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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韓信, ?~196년) 군사적 능력
한신이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뛰어난 명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한신은 단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시작하여 여섯 개의 나라를 무너뜨렸으며, 두 명의 왕을 사로잡았고, 한 명의 왕을 참살했다. 그 기간은 불과 몇 년에 불과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기동전, 배수진, 우회공격, 전면전 등 온갖 방식의 전투방법을 총동원했고, 전투란 전투는 모조리 이겼다.
물론 이렇게 한신이 상대한 적들이 비록 국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해도, 실상은 초한쟁패기에 전국시대 열국의 후예들이나 군벌들이 항우의 후원을 받아 급조한 정권들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후에 출현하는 중앙집권형 국가들은 고사하고 전국시대의 열국보다도 동원력이 떨어지고 국가 체제가 미비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즉 상대한 군사의 질이나 적의 수준이 아주 높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배수진의 일화에서 보듯이, 병력 질이 막장이기는 한신도 마찬가지였다. 유방에게 군사를 빼앗겼을 때도, 아무리 자고 있다지만 한나라의 사자라는 말만 듣고서 보고 한 번 없이 지휘관 막사까지 냉큼 들여보내준 일도 한신 휘하의 병사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예. 즉 한신이 특별히 정예군을 이끌고 상대적으로 만만한 적을 두들겨 팬 것도 아니었고, 똑같은 조건에서 시작했지만 한쪽은 추풍낙엽으로 당하는 역할이었던 것에 비해, 한쪽은 무패의 군단이 되어 있었다. 이는 지휘관 능력의 차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재밌는 부분은 한신이라는 사람의 개성이다. 한신은 젊은 시절에는 그야말로 찌질이 그 자체로 평가받았고, 항우의 군단에 있을 때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즉 그전에는 제대로 군사 한번 다뤄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인데, 유방의 밑에서 한번 기회를 잡자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내보였다. 병법으로 말하자면 거의 타고난 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지휘관으로서 활약만 엄청난 게 아니라, 이좌거의 이야기를 듣고 연나라를 항복시키는 등 기본적인 식견도 충분했다.
10.2. 정치적 능력
어느 날 한신이 번쾌의 집에 들렸을 때 번쾌는 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마중했다가 다시 배웅을 하며 자신을 신이라 칭하며 말했다. 「대왕께서 소신의 집에 왕림하셨으니 참으로 광영입니다.」
한신이 번쾌의 집을 나서며 스스로를 비웃으며 혼자말로 말했다. 「내가 살아서 번쾌와 같은 사람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되었구나!」
회흠후 열전 가운데, 한신의 부족한 처세술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당시 한신은 반란혐의로 초왕작위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지휘관으로서 엄청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 특히 정치적인 면, 그 중에서도 처세술에 관해서는 완전 빵점이나 다름없었다. 괴철이 독립을 권했을 때는 "그래도 날 출세시켜 준 게 유방인데, 그럴 수는 없지" 라고 거절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신의 인간적인 의리가 돈독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이미 초한전쟁 중에 한고제를 수없이 자극했으며,이게 역이기 사망과 한고제가 위급해졌을 때 왕 시켜달라고 하기 이후에 나온 말이라는 게 문제다. 그 이전에도 팽성대전에서 깨진 유방이 부르는데 무시하기, 형양성 함락 모른 척 하기 등등 어그로라는 어그로는 다 끌었다. 가왕 요청 시점에서 이미 장량과 진평은 한신을 여차하면 반란할 인간으로 여기며 아군 취급도 하지 않았다.
