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7년 일본육사졸업(49기)
1945년 뉴기니 독립공병 15연대장 대리 (일본군 소좌) 1949년 육군대령임관 1951년 육군참모총장 1960년 허정과도정부 국방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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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오적의 장손, 일본군육군소좌
- 이종찬은 한일합방시 법무대신이자 을사5적으로, 그리고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은 이하응의 장손자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고대광실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성장하였다. 경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를 거쳐 1천여 명의 전교생 중 한국인은 10여명에 지나지 않은 일본인학교인 경성중학(서울고 전신)을 졸업하고, 그는 학교배속장교와 주변의 권유 및 식민치하에서 일본인에게 멸시를 받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32년에 일본육사에 들어가 37년 6월 49기생으로 일본육사를 졸업하였다. 그해 8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해전선에 투입된 그는 아사히신문에서 그를 소개할 정도로 일본의 남경공략에 수훈을 세워, 무공이 뛰어난 군인에게 수여되던 긴시(きんし)훈장을 탔다. 또 이때 자신의 많은 부하가 죽자, 38년경에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시를 지어 동아일보에 투고하여, 게재되기도 하였다.
대위로서 42년 초 동경포공학교를 졸업한 이종찬은 42년 가을 남방전선 전속명령을 받아 뉴기니로 출정, 43년에 소좌로 승진하고 현지민수용소의 소장과 효도(曉島)수비대장을 거쳐 독립공병 15연대장 대리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종찬은 12월에 현지소재의 한국인장병들을 모아 조부대(朝部隊)를 편성하고, 이들과 더불어 다음해인 46년 6월 천신만고 끝에 인천항에 상륙, 귀국했다.
대령복귀와 출세가도, 이승만의 신임
- 귀국 후 한국의 정세와 극한적인 전쟁체험, 민족에 누를 끼쳤다는 죄의식, 홀어머니의 반대 등은 이종찬으로 하여금 국방경비대와는 거리를 두고 자숙의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46년 10월에 이응준과 일본육사동기생인 채병덕 등으로부터 국방경비대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그 지긋지긋한 군대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또, 초대국무총리이자 국방장관인 이범석이 그에게 국방참모총장을 맡아달라고 권유해도 이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현실적으로는 친일파였던 자신의 가계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했다. 즉, 48년 3월말 공표된 군정법령 175호의 국회의원선거법 중 '일본정부로부터 작을 받은 자'는 피선거권은 물론 선거권조차도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군대는 앞의 규정에 적용을 받지 않는다 해도, 이종찬의 국방경비대 복귀문제는 당시 친일파숙청을 요구하던 정세 하에서 친일파 문제가 일정정도 해결되어야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정부의 수립과 친일파숙청문제는 그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다. 즉, 이하영의 일본작위를 이종찬이 세습했는가 여부를 둘러싸고, 49년 5월 반민특위로부터 소환된 그는 할아버지 이하영의 작위를 이어받지 않음을 설명하여 이를 입증하였다. 이리하여 군에 복귀하는 데에 있어 현실적 장애물과 심리적 장애물이 일단 제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49년 6월 22일, 이종찬은 이승만, 신임 신성모국방장관 등의 끈질긴 권유로 육본 제1국장(후에 총무국장으로 개칭)과 정훈국장을 겸하는 육군대령으로 군에 다시 복귀하였다. 군에 복귀한 이종찬은 뒤늦게 군대에 복귀했지만 이승만 등의 신임에 힘입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즉, 1950년 6월 이승만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있던 일본육사동기생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의 배려에 의해 수도경비사령관이라는 요직에 기용되었다. 6.25가 발발하고 수원이 함락된 다음날(7월 30일) 수도사단장을 김석원에게 넘긴 이종찬은 일시 관운이 막혀 경남지역에서 병력편성사업에 종사하였다. 하지만, 다시 9월 1일에는 김석원의 후임으로 3사단장직을 맡아 포항전투와 형산강전투에 참가하였는데, 특히 형산강전투에서는 자결할 각오로 전투에 임해 형산강전선을 지켜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공세로 전환하여 북진하던 중이던 9월 20일 육군준장으로 승진하고, 10월 2일 미군의 36선돌파명령과 두만강상류지역을 향해 진격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북진하던 중 1950년 11월 12일 병기행정본부장으로 전보됐다. 