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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아담 #원죄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한 피조물의 부패는 지구 규모가 아니라 우주 규모일 것이다. 따라서 우주를 이루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척도인 빛의 속성도 부패했거나 매우 제한되었을 것이다.
#삭개오 #강도 #회심
나는 삭개오나 십자가의 강도가 예수님을 만난 그순간에 즉각적인 회심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많은 나날 동안 자기의 비참하고 죄악된 삶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자기를 건져내실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레위기 #Leviticus 19:3
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부모로부터 받은 것들을 감사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려서는 부모는 당연히 자기에게 무조건 다 해줄 의무가 있는 존재이고 조금 자라서는 부모 도움 없이 자기 홀로 큰 줄 알며 나이 들어서는 거동이 불편한 부모를 귀찮아하게 마련이다. 부모와 자녀간에 관계가 원활하지 않으면 차라리 그 연을 끊는 것이 낫겠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그저 서로 아무런 감정이 없이 단지 혈육이라는 관계만 간신히 이어진 채로 지내기도 한다. 그래서 부모의 헌신과 희생을 깨닫고 감사하는 심령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과 방불한 정도의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은 부모 공경이 아니면 아무리 화목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어도 부모의 처지에 따라 공경의 정도가 달라지게 된다. 불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으면 자의에 따른 부모 공경은 절대로 불가하다. 그러나 성령께서 새롭게 하신 심령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그리스도인은 부모의 처지가 어떠하건 한결 같이 부모를 공경한다. 화목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간직한 부모 공경을 장성한 후에도 간직하고 나이들어 부모가 거동이 불편하더라도 더 열심으로 보살필 것이다. 비록 불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다 하더라도 중생하여 성령으로 새롭게 되면 어느 순간 이전에 가졌던 부모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자기도 모르게 눈녹듯 사라지고 이제부터라도 부모를 섬겨야 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어 조금씩 실천해 나가게 된다. 물론 이는 중생하자마자 바로 발현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때로는 신앙 생활 수십년 만에 생기게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딱히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아주 평범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참된 성도임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성령의 열매이자 증거이기도 하다.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지금 자기의 부모에 대해서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부모를 공경하는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매우 불우한 환경에셔 나고 자랐을 수도 있다. 특히나 자녀를 양육할 책임을 저버리거나 심지어 학대를 일삼는 부모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공경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할 수가 있다. 대중매체에서는 그런 경우에는 자기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그런 부모와는 단호하게 연을 끊고 살아가라고 한다. 더군다나 자녀를 방임하고 학대한 부모가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긴다면 과연 그런 부모에게서 나고 자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사실 당사자가 아니면 그 괴로움을 알 수 없으므로 함부로 말하기 매우 어렵다. 그렇게 성장환경이 불우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괜시리 섣불리 원론적인 조언을 하기보다는 그저 그의 처지에 공감하면서도 그가 모쪼록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로 부모 같지 않은 부모조차도, 설령 자기 부모의 태도에 전혀 일말의 변함이 없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당신을 못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부모를 기꺼이 용서하고 공경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는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참된 중생을 얻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아직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때 그리스도인은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항상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부모를 공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게 된다. 그러나 거짓 신자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 없이 당당하기만 하다. 게다가 어떻게 하면 부모를 섬기지 않을 수 있을지를 궁리하며 고르반 같은 꼼수를 부린다. 부모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에는 외식하는 자처럼 공경하는 척 하지만 무익하다고 여기게 되면 냉정하게 외면한다. 눈에 보이는 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신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결국 자기의 중생이 거짓이고 허황된 자기 기만이라는 것만 입증할 뿐이다.
