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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끝난 것인가요? 아직 미결 상태랍니다. 태풍 ‘개미’가 뭔 짓을 할지 기다려봐야 한 대요. 거참, 뭔 개미가 대단합니다. 일단 장마가 물러가면 좋겠습니다. 한달 가까이 되었으니 땡볕이라도 좋으니 햇빛이 그립습니다. 이 후덥지근한 더위는 몸뿐만 아니라 맘까지 상하게 만듭니다. 짜증나지요. 찌는 것보다는 타는 것이 낫겠다 싶습니다. ㅋㅋ 아무튼 여름은 이제야말로 시작되는 기분입니다. 타든 찌든 8월이 오면 입추도 있고 처서도 따라옵니다. 일단 기분이라도 나아질 것입니다. 어차피 지나갈 테니까요. 그렇게 수십 번을 돌고 돌아 인생 종치는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시간이 감에 따라 계절의 변화에 적응력이 떨어지는 느낌도 듭니다. 여태는 잘 버텨왔는데, 내년에는 또 어떨는지 ----
엊그제 새벽에는 구름 사이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달을 본지가 한달은 된 듯하여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달에 안착했던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의 감동에는 못 미치겠지만 정말 반갑더라니까요. ㅋㅋ 그런데 파란 하늘을 본지도 꽤나 됩니다. 저 하늘에 구멍을 뚫고서라도 보고 싶습니다. 정말 이 주말을 지나 장마는 끝날까요? 제발 좀 물러가주기를 바랍니다. 7월도 마무리 단계, 여름이라고 남아봤자 한달인데 말입니다. 두 달치 몰아 땡볕으로 갚아준다 해도 감사하게 받으렵니다. 땀 좀 더 흘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덕에 풍성한 과일과 풍요로운 가을을 맞이하면 좋겠지요. 힘든 세상 먹거리라도 걱정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일단 오른 과일 값들이 좀처럼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요. 거참!!
자 7월도 가고 있습니다. 담주에는 8월, 더욱 팔팔하게 만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
2024년 7월 27일 김종우 목사 드림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욥기 26 : 7 - 8)
<플라이 미 투 더 문>
모두가 믿는다 해도 거짓은 거짓이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해도 진실은 진실이다.‘ 말이야 좋지만 참 어렵다 싶습니다. 양쪽 다 실망과 낙담을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약자가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일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세상살기 어려운 것이 그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끝까지 버티며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제야 조금 관심을 돌리기는 하지요. 목숨 값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나마 시간이 좀 흐르면 유야무야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냥 묻히는 것입니다. 아마 지하에서도 탄식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이 그렇지 뭐, 하면서 지나가겠지만 아픈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진실이 이기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묘하게 뒤집어집니다. 보고 나서 생각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거짓이 성공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기야 성공하든 말든 공개된 것은 사실 쪽의 화면이니 별 상관은 없었겠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측근인 ‘모’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줄 알고 신나할까요? ‘켈리’와 ‘콜’은 진실을 숨길까요? 지상에서 꾸민 자작극이 거짓임을 세상도 모를 것입니다. 이쪽 저쪽이 모두 성공하였으니 별 문제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고양이 덕에 촬영현장이 무너질 때 모가 얼마나 당황하였을까 상상해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찌 보면 정치인도 연예인 비슷하게 인기를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국민의 지지율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곧 투표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일단 득표수가 많아야 하고 상대방보다 다소라도 많아야 당선됩니다. 이 득표수가 바로 인기와 비례합니다. 인기는 관심의 표명입니다. 다수의 관심을 받으려면 남다른 활동이나 특징이 있어야 합니다. 다양한 지식을 갖추고 토론에 뛰어나든지 모두가 존경할 만한 희생 봉사를 했다든지 뭔가 특별한 차이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대통령도 집권기간 국민의 관심과 존경을 받으며 일을 하려면 눈에 보이는 실적이 매우 중요합니다. 차기 집권에 영향을 받습니다.
