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기도 남북으로 통하던 길목 용인
인기멤버
hanjy9713
2023.12.30. 20:41조회 9
댓글 0URL 복사
남북으로 통하던 길목 용인
고구려 때 구성현(駒城縣)이었던 이 지역이 용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1413년이었다. 용구현(龍駒縣)과 치인현(傂人縣)이 합쳐져 이루어진 용인을 김수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용인은 작은 고을이다. 왕도와 인접한 까닭에 밤낮으로 모여드는 대소 빈객이 이곳을 경유하지 않는 적이 없는데, 이는 대개 남북으로 통하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옛 원관이 작아서 겨우 하룻밤을 묵을 수 있으나, 매우 더운 때면 답답하고 트이지 않아서 손님이 와도 더운 느낌과 번울(煩鬱)함이 가실 수 없어 오랫동안 애를 먹었다.
이 기록을 보면 가난한 작은 고을에 오는 손님은 많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싶다. ‘작고 궁핍한 고을’ 또는 ‘경기도에서 가장 다스리기 힘든 고을’이라는 용인을 두고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고 한다.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서 산다는 말인데, 이는 신라 말의 고승 도선국사가 용인 땅의 형세를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지역 사람뿐 아니라 우리나라 명문세가들이 용인에 많이 묻혀 있다.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자락에는 포은 정몽주의 묘가 있는데, 1887년 개성에 있는 포은의 묘를 옮길 때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려 이곳에 떨어져 묘를 썼다고 한다. 능원리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문강공 이석형과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전사한 죽창 이시직의 묘도 있다. 모현면 동림리에는 임진왜란 때 북도 순변사를 지낸 이일 장군의 묘가 있고, 모현면 갈담리에는 숙종 때 문신인 남구만의 묘가 있다.
오산리에는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묘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공을 세워 우의정을 지낸 오명항의 묘가 있으며, 일산리에는 조선 영조 때 문신인 홍계희의 묘가 있다. 홍계희 묘는 정조 때 그의 아들 술해와 손자 상범이 역모죄에 걸려 처형되면서 무덤도 파헤쳐졌던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원삼면 맹리에는 허균의 부친이자 동인의 영수였던 허엽의 묘가 있는데, 노수신이 짓고 한석봉이 글씨를 썼다. 수지읍 상현리에는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인 정암 조광조를 모신 심곡서원과 그의 묘가 있다. 지금은 아파트 숲 속에 갇혀 있는 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그의 묘에 있는 신도비는 노수신이 짓고 이산해가 글씨를 썼다. 이곳을 찾았던 유희경이 그를 사모하는 시 한 편을 남겼다.
사모하는 마음 심곡을 찾으니
가을 산 나뭇잎이 누렇게 물들고
낡은 비석에는 풀 넝쿨이 덮였네.
해묵은 무덤에 저녁 해 쓸쓸하구나.
도덕은 천 년에 밝게 빛나고
문장은 한나라에서 으뜸이었나니
분향하고 술잔 드리는데
슬픈 눈물 옷깃을 적시네.
심곡서원
조광조 묘
심곡서원 문인석
수지읍 상현리에는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인 정암 조광조를 모신 심곡서원과 그의 묘가 있다. 지금은 아파트 숲 속에 갇혀 있는 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그의 묘에 있는 신도비는 노수신이 짓고 이산해가 글씨를 썼다.
용인시 구성읍 마북리에는 조선 고종 때의 문신 민영환의 묘, 이동면 시미리에는 우국지사 이한응의 묘가 있다. 용인시 역북동에는 다산과 함께 화성을 건축한 번암 채제공의 묘가 있고, 외사면 석천리에는 『반계수록』을 지은 반계 유형원의 묘가 있다. 남사면 완장리에는 임진왜란 때 삭령전투에서 전사한 경기도 관찰사 심대의 묘가 있고, 용인시 이동면 천리에는 영조 때의 학자인 도암 이재의 묘가 있으며, 묘봉리에는 충현공 안홍국의 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친 묘가 있다.
한편 용인시 내사면 식금리의 가루쟁이(식송)리에는 용인, 광주, 이천으로 통하는 갈림길이 있었고, 식금리에는 갑자사화 때 죽은 박언의 무덤이 있다. 남곡리의 골배마을은 천주교 성인인 김대건이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바라산, 백운산, 태화산 등 해발 400~600미터의 산들이 솟은 중앙부를 경안천이 흐르고, 동남부에선 남한강으로 접어드는 청미천이 흐른다.
용인시 내사면 등촌마을에는 ‘들통곡 날통곡’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이 마을에 원님이 부임해올 때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산골로 귀양을 보내나” 하고 통곡하면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부임해보면 장작불에 쌀밥을 먹을 정도로 물산이 풍부한 데다 주민들의 인심까지 좋아서 임기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갈 때는 섭섭하여 통곡하며 떠났다고 해서 이 마을 이름을 ‘들통곡 날통곡’이라고 하였다 한다.
용인에는 과거에 번성했던 김량장이 있어서 장날이면 장작장수나 숯장수들이 길가에 즐비했고, 장사꾼들의 고함으로 온 고을이 들썩거렸는데, 지금은 도시로 변하면서 그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한편 용인시의 처인구는 처인성(處仁城) 때문에 생긴 행정명이다. 처인성에 관한 기록이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처인성: 관아의 남쪽 2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져 내렸다. 군창(軍倉)이 있다. 고려 고종 때 강화로 도읍을 옮겼는데, 원나라 황제가 노하여 군대를 보내 상황을 물었다. 원나라 장수 살알(撒歹)이 어사잡단(御使雜端) 설신(薛慎)을 군중(軍中)에 잡아두고 개성에 이르러 강을 건너 남쪽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설신이 살알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의 고위 관리가 남쪽으로 강을 건너면 불길하다고 전한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지 않고 한양에 이르러 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다음에 처인성에 이르렀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을 맞고 죽었다. 원나라 군대가 개성으로 되돌아가 설신이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이라 하여 강화도로 들여보냈다.
한편 용인에 편입된 양지는 조선시대에 현이었는데 영남대로가 지나던 교통의 요지였다. 용인을 다녀간 최숙정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소조(蕭條)한 닭과 개는 10여 집이로구나. 땅은 궁벽하고 사람은 드물어 고요하여 시끄럽지 않다. 이로부터 성군 조정에 약한 정사가 없으니, 날이 긴 영각에 아침 아참(아전들의 아침 출근)이 늦도다.
양지는 현재 수원, 안성, 인천 등과 영서지방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 항상 자동차들이 밀리는 현장으로 변모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북으로 통하던 길목 용인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신정일)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
좋아요0
이 글을 '좋아요'한 멤버 리스트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