즉, 감정적, 정치적으로 어그로는 실컷 끌어놓고, 정작 본인이 자립할 수 있을 때는 딱히 정치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목적이 아니라 그냥 인간적인 감정으로 판단했다는 말이다. 당장 항우가 보낸 무섭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무슨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라 "너는 나 형편없이 대했는데, 유방은 인간적으로 나 잘 대해주던데?" 같은 감정적인 이유였다. 문제는 이시기가 역이기를 죽이고 제나라의 왕위를 요구하며 유방의 분노란 분노는 다 산 상황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출구전략이 될 수 있는 항우와의 연대를 개인적인 인연으로 거부한 이상 더이상 항우와의 연대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든다. 나중에 모반 혐의가 걸리고도 유방이 자길 죽이진 않을 거라 믿었던 모습 등을 보면, 한신은 자신이 한고제의 어그로를 끌었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거나, 아니면 자기가 그 정도는 충분히 용서받을 만큼 유방과 가까웠다고 여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 단, 항우의 제안을 거부한 걸 단순히 호의의 문제로만 볼 것은 아니다. 한신은 원래 항량&항우 밑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고 집극랑이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항우를 가까이서 보았다. 집극랑이 직책은 낮지만 하급장교로 무기를 관리하고 건네주는 입장상 가까운 거리에서 항우와 측근들의 이너서클을 접할 수 있는 위치였다. 물리적으로 가까운만큼 항우에게 여러 가지로 계책을 올리면서 항우에게 인정받고 이너서클에 들어가려고 했다. 훗날 종리말이 한신에게 의탁했다는 걸 감안하면 이 시기에 항우만 아니라 이너서클에 속한 측근들에게도 재주를 보이면서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귀족인 항우가 뒷골목 양아치인 한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고 무시했다. 이런 항우의 영향을 받은 다른 측근들도 딱히 한신을 좋게 보는 경우가 없었고 용저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한신의 과거는 용맹한 항우군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추태였다. 종리말같은 핵심 측근과 친분을 쌓았음에도 이너서클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다른 기회가 생긴 것도 아니였다. 거기다 옆에서 항우를 지켜보는만큼 항우의 단점을 너무나 잘 알게 된 상태였다.
반면에 유방과 측근들은 신분이 그리 높지 않았고 다들 뒷골목 양아치였던터라 한신과 출신이 비슷했다. 한신의 과하지욕을 유방군 내에서 딱히 조롱한 일도 없었던만큼 그 정도는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일상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터였다. 심지어 곧바로 전군 지휘권을 쥐어주고 독립 전역 사령관으로 임명해서 자유롭게 행동하게 했다. 항우는 용저에게나 독립 군단을 주었을 뿐 대체로 자기가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하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한신이 항우에게 가더라도 딱히 이 이상 좋은 대접을 기대하기 힘들었고 애당초 항우과 자신이 안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다 설사 처음은 좋더라도 항장인 이상에 항우 진영에서 의심받기 딱 좋고 더구나 유방처럼 독립적인 군대 지휘권도 보장받을 거라는 것도 없었다. 애당초 의제까지 시해하는 등 폭력적인 항우를 믿고서 유방의 뒷통수 치는 것도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였다.
그렇다고 한신이 순전한 의리파였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상하관계였다곤 해도 같은 전선에서 싸웠던 전우 관영을 두고 "내가 저따위 놈이랑 어떻게 동급이란 말이냐"같은 말을 서슴없이 하고 다니질 않나, 위에서 언급한, 자신의 보전을 위해 종리말을 죽게 한 것도 그렇고, 한신은 죽기직전에 괴철이 자신에게 반란을 사주했다는 사실까지 불어버려서 괴철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신을 도우려 하는 사람을 스스로 차버린 것이다. 어쩌면 한신이 신하들의 옹호를 받지 못한 건 이것과도 관계가 있을 수 있는데, 유방의 중요한 측근들인 소하, 하후영, 조참, 번쾌 등은 모두 유방의 고향 출신으로, 돈독한 우정에 기반한 인간관계였다. 따라서 종리말을 배신한 한신의 행위가 이들에게 밉보였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소하는 같은 고향이라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그만큼 두둔해 줄 친구들도 많았을 수 있다.