이로써 6.25전란 발발 이후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기간에 일선 사단장을 지내 무공을 세운 이종찬은 공교롭게도 중군군개입으로 처절한 후퇴를 개시하기 직전에 후방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51년 5월 7일 이종찬은 군단장도 거치지 않고 단지 사단장만의 경력을 갖고 있었던 이종찬은 일약 총장으로 기용되었다. 이러한 것은 이승만의 이종찬에 대한 강한 신임에 바탕한 것이었다. 6.25이전에도 이종찬의 결혼문제까지도 신경을 써주었던 이승만은 그를 크게 신임하였다. 더우기 전임 참모총장인 정일권이 후임자로 이종찬을 이승만에게 추천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당시 국방장관인 이기붕과 이종찬과의 관계였다. 이기붕은 이종찬의 외삼촌인 윤태우와는 막역지간으로, 이종찬의 어머니와는 '누이'라고 부를 정도의 관계였는데, 이기붕이 막후에서 이종찬을 적극적으로 천거, 총장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기붕이 국방장관으로 된 지, 한달 반만에 이종찬은 참모총장으로 발탁되었다.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려 참모총장으로 임명된 이종찬은 휴전회담을 뒷바침하는 한편, 당시에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 및 국회의 학살조사단 피습사건을 뒷처리하였다. 또 당시 4년제 정규육사가 개교하기로 되었는데, 이 때 초대 교장 인선문제는 각지의 청탁과 관련해 이종찬의 고민거리였다. 여기에서 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이종찬은 안중근의 조카이자 광복군 출신인 안춘생을 교장으로 임명했다. 6.25가 국제전으로 되어 전쟁수행의 주도권이 미군에게 넘겨지면서, 육군참모총장인 이종찬의 업무는 앞에서와 같이 사건의 뒷처리와 인사문제처리라는 지극히 행정적인 업무로 국한되었고, 따라서 이종찬의 이름도 급속승진한 참모총장 이외에는 역사에 남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종찬 신화의 시작, 군의 정치개입반대
- 한국정치사와 군대의 역사에서 이종찬를 기억하도록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이승만정권하에서 시련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문제는 부산정치파동과 관련된 군동원문제였다.
임기만료일을 앞두고 재선이 불투명했던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개헌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의도를 간파한 야당측은 52년 4월 중순부터 내각제개헌안을 제출했고, 이에 대해 관변단체는 내각책임제 개헌안 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는 한편 민족자결단 등 유령단체들이 국회의원소환과 국회해산 요구 데모 등을 벌이면서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에서 게릴라에 의해 미군 등이 사살되었다고 하는 소위 '금정산사건'이 발생, 이것을 빌미로 이승만정권은 5월 24일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원용덕헌병사령관을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하고, 소위 '5.26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당시 2개중대 규모의 비전투병력 밖에 없었던 부산에서 비상계엄령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이승만과 신태영국방장관은 이종찬에게 2개대대규모의 병력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에 대해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이승만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용을 담은 육군 훈령 217호을 전군에게 내려보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5월 27일 이종찬을 호출하였다. 그러자, 이종찬은 체포될 것을 우려하여 미8군사령관인 밴플리트와 함께 미대사관 승용차편으로 이승만에게 갔다. 이때 이승만의 힐난에 대해, 이종찬과 밴플리트는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며 또 작전지휘권이 미군에게 있는 상황에서 전방군대를 후방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불가하다'고 항변하였다. 그리고 이종찬이 사표를 이승만에게 제출하자, 이승만은 밴플리트의 시선이 냉담한 것을 깨닫고 이종찬의 사표를 반려했다. 