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사회교리, 가톨릭 정의평화운동의 희망이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이 <새로운 사태(노동헌장)>을 반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당시 <공산당선언> 이후에 급속도로 노동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상황이었으며, 유산자들의 편이라는 점에서 노동자들은 교회를 적대적 관계를 보았다. 이 당시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가톨릭노동청년회를 만든 조셉 까르딘 추기경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조셉 까르딘은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방학이면 집에 돌아왔지만, 이미 노동자가 된 그의 친구들은 그를 벗으로 대하지 않았다. 가톨릭 사제와 가톨릭 신학생(예비 사제)은 그들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조셉 까르딘은 노동자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는 ‘회심’의 과정을 밟는다. 그가 교계의 극심한 반대에 무릅쓰고 노동사제가 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는 교회 안에 노동청년의 세계를 구축해 등을 돌렸던 ‘선한’ 벗들을 다시 동지로 불러들이고자 갈망했다.
결국 교회는 20세기 초 산업사회 안에서 섬처럼 떠돌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어적 차원에서 ‘노동자에 대한 배려’를 회칙을 통해 선포한 것이다. 부자들의 탐욕을 경계하고 부자들에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도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 회칙에서 노동자의 단결권(노조설립)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레오 13세 교황의 뜻은 적절히 관철되지 못했으며, 독일의 케틀러 주교 등 일부 고위성직자에게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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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23세 교황. |
세상 안에서 세상의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일체감을 표명했던 가장 극적이고 보편적인 사건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다. 공의회는 이제 가난한 이들의 슬픔과 고통, 기쁨과 희망을 제 것으로 삼기로 작심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 교황이 역대 교황 가운데 유일하게 농부출신이며, 사제 서품 후 첫 소임이 노동운동을 지지 지원하던 이탈리아 베르가모 교구의 테데스키 주교의 비서였다는 점은 의미있는 일이다.
테데스키 주교와 론깔리 비서신부가 라니카 제련소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고 성금을 모으자, 우익신문들은 “주교의 자선금은 파업에 대한 축성이며 공공연한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강복”이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론깔리 신부는 반박문을 통해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를 인용해 노조활동을 옹호하고,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은 권리를 박탈당한 힘없고 박해받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에 주교와 본당 신부들은 ‘정의의 문제’를 위해 일해야 하며, 고통당하는 사람을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가 교황이 되어 <지상의 평화>를 발표하고, 공의회를 소집해 ‘교회의 비전’을 다시 제시했다. 요한 23세 교황이 베르가모 신학교 시절, 교회사를 전공하고 ‘근대주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 일부 주교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사회참여에 나서는 사제들에게 희망의 근거가 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죽은’ 가톨릭사회교리를 부활시킨 은인이다
그러나 사회교리와 복음의 급진성을 결합해서 발생한 ‘해방신학’이 출현하면서 교회 내 갈등이 증폭되었다. 여전히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는 주교들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이후 등장한 전통주의적 관점이 결합해서 ‘해방신학’을 단죄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중남미의 군사독재 상황에서 출현한 해방신학은 1968년 메델린 주교회의와 1979년의 푸에블라 주교회의를 통해 중남미의 공식적 신학으로 자리잡았으나, 교황청의 입장은 달랐다. 결국 6.8혁명을 ‘혼란’으로 경험한 라칭거 추기경이 주도하여 <자유의 전갈>(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신앙교리성 훈령, 1984)과 <자유의 자각>(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신앙교리성 훈령, 1986)을 통해 해방신학이 ‘계급투쟁’을 선도하거나 ‘마르크시즘’에 경도되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해방신학의 대표적인 입장은 철회되지 않았으며, 해방신학자들에 대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교회 전통에 안에 자리잡았다. 2004년에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출간한 <간추린 사회교리>는 수많은 사회회칙들을 요약하는 가운데 비교적 급진적인 내용은 빼버렸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테제는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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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 |