한신의 태도를 교정해 줄 조언자는 한 명도 없었고 기껏 있다 간 괴철은 바람만 넣고 갔으니 사람 복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신과 비교해도 만만찮게 의심에 시달린 소하가 위기 때마다 어리버리 타다가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결국 버텨낸 것과 비교되는 부분. 항우와는 다른 의미로 잘난 개인의 한계를 보여준달지.(...)
무엇보다 한고제에게 당하는 부분을 보면 황당함을 넘어 괴이할 정도인데, 사실 한신 같은 전쟁 영웅은 군주로서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한신은 너무나도 싱겁게 한고제에게 당해버렸는데, 잠자다가 털리기라든지, 제나라 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기습에 걸려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잡혀서 초나라 왕이 되었으며, 초나라 왕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내가 죄가 없는데 어쩌기야 하겠어?" 같은 안일한 판단 때문에 역시 칼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회음후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신이 반란할 마음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는데 크고 아름다운 한고제의 카리스마에 눌린 걸지도 모른다.
설사 "한신이 어떤 대응을 했어도, 유방은 한신을 좋아하지 않아 결국 숙청했을 것." 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신이 정말로 모두가 인정할 진정한 충신 이었다면 최소한의 인정은 받았을 테지만, 스스로는 시정잡배의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는 성인의 마음을 요구했다 고 표현한 사마광의 평론만큼 한신의 모호한 태도는 훗날의 사가들에게 "충성심이 없다.", "나라도 숙청했을 듯."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신은 군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으나 결국 제거된 인물들하고는 분명 다르다. 그나마 공로가 워낙 크다는 점때문에 최소한의 동정표라도 좀 받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유방이 이성왕을 숙청하는등 견제하는 작업을 했고, 종종 소하 등 최측근들까지 의심하는 면모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과 한신을 동일하게 묶기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 한신은 단지 '유방에게 밉보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밉보인 인물이었다. 한신 숙청에 관련된 인선만 봐도 한고제가 견제하고, 여후가 제거하고, 소하가 협력했으며, 장량이 그 소하에게 상을 줄 것을 청하는 것으로 이 결단을 지지한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즉 한신은 그 당시 최고 실세 전원에게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는 동안 유방의 신하들 중 누구도 한신을 옹호하지 않았다. 한신을 등용시킨 장본인인 하후영이 오히려 적이었던 계포를 위해 유방을 찾아가 힘써 준 것과 비교하면 묘한 부분. 전횡이 역상을 만나기가 차마 부끄러워서 자살했는데 한신을 천거한 입장으로 조정에서 그 역상과 실시간으로 마주보고 지낸 소하와 하후영의 심정 또한 모르긴 몰라도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유방에게도 그렇지만 이 둘에게도 기껏 믿어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돌려준 꼴.
한 6년에 누군가가 초왕(楚王) 한신이 모반했다고 글을 올렸다. 고제가 장수들에게 묻자 장수들은 “서둘러 군대를 내서 그 놈을 파묻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고제는 말이 없었다. 다른 자리에서 고제가 진평에게 의견을 구했지만 진평은 거듭 사양하더니 여쭈었다. "장수들의 뜻은 어떠합니까?"
