어 줄기를 넘어 줄기를 휘감아 아주 날아본 적
양지를 찾아다녔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모종 하나를 화분에 옮겨 심으면 야산의 어둠이 방 안에 넝쿨째 자라기도 한다는 걸
진녹색 잎의 뒷면이 바스러졌다
시든 가지에도 물을 주면 잎새가 돋았다
공통감각
과천역에서 내렸다 우리 서울대공원에 가려고 한 거다
동물원은 닫혀 있었다
철창 위로 올라가면
어둠 속에서 빛이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짐승의 눈인지
깨진 알인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철창 밖의 동물원 슬픔도 없는 식물원
우리를 열면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사랑이라는 말을
다른 언어로 말해보려고 했다
나 다른 게 될 수 있을까
밀알 하나가 굴러와, 구린내를 풍기며 굴러와 나를 가로질러 굴러와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태어난 것 같아
하나가 울면 다른 하나가 따라 울고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깃털이 날렸다
아름답다고 말하고 나면 사라지는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언제나 네 손가락은 축축하고
약속이니까
잘하자 꼭 하자
같이 보이는 웃음이어도
몇 번이고
다르게 말해볼 수 있는 뒷모습이었다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친구가 되자
그렇게 말하는 순간 친구를 할 수 없게 되니까
첫차를 기다리며
땀을 흘렸다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다다르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