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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시편 21:1~13
지난 시간에 생각한 시편 20편은 백성들이 그들의 왕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기도의 도움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에 다른 사람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이 기도해 주고 있는 것을 알 때, 이처럼 행복한 일은 없고 이처럼 힘이 되는 일도 없습니다. 왕을 위해 백성들이 기도할 때 그 왕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왕을 위해 기도하는 백성 역시 복이 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오늘 우리 성도들은 이 나라의 대통령을 위시해서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도 인정하고 어떤 사람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공연히 시끄럽게 군다고 하다가는 끝장나고 말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은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없애 버렸다가 가졌던 물건을 몽땅 도둑 맞았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26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런 사건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간증을 하였습니다. 자신도 사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장 싫어했고 미워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데는 앞장을 섰던 사람인데 놀라운 경험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이제는 이 그리스도를 전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을 말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늘까지 서서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릴 것 없이 증거하게 된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한 대로입니다.
이 때 이 말을 듣고 있던 베스도가 크게 소리지르며 “바울아 네가 미쳤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합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 때문에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합니다.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으신 줄 믿습니다. 이 일은 한편 구속에서 행한 일이 아닙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압니다.” 이 때 아그립바 왕이 바울의 말을 가로채며 “바울아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구나.”
“예,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나처럼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아주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의와 절제와 오는 심판에 대해서 말할 때 두려워하면서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는 곳에 문제가 생기곤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빛의 자녀들은 어두움의 자녀들과는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두운 그늘에 있는 바위 같은 것을 뒤집어 열어 보세요. 수많은 벌레들이 빛을 볼 때 도망치느라고 야단이 날 것입니다. 왜요? 빛이 싫어서 그럽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을 싫어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어둡게 사는 사람은 빛을 싫어합니다. 마귀의 자식은 하나님의 자녀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핍박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핍박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빛을 싫어하면 어두움에 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지도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힘을 얻을 뿐더러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할 때도 귀찮게 시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잘 받아들일 때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분봉왕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가지는 등 왕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누구도 왕의 잘못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세례 요한이 왕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때 왕은 너무 화가 나서 요한을 죽이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는 터라 민중이 두려워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적당한 시기에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도 하나님 두려워 아니하다가 충이 먹어 죽어버렸습니다.
오늘도 세계 도처에 소위 통치자들이 자기 생각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투옥하고 정치 보복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것은 삼가야 할 일입니다. 나중에 역사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힘입은 사람입니다. 베들레헴 목동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잠시의 실수로 큰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충복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충복 우리아를 자기 손으로가 아니라 일선에 내보내 적의 손에 의해 죽게 했습니다. 간음죄,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이 사실을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가 이 사실을 알고 다윗 왕에게 죄를 지적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런 힘없는 선지자 하나 정도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서 처치하는 것은 문제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자리에 꼬꾸라져서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이렇게 진실되게 바로 해보려고 할 때 국민들의 신뢰가 따르게 되고 나라는 번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왕을 위해 기도하고 지도자는 힘을 얻어 일합니다.
우리 나라의 지도자들도 다윗 같은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읽은 시편 21편은 앞의 시편이 하나님께서 나라의 왕을 보호해 주시고 번영케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인 반면에,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왕을 축복하시어 성공케 하신데 대한 감사의 시입니다.
이것은 정말 옳은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드리는 기도를 가만히 반성해 보세요. 간구하는 기도는 많이 드리지마는 그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는가를 주의해 보지도 않을 뿐더러 그 기도가 응답되어도 감사드리는 기도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감사의 기도를 더욱 기쁘시게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향한 감사는 경건한 기쁨의 표현입니다. 받은바 도움과 은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감사하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가 구한 것 이상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1절,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다윗은 그의 기쁨이 그의 군대의 힘이나 그의 성공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힘과 그의 구원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왕의 승리에 대해 기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실 때 그의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인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무엘하 3장 36절에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던지 무리가 다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쁨으로 삼는 왕,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서 그것에 대한 모든 봉사를 감당하는 왕, 그런 왕을 가진 백성은 행복합니다.