사기 진승상세가
이성왕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유방의 직속 부하들 입장에서 보더라도 형양 · 성고 전역, 광무 대치 등에서 자신들이 항우와 힘겹게 맞서 싸우고 있을 때 왕위를 요구하며 출세한 한신의 모습이 좋게 보였을 리는 만무하다. 팽월, 영포 등이야 애초에 유방의 직속 부하가 아니었으니 그렇다치더라도, 한신은 분명 유방의 부하로 시작해서 왕이 되었는데, 이는 연왕 장도가 반란으로 몰락한 후 비어 있는 연나라 왕 자리를 얻은 노관을 제외하곤 유방의 부하들 중에 그 누구도 얻지 못했던 자리였다. 하물며 연나라는 당시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변방일 뿐이고, 더불어 노관은 유방의 어린시절 친구이자 평생을 같이했다는 입장은 협객출신인 유방 직속부하 입장에서는 어느정도 설득될 만한 위치였다. 그러나 한신이 차지했던 제나라는 가히 중화의 중심지이며 다음으로 얻어낸 초나라의 경우는 애당초 고조 시기 공신들이 거의 대부분 초나라 출신일 만큼 특별한 자리였다. 이것만으로도 시기심, 질투심을 잔뜩 유발할 만한 상태였는데 여기에 한신은 같은 편에 죄도 없는 역이기를 순전히 자신의 공을 위해 고의적으로 죽게 만들었으며, 제나라 왕위 일화에서 보이듯이 유방은 한신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비상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준 왕위였는데 주변사람들이 그걸 모를리가 없다. 이후에도 번쾌와의 일화에서 보이듯이 자중하긴커녕 한술 더 떠 기고만장한 태도로 이들을 무시했다. 또한 질투심 등은 둘째로 치더라도, 유방이 세운 한나라라는 체제에서 자리를 잡고 성공한, 이제 '기득권' 이 된 그들에게 한신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가장 위협적인 변수였다.
그를 위한 변명을 좀 하자면 한신의 병력은 유방에게 받은 것이었고 솔직히 한신이 사람들이 자신을 잘 따르게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에 항우는 몰라도 유방을 적으로 돌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유방에게 황당한 방식으로 군사를 빼앗겼을 때도 남겨진 병사들은 그렇다 치고 같이 뒤통수를 맞은(...) 장이조차 별다른 말이 없었을 정도이니 유방의 장악력이란 게 생각 이상이었을 수도 있고, 항우와의 결전 이후에도 한신의 병력은 유방이 적으로 돌아선 순간 그대로 항복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니 한신으로서는 답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유방의 구원 요청을 거절한 것도 한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방이 그대로 고인이 되는 게 최선의 방법이 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애초에 한신은 사람들에게 정말 엄청난 충성을 받았던 인물들과 비교하면 어이없게 세력을 빼앗기며 실제로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 어이없게 몰락한 인물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신의 태도가 이해가 간다.
게다가 한신이 지휘한 부하들의 면모를 보면 당장 한신과 함께 전장을 뛰었던 조참부터가 유방이 봉기할 때부터 함께 한 원년멤버 중 하나였으며 유방의 부하들은 한신의 군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한신이 지휘하던 것과는 별개로 군대는 끝까지 유방의 통제 하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한신은 과거 전국시대 제후들과 같은 기반이 있었던 인물도 아니었기에 유방이 준 군대가 없으면 기반 자체가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황을 보면 한신이 독립해서 제3의 세력으로 성장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봐야 할 지도.
사실 변명에서 나온 것처럼 한신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런 걸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왜 군주의 심기를 건드리는 짓만 했는지는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결국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전쟁터에서는 그렇게 귀신같은 능력을 보여준 한신이 이토록 정세 판단에 어둡고 무능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는 부분. 영웅들도 사람이다 보니 모든 면에서 완벽하거나 평균 이상일 수가 없어서 은근히 이런 유형의 영웅들이 많긴 하다.