하지만, 밴플리트가 잠시 자리를 뜨자, 이승만은 이종찬에게 '대한민국참모총장인가, 아니면 미8군참모총장인가'라고 공격하였는데, 밴플리트가 돌아오자 이승만은 이내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이 문제를 두고 이승만과 신태영국방장관, 이종찬육군참모총장, 원용덕 영남지구계엄사령관,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 5인의 회담이 재차 열려 설전이 벌어졌다. 그 설전은 크게는 5.26정치파동에 대한 미국정부와 한국정부 간의 견해 차이에서, 작게는 작전지휘권을 둘러싸고 이승만.원용덕과 이종찬.밴플리트 간에 진행되었다. 어쨋든지간에 장시간 논쟁 속에서 계엄군파병과 유엔군사령부의 비상계엄지지라는 이승만의 의도는 좌절되고, 이종찬과 밴플리트의 의견대로 파병불가로 결판났다. 그리하여 원용덕은 부산에 있는 헌병.공병.의무병 등 비전투병력 2개 중대만으로 계엄업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던 이종찬은 이승만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앞의 5인회동 이후 이승만이 '이종찬을 대포로 쏴 죽여라'라고 당시 유재흥참모차장에게 말할 정도로이승만과 이종찬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이종찬은 암살을 우려해 안방에 이부자리를 펴 놓은 채 나머지 4개나 되는 공관방을 옮겨 다니며 잠을 잤다. 이렇게 생활한지 10여일 후엔 피골이 상접하다시피 수척해져서 체중은 50kg도 못 될 정도였다. 이러한 이종찬이 이승만으로부터 어떤 해를 당하지 않을까 우려한 밴플리트는 미군헌병들을 총장공관에 파견, 경비토록 하는 한편 며칠 만에 한 번씩 찾아와 격려하면서 '가급적 총장공관에서 나가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렇듯이 밴 플리트는 이종찬의 신변에 대해서 각별히 배려하였다. 그런데, 밴플리트의 배려는 단순히 이종찬 개인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의 결과이었다. 즉, 5월정치파동을 두고 이승만과 트루만 미국대통령 및 미국무성 사이에 열띤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이때에도 이승만이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 무초 주한 미대사는 이승만정권을 전복시킬 것을 생각하고 트르만미국대통령도 이에 동의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무성은 무초와 클라크에게 훈령을 보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만일 이승만이 전쟁 수행을 위협하는 행동을 계속 취하거나 국회에 더 이상의 탄압을 가할 경우 클라크와 무초는 미국과 유엔을 대리하여 이승만에게 그 중지를 요구한다. 만약 그가 거부하면 클라크는 한국군 참모총장에게 한국 육군의 통수권을 장악, 부산지구를 관장하도록 명령한다.' 이에 따라 클라크는 이승만정권의 전복을 위한 쿠테타 계획을 수립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실을 만들어 이승만을 서울로 초대한다. 그가 부산을 떠나면 유엔군병력이 즉각 부산에 진주하여 유엔군 참모총장을 통해 현존 계엄정부를 관장한다.' 이렇듯이 이승만제거에 대한 미국의 정책과 정책실현수단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고, 또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이승만과의 대결에서 미국편에 서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종찬에 대한 밴플리트의 관심은 이승만제거계획의 일환이기도 했다. 또, 이종찬이 이승만에게 맞설 수 있었던 것도 군대의 정치개입반대라는 자신의 신념에도 있었지만 더불어 바로 이러한 미국의 이승만제거 정책에 대한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7월 3일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이승만은 구금했던 국회의원들을 석방하고 7월 28일 계엄령을 해제하고 또 8월 5일 선거에서 압승했다. 이렇게 해서 긴박했던 위기는 표면적으로나마 종식되었다. 그리하여 클라크나 이승만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클라크의 구테타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신화만 남기고
- 하지만, 이종찬에게 있어 클라크의 쿠데타취소는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이었다. 즉, 발췌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그는 공관에서의 '칩거'상태에서 벗어나 육본으로 출근하기도 하고 공식행사에 참석하게 되었지만 이승만은 곧 후임으로 밴플리트가 추천한 백선엽을 임명하면서 7월 22일 이종찬을 해임하였다. 그리고 '이종찬 같은 인물은 아껴야 한다'는 미본국정부의 훈령에 따라 밴플리트와 라이언 미군사고문단 단장 등은 이종찬에게 미국참모대학에 유학할 것을 권하였고, 이러한 속에서 그는 일개 유학생이 되어 도미유학의 길을 떠났다. 이는 이종찬이 부산정치파동으로 인해, 더 직접적으로는 미국과 이승만 측의 싸움의 와중에서 일거에 최고지휘관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떨어지는 별'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군의 정치개입반대라는 신화만을 남기고 태평양상공으로 사라져 갔던 것이었다.