우리가 힘을 얻어 승리하는 것은 나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님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6절에도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했습니다.
이 기쁨은 성도의 특권입니다. 다른 데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가 마땅히 할 바로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슬퍼하는 마음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피곤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기뻐하는 생활이야말로 능력있는 생활의 비결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쁨과 주의 앞에서의 기쁨은 다릅니다. 세상 기쁨은 육신의 기쁨입니다. 세상 기쁨은 육감적이요,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자랑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세상 기쁨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기쁨입니다. 환경이 좋으면 기뻐하고, 환경이 나쁘면 슬퍼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므로 맑은 날은 기뻐하고 흐린 날은 슬퍼합니다. 순경에는 기쁘고 역경에는 슬퍼합니다. 건강하면 기뻐하나 병들면 슬퍼합니다. 젊어서는 기쁘고 늙어지면 슬픕니다. 살 때는 기쁘나 죽을 때는 슬픕니다. 세상 기쁨은 일시적인 기쁨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기쁨입니다. 마치 서산에 지는 해와 같아서 점점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세상 기쁨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 앞에서 기뻐하는 기쁨은 영혼의 기쁨입니다.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는 기쁨이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입니다. 맑은 날도 기쁘고 흐린 날도 기쁩니다. 건강해도 기쁘고 병이 나도 기뻐합니다. 젊어서도 기뻐하고 늙어서도 기뻐합니다. 살 때도 기뻐하고 죽을 때도 기뻐합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항상 있습니다. 마치 돋아나는 햇살 같아서 기쁨이 점점 커집니다. 하늘 나라 가는 구원의 기쁨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환난이 많고 죄악이 많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의 기쁨을 소유해야 모든 역경을 돌파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참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을 붙들어 주며 병난 자를 위로하고 역경 중에 있는 사람을 돌보아주는 봉사 생활을 하는 데도 힘이 필요합니다. 이런 힘이 어디서 옵니까? 주님을 믿는 가운데, 주님 앞에서 오는 기쁨을 소유하게 될 때, 우리가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봉사뿐 아닙니다. 우리 개인에게 닥치는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속담에 “빈 집에 도둑 든다”는 말이 있는데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생활한다고 하면서도 시험에 빠집니까? 그 이유는 아직도 마음속에 신앙으로 말미암아 오는 기쁨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기쁨을 좀 얻어 볼까 해서 기웃기웃합니다. 그 마음이 비어 있어 그럽니다. 참 신앙으로 그 마음속이 주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은 세상의 기쁨을 돌볼 여가도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기쁨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기쁨과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될 만큼 시들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Peace like a River)
1.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2. 내게 바다 같은 사랑
3. 내게 샘솟는 기쁨
그러면 이 놀라운 기쁨을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습니까?
본문 2절을 보세요.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 우리가 드린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신청 서류를 하나 냈다가 그것이 결재가 나면 기쁜데 하물며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응답이 있을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속으로부터 외치게 됩니다. “내가 열납되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셨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간구할 수 있고 그것이 나에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고 그 기도가 응답받을 때 우리 마음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이 왕을 위해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십니다. 어떻게요? 3-6 절까지를 같이 읽으십시다.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에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왕이 될 생각도 아니했고 원치도 아니했으며 왕이 되려고 노력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셨기 때문에 그가 왕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선택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축복을 받고 난 다음에야 그 축복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이요, 이것이 감격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축복은 아름다운 것으로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가장 영화롭게 높이셨고 그에게 가장 광대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주께서 정금 면류관을 그의 머리 위에 씌우셨나이다” 대적들이 그것을 빼앗으려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지켜 주셨습니다. 면류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면류관을 씌우는 자 외에는 누구도 그것을 살 수가 없으며 하나님이 씌운 면류관을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더욱 크고 많은 것으로 주십니다. 그가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되어 생명이 경각간에 달렸을 때, 그가 살려달라고 생명을 구할 때 주께서 그를 살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영영한 장수, 말하자면 영생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4장 4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실 하나님께서는 5절 말씀대로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셨습니다.” 주님은 다윗을 모든 이웃 왕들의 영광을 훨씬 능가하도록 그의 영광을 크게 해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류에 대한 모든 복의 근원이 되게 함으로써 그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주께서 그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이 되게 하시며” 하였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축복해 주실 때 축복받는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서 그로부터 생명이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이런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뿐만 아닙니다. 모세도 그렇습니다. 요셉도 그렇습니다. 여호수아,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다윗, 사도 바울 같은 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축복을 안겨준 분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어떻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까?
