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 605년에 일어난 갈그미스 전투(The Battle of Carchemish)도
세계 역사의 큰 분수령 중의 하나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역사의 분수령이 된 전투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투(역사의 중심이 중동에서 발칸으로 옮겨짐),
십자군 전쟁(기독교와 이슬람의 분리와 동방의 사상의 서방 유입),
워털루 전투(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샤를 제국이 몰락됨)등등으로 생각됩니다.
갈그미스 도성은 유브라데 강의 도하 지점인 강의 상류를 지키는 도성으로,
메소보다미아와 소아시아를 연결시키는 주요 동서 고속도로의 북쪽 부분에 위치 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이 쇠퇴할 무렵 이집트의 군대가 주전 609년에 공격하여 정복하였습니다.
주전 609년은 이집트의 바로느고가 유다왕 요시아의 군대를 므깃도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역대하 35:20~27 )
정복한 도시가 갈그미스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요시아왕이 그릇된 판단을 한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긴하였지만,
결국 국제적인 힘의 균형은 갈그미스 전투에 의해서 유다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 갈그미스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
고대 헷족속과 수리아 족속의 성읍이었던 갈그미스는 지중해 부근 알렙포(Aleppo)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오늘날의 '제라불루스'(Jerablus)이다.
이 성읍은 시리아 지역에서 유프라테스 지역으로 오고가는 관문으로서, 전략적 요충지이며 교역의 중심지이다.
이런 이유로 이 성읍은 자주 열강의 각축지가 되었는데,
BC 15세기경에는 애굽의 왕 투트모스 3세(Tuthmosis Ⅲ)의 치하에 들어갔다가,
BC 14세기경에는 힛타이트의 수필룰리우마스 1세(Suppiluliumas Ⅰ)의 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BC 1200년경 힛타이트 제국의 멸망과 함께 잠시 독립적인 도시국가로 존재하다가
BC 8~9세기 경 다시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쳤다.
그리고 BC 717년 사르곤 2세에 의해 갈그미스는 앗수르에 완전히 병합되어 앗수르의 한 성읍이 되었다.
그후 다시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2세가 앗수르 군대를 격파하고 이 성읍을 차지하게 되었다.
2. 당시의 국제 정세
갈그미스 전쟁 발발 당시 BC 612년 바벨론에 의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의 함락과 함께 앗수르는 사실상 국가로서 거의 몰락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대신 바벨론이 근동의 북방 지역에서 최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동의 남방의 강대국인 애굽은 북방의 앗수르가 쇠약해진 틈을 타 팔레스틴과 시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동시에, 수도 니느웨 성을 잃고 거의 몰락 상태에 처한 앗수르를 통치하고 있던 앗수르발리트 2세와 동맹을 맺고 바벨론의 남하를 공동 저지코자 하였다.
한편 BC 609년에 발발한 유다왕 요시야와 애굽왕 바로느고 간의 므깃도 전투도 갈그미스 전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당시 수도 니느웨를 잃고 갈그미스 성읍 중심으로 다시금 세력을 정비하고 있던 앗수르는 바벨론의 집중 공격에 큰 고전을 겪고 있었다.
이에 앗수르가 완전히 붕괴될 경우에 애굽의 운명도 위태하게 될 것을 우려한 애굽왕 바로느고는 앗수르를 원조하기 위하여 팔레스틴을 지나 북쪽 갈그미스 성으로 진군코자 하였다.
이때 앗수르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다왕 요시야가 애굽 군대의 진로를 차단코자 므깃도로 나가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유다는 애굽에 크게 패하였고 또 요시야도 전사했다.
바로느고의 군대는 갈그미스까지 가서 바벨론과 전투를 개시했으나 싸움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전하여 귀국하는 길에 하맛 땅 립나에서 자기에게 나온 여호아하스를 잡아 옥에 가두고
그 형제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하여 왕으로 삼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혀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유다는 애굽으로부터 잦은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는데
17대왕 여호아하스가 폐위되고 18대 여호야김이 등극하게 된 것도 애굽의 내정 간섭에 의해서였다.
그후 여호야김 4년(BC 605년)에 애굽의 바로느고는 다시 갈그미스로 진격하였으나
갈그미스와 하맛에서 느부갓네살에게 패하였다
1년후 느부갓네살은 팔레스틴으로 내려와 아스글론을 정복하고 애굽 시내에 이르렀다(왕하 24:74).
그리하여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에서 잠시 누렸던 독립을 잃고 당분간 바벨론의 속국 상태로 있었다.
여호야김이 3년동안 바벨론에 조공을 바치다가 느부갓네살이 아직도 잠재적인 원수로 남아있는 애굽의 느고를 치기 위해 애굽 국경까지 진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후퇴하게 된다.
여호야김은 그 기회를 이용해 느부갓네살을 배반했다(왕하 24:1).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을 섬겨야할 것을 권면했으나 듣지 않았다(렘 27:1~15).
이 소식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곧 유다 근방에 있는 갈대아 부대와 그 예하에 있는 아람과 모압과 암몬의 부대들을 급파하여 여호야김을 쳤다(왕하 24:2; 렘 35:11).
그리고 그후 얼마동안 아람과 모압과 암몬의 분대들로 보강된 갈대아 부태를 보내서 유다를 다스리게 했다(왕하 24:2; 렘 35:11).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랐다(왕하 24:6, BC 598년 12월- 3개월 10일 동안).
느부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쳐들어왔을 때(BC 597년 3월 10일)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대신 왕으로 세웠다(왕하 24:10~174).
3. 전쟁의 경위
므깃도에서 유다왕 요시야 군대를 격파한 애굽왕 바로느고는 갈그미스로 진군해 올라가 앗수를 군대를 원조하여 바벨론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저지시켰다.
그리고 립나 성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계속해서 바벨론의 공격에 대비하였다(왕하 23:31~34).
그러다가 BC 605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2세가 갈그미스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앗수르와 애굽 군대를 완전히 전멸시켜 버렸다.
이 당시 애굽 군대의 참패 상황이 렘 46:2~12에서 매우 장엄한 시적 문체로 잘 묘사되어 있다.
4. 전쟁의 결과 및 의의
이 전쟁에 의해 애굽은 더 이상 팔레스틴과 시리아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왕하 24:7).
그리고 대신에 바벨론이 이 지역에서 최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제18대, 제19대 유다왕 여호야김과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의해 폐위되고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왕위에 앉혀졌다.
그리고 BC 586년 시드기야도 결룩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됨으로써 사실상 남유다는 BC 586년에 이미 BC 722년 멸망한 북이스라엘에 이어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