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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창조 교수, 術을 學으로 높인 풍수학인… “그곳에도 단골술집 있겠죠”
31일 별세 최창조 교수를 기리며
김두규 우석대 교수 추모 기고
조선일보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입력 2024.02.02. 03:00업데이트 2024.02.02. 06:43
https://www.chosun.com/opinion/contribution/2024/02/02/ONBQ72GHFBEGDHYPR2HX3NB6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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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7일 최창조가 30년 전‘한국의 풍수사상’을 펴낼 때만 해도 광화문 뒤에 일제가 세운 조선총독부 건물(옛 중앙청)이 버티고 있었다. 지금은 헐려 북악산이 훤히 보인다. 그는“일제는 조선사람들의 무덤을 건드리는 대신 왕궁인 경복궁의 목과 입에 해당하는 자리에 건물을 세워 단번에 조선의 기를 누르려했다”고 말했다./이덕훈 기자
풍수쟁이는 많았어도 진정한 풍수 학인은 없었다. 최창조 교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1980년대 상황이다. “지리학”이란 명칭으로 ‘국학(國學)’의 자격을 누렸던 풍수는 조선이 망하면서 공식 지위가 폐지되었다. 일제는 조선 풍수를 의도적으로 폄훼했다. 조선과 만주 땅을 식민지로 경영하려면 철도와 도로 신설이 필수였다. 지맥이 잘리고 그 위에 안장한 수많은 묘지가 파헤쳐졌다.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잠재우려고 총독부는 묘지 풍수설이 미신임을 강조하였다.
2013년 12월 17일 1984년 '한국의 풍수사상'을 발간해 잡술취급을 받던 풍수를 학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풍수사상가 최창조씨가 최근 '한국 풍수 인물사'를 발간해 한국 자생풍수의 맥을 총정리했다. 인왕산 서울성곽을 배경으로 선 최창조. 그는“대한민국 전역과 북한의 평양과 개성을 모두 가봤지만 통일한국의 수도로 서울에 견줄만한 곳은 단 한곳도 없다”고 말했다./이덕훈 기자
또 한번 한국의 풍수설이 변화를 겪는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근대화에 필요한 것이 고속도로 건설이었다. 일제 때보다 더 대규모로 지맥이 잘리고 무덤들이 이장해야 했다. 새로운 대체지를 찾는 과정에서 풍수쟁이(지관)들이 성수기를 맞았다. 사주쟁이들이 풍수쟁이로 급하게 전업한 것도 이때다. 정부는 암묵적으로 묘지 풍수를 부정해야 했다. 1980년대까지 풍수 상황이다.
2016년 3월 서울 구로동 1층 아파트 서재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최창조 교수. ‘자생 풍수’를 주창한 최 교수는 한국에서 풍수를 ‘학(學)’의 경지에 올렸다는 평을 받는다./조인원 기자
1984년 당시 전북대 최창조 교수가 ‘한국의 풍수 사상’(민음사)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때까지 ‘술(術)’로 치부되던 풍수가 당당하게 ‘학(學)’의 반열에 오르는 결정적 계기였다. 풍수쟁이들은 자기 편인 줄 알고 최창조와 ‘한국의 풍수 사상’을 열렬히 환호한다. 그러나 최창조 교수가 묘지 풍수를 부정하자 풍수쟁이들은 그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동시에 오리엔탈리즘 관점에서 한국의 풍수를 무시하는 지식인들의 최창조 교수에 대한 경계심과 질시가 시작된 것도 이때였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전북대 지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일 때 그는 행복했다. 전주를 사랑했다. 딸이 태어나자 ‘전주[全]에서 얻는 경사[慶]라고 하여 ‘전경’으로 이름을 지었다. 또 그를 좋아하는 많은 동료 교수가 있었고, 수업이 끝나면 전북대 뒤쪽 언덕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는 낭만이 있었다. 술친구이자 평생지기(知己)인 김기현(퇴계학) 전북대 명예 교수는 가끔 그때를 회상한다. “언젠가 강의가 끝나고 후문 막걸리 집으로 갈 때 일입니다. 갑자기 몸을 굽히더니 아스팔트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꿈틀거리는 지렁이 한 마리를 집어 풀숲 촉촉한 땅에 밀어넣은 것입니다. 그때 생각했지요. 최 선생이 땅속을 들여다볼 수 있던 것은 미물까지 사랑한 성정 덕이 아닐까?라고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분이었어요.”
1988년 그가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 것은 불운이었다. 갈 마음이 없었고 동료 교수들도 적극 말렸다. 왜 그 ‘선배’는 최 교수를 굳이 서울대 자기 학과로 불러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선배’ 교수는 거절하는 최 교수를 압박하려고 서울 청량리에 사시던 최 교수 어머니까지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풍수 강의를 오래 하지 못했다. 정작 그를 불러들인 선배 교수부터 견제하였다. 1991년 자의 반 타의 반 학교를 그만두었다. 40대 초반 나이에 초등학교·중학교 자녀를 둔 가장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일었다.