여호와께서는 십계명에서는 안식일 계명 다음에 바로 부모 공경 계명을 주셨고 여기서는 부모 공경 명령에 이어 안식일 준수 명령을 주신다. 우리 눈에는 두 계명과 명령이 크게 연관성이 없어보여도 여호와께서 이렇게 연합해서 주신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혈육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으로서 영이신 여호와를 공경하는 것을 드러내라는 것일 수 있다. 둘째는 부모를 공경하더라도 그 부모를 주신 참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뜻 안에서 하라는 것일 수 있다. 즉,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한다는 핑계로 여호와를 거슬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여호와를 공경하는 것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오직 여호와만이 유일무이하신 참 하나님이시고 다른 신은 없으며 그 어떤 우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안식일은 구약시대처럼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신성으로나 인성으로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한 주간의 첫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자들은 매주 주일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고 우리의 구속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러 주일을 지키지 않거나 마음을 소홀히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에 교회 모임이 제한되고 온라인 예배가 활용되는 때에는 그리스도를 공경하지 않는 방종이 더 활발하게 일어난다. 온라인 예배로라도 그리스도를 공경하려 하기보다는 단지 자기의 편의를 위해서 온라인 예배만으로 내 할일 다 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게다가 교회로 모일 형편이 되어도 굳이 교회에 갈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결국에는 교회 무용론이라는 이단의 미혹에 빠지게 된다. 정반대의 극단으로는 모두의 안전을 위해 한시적으로 모여 드리는 예배를 제한해야 하는데도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모이지 않으면 예배가 아니라면서 바득바득 모여서 민폐를 끼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신자들이 손가락질 받는 것을 자초하는 공경은 원하지도 않으시고 받지도 않으신다. 비상시에는 비상시에 맞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공경해야 한다.
#20220811
#요한계시록 #Revelation 19:2-3
2 그의 審判은 참되고 義로운지라 淫行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淫女를 審判하사 自己 종들의 피를 그 淫女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for true and just are his judgments. He has condemned the great prostitute who corrupted the earth by her adulteries. He has avenged on her the blood of his servants."
quia vera et justa judicia sunt ejus, qui judicavit de meretrice magna, quæ corrupit terram in prostitutione sua, et vindicavit sanguinem servorum suorum de manibus ejus.
ὅτι ἀληθιναὶ καὶ δίκαιαι αἱ κρίσεις αὐτοῦ· ὅτι ἔκρινεν τὴν πόρνην τὴν μεγάλην ἥτις ἔφθειρεν τὴν γῆν ἐν τῇ πορνείᾳ αὐτῆς, καὶ ἐξεδίκησεν τὸ αἷμα τῶν δούλων αὐτοῦ ἐκ χειρὸς αὐτῆς.
음녀인 거짓 교회가 저지른 죄악은 음녀가 문란한 음행으로 땅을 더럽히듯이 복음을 왜곡한 거짓 교훈과 성도들을 괴롭게 하는 악한 행실로 광야에서 양육을 받는 여인인 참된 교회와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고 영광을 더럽힌 것이다. 음녀가 음행으로 땅을 더럽히는 기간은 광야의 여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양육을 받는 1260일이고, 이방인들이 성전 바깥 뜰과 거룩한 성을 짓밟는 마흔 두 달이며, 하나님의 두 증인이 땅의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짐승과 싸우는 1260일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음녀가 짐승에게서 돈과 권력의 권세를 받아 누리므로 광야의 여인보다 돋보이며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킨다. 더군다나 음녀와의 음행에 길들여진 이방인들은 거리낌없이 성전 바깥 뜰과 그곳에 세워진 거룩한 성을 짓밟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기는 커녕 음녀와 짐승으로부터 자기들의 만행에 필요한 자원을 적극적으로 지원받는다. 또한 하나님의 두 증인은 복음을 증언하는 1260일 중 한 때와 두 때 동안에는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며 괴롭게 하지만 마지막 반 때에는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회심하여 더욱 힘있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주님께서는 음녀에 의해 광야의 여인이 모욕을 받아도, 당신의 성전 뜰과 거룩한 성이 짓밟힘을 당해도, 당신의 거룩한 두 증인이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여도 혹시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신가 싶을 정도로 아무런 조치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신다. 그래서 선지자 엘리야처럼 특심한 신앙의 열정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민하고 소심한 성정을 가진 성도들은 짐승의 표도 받지 않고 음녀와 음행을 저지르지도 않은 성도가 자기 밖에 남지 않았으니 얼른 이 땅에서 데려가시기를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교회와 신앙에 대한 걱정과 근심과 우려와는 달리 주 하나님 그리스도께서는 음녀의 음행 때문에 광야의 여인이 해를 당하지 않게 하시고, 이방인들의 짓밟음에도 거룩한 성이 멸망당하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의 두 증인이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여도 삼 일 반만에 일으켜 세우시고 하늘로 들어올리신다. 이 땅의 성도들이 죽음에서 부활하고 새롭게 변화되며 주님과 함께 하늘로 들림받게 되어 이 땅에 악인들만 남게 된 후에야 비로소 주님께서는 일곱 천사의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들로 이 땅을 초토화시키시고 짐승의 분노를 통해서 거짓 교회인 음녀를 갈갈이 찢고 불살라 버리게 하신다. 들림받은 하늘의 성도들은 유리바다를 통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쏟아부으신 진노의 재앙과 음녀의 멸망을 보면서 그제서야 주님께서 1260일, 마흔 두 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주님께서 음녀와 짐승의 만행을 내버려두신 이유를 깨닫고서 그 공의로우신 심판을 찬양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 음악 가사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포장한 자기연민과 자기비하가 차지하고 있는데, 하늘의 성도들의 찬양처럼 악인을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 그리스도의 공의로우심도 아울러 찬양해야 함이 마땅하다.