한창 미소가 대결하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두 강대국의 대결은 이제 지상에서 우주로 확장되었습니다. 누가 먼저 지구 밖으로 나갈 수 있느냐로부터 누가 먼저 달에 가느냐로 발전되었습니다. 소련이 먼저 지구 밖으로 나가자 미국이 깜짝놀랐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직속의 ‘미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60년대 ‘아폴로’ 계획이 추진됩니다. 불행하게도 발사연습 도중 우주선 내의 화재로 3명의 우주비행사가 희생됩니다. 당시 책임자였던 콜은 평생 그 트라우마를 안고 지냅니다. 다시는 그런 사고를 만들지 않고 철저히 준비하여 기어코 목표하였던 유인우주선을 달에 보내어 첫발을 디디게 하고 싶었습니다.
짐작하겠지만 어마어마한 국가 예산이 들어가는 중차대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사고로 인하여 모든 아폴로 계획이 중지됩니다. 그럼에도 소련에 뒤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막대한 재정과 사고위험 그리고 국민적 관심으로부터 멀어짐이 이 인류사적 사업에 걸림돌입니다. 일단 재정을 확보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돈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개인이 투자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막대한 국가적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국회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필수입니다. 책임진 의원들의 동의와 지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의원들은 항상 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국민적 관심을 끌어들여 표를 확보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시 국내는 월남전으로 인하여 그 현장 소식이 자주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국민의 눈이 온통 월남전에 쏠리고 있던 것입니다. 나라의 장래와 미소대결이라는 국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어하는 대통령도 그런 국민의 눈을 우주로 돌리고 싶어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방법을 찾아내라고 지시합니다. 홍보담당관이 비밀리에 홍보 관련 업무에 뛰어난 인재를 찾습니다. 그리고 찾아낸 사람이 바로 자동차 세일즈를 하고 있는 ‘켈리 존스’입니다. 은밀하게 접근하여 제의합니다. 그 대가가 고액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함게 간 곳이 바로 나사입니다. 그깟 자동차 때려치우고 국가를 세일즈하라는 말입니다. 무엇인들 못 팔랴, 싶었겠지요.
문제는 나사 책임자였던 ‘콜 데이비스’입니다. 소위 곧이곧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다는 켈리와 원칙과 법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콜과 사사건건 부딪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켈리는 일단 사명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거짓도 불사합니다. 그것은 콜의 삶과 업무수행의 원칙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 두 사람의 옥신각신하는 속에서 나사의 목적 곧 우주선 사업이 진행됩니다. 일단 의원들의 동의와 협조를 얻어내서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깐깐한 의원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 숙제입니다. 원칙이 어떠하든 콜의 원하는 바도 우주선 발사입니다. 평생의 꿈이기도 합니다. 달에 사람을 보낸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것을 미국이 인류사상 최초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런 일이 실제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막힌 상상입니다. 사실 이야기의 재미는 우주선 발사 자체보다 콜과 켈리의 로맨스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있습니다. 아주 다른 두 남녀가 티격태격하면서 정을 쌓고 사랑을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쏟아내는 말들이 여느 코미디보다도 재밌습니다. 대사를 만든 작가의 뛰어남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대사를 거침없이 자신의 말로 튕겨내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대단하다 싶습니다. 아무튼 그 옛날 들었던 달에서 전해온 우주인 ‘닐 암스트롱’의 첫마디는 아직도 마음을 울립니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영화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을 보았습니다.