그러나 여전히 <가톨릭사회교리>는 인권지수가 바닥을 치고 부패지수만 상승한 이명박 정부 아래서 여전히 ‘해방적이며 진보적인’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교회가 <간추린 사회교리>에서 언급한 내용만 귀담아 들어도 한국사회에서 예언직을 수행하는데 모자람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너무나 로마적인’ 교회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사회교리’만큼은 배우지 않았다. 한국교회가 사회교리를 가장 많이 입에 담은 시기는 1970년대였다. 민주화 운동에 교회가 깊이 연대할 때 발표했던 성명서에는 어김없이 사회교리 문헌이 사회참여의 교회적 근거로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뤄지고, 1990년대에 돌입하면서 교회는 사회적 관심을 중단하고, 교회확장에만 부심했으며, 그 결과 사회교리는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이명박 정부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잊혀진 사회교리를 부활시키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쌓았다. 벌거벗은 자본주의의 탐욕이 노동자들의 목숨줄을 잡아 흔들 때 그 최악의 상황에서 <새로운 사태>가 발표되었듯이, 이제 다시 이명박 정부는 용산참사, 4대강, 강정 해군기지, 한미FTA로 이어지는 탐욕의 극단을 보여주는 ‘새로운 사태’를 야기시킴으로써 한국교회가 ‘사회교리’를 다시 읽게 만들었다.
생명평화의 시대에 부활하는 정의평화위원회, 그리고 사회교리
여기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갈 것은 2010년을 전후해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기운이 싹텄다는 점이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른바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폭압적인 시대상황을 반영하듯 결기 있게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왔다면, 2010년을 전후해서는 당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틈입할 수 없었던 교구, 이른바 보수적인 주교들이 교구장으로 군림하던 대구, 수원, 대전교구에서 젊은 사제들이 나름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때로 정의구현사제단과 더불어, 때로는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교회의 예언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곧 다양한 이슈를 중심으로 모이는 ‘천주교연대’다.
천주교연대의 출현은 사실상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1980-90년대에 한국사회 안에 조금씩 움트기 시작한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에 대해 ‘정치적 민주주의’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던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사실상 무심했으며, 결국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던 일부 사제들은 ‘환경사제단’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이합집산의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 환경문제와 반전반핵평화운동이 주요한 이슈로 대두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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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규현 신부. |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아이콘으로 작동하던 문규현 신부가 부안 핵폐기장 유치 반대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평택 미군기지 반대운동, 지율스님의 천성상 터널 반대운동 등으로 환경평화 이슈가 대두되고, 이제는 ‘생명평화’가 일상적인 용어가 될 정도가 되었다. 이참에 최초의 천주교연대가 ‘4대강 공사 반대’이라는 환경이슈를 중심으로 결집하기에 이른 것이다. 환경이슈는 정치적 급진성과 상관없이 또는 상관성을 지니고 전면에 대두되고, 대체로 보수적인 입장에 서기 쉬운 주교 등 교회장상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제주해군기지’를 둘러싼 천주교계의 반응과 천주교연대 결성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제주 해군기지 문제는 반전평화의 성격과 환경보존 이슈가 통합된 자리이며, 예외적으로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가 강력히 호소하고,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또 다른 아이콘인 문정현 신부가 투신하고,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뿐 아니라 교회 공식기구인 정의평화위원회와 새롭게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는 ‘천주교연대’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제주 해군기지 문제가 불거지는 가운데, 각 교구에서는 명패만 걸려 있던 정의평화위원회들이 실질적으로 회생하고, 급기야 주교회의 차원에서 ‘사회교리 주간’을 결정했다. 이는 사회교리가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공적으로’ 승인된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이전에도 서울대교구 등 일부 교구에서 사회교리학교를 운영해 왔지만, 최근 들어 대전교구와 수원교구, 인천교구 등에서 사회교리학교를 열어 왔으며, 차후로 다른 대부분의 교구에서도 사회교리학교를 개설할 뜻을 비치고 있다.