3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煙氣가 世世토록 올라가더라
And again they shouted: "Hallelujah! The smoke from her goes up for ever and ever."
Et iterum dixerunt : Alleluja. Et fumus ejus ascendit in sæcula sæculorum.
καὶ δεύτερον εἴρηκαν Ἁλληλουϊά· καὶ ὁ καπνὸς αὐτῆς ἀναβαίνει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τῶν αἰώνων.
하늘 성도들의 두번째 찬양과 함께 세세토록 올라가는 연기는 거짓 교회인 큰 음녀 바벨론이 불타면서 나는 연기이다. 짐승은 용의 수하임에도 불구하고 음녀를 미워하여 죽이고 불태운 행위로써 역설적이게도 주 하나님 그리스도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역할을 하게 되었고, 거짓 교회인 큰 음녀 바벨론은 짐승에게 살이 뜯기고 불살라짐으로써 주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후련함으로 기쁘게 흠향하시는 제물이 되고 말았다. 자기한테 까불면 하나님이라도 자기 손에 죽는다는 미치광이 교훈을 전하는 목사,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북한 주민 2천만명을 하나씩 끌어안고 죽자는 경거망동한 목사, 병적으로 여자 청년들과 간음을 저지르고도 욱하면서 홍대에 새교회를 세워 운영하는 목사, 거짓 교훈을 순복음으로 둔갑시키고 뒤로는 조용하고도 기막히게 온갖 불법과 간음을 저지르다 회개하지 않고 죽은 목사, 오류투성이의 교훈과 정직하지 않은 신학과정에도 현란한 말솜씨만으로 교인들을 농락하는 목사, 부목사에게 지록위마를 강요하고 자숙을 핑계로 목회를 중단하며 교회에서의 모든 혜택은 다 찾아먹으면서도 교회 몰래 다른 교회를 알아보고 끝내는 섬기던 교회를 저버리고 떠나버린 목사들은 결국 아사셀처럼 짐승에 의해 살이 찢기고 화제처럼 짐승에 의해 불살라짐으로써 주 하나님 그리스도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드릴 것이다.
