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 내 업적 중 하나인 'Sweden is not overpowered!' 달성을 위한 연대기입니다.
엑박이었다니 (...) 사진을 다음에서 새로 첨부하였는데 이제 잘 보일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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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마르 동맹의 수장인 크리스토퍼 3세는 바이에른 출신으로 스칸디나비아의 사정에는 어두운 편이었다. 그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북방인들 대신 홀슈타인이나 몇몇 덴마크 인들을 주로 기용하였다. 또한 그 동안 인정되어오던 동맹 내 각 국가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덴마크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체제를 획책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동맹 내 권력에서 점차 소외된 스웨덴 귀족들은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스웨덴 의회 내에서도 젊은 강경파가 득세하였다. 하지만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스웨덴보다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으며 더 많은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스웨덴으로써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한편, 스칸디나비아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는 수 백년이 지났지만 반도의 최북단 오지에는 스웨덴인이 아닌 야만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곳의 주민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 스톡홀름 대주교는 이러한 사실에 개탄하며 의회에 오지 선교를 위해 지원을 부탁했고, 그 대가로 각 주교구가 영주들의 통치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의회에는 신실한 신도들이 많았고 주교들이 각 제후들의 영지 통치에 협력하길 원했으므로
라플란드 선교단 파견에 자금을 지원할 것을 승인하였다.
또한 무당(shaman)과 그를 따르는 족속들의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무력진압을 위한 치안 유지대를 관리하는 것 또한 승인하였다.
귀족 의회에서는 내년도 예산안 편성으로 열띤 토론이 오고갔다. 대부분의 의원들은 한자 동맹의 세력 확장으로 무역수입이 크게 줄었기 때문에 무역선 확충에 많은 예산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한 의원이 의회의 단상으로 올라가더니 탁자를 손으로 두드리며 큰 소리를 내어 의회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베르그스라겐의 크리스토프 공작이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발트해에서의 교역권을 되찾아오는 것입니까, 숲을 벌목하고 농지를 개간하는 일입니까. 네,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우리의 번영과 영광은 자유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스웨덴 인의 운명을 저 오만한 게르만인과 덴마크인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위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 게르만 왕으로부터 고귀한 스웨덴의 왕관을 되찾아와야 합니다!"
그의 마지막 말에 의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 자는 지금 왕과 전쟁을 하자고 주장하는 것일까. 크리스토프는 좌중의 술렁임을 잠시 듣고 있다가 큰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네, 여러분이 들으신대로 우리는 덴마크 왕과 싸워서 독립을 쟁취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닙니다. 동맹은 우리보다 강력하고, 우리의 곳간은 텅텅 비어있습니다. 우리는 군대를 양성하고 함대를 건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산을 최대한 아껴야 합니다. 의회의 각종 자문위원회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재정을 확보해야 합니다. 오로지 스웨덴의 철만이 우리의 자유를 지켜줄 것입니다!"
이미 덴마크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스웨덴의 귀족들이었지만 국왕에 대한 저항까지는 차마 생각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몇 년 전에 고틀란드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국왕군에게 진압되었던 사실을 다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크리스토프의 대담한 연설은 스웨덴의 귀족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연말 예산 회의 이후 수도인 스톡홀름과 그 주변에서 새로운 병사들이 징집되었고,
기존에 있었던 상선과 수송선은 유지비를 이유로 모두 해체되었고 해상전을 위한 갤리선이 건조되었다.
스웨덴은 독립적으로 다른 나라와 외교를 할 수는 없었지만, 스웨덴 의회에서는 비밀리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특사를 파견해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관계개선을 통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독립 지원을 위해 외교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동맹은 동유럽의 강국인 리투아니아와 협정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가 덴마크와 전쟁을 하면 저들은 우리에 맞서 싸울 것 아닌가.' 의회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꺾여가고 있었다.
또한 크리스토퍼 3세가 적장자를 생산하면서 스웨덴이 전쟁 외에 동맹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어졌다.
덴마크는 많은 함선을 보유하고 있어서 스웨덴으로서는 해전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보다 더 많은 갤리선을 건조하기로 하였다.
크리스마스 3일 후 스웨덴에 한 성자가 나타나서 병자를 치유하는 등 기적을 행하면서
사람들이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을 찾게 되었다..
폴란드 국왕은 리투아니아 대공을 겸하게 되었고, 동맹은 폴란드와의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제 폴란드와의 관계개선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의회에서는 발트해 교역을 놓고 덴마크와 경쟁하는 한자동맹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의회는 덴마크의 다른 경쟁자인 스코틀랜드나 폴란드를 견제하는 튜턴 기사단에도 특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1447년 10월 2일, 스웨덴 의회는 코펜하겐의 국왕으로부터 전갈을 받게 된다.
'동맹의 우방인 폴란드가 기사단과의 전쟁에 돌입하였으므로 스웨덴은 즉시 함대와 병력을 지원한다'
국왕의 전갈을 받은 뒤 의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몇몇 의원은 당연히 동프로이센으로 군대를 파병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다수의 의원들은 파병을 주저하였으나 적절한 명분으로 고민하였다. 크리스토프 공작 일파는 발트해의 해적 토벌과
핀란드의 치안 불안을 이유로 파병을 거절하자고 제안하였고 이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져 스웨덴은 따로 파병을 하지 않게 되었다.
국왕은 스웨덴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분노하였으나 덴마크도 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의도가 없었기에
특별한 조치는 취하지 않고 이를 두고보겠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한편 라플란드의 주교는 이 곳 주민들이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는 전갈을 보내왔고
의회와 스톡홀름 대주교는 이에 기뻐했다.