2013년 12월 17일 광화문 광장에 선 최창조. 그는 “일제는 조선사람들의 무덤을 건드리는 대신 왕궁인 경복궁의 목과 입에 해당하는 자리에 건물을 세워 단번에 조선의 기를 누르려했다”고 말했다./이덕훈 기자
최창조는 땅의 풍수가 아니라, 사람의 풍수이자 마음의 풍수를 강조하였다. 그의 ‘자생 풍수’는 한반도 풍수의 비조(鼻祖)인 도선국사의 전통과 맥을 잇는다. 전 국토의 명당화였다. 땅이 불평등하면 사람도 불평등하다. 최창조 교수의 자생 풍수론은 불평등한 땅을 평등의 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서울대를 사직한 그는 저서 30여 권을 통해 그렇게 설파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필자는 최 교수의 책 몇 권에 발문을 썼고, 최 교수도 필자의 책에 발문과 추천사를 써 주셨다. 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필자의 독일 유학 시절 편지를 통해서였다. 1991년 귀국해서 처음 만났을 때 일이다. “독문학과 자리가 많지 않아서, 교수 자리 잡기 힘들 터인데, 우리 동네(풍수)로 오시지요.” 이후 가끔 뵈었다. 그의 자생 풍수론은 ‘조선 풍수 학인’을 자처하는 필자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1990년대 필자의 고향 마을을 찾아왔다. 필자 부모를 굳이 뵙고 인사를 하시겠다는 이유였다. 대문 앞에 화려한 모란이 필 즈음이었다. 당시 순창에서 출퇴근하던 필자의 ‘풍수 실력(?)’을 엿보려 하지 않았을까. 막연히 생각해본다. 이후 최 교수는 ‘의형제를 맺자!’ 하였다. 필자는 그럴 수 없었다. 최 교수 지기인 김기현 교수와 필자는 사제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기현 교수가 의형제 맺기를 적극 거들었다. 이후 우리는 형님 아우가 되었다. 그는 술을 좋아하였다. 필자 역시 술을 좋아하였다. 맨 정신일 때는 “형님, 아우!” 하다가 술에 취하면 ‘술친구’가 되었다. 1997년인가 그즈음 일이다. 답사차 순창에 온 최 교수가 필자에게 연락했다. 오후 3시에 ‘남원집’이란 한정식 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남원집’이 100일 동안 숙성시켜 만든 술이라 해서 ‘100일주’란 막걸리였다. 밤 10시쯤에 자리를 파했다. 막걸리가 동이 났기 때문이다. 훗날 그는 어느 글에다가 ‘김두규와 순창에서의 통음 사건’을 문자화하였다.
2010년쯤 최창조 교수가 생전에 김두규 교수와 찍은 사진./김두규 교수 제공
2024년 1월의 마지막 날, 최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그는 도선국사 이후 ‘한국 풍수’를 완성하였다. 시대의 소명을 다하였다. 만약에 저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최 교수와 다시 통음하고 싶다.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진다.
“형님, 그곳에서 주선(酒仙)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좋은 단골 술집 하나 만들어 놓으세요!”
유족으로 아내 박증숙씨와 아들 준보, 딸 전경씨 등이 있다. 서울 영등포한림대한강성심병원, 발인 3일 오전 7시.
2024.02.02 06:16:37
여자의 적은 여자이듯이, 대한민국의 적은 대한민국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벨 수상자가 왜 안 나오는지 아는가 나무의 원숭이 올려놓고 끌어내리려 애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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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6:51:38
최창조 교수가 타계하셨군요. 명복을 빕니다. 최창조 김두규 두 분의 한국풍수 이야기, 책을 사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조선일보를 통해 김두규 교수의 글 재미있게 읽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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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6:43:25
..명리나 기문둔갑은 금방금방 검증이 되는 분야인데 풍수는 검증이 안되는 이론이라오.. 그걸 무덤을 파헤쳐서 확인을 하나.. 자손들이 잘되어서 어쩌구저쩌구 하는게 금방 검증되는 이론도 아니고..뭐 적당히 둘러대면 돈은 많이 들어오니.. 그저 서울대 교수면 다 정확한지 알고 있는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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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6:23:08
말장난 작작해라! 풍수는 그냥 풍수라고! 학문은 무슨 학문. 미신이잖아! 하기사 사상의학인지 뭔지를 우리 전통과학이라고 과학관을 만든 지방정부도 있는 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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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07:06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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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17:41
술이나 학이나 반듯한 이론에 정확한 현상을 짚어내는것이 옳은것이다. 현지답사와 현상에대한 비교 판단의 엄청난 데이터를 구축해 보지 않은자가 다만 학자로 불린다고해서 신뢰가 높아진다면 그것또한 오류이다. 실제는 입만 가지고 알수있는것이 아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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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17:36
심증은 있으나 확증이 없는 분야가 풍수지리 인듯 하다... 등산로에 박혀있는 수십만개의 쇠말뚝은 왜 영향이 없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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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04:47
육관도사는 썰로 유명했고 나름 이분은 풍수를 학문적으로 풀어서 체계를 만드신 사람으로 보였다. 역시 누구든지 한세상은 마감이되는구만. 풍수 나도 100%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조금도 안믿는것은 아니다. 다만 살아서 타인이나 지인에게 내가 가진범위내에서 선행을 베풀고 열심히 살고 벗이 찾아오면 지갑열어 그까짓 술한잔 밥한그릇 사주고 그렇게 살다보면 내가 갈자리는 흉지는 아닐것이다. 그렇게 살고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것이다. 죄짓지말고 살자. 나라에 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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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59:24
이 분 논리대로라면 지맥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근대화에 필요한 도로 철도 건설은 절대 하지 말고 그냥 원시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도로 없이 지맥이 잘 보존된 조선이 그렇게 흥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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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54:18