이는 강우일 주교가 이미 언급했듯이, 교리의 두 가지 측면이 통합되는 것이다. 즉, ‘믿을 교리’만 강조해 오다가, 그 교리가 몸을 입고 나타난 ‘행할 교리’로서 사회교리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의 교회가 본당 구조 안의 신심행위에 주목해 왔다면, 이제는 그 신심이 지역사회와 한국사회 안에서 육화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본당의 담을 헐고 세상에 제 몸을 나누어 주는 성체성사의 신비가 이루어지는 시점이다.
가톨릭사회교리, 갈 길이 멀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국교회가 사회문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여전히 ‘사제 중심’이며 ‘교도권’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같은 4대강 문제를 둘러싸고 강우일 주교와 정진석 추기경의 입장이 갈렸던 점에 비추어 볼 때, 무작정 ‘교도권에 따르라’는 명령은 무리한 요청이 된다. ‘교도권’이라 해도 무류적 요청이 아닐 때에는 신자들 스스로 숙고하고 식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민주주의와 생명평화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높이 살 수 있겠지만, 정작 교회 내부로 시선을 돌리면 교회 안의 권위주의와 사제중심주의로 평신도들, 특히 여성들의 자리는 여전히 비좁은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즉, 교회 내 민주주의와 생명평화는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또한 병원 등 교회 내 사업장의 노동조합은 여전히 어려움에 처해 있으며, 교회기관 단체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노동조합 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곧 사회교리를 교회 바깥에만 적용할 뿐 교회 내부에는 적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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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석 추기경. |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있는 탐욕과 성장과 개발주의적 태도가 교회 안에서도 관철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대교구는 4대강 사업에 대한 묵인과 동시에 명동성당 재개발에 공력을 쏟아왔다. 최근에 문화재 출토 문제로 주춤하고 있지만 공사를 강행할 태도다. 정진석 추기경은 지난 9월 16일 기공식에서 “오늘은 우리 서울대교구의 역사적인 날이다. 180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대교구청을 건설하는 공사를 하게 되어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12월 6일 정 추기경은 자신의 영명축일 미사 강론에서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교구청 신축공사는 효과적인 복음화를 위한 것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연장선에 있다”고 말하면서, 2020년에 신자 200만 명을 모으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늘어나는 신자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사무실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전했다. 여기서 ‘세상의 슬픔과 고통, 기쁨과 희망’을 나누고자 했던 공의회 정신은 ‘교회의 양적 성장’으로 둔갑하고 있다.
또한 수원교구의 교구청과 정자동 주교좌 성당을 가보면, 그 엄청난 규모에 압도되고 만다. 이런 태도의 뒤편에는 성장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각 교구장마다 항상 되뇌이는 것은 ‘신자수 증감’ 문제이며, 신자들은 묵주기도 1천만단 바치기 운동에 동원되고 있다. 이런 물량주의를 버리지 않고서야 벌거벗은 가난을 살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던 예수와 닮은 교회가 될 수 없으며, 이명박 정부의 성장주의와 물량주의, 개발주의를 비판할 도리가 없다.
한국교회 안에 스며든 상업주의
이른 ‘평화드림’이라는 주식회사는 서울대교구가 보여준 상업화의 전범이다. 평화드림의 자회사인 ‘평화상조’ 홍보 팜플릿에 교구의 추기경과 두 주교와 몬시뇰까지 나서서 홍보대사를 자처하는 모습은 낯뜨거운 광경이다. 인천교구에서도 평화드림을 벤치마킹해서 ‘바다의 별’이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가톨릭사회교리가 힘을 발휘했다면, 교구에서는 오히려 그라민 은행 같은 서민 소액대출기관이나, 사회적 기업 등을 후원하고, 사회적 책임투자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것이 교회로서 마땅한 일이다.