#20210811
#신명기 #Deuteronomy 28:49-57
49 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50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보살피지 아니하며 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51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의 소산을 먹어 마침내 너를 멸망시키며 또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소의 새끼나 양의 새끼를 너를 위하여 남기지 아니하고 마침내 너를 멸절시키리라
52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53 네가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곤란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
54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남자까지도 그의 형제와 그의 품의 아내와 그의 남은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55 자기가 먹는 그 자녀의 살을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까닭일 것이며
56 또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부녀 곧 온유하고 연약하여 자기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자기 품의 남편과 자기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57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가나안에 거주할 이스라엘이 경계해야 할 이방 족속들은 기껏해야 먼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일곱 족속들과 먼 조상까지 올라가면 한 핏줄이었던 모압과 암몬과 에돔 족속 정도였다. 그래서 초반에는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우선 그 이방 족속들에게서 침략과 지배를 당하게 되었었다. 그러다가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열 개 지파가 유다 지파를 배신하고 난 다음부터는 북 이스라엘은 아람 족속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당해야 했고 더 지나서는 그야말로 언어가 사납고 용모가 흉악하며 노약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민족인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게 된다. 선지자 엘리사 시대에 북 이스라엘은 아람 군대의 침공을 받아서 성이 포위를 당했는데 성 안의 먹을 것이 떨어지는 바람에 심지어 아이를 둔 두 엄마들이 서로의 자녀를 잡아먹는 것으로 왕에게 송사하는 지경까지 닥치게 되었었다. 즉 자기 자녀를 잡아먹으리라는 여호와의 저주는 어떤 비유나 공허한 위협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패역한 북 이스라엘에게 닥쳤던 것이었다. 이는 비단 아람 군대의 침공 때에만 있었던 현상이 아니라, 그들이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멸망을 당하던 때에도 똑같이 벌어졌을 것이다. 유다 왕국은 비록 중간 중간에 몇몇 선한 왕들이 있었어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북 이스라엘의 죄악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다가 여호와께서 여러 선지자들에게 한탄하신바와 같이 동생 오홀리바의 음란함이 언니 오홀라보다 더 극심했던 것처럼 유다 왕국의 우상숭배와 패역함이 나중에는 북 이스라엘의 그것보다 더 극심해져서 결국에는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에 의해 2년여 간 포위를 당하고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시드기야 왕 9년 부터 11년 까지 바벨론의 포위를 당했을 상황은 아마도 북 이스라엘이 아람 군대와 앗수르 군에 포위를 당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므로 당시 예루살렘 성 안에서도 자기 자녀를 잡아먹는 패륜적인 유아살해가 빈번하게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국이나 전쟁통에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까지도 잔인하게 잡아먹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밀곰이나 힌놈 같은 우상들에게 자녀들을 제물로 바쳐 태워죽여 왔었기 때문에 그런 그들에게는 자녀를 태워죽이나 잡아먹으나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우상에게 자기 자녀를 번제물로 바치던 이스라엘 전체에게 자기 자녀를 잡아먹을 지경까지 내모시는 것은 합당한 징벌이라 할 수 있다.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그리스도교를 국교로까지 승인하였어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수많은 잡신들과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고 있다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고트족을 로마에게 보내셔서 거의 멸망하기까지 침략 당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조기에 받아들인 서유럽 국가들은 제대로 신앙을 지키지 않고 복음을 빙자하여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는데 급급하다가 몽골족과 투르크족 등의 민족들에게 심각한 침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가치를 이어가지 않고 자국의 번영을 빌미로 강제로 식민지를 삼고 그곳 주민들을 강제로 노예로 삼고 학살을 일삼는 등의 범죄를 저지르자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역설적이게도 신앙개혁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나치와 히틀러를 세우셔서 유럽 전체를 전쟁의 참화로 초토화 시키셨다. 일본은 이 틈을 타서 조선을 침략하고 역사상 그 어느 침략국들보다도 잔인하고 악랄하게 지배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일본은 731부대라고 하는 생체실험부대를 둬서 식민지로 삼은 조선인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잔혹한 실험을 일삼기도 하였는데, 그중에는 엄마와 어린 자녀를 같이 방에 가두어 바닥을 뜨겁게 달구어서 엄마가 자녀를 어떻게 하는지를 살펴보는 끔찍한 실험도 있었다. 조선은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들을 무참히 잡아죽인 죄의 대가로서 하찮은 언어에 용모와 심령이 마귀와 같은 흉악한 일제에 의해 그런 잔인한 폭정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기독교인을 자처하였으면서도 복음의 가치를 따라 나라를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기습공격과 침략을 받아 거의 남한을 빼앗길 지경까지 갔다가 3년 동안 지리한 전쟁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바로 위에 북한이 망할 듯 하면서도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기독교회의 신앙을 깨워 일으키게 하시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섭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선지자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던 것과 같이 대한민국의 신령한 영적 군대가 되어 북한이 군사적으로 침략하거나 도발하지 못하게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즉, 북한이 도발하는 것을 가지고 한국 교회는 괜히 정부 정책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영적 군사의 책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여겨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20190811