사농공상, 농자천하지대본, 풍수학... 이런걸 폐기해야 잘 사는 나라된다. 근대화, 산업화하는데 산 안깎고 굴 안 뚫고 잘들 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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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43:00
풍수 타령하고 있으니 조선이 미개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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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02:15
“후문 막걸리 집으로 갈 때”(?) <우리말샘>막걸릿집[명사]막걸리를 파는 술집. <한글맞춤법>제30항에서 순우리말 합성어로서(막걸리+집) 앞말이 모음으로 끝나면서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면[막껄리찝] '사이시옷(ㅅ)'을 받치어 '막걸릿집'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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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6:56:44
참 기가 찬다. 하는 짓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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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9:01:55
조선일보가 풍수를 학문으로 숭상했다. 사주팔자, 풍수, 관상, 잘 키워 K-콘텐츠로 발전시키자.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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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19:46
도선의 비보 풍수는 절묘한 안목이었지. 최창조도 전라도 말종이었나? 평등 그거 좋은 거 아니다, 땅의 위치와 형세에 따라 그 쓰임이 다 다른데 평등이라니 말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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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6:25:14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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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8:58:24
풍수지리는 미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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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8:49:48
사람이 살기 좋고 편리하며 풍광이 좋은 곳은 사람이 살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으니 명당이라고 할 수 있으나 돌아가신 분의 경우는 화장해서 추모관에 모시니 사자에 대한 것은 이제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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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59:44
풍수는 미신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유명을 달리하신 최창조선생님의 명복을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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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52:58
최교수 자생풍수는 풍수를 학문으로 끌어올린후 전국의 땅을 답사하면서 쓴 저서이다 일고서 아 이런분이 한국에도 있었구나 한 것이 불과 어제같은데 타계하셨다니 참 아쉬운 마음이 앞서네요. 부디 영면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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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06:37
왜 갑자기 풍수 예찬인가? 대통령 부부의 관저가 육참총장공관이에서 외교부공관으로 바뀐 원인이 어느 풍수가의 입김이 강해서?(한 때 그 교수 이름이 신문 지상을 도배했지만 그 분의 인격이 침해 당할까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 너무 풍수, 풍수 하지 말라. '풍수 불여 지리'하고 '지리 불여 인화'라 했다. 인화에 기본을 두는 정치가 덕치주의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최고 지도자는 법치 보다 덕치에 기본을 두어 사람을 끌어 모으는 정치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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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8:52:36
이 시대에 이렇게 멋진 부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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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8:48:56
우주 에너지는 어디든 있다. 받을 줄 알면 어디든 그 곳이 명당이 되는 거지. 아기가 넘어졌는데 땅을 때리며 땅 탓을 하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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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8:40:21
36년 전 최교수님의 ‘한국의 풍수사상’ 읽은 후학으로 그 책이 아직도 제 책꽃이 가운데 지키고 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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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8:26:41
풍수학은 크게 말하면 지정학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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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38:36
우주와 내가 하나! 이게 동기감응의 원리다. 덕불고 필유린 적선지가 필유여경. 조선풍수가 망한것은 그 본질인 심경을 잃었기 때문이다. 경천애인!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땅을 도구삼아 복만 구하려다. 조선풍수 500년이 망한것이다. 명당은 하늘이 열고 땅이 품어 주는 것인데 악인을 명당에 모신다한다. 하늘과 땅이 품겠는가? 바른자는 불속에 넣어도 성불이 되고 악인 명당에 넣어도 악질로 땅이 변화는 이치를 모른다는 것인가? 우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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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07:08:09
풍수는 지리와 연결되는 게 아니라 도시와 연결됐어야 했다. 사람들이 거리감을 갖는 것은 실재 생활과의 괴리 때문이기도 하다. 용적률 500%를 이제 가뿐히 넘는 도시와 정서적 안정감이 아무 문제가 없다면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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