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웅
그날도 바람이 방향을 바꾸고,
볕은 낮게 눕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
손끝으로 계절을 짚었다.
차가운 공기,
커튼이 숨을 쉬듯 흔들렸다.
그 움직임이 사람의 마지막 말 같아
나는 오래 지켜보았다.
외투를 걸치고,
조용히 문을 나섰다.
마당 끝 금간 바닥에
들꽃들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여름이 가기 전에 뽑자 다짐했으나
오늘도 생각만 남았다.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익숙한 담벼락들이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석류나무 가지 끝 붉은 열매,
말없는 기다림처럼 늘어져 있었다.
기억할 이유는 없었지만,
생각은 자꾸 그쪽으로 기울었다.
산책길 어귀,
은행나무 아래 노란 잎들이 바스락거렸다.
나는 이 소리를 사랑했다.
“낙엽은 지는 게 아니라,
내려앉는 거야.”
속으로 중얼이며
어느 오래된 책갈피를 떠올렸다.
정자에 이르자,
휘어진 벤치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판자는 삐걱거렸지만
나는 매번 그 자리에 앉았다.
멀리서 까마귀 한 마리
울음으로 저녁을 알렸다.
주머니 속
펼치지 않아도 아는 편지.
그래도 나는 다시 펼쳤다.
나는 언제나 먼저 겨울이 되는 사람이다.
백설이 덮어 지나온 발자국을 지운다 해도
봄처럼 기억해 주기를.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아무 맛도 없었다.
다만 따뜻하다는 감각만,
목을 지나가며 남았다.
그래, 따뜻한 것이
꼭 달콤할 필요는 없다.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
은행잎 몇 장이
벤치 옆으로 쌓였다.
나무와 잎사귀는
아무도 모르게 이별을 했다.
나는 나뭇잎 하나를 집어
종이 위에 올려두었다.
의미는 없었으나,
그러고 싶었다.
걸음을 돌려 마을로 향했다.
가로등이 켜지고
창마다 불이 들어왔다.
저무는 하루의 길목에서
그녀와 처음 걷던 날이 떠올랐다.
“여긴 별 게 없어서 좋아요.”
하늘을 가리킨 내 손끝을
따라오던 그녀의 웃음.
그 웃음이 오늘,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집 앞에 이르러 문을 열었다.
볕 대신 냉기가 실내로 스며들었다.
커튼을 닫고,
찻잎을 비우고,
그녀의 찻숟가락을
식탁 한켠에 그대로 두었다.
밤이 오고,
기온이 더 내려간다는 소식.
그러나 나는 난방을 켜지 않았다.
담요를 두르고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눈은 오지 않았고,
바람도 멎었다.
그 고요함이 싫지 않았다.
내일은 잡초를 뽑을 수 있을지도.
아니면 다음 주쯤.
급하지 않다.
이별은 언젠가
그 자체로 자연이 될 테니까.
그날 밤,
나는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고,
어떤 얼굴도 떠올리지 않았다.
겨울로 가는 길 위에
나는 조용히 서 있었다.
여물어 가는 내몸을 응시한 채.
첫댓글 이별과 고요함도 삶의 일부이며, 모든 감정은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익어가도 괜찮다는 따뜻한 위로를 건넵니다 달콤하지 않아도 따뜻한 자판기 커피처럼, 삶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늘 그렇게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