다만 과거의 안습하던 시절의 행적을 보면 묘하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역사속에 기록된 한신의 행적을 보건데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스스로의 성격 탓에 적을 만들고 그 때문에 하려던 일도 꼬이는 식의 인생이 반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원래 용병술 쪽으로만 뛰어났을 뿐 다른 쪽으로는 안습이었다는 거.. 실제로도 중국사에서는 옛날부터 관례적으로 천하를 가진 사람에게는 "백만"이라는 수식어가 잘 붙었는데 천하를 통일한 한고조에게 순진하게(?) 십만 명이나 지휘할 재능이라고 했다가 한고조의 표정이 썩으니까 황급히 수습한 적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간혹 한신에 대해 "영웅의 모습과 소인배의 모습이 섞였다."라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시바 료타로는 자신의 소설 항우와 유방에서 한신의 이런 모습을 부각시켰는데, 작중 괴철이 한신에 대해 "무인으로서는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지만 다른 면에서는 백치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
정말로 흥미진진하게도, 한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신 같은 위험 인물이 사라져서 부담이 덜해진 부분에 대한 기쁨과, 그래도 대단한 공을 세운 위풍당당한 천하 명장이 그토록 허망하게 죽어버린 일에 대해서는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는, 둘 사이의 참으로 미묘한 애증관계를 관통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유방 입장에선 굉장한 용력을 갖췄고, 중요할 때 보상을 탐하는 못 미더운 성정을 드러냈음에도 번번히 관직을 한 단계 낮추는 견제 차원의 대응으로 끝내려 한 만큼 최대 공신인 한신에게 나름대로 예우를 차렸다고 볼 수 있다. 유방은 반란에 관련될 경우 혐의만으로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여 친구인 노관, 사위인 장오, 동서 번쾌도 분노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한신만은 진짜로 종리말을 몰래 숨긴 것이 들통났어도 취조 한 번 받지 않고 풀려나는 등 혼자만 대우가 달랐다.
즉 한신에겐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도 하였다. 이 과정에 무수한 고난이 찾아왔으나 스스로 본인의 능력이 천하제일임을 알고 버텨내 천하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야심과 그릇이 능력에 미치지 못해 기회가 왔을 때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기회를 움켜쥐지 못하고 남의 밑에 머무르기로 했으면서 남의 처우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치기 어린 어리광을 부리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어리광을 부린 끝에 점차 대우가 박해졌으나 그리 될 일이었음을 모르고 자신의 능력대로 대우받고 싶어하다 일을 그르쳤다. 미래를 위해 가랑이 사이를 기던 인내심이 반의 반만 남아있었더라도...
일찍이 남과 더불어 가지려 하지 않고 인수를 아까워하는 항우를 아녀자의 어짊이라 평했지만 그 스스로가 그 인물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도 바로 그 점을 인식해서 자립하라는 권고를 모두 물리친 것일지도 모른다.
10.3. 주변인과 후대인의 평론
• 유방의 평가
진평이 말하였다. "폐하의 제장들 중 용병술이 한신을 뛰어 넘는 인물이 있습니까?"
황상(유방)이 말하였다. "용병술은 한신을 따라갈 사람이 없소." ─ 사기, 진승상세가
• 사마천의 평론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에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의 정세가 이미 정해진 뒤에야 반역을 꾀했으니, 일족이 멸망한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 사마광의 평론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한신이 첫째로 큰 계책을 세웠다고 하니, 고조와 더불어 한중(汉中)에서 군사를 일으켜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북쪽으로 가서 위표(魏豹)를 사로잡고, 대(代)를 빼앗았으며, 조나라(趙)를 무너뜨렸고, 연(燕)을 위협하였으며, 동쪽으로 가서 제나라(齊)를 공격하여 이를 소유하고 남쪽으로는 초를 해하(垓下)에서 멸망시켰으니, 한나라(漢) 왕조가 천하를 소유할 수 있던 것은 대개 한신의 공로입니다."
"그가 괴철(蒯徹)의 유세를 거절하고 고조를 진구(陳丘)에서 환영한 것을 보면, 어찌 반란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오랫동안 직책을 잃어 앙앙불락(怏怏不樂)하다가 드디어 패역의 구렁텅이로 빠진 것입니다. 무릇 노관(盧綰) 같은 자는 고조와 같은 고향이라는 옛날의 정리(情理)를 가지고 연나라에서 왕 노릇을 했는데, 한신은 열후가 되어 조회에나 참석하니 이것은 고조가 한신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사마광은 그런 한신을 고조가 속이는 꾀를 써서 진구에서 사로잡았으니, 이것은 고조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신 역시도 죄를 받을만한 일을 했습니다."