새 것과 옛 것
우리 성도 여러분, 새것이 좋습니까 헌 것이 좋습니까? 냉장고도 새것이 좋고 TV도 새것이 좋고 컴퓨터도 새것이 좋습니다. 물론 옷도 새것이 좋고 집도 새것이 좋지요? 그런데 무조건 새것이 좋겠습니까? 우리 속담에 구관이 명관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하기야 오늘날은 자칫 구관이 구닥다리 될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를 할 줄 아나, 스마트폰을 할 줄 아나, 도무지 현대 기술을 따라가지 못해서 헤맵니다. 그러니 채용해서 사용할 수가 없지요. 역시 새것 즉 젊은이가 훨씬 낫습니다. 그렇다고 집에 계신 부모님 새것으로 다 바꿀까요? 마누라도 새것이 좋지요? 서방도 새것이 좋고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무조건 새것으로 바꾸다가 머리도 새것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기억 다 잃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인생을 잃어버립니다. 새것이 좋기는 합니다. 하지만 바꾸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 줄 압니다. 오늘은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보겠습니다.
예수님 사역 초기에는 여러 가지 치유사역이 많았습니다. 왜요? 그것이 목적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목적이 뭐라고요? 천국복음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그 생명의 말씀을 들으려고 와요, 안 와요? 예수님의 뭘 보고 옵니까? 학력을 보겠습니까? 경력을 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지위나 생김새를 보겠습니까? 뭘 보고 오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탤런트처럼 잘 생겼다고 합니까? 기독교백화점에 걸려있는 초상화처럼 생기셨으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가요?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렘 14 : 8 - 9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 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 같다고 합니다. 더구나 어리벙벙한 자 같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생긴 모습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무엇을 보고 예수에게 오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치유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별로 생기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변변한 경력도 배경도 없는데 사람들이 몰려가니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곱게 보이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도 변변한 곳을 나오지 않고 학위나 지위도 변변치 않고 정통교회도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치유사역을 한다며 사람들을 모아 집회를 합니다. 세상 교회들이 곱게 보아주나요? 이거 웬 이단이 나와서 신자들을 미혹하는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합니다. 조금 후에는 교회 같은 거 세워가지고 점점 부흥합니다. 소문 듣고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가만 놔둡니까? 자기 교회 성도들 빠져나갈까 노심초사하지요. 그리고는 신학적으로 검증을 한다고 야단입니다. 이러쿵저러쿵 이론을 만들고 깨부술 생각만 합니다. 순복음교회가 처음 자리 잡을 때도 얼마나 말이 많았습니까? 정말 힘들었지요. 쉽지 않습니다. 기성교회들 즐비한데 뭐 하나 세우려고 하면 그 틈바구니 헤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이 겨우 삼십 대 청년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다니니 쟁쟁한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습니다. 백성들 가지 못하게 막느라고 열을 냅니다.
마 8장 끝에 보면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은 몰라봐도 귀신은 귀신 같이 알아보지요. 마 8 : 28 - 29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그래서 예수님이 그 귀신들이 옆에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해줍니다. 결과 어떻게 됩니까? 32절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자 이 소문이 나겠습니까, 안 나겠습니까? 이제는 예수님 곁에 사람들이 따라다닙니다. 그 덕을 보고자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지요. 병을 고쳐줍니다. 귀신 들린 사람 고쳐줍니다. 놀라운 일을 구경하는 겁니다. 재미있을까요, 없을까요? 여태 이런 구경한 적 있다? 없다? 신나지요.