그들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므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그가 앗시시 성을 한 번 걸어만 가도 다른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 같은 분도 은혜가 충만해서 그가 걸어 갈 때 그림자라도 자기에게 비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를 복의 근원으로 삼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얼마나 축복이 됩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불행입니다. 그러나 매일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분이 많을 때 이것처럼 큰 축복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우리도 다른 사람 위해 기도하는 일에 인색하지 맙시다.
요한 녹스는 스코틀랜드를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국을 구원하고 이 조국을 축복해 줄 그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장 큰 복의 근원은 다른 심령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으로 본문 7-13절까지는 성도들의 소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7절 이하에는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오니 우리도 힘을 얻게 하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왕이 어떻게 요동하지 아니하고 튼튼히 서 있을 수 있습니까?
7절에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집을 잘 지어도, 튼튼하게 지어도 그 기초가 흔들리면 그 집을 흔들리고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 기초가 흔들리지 않을 때 튼튼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8절에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했습니다. 원수들이 아무리 앞에서는 우정과 충성을 고백하며 공교하게 위장했을지라도 네 손이 그들을 발견해낼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복수하시는 눈을 피할 곳이 없으며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산과 바위더러 가리워 달라고 애원해도 결국은 무화과 잎사귀보다 못한 피난처가 될 것이고 우리 앞에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들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저희는 삼키우고 말 것이며,
10절 말씀대로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망하고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어 버리신다”고 하였습니다.
11절에 “저희는 너를 해하려고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그들을 소멸시킬 것입니다. 그 얼굴을 향하여 활을 당기십니다. 이 얼마나 몸서리쳐지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처럼 사실은 철두철미하십니다. “하나님의 연자 맷돌은 매우 천천히 돌아가지만 매우 보드랍게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의기양양하게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나 주님은 강하십니다. 우리는 부족하나 주님은 완전하십니다. 우리는 적과 싸워 실패할 수밖에 없으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구속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다. 우리의 간구를 응답해 주시되 구한 것 이상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그리고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시며 힘 얻어 봉사하며 모든 시험 이기고 주안에서 복의 근원이 되십시다. 그래서 원수 앞에 상을 베푸시는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주와 더불어 원수를 쳐 물리치는 승리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미래의 비밀
(시 21:1-13)
찬송 301장
시편 21편은 앞의 20편과 짝을 이루는 시편입니다.
20편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기원하는 출정시라면, 21편은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고 돌아와 영광을 돌리는 개선시입니다.
본문은 삼하 10장의 그 치열했던 암몬과의 전쟁이 그 배경입니다.
내용으로 보면 1-7절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8-12절에서는 미래에도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13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는 교훈은 응답을 받았을 때는 감사를 잊지 말고, 그리고 감사하는 자에게 미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쉬울 때는 부르짖다가 응답 받고는 모른 체한다면 그가 어려운 일을 다시 당했을 때 그 누가 그를 다시 도와줄 마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열 명의 한센씨 환자가 고침을 받았지만 한 명만 감사하러 왔을 때 예수님께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늘 감사를 잊지 않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