"애초에, 한이 초나라(楚)와 형양(衡陽)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한신은 제를 멸망시키고 돌아와서 보고도 하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그 후에 한이 초를 추격하여 고릉(固陵)에 이르러서는 고조가 한신과 더불어 초를 공격하기로 기약했었는데 한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미 고조는 한신을 사로잡을 마음이 있었지만, 다만 힘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천하가 평정되고 나서는, 대체 한신을 다시 믿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릇 때를 틈타서 이익을 취하려는것은 시정잡배의 생각이고, 공로를 돌리고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 선비나 군자들의 마음입니다. 한신은 스스로가 시정잡배의 뜻을 가지고 그 몸을 이롭게 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선비나 군자의 마음을 기대했으니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 자치통감(資治通鑑)
• 이맹현(李孟賢)의 평가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얻은 것은 모두 한신의 힘인데, 만약 한신으로 하여금 괴철의 꾀를 들어 써서 제(齊)나라의 강함을 근거삼아 솥발처럼 세 곳에 할거하여 서로 대치 하였다면 고조가 비록 천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형세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니, 역시 반드시 곤궁(困窮)한 뒤에야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신은 본디 배반할 마음이 없었는데 오로지 고조가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분격(憤激)하여 반모(反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그러나 한신의 공은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집에 살아남은 이가 없게 하였으니, 고조는 진실로 한신을 저버림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46권, 5년(1474) 8월 10일(임진) 5번째 기사
• 안처성(安處誠)의 평론
"한 고조가 공신을 대우함을 있어 처음에는 옳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것으로 천하를 취하려고만 했을 뿐 잘 어거하는 도는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한신(韓信)이 가왕(假王)되기를 청한 것은 참람하고 방종한 마음을 가지고 임금의 마음을 의심케 함을 면치 못하였고, 고제(高帝) 역시 마지못해 그의 청을 들어주고는 후일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면치 못하여, 상하가 서로 의심한 끝에 결국은 보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나는 새가 다 없어지니, 좋은 활도 쓸모가 없게 됐다.'는 탄식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중종 중종 2권, 2년(1507 2월 13일(정해) 2번째 기사
• 주희, 유희춘(柳希春)의 평가
"한신은 이미 재능 때문에 고제가 꺼렸고 여후(呂后) 또한 총애하는 심이기(審食其)와 더불어 한신과 팽월(彭越)을 죽이려고 도모했었습니다. 그러므로 팽월에 있어서는 사인(舍人)을 시켜 무고하게 하여 죽였고 한신에 있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니, 소위 '진희(陳豨)를 시켜 모반하게 했다.'는 것은 곧 사인의 아우 사공(謝公)이란 자가 고발한 말입니다. 주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한신의 반역은 나타난 증거가 없다.'고 했고, 여조겸(呂祖謙)이 《십칠사상절(十七史詳節)》·《대사기(大事記)》를 편수할 적에 모두 한신이 모반하려다가 주벌당했다는 것으로 말하자 주자는 '사람을 잘못 죄에 빠뜨린 것이다.'고 했었습니다."
"대개 진희가 대(代)의 정승으로 부임할 적에 따라간 빈객(賓客)의 수레가 1천 승(乘)이었는데 주창(周昌)이 빈객이 불법인지를 조사하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이 진희에게까지 걸리게 되자 진희가 주벌당할까 두려워하여 모반한 것이니, 한신에게서 나온 일이 아님이 매우 분명합니다. 주자가 지극히 은미한 내용을 추찰해 보고서 《강목》에 '여후가 회음후(淮陰侯) 한신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고 특서한 것입니다."