#매일성경 #에스겔 20:45-49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들에게 내리실 재앙을 여러 비유로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내 생각에 두어 가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여러 번 경고하심으로써 그 재앙을 반드시 내리실 것을 확증하시는 것이다. 애굽에 끌려갔다가 바로의 꿈을 해몽하게 된 요셉은 바로가 두가지 다른 꿈을 겹쳐 꾼 것은 하나님께서 7년 풍년 이후 7년 기근을 반드시 내리실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기 때문에 한 번만 말씀하셔도 분명히 이루시지만, 굳이 두 번 이상 말씀하시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의 연약한 수준으로 친히 낮추어 맹세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백성에게 내리실 재앙을 한 두 번도 아니고 어러 번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한 가지는 이렇게 여러 번 경고하심으로써 혹시 그 가운데 우둔한 자라도 듣고 깨달아 스스로 겸비할 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지어도 단번에 징계하시거나 심판하시지 않고 한동안 참으시고 유보하신다. 그 기간 동안에 혹시나 불현듯 깨닫게 되어 회심하여 돌이킬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 분명히 죄악 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자들은 바로 당장 하나님의 채찍이 임하지 않는 것을 두고 하나님을 멸시해서는 안되고 그 순간이 하나님께 돌이킬 기회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들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여 반드시 재앙을 당하도록 하게 하려 하심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악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경각심을 갖게 하려 하셨다면 비유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들이 당할 재앙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에서 아무런 비유를 말하지 않고 40일 후에 이 성읍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무너질 것이라 선포하였고 이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겸비하여 회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자신의 외형적인 백성들이라 하더라도 자기 죄악으로 반드시 멸망 당할 많은 악인들이 이 재앙의 예언을 듣고 깨닫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마치 허구의 이야기 같은 간접적인 비유로 재앙을 말씀하심으로써 악인들의 마음을 안일하게 하신 것이다. 악인들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예언을 비유로 전하는 것을 보고 '비유로 말하는 자'라 하며 조롱하고 무시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비유로 말씀하셔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참된 의미를 숨기셨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의 유일한 준칙으로 주신 성경은 신앙의 원리를 가르칠 뿐 신자의 모든 상황에 어떻게 해야 된다는 직접적인 가르침은 주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익혀서 각자의 삶에서 성경의 원리를 적용하여 다양하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차적으로 성경을 넓고 깊게 알수록 성경의 원리를 따라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가 더욱 확장된다. 그러나 신자라 하면서 성경 배우기를 소홀히 여기는 자는 성경의 원리를 알지 못하므로 삶에서 성경대로 행하지 못하고 자기 소견에 욿은대로 행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들은 복음의 비유를 깨닫지 못하여 말씀의 씨앗이 사탄에게 먹힌 바 되는 것과 같다. 성경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을 듣기 위한 들을 귀를 갖는 것이다. 들을 귀가 없으면 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행할 수도 없으므로 그 마지막은 멸망인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익히는 것이 바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때문에 교회의 복음 사역자들의 역할이 너무나 막중한 것이다. 그들이 복음을 바르게 알고 가르쳐야 교회가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 사역자라 하면서도 온전히 복음을 가르치지 않고 고의적이고 악의적이며 자의적으로 왜곡하기를 일삼는 담임목사는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과 같아서 자기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를 무너뜨리며 교인들을 자기보다 두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하는 것이다.
남쪽 숲은 남 유다,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불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 모든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는 의인과 악인 또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 등 모든 백성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재앙은 의인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의인은 재앙으로 인해 멸망은 당하지 않을지라도 그 재앙에서 자기의 의로 말미암아 겨우 자기 생명만 부지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의인이 재앙 가운데서 멸망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견고히 인내하게 하신다. 그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깨닫는 혈기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재앙을 통해서 이면작인 하나님의 뜻을 분간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경 66권이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혈기 있는 자들이 될 수 있다. 분별하지 못하여 재앙을 오롯이 당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 책임인 것이다. 만약에 담임목사에게 혈기가 있었다면 왜 교회에 그와 같은 큰 사건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뜻은 무엇이며 담임목사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게도 담임목사에게는 그럴만한 혈기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기 탐욕에 충실하여 육체의 소욕을 따르며 성령의 소욕을 거부하고 성령을 소멸시켜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에 교회를 사임한다고 한 결정 조차도 마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무책임하게 해버렸다. 그런 담임목사가 당하게 될 마지막은 성경에 수두룩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아멘으로 받아들이며 소망할 뿐이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탄원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성경대로 그 악한 담임목사에게 이루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