그렇게 재미있어서, 또는 그 덕을 보고자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짓을 하는가, 엿보려는 사람들이 섞여있다는 말입니다. 혹시 무슨 흠이라도 발견하면 당장 이단이다 정죄하고 쫓아내려는 겁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어느 모임이 유명해졌다, 성도들이 몰려간다, 하면 교회들이 긴장합니다. 자기 교인들 그곳으로 몰려갈까 벌벌 떱니다. 그러니 무슨 흠은 없는가, 약점이 무엇인가 뒤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사역의 목적이 무엇이라고요? 천국복음 전파요 그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살펴보아야 합니까? 그 말씀을 잘 들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사람의 말인지 분별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사실 들어도 알까요, 모를까요? 문제는 그겁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도 색안경을 끼고 보면 제대로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제대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9장에 들어옵니다. 이번에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9 : 1 - 2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자 병자가 왔습니다. 그런데 치유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사해주십니다.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아니 병은 고쳐주지 않고 웬 죄 사함인가 하는 겁니다. 더구나 죄는 누가 사해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니 당장 이의가 제기됩니다. 마 9 :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한 마디로 건방지다, 하나님의 권세를 도적질했다 그 말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려주려는 의도인 것을 이들이 알까요, 모를까요? 알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보내서 오셨다, 너희가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야다, 이 사실을 나타내려 의도하신 겁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 턱이 없이 흠을 잡으려고 기다렸던 서기관들이 드디어 잡았다 생각한 것이지요. 예수님이 밝히 알려주십니다. 6절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렇게 해서 중풍병자가 치유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이 결코 치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데 그 즉시 일어나 걸어라 하시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뭐라 하셨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한 번 인생으로 끝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주기 원하신다고요? 영생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죽음을 없애야 합니다. 죽음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음이 왜 왔다고요? 죄 때문에. 그렇다면 무엇을 해결해야 합니까? 예, 죄입니다. 죄를 없애야 영생의 길이 열립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옛 찬송가 205)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구원과 영생복락이 오는 것입니다. 병을 고쳐준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면 영생은 없습니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것이 죄 용서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안다 모른다?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지도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 곁에 따라다닌 사람들은 당시 유명한 사람들입니까, 세상에서 별볼일없는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감시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 외에는 거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30대 초반 젊은이를 뭐 보겠다고 따라다닙니까? 단지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가르치는 목자들을 따라야 할 백성들이 자꾸 예수에게 가니까 감시하려고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끼어든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도 그런 유명한 사람들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마태라는 세리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바리새인들이 끼어 있다가 또 트집을 잡습니다. 마 9 : 10 - 11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과 어울립니까, 잘난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합니까? 우리 자식들이 길거리 거지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 것을 보면 가만 둡니까?
예수님은 우리 입장과 다른 줄 압니다. 겉으로는 잘 꾸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그 놈이 그 놈입니다. 어디를 보시니까요? 우리 속을 보십니다. 겉은 수백 만 원 양복으로 감싸고 밍크코트로 둘러본들 하나님 앞에는 벌레인 인생일 뿐입니다. 욥기에서 고백합니다. 욥 25 : 5 - 6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그렇지요. 하나님 앞에는 다 꼴불견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죄인이요 더럽기가 한량없는 구더기 같은 인생들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인생들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을 들고 있는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의 눈에 예수님이 들어옵니까? 화려한 제사장 예복을 입은 사람들의 눈에 거렁뱅이 같은 예수님이 제대로 보이겠습니까? 대단한 치유와 기적을 베푼다고 하면서 누구와 어울립니까? 자기네는 근처에도 가지 않는 죄인들과 함께 합니다. 자기네와 차원이 같다? 다르다? 다르지요.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저런 죄인들과 어울릴 수가 있느냐 이겁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마 9 : 12 -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신 겁니다. 우리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이루려고 오셨기 때문에 그대로 하시는 겁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 인애를 ‘긍휼’로 바꾸어 말씀하신 겁니다. 인애를 쉬운 말로 바꾸면 ‘사랑’이고 어렵게 표현하면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사보다 무엇이라고요? 사랑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시나요? 조금씩 배우고 있는 줄 믿습니다. 여기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알고 있는 걸까요, 모르고 있는 걸까요? 예수님 눈에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알고 있습니까? 배우고 있는 줄 압니다.