"여후와 심이기는 평소에 제장들을 없애려고 했었기 때문에 고제가 붕(崩)했을 적에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에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은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노관(盧綰)에게 붙어 연(燕)에 있었고 관영(灌嬰) 또한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낙양(洛陽)에 있었는데 역상(酈商)이 심이기를 달래어 '만일 제장들을 족주(族誅)한다면 주발과 관영이 회군하여 그대들을 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므로 이에 발상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한서》 형법지(刑法志)를 고찰해보면 '한신과 팽월을 벨 적에 여후가 우선 혀를 모두 베도록 했다.' 했으니, 이는 자신의 추잡한 행실을 말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외람하게 형벌을 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우옹(金宇顒)의 반박
"한신이 어찌 군신의 의리를 안 사람이겠습니까. 한왕(漢王)과 함께 초나라(楚)를 치기로 기약해놓고도 오지 않았습니다."
유희춘의 재반박
"초래(草萊)에서 서로 의탁한 사이는 평상시의 군신 사이와는 다릅니다. 그 당시에 한나라 신하들이 한왕을 족하라고 불렀었으나 이것이 어찌 평상시 군신의 예이겠습니까. 한신이 기약을 어기고 오지 않은 것은 진실로 죄가 있는 일입니다마는, 제(齊)나라 전부를 차지하여 천하를 삼분(三分)한 형세가 되었을 적에 괴철(蒯徹)이 거듭 꾀었는데도 '내 어찌 이득을 좇아 의리를 저버리겠는가.' 하고 잘라서 말했으니, 이는 그의 늠름한 대절(大節)이 드러난 부분입니다.
또, 항우를 처음 패배시켰을때 한왕이 시급히 제왕(齊王)의 성으로 들어가 정예병을 모조리 빼앗고 다시 초왕(楚王)으로 봉했지만 조금도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선유(先儒)들은 '그가 스스로 의심을 품고서 사로잡았으니 이는 진실로 한왕의 잘못이다.' 하였는데,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한나라의 신하이기 때문에 곧바로 쓰지 못한 것이고, 뒷날의 사마공과 대계(戴溪) 또한 그가 모반하였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온공(溫公 : 사마광)은 성격이 순후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사리에 밝지는 못하여 평상시의 군신의 예를 고집하여 초래에서 서로 의탁한 사람을 책망한 것입니다. 한신이 죄없이 사로잡혀서 열후(列侯)로 강등되어 번쾌(樊噲)와 같은 서열에 든 것이 부끄러워서 불만스럽고 무료해 한 적은 있었겠지만, 모반했다고 한다면 심하게 무함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8권, 7년(1574 2월 5일(경술) 1번째 기사
• 대만 역사학자 보양(栢楊)의 생각
"무릎을 꿇었다고 (한신을) 겁쟁이라고 봐선 안 된다. 무릎을 꿇을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놀라서 간이 콩알만 해지고 정신이 멍해져서 털퍼덕 하고 무릎을 꿇는 경우다. 이런 사람은 겁쟁이다. 다른 하나는 위로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경우다. 나중에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사람이라면 분명 영웅이다. 화가 치민다고 덥썩 깨물고 죽어도 놓지 않는다면 개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 이중톈, 초한지 강의 pp.30 中
• 이중톈의 생각
"한신은 한 시대의 명장이자 최고의 공신이었습니다. 그는 꿋꿋하게 곤경을 버티고 일어나 전투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전백승하여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유방을 배신할 수 있었을 때 충성을 지켰으며,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적을 때 모반을 꾀했습니다. 혹자는 한신의 모반이 (날조된 혐의라)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고, 혹자는 모반의 증거가 확실하다고 주장합니다. 또 혹자는 그가 핍박을 당해 최후의 발악으로 모반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신은 영웅 시대의 영웅으로서 치욕을 참았으며,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가끔씩 우유부단하고 이해득실에 노심초사했지만, 후세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의 일대기는 음미할수록 깊은 감동을 주는 동시에 음미하는 이를 심사숙고하게 만듭니다." ─ 이중톈, 초한지 강의 pp.70 中
• 조선 효종의 의견
"한 고조가 한신을 죽인 것은 대체로 혜제(惠帝)가 어리고 약했기 때문에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랬던 것이다. 만약 혜제도 문제(文帝)처럼 영명(英明)했다면 필시 한신 등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효종 4권, 1년(1650 7년) 7월 28일(기묘) 2번째 기사
• 조선 순조의 의견
"한나라 고조가 운몽(雲夢)에서 거짓으로 놀다가 한신(韓信)을 사로잡은 것은 정도(正道)가 아닌 듯하다. 진평(陳平)의 계략은 진실로 정도가 아니고, 한신 또한 그르다. 경포(黥布)에 대해 말한 것과 군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보낸 일은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겠는가?"