예전에 마더 데레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브랜드로 자리잡아 가는 아이콘은 ‘김수환 추기경’과 ‘이태석 신부’라는 아이콘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경우에 그분의 1970년대 사회민주화운동에 헌신은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키면서 ‘옹기장학회’와 ‘바보재단’, ‘장기기증운동’을 강조하며 천주교홍보책자의 표지로 사용하고 있다. 이태석 신부 역시 부산교구의 송도본당처럼 ‘참사랑 실천 걷기대회’처럼 선교활동의 일환이 되고 았다. 이들을 천주교의 브랜드화 해서 추진하는 사업들은 대부분 선교, 빈민구제, 장학사업 등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이태석 신부의 사회적 영성에 미치지 못한다.
이태석 신부가 작사작곡한 노래인 ‘묵상’의 가사는 오히려 ‘세계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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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석 신부. |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 말씀 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비판적 독립언론이 필요하다
가톨릭사회교리가 교회 안팎에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언론’이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비록 한국교회 안에도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 그리고 <평화방송>이 있으며, <대구 매일신문> 같은 언론이 존재하지만, 사상적으로 진보적이며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정론은 ‘사실상’ 없다. 최근에 아시아지역 교회소식을 전하던 UCAN뉴스가 <아시아가톨릭뉴스> 국내판을 인터넷으로 서비스하면서 빈틈을 어느 정도 메우고 있지만, 결국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 같은 ‘독립언론’만이 복음적 정결성과 사회교리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언론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근 조중동의 종편참여로 인해 논란이 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독재정권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방송통신위원회와 지상파 방송을 장악하려고 무리수를 두어 왔으며, 급기야 막대한 특혜시비 속에서도 조중동의 종합편성 방송을 허용했다. 그 결과 광고수익과 관련해 <평화방송> 등 종교방송은 심각한 재정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지만, 더 큰 권력에 의해 속수무책인 채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처신하도록’ 가르치는 복음 명령을 수행하고 사회교리를 실천하려면 정치적 종교적 상업적 권력에서 자유롭게 발언하는 ‘독립언론’을 세워야 한다.
사회교리와 해방신학의 위험한 기억, 한국에선 아직도 ‘유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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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보프. |
마지막으로 중남미 해방신학의 입장을 대변해 온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가 1992년 6월 28일 사제직을 버리고 평신도가 되면서 전 세계의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보프 신부는 “하느님이 사람의 머리에 생각을 심으셨거늘 하느님만 못한 주교가 이를 표현하지 말라 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던 쿠바의 사상가 호세 마르티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1970년대부터 여느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나는 복음을 사회 불의와 억눌린 이들의 외침을 생명의 하느님과 관련지어 설명하고자 애써 왔습니다. 이리 해서 생겨난 것이 해방신학이라는 처음으로 보편성을 띤 라틴아메리카 신학입니다. 해방신학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의 해방력을 되찾고 예수에 대한 ‘위험한 기억’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교를 권력자들의 이익에 묶어 두고 있는 쇠사슬을 깨뜨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무엇이나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안에는 모든 것을 싸잡는 일이란 없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예수는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넘어서는 안 될 한계선이 있으니 인간의 권리와 존엄과 자유가 그것입니다. 줄곧 허리를 굽히고만 있는 사람은 필경 병신이 되고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됩니다.”
보프 신부는 자신의 삶을 고취하는 동기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투신, 복음에 대한 열정, 이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느끼는 연민, 억눌린 이들의 해방을 위한 책임, 비판적인 사고와 극도로 비인간적인 현실 사이의 매개, 그리고 끝으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밝히고 실천한 것처럼 창조계의 어느 존재에 대해서나 자상하게 돌보는 다정한 마음들”이라고 전한다.
이처럼 보프는 자신의 길이 하느님 안에서 복음을 따르는 길이라고 확신했기에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에게서 방해받고 박해받는다 해도 기 죽지 않는다. 그래서 "무엇이 보람없으랴. 혼이 기죽지 않을진대"라고 말하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