이어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금식에 대해서 질문하였는데 예수님이 대답하신 내용만 보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식은 왜 합니까? 금식이 뭡니까? 밥을 안 먹는 겁니다. 왜 안 먹어요? 누가 먹지 말라고 합니까? 자 금식을 왜 하지요? 기쁘고 즐거워서 합니까? 슬프고 괴로워서 합니까? 그렇습니다. 슬프고 괴로워서 합니다. 일이 잘 돼서가 아니라 잘 안 돼서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부모에게 떼쓸 때 뭐 합니까? 금식합니다. 사실 이건 금식이 아니라 ‘굶식’입니다. 자기 욕심 채우려고 하는 것이지, 슬프고 괴로워서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금식하라고 하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욜 2 : 12 “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징벌을 받습니다. 매를 맞는 아이보다 매를 때리는 어미의 마음이 더 아픕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용서받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요.
우리가 금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우리 구원자가 가까이 있다면 금식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그 예수님이 우리 곁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아픕니다. 힘듭니다. 슬픕니다. 그 때에는 금식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마 9 : 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옵니다. 구원자를 잃으면 어떻게 됩니까? 슬픕니다. 낙심됩니다. 아픕니다. 그러니 금식하며 하나님께 애원해야 되겠지요. 예수님은 당신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길을 걷고 계신 겁니다. 그 사역이 재밌을까요, 힘들까요? 우리가 끝을 알고 산다면 살맛이 나겠습니까, 안 나겠습니까? 혹시 내가 길가다가 빌딩 공사판 옥상에서 떨어지는 벽돌을 맞고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산다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기분 잡치겠습니까? 정말 살맛이 싹 가셔버리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알고 사셨습니다. 어떻게요? 성경에 그렇게 이미 예언되어 있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는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 신 21 :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바울이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갈 3 :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겠지요?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결론으로 말씀하신 것이 새 포도주와 새 부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전해주는 천국복음을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이미 율법으로 닳고 닳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복음이 맞지를 않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인정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합니다. 무엇이 다른지 분별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틀렸다고 우깁니다. 그 대표적으로 행한 사람이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예, 사도 바울입니다. 율법으로 똘똘 뭉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라고 하면 이를 갈았던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뒤집어졌습니다. 그리고 고백한 것이 빌 3 : 8절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우리도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요?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 합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재산입니까? 글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부자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전도자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장막을 만드는 직업을 활용하였습니다.(행 18 : 3) 그러니 바울이 다 버렸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런 세상 재물이 아닙니다. 그는 잘 아는 대로 율법에 누구보다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지식에 매여서 예수와 그 따르던 자들을 그렇게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것이지요. 이 예수가 바로 율법이 증거하는 구세주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율법의 지식을 다 버렸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이고 구약에서 약속하였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증거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가 죽인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 한 것입니다.(행 3 : 36, 5 : 42, 17 : 3, 18 : 5, 18 : 28)
택함 받은 하나님 백성이라 칭하면서 더 나아가 그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한다던 목자들 곧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이 구약을 제대로 알았다면 예수를 그렇게 핍박하였겠습니까? 안다고 고집하였지만 사실은 무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탄식하신 바가 있습니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무슨 지식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성경을 아는 지식 아닙니까? 그런데 암송까지 하면서 몰랐다는 말입니다. 행 13 :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언제 오시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으니까요. 때에 관해서는 아들도 천사도 모른다고 말입니다.(마 24 : 36, 행 1 : 7) 그런데 어떻게 오실까요? 그냥 막연하게 기다리면 됩니까? 그런 식으로 믿었기에 초림 때 예루살렘 목자들이 외우면서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신앙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여태 가지고 있는 지식은 버립시다. 그냥 믿으면 구원? 몰라도 믿으면 구원이라고요? 다시 상기합시다. 무식하면 망합니다. 누가요? 하나님 백성이 망합니다. 불신자들이 망하는 것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이미 열외입니다. 안 믿겠다는데 어쩝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 자녀들입니다. 쓰레기 같은 옛 지식, 예수 천당! 버립시다. 제대로 알고 믿어야 구원입니다. 하나님도 알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아멘!! 배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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