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뚜와네뜨는 프랑스 혁명과 1792년 8월 왕정 타도로 이어진 민중 소요사태가 일어나도록 자극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의 11번째 딸이었으며 1770년 프랑스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왕세손와 결혼했다.
루이 15세는 내성적이며 따분한 성격의 무뚝뚝한 남편이었으므로 1774년 루이가 왕위에 오를 무렵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총애하는 경박한 궁정 신하들의 작은 모임에 어울려 사교에 열심이었다. 그녀의 방탕한 궁정비 지출은 1770, 1780년대에 프랑스가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는 데 한몫을 했다.
또한 더욱 방탕한 궁정 귀족들과 가까이 지냄으로써 그녀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그녀가 혼외정사를 한다는 중상모략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이런 비방은 다이아몬드 목걸이사건(1785~86)의 와중에서 마리가 추기경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부당한 비난을 받았을 때 절정에 달했다. 이른바, ‘다이아몬드 목걸이사건’이었다..
이 추문으로 왕실의 평판이 떨어졌고 귀족들은 루이의 대신들이 추진하던 모든 재무개혁에 열렬히 반대하게 되었다.
김건희 여사.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절대자임을 확실히 보여줬다. 김건희는 여러 가지 추문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한동훈 위원장 ‘서운함’을 나타내자 윤 대통령은 ‘분노’로 이행했고, 여당이 휘청했다.
김건희 사안에 여권의 대응은 유별나다.
서울-양평고속도로 특혜 의혹이 제기됐을 때 원희룡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은 “사업 백지화” 선언으로 급발진했고,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 특검법은 높은 찬성 여론에도 대통령과 여당은 극구 거부했다.
지난해 국가안보실장·의전비서관·외교비서관 일괄 교체 등 석연치 않은 인사 때마다 김 여사 관련설이 돌았다.
이번 윤-한 충돌 사태는 드러내놓고 ‘김건희’ 갈등이다. 대통령 배우자 리스크가 국정 운영에 이토록 큰 변수였던 적이 있었던가. 4월 선거가 ‘김건희 총선’이 될 판이다.
스릴러와 멜로, 코미디가 뒤섞인 사흘 난장판의 끝에, ‘사랑꾼 윤석열’만 남았다.
해결된 건 없고, 여권은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정치 경험 전무한 두 검사 출신이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으로 서 있다는 사실은 엄연하고, 여권 내부에서 ‘김건희 성역’은 더 단단해졌으며, 공천이라는 본게임이 남았다. 이해 불가한 상황을 얼마나 더 봐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