약 1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53년 7월 초순경 귀국한 이종찬은 한직인 육군대학총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면서 이승만으로부터 끊임 없이 냉대와 수모를 당하였다. 이런 속에서 이종찬은 이승만과 만나는 것조차 꺼려 육사교장자리를 사퇴할 정도로 끝까지 반목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최고권력자인 이승만과의 반목은 이종찬으로 하여금 무대전면에 나설 기회를 잃게 하였고, 또 그도 이승만 하에서는 적극적으로 앞에 나설 생각도 없이 물러나 있었다. 이렇듯이 이승만에 대해서는 반목하는 태도를 보였던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의를 갖지 않도록 배려했으며 때로는 정치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예컨데, 59년초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가 대법원에서 확정되자, 그는 무위로 돌아가긴 했지만 이기붕을 만나 조봉암이 극형만은 모면하도록 힘써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57년에 육대에 입교해 졸업하는 박정희를 '유능한 장군'으로 판단하고 소장진급대상자로 추천하는 등 그의 승진을 돕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군의 정치개입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이종찬에게 쿠테타의 필요성을 역설했었던 박정희가 59년부터 본격적으로 쿠테타 계획을 진행시키면서, 박정희는 군내에서 가장 신망이 두터웠던 이종찬을 쿠테타 모의에 끌어들이기 위해 줄기찬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종찬은 '군의 정치불개입'이라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단호히 거부하였다. 또, 이종찬은 자신의 정치적 배경인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60년 3.15부정선거의 군대판인 '비둘기작전'에 대해서도 끝까지 거부하였다.
4.19, 한때 국방장관으로
- 이종찬은 4.19혁명의 결과 성립된 허정내각에 국방장관으로 입각하였다. 국방장관으로 입각하여 군에 관한 한 일체의 권한을 행사하던 그에게 닥친 첫번째 과제는 3.15부정선거 책임추궁으로 분란에 빠진 군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당시 '3.15부정사건의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인 송요찬은 물러나야 한다'는 박정희가 송요찬에게 보낸 서신과, 김종필 등 육사8기생이 주동이 되어 '부정선거 및 부정부패에 책임을 지고 중장급 이상 장성들의 자진퇴진을 요구'하는 연판장사건으로, 또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송요찬의 반격으로 '박정희의 데모사주설' 등으로 군대내부는 심각한 분란에 빠졌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군의 정치불개입이라는 자신의 소신과 박정희에 대한 배려에서 앞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처하였다. 그런데, 5월 중순 송요찬의 돌연한 사퇴와 5월 말 연합참모총장 백선엽의 사표를 계기로 부정선거와 부패장성에 대한 인책의 소리가 드높은 군내의 여론에 따라 각군의 주요지휘관에게 책임을 물어 예편조치를 취해나갔다. 뿐만 아니라, 3군총장과 해병대사령관들을 대상으로 한 헌법준수 선서식을 7월 17일 거행하게 하는 등 군부쿠데타의 가능성을 예방할려고 노력하였다. 더 나아가,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광주1관구사령관에로의 전보라는 박정희 전보조치를 묵인하였다. 이렇듯이 과도정부에 참여한 이종찬은 군의 내분을 진정시키는 한편 군의 쿠데타가능성을 제거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60년 8월 2공화국이 성립되고 과도정부가 종결되고 그는 평민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평민의 신분에 돌아온 그를 박정권은 한국현대사의 밖으로 내몰았다. 즉, 박정희의 쿠데타참여제의를 또다시 거절한 그는 5.16쿠데타 이후인 7월에 주이탈리아대사로 임명되어 67년까지 근무하였는데, 이 대사직은 당시 박정희정권에게 있어 '귀찮은 인물'에 대한 '명예직'이었다. 따라서 그의 갈길은 분명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후지필림 회장직과 한.이탈리아협회 회장, 그리고 3.1국민회의의장(1971년), 유정회 의원으로 활동하기는 하나 군대를 떠난 그는, 더더군다나 박정권의 '계륵'이 되버린 그는 이미 신화 속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 강성재,{참군인 이종찬장군}, 동아일보사, 1986년.
조지프 굴든, {한국전쟁}, 일월서각, 1982년. 부산일보, {임시수도천일}, 부산일보사, 1985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