동쪽에서는 루스인들 간의 분쟁이 벌어졌고 모스크바 대공이 노브고로드 공국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미개한 루스인들은 아직 반도에 위협이 되지는 않지만, 저들은 머릿수가 많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라는 의견이
의원들의 사석에서 오고가곤 하였다.
해군 전술에 능한 구스타브 백작이 새로운 해군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크게 이기고 있던 모스크바 대공이 갑자기 노브고로드에서 물러났다.
타타르 인들과의 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스톡홀름 시장의 이번 주 화제거리는
노브고로드에서 온 상인이 전해온 무시무시한 유목민들의 이야기였다.
어느 덧 기사단과의 전쟁은 기사단의 완패로 기울고 있었다. 한 때 발트해의 패권을 장악했던 기사단이
폴란드와 칼마르 동맹의 협공으로 몰락하고 있었다.
기사단과의 전쟁이 끝나가고 있음을 전해들은 의회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더 많은 함선 건조를 결의하였다.
스웨덴어를 잘 하지 못하는 국왕이 한 공작에게 큰 무례를 범하면서 스웨덴 귀족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폴란드는 기사단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여 발트해의 주요 무역거점인 단치히 시를 얻게 되었다.
그러자 역시 발트해의 패권을 노리던 덴마크는 폴란드와의 협정을 파기하였다.
크리스토프 공작은 긴급 예산을 편성해 전쟁 준비를 할 것을 의회에 촉구하였다.
그는 전쟁 직후이고 덴마크와 폴란드와의 협정이 깨진 지금이야 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하였다.
갤리 함대의 사령관이 새롭게 임명되었다.
그 사이 덴마크는 모스크바 공국과의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의원들은 국왕과의 전쟁은 무리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크리스토프 일파는 모스크바는 우리와의 전쟁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모스크바는 바다를 접하지 않았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노브고로드 공국이 있소.
노브고로드 공국은 모스크바와 원수지간이니 결코 모스크바의 군대가 공국령을 통과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또한 우리의 군대가 국왕의 군대보다 많소. 함대로 카테가트 해협을 봉쇄하여 국왕군이 노르웨이 군과 합류하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소!"
의회는 그의 확신에 설득되어 모든 병력과 함대를 남쪽으로 파견하여 국왕과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1452년 2월 7일, 스웨덴의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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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제 제대로 뜨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데탑에서 수정하고 랩탑에서 확인했을 때는 잘 뜨긴 하는데
첫 시작이 왠지 당황스럽군요.
초반 덴마크는 거의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와 동맹을 맺더군요. 얘네들이 개입하면 승산이 낮아지므로,
폴란드나 덴마크가 기사단을 노릴 때 까지 기다리면 반드시 동맹이 깨지게 되어있더군요..
시작하고 몇 년 후면 백이면 백 폴란드나 덴마크가 기사단을 공략하지요..
그 동안 자금과 병력을 확보하고 기다렸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독립전쟁을 시작하면
노르웨이가 병합되기 전에 안전하게 전쟁할 수 있더군요.
첫댓글 x-box
네이버에서 이미지 링크하지 마세요
저장해 두고 쓰려고 했는데 안 보이는 거였군요.. 수정했습니다. 잘 보일지 모르겠네요;;
엑박이네요
엑박이라니 ㅜㅜ
실은 스웨덴 역사상 왕족이 아닌 공작은 벵크트 한 사람 밖에 없다는.
칼마르연합에서 독립한 후로도 일반귀족의 작위는 백작과 남작으로 제한됨.
왕족 이외에 친왕, 공작, 후작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몽땅 외국의 작위라는.
뜬금없는데. 북방에 사자가 사나염?
스웨덴의 전성기를 연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별명이 '북방의 사자(Lejonet fra-a위에 작은 o-n Norden)'입니다.
'벽에 걸린 저건 뭔가요?' '아, 저거요? 맥거핀이라고 합니다.' '맥거핀이라…어디에 쓰나요?' '스코틀랜드 북부 산악지대에서 사자를 잡는 데 쓴답니다.' '스코틀랜드에는 사자가 없는데요?' '아, 그럼 맥거핀은 아무것도 아니군요.'
먼 옛날에 남유럽 등지에도 사자가 소수 살긴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당연히 북아프리카나 중근동 지방에서만 볼 수 있었죠. 사자가 중요시된 것은 오히려 이것 때문입니다. 유럽에서 횡행하던 우상숭배 중 하나가 곰 숭배였거든요. 기독교가 확장되면서 곰을 몰아내고 일부러 사자를 앉혀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사자와 유니콘은 당시 민중 입장에선 둘 다 똑같이 환상종이나 다름없었다는 이야기;;
@인생의별빛 음....그럼 노브고로드 깃발에 서있는 두마리 곰탱이는 무슨 의미르 그려진 건가오?
@E.K. 열심히 뒤져보긴 했는데 그 흑곰들의 의미는 모르겠습니다. 러시아어 위키에 따르면 1781년 8월에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승인된 문장이라고 하며, 1565년 이반 4세 시절의 문서에서도 '두 발로 서서 앞발로 의자를 잡은 한 마리의 곰'의 상징이 등장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하지만 문서상으로만 겨우 등장하고 있을 뿐, 그것이 실제로 노브고로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역사적으로 노브고로트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나보다 하는 거죠.
http://ru.wikipedia.org/wiki/%D0%93%D0%B5%D1%80%D0%B1_%D0%92%D0%B5%D0%BB%D0%B8%D0%BA%D0%BE%D0%B3%D0%BE_%D0%9D%D0%BE%D0%B2%D0%B3%D0%BE%D1%80%D0%BE%D0%B4%D0%B0
오오 필력 좋으시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