"또 무섭(武涉)을 사양하여 돌려보냈을 때를 당하여 '나를 먹여 주고 나를 입혀 주었다.'는 말은 이미 전국(戰國) 때의 여풍(餘風)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신의 재주는 과연 성질이 사납고 교만한 까닭에 반심(反心)이 이미 싹텄었으니, 그 형세가 길 수 없었다. 한나라 고조의 일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그를 성심(誠心)으로 대우하였었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 조선왕조실록, 순조 11권, 8년(1808 11월 19일(경진) 1번째 기사
대채로 한신을 옹호하는 평가가 많다. 유교적으로 군신관계를 중요시한 조선에서는 어쩌면 당연할 수도 한신이 잘 못 한것이 있다 하더라도 일단 먼저 팽한 것은 한신이고 오륜 사상에서도 나와 있듯이 군주와 신하의 믿음을 중시하는 조선은 신하를 먼저 팽 시킨 유방은 두고두고 까일 존재 였다.
11. 기타
장기를 만들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한고제가 전국을 통일하고 난 후 역모의 의심을 받은 한신이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평소부터 그를 존경해오던 병졸이 그에게 말했다.
"장군, 장군께서 저에게 병법을 전수해 주신다면 저는 그것을 대대로 전수하여 장군의 이름을 빛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부탁을 수락하지 않았으나, 그 병졸이 몇 번이나 간곡히 청하자 한신은 마침내 그에게 3일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3일 후 한신은 그 병졸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있던 큰 네모 판자에 적군과 아군 진영을 나누고 거기에 각각 32개의 칸을 그려넣은 다음, 중간에 강을 경계로 삼고 그 안에 "초하(楚河), 한계(漢界)"라고 적어 넣었다(중국 장기는 우리와 달리 중간에 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
또 한편에는 16개의 붉은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수(帥), 사(仕), 상(相), 차(車), 마(馬), 포(炮), 병(兵) 등의 글자를 써넣고
다른 한편에는 16개의 푸른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수(將), 사(士), 상(象), 차(車), 마(馬), 포(炮), 졸(卒) 등의 글자를 써넣었다.
그 모습을 본 병졸은 갸우뚱하며 "이것이 병법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신이 대답했다.
"이 72개의 작은 사각형을 우습게 보지 말거라. 여기에는 천군만마의 대전투를 모두 담을 수 있다. 이 16개의 종이조각은 각각 자기편을 대표하는데, 용병에 있어서도 문무를 바탕으로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전반적인 계획을 적절하게 운용하면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처하여 백전백승할 수 있다. 이 방법에 정통한 후에 그것을 군사(軍事)에 응용하면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 천하에 적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병졸은 무릎을 꿇고 절한 뒤 한신을 스승으로 삼고 병법을 배웠다. 한신이 죽은 뒤 병졸은 공직을 사양하고 병법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편의상 그는 종이에 장기판을 그리고 종이 조각 대신 나무조각을 깎아 장기알을 만들었다. 그 후 이것은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라는 것. 물론 실제로 만든 건 아니다. 그 시대에 종이가 존재했으나 우리가 쓰는 것과 다르다. 서사도구로써의 종이는 후한대의 채륜이 기존의 종이를 개량하여 만든 것이다. 그만큼 한신이 대단하다는 걸 표현하는 일화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