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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실사구시(新 實事求是) >
시작 >>>
소속감은 사회적 동물의 영혼에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에너지원입니다. 소속감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은 인생이라는 고해의 거친바다를 헤쳐 나가는 몸과 마음에 커다란 힘으로 작동합니다. 몸에는 활력을 마음에는 의욕을 가져다줌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닫힌 세계를 벗어날 추진력을 보여줍니다. 자신을 벗어나 바깥세상으로의 기나긴 창조여행을 떠나면서 비로소 인생의 삶을 시작합니다. 결혼이 인생의 창조적 행위라면 취직은 삶의 수단으로서의 창조이며 여행도 낯설음과 휴식이라는 창조의 가치를 가집니다. 독자적인 삶에 대한 용기보다는 공동체와의 연대의식으로 함께하려 할 때에 창조적인 인간은 탄생합니다.
창조는 나를 위한 노력이 아니라 남을 위한 배려이며 세상에의 참여정신입니다. 창조는 세상에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고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어왔고 주변에 널려있는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다시 만져보며 걸러내서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환영을 받을 때입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거부하는 데에 굳이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창조를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창조에는 시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 거부당하더라도 시절이 바뀌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 새롭게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대와 연대와 친밀의 동질성으로 새로운 창조를 이룩할 수는 없습니다. 낯섦의 차이와 이질(異質)의 분산을 극복하는 과정을 겪으며 너머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에 새로움의 창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차이와 다름의 낯설음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부족한 자신감은 스스로 고단한 창조적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를 두려워하며 외면한 채 편히 살아가려 합니다.
사회의 전통적인 조직들도 별반 없이 통일된 시각을 근본으로 형성되어 왔습니다. 과거에는 그런 방식이 숱한 시행착오를 줄여줄 원천적인 결단이자 전진해나갈 에너지원으로 인식해 강조해오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조직의 붕괴는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그들은 같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문화를 창조했으니 이성에 바탕을 둔 지식체계의 진수로서 원리와 규준과 규범을 교육의 근간으로 설정해 널리 홍익인간의 삶을 규정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질감은 자신들이 욕망에 근거해 이룩한 체계적 이념을 파손하고 오염시킬 주된 정신적인 동인(動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름을 체계(體系, system)내부의 질서를 해치는 붕괴의 씨앗으로 인식했습니다. 다름을 수용하고 종합해 새로운 창조적 질서에 대한 의지력을 키우기에는 너무나도 전통적인 사회적 관습에 젖어있었기에 수용 자체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조상들은 다름의 불편을 형식적인 제도로 무마시켜 나가기위해 스스로 낮은 세계로 내려서는 겸손을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매김해 범절-화시켜 근본으로 삼아왔습니다. 그 너머세계에서 낯선 다름은 경원시(敬遠視)되어야 했으며 더욱이 근본적인 사상체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싹수를 보인다면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이는 폭력성을 체계의 논리로 정당화하였습니다.
여성들은 더욱 어려운 환경으로 내몰렸으니 삼부종사니 시집귀신이니 하며 열녀문으로 몰아갔습니다. 결국 근대가 시작되는 시절에 서구와의 첫 대면에서 동질감의 가장 큰 폐해와 맞닥뜨리자 조상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니 그것은 이질감에 대한 면역력이 너무나도 없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마치 유럽을 침공한 몽골군들이 퇴각하며 넘겨준 전염병으로 유럽의 인구가 반 토막이 나고, 신대륙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최초의 유럽인들과 접촉하면서 감기에 노출되며 부락이 소멸하듯이 면역체계의 차이는 가혹한 죽음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런 낯설음이야말로 바로 운명과 직결됨을 본성으로 감지하였기에 그처럼 대응해온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도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의 근대는 동질(同質)과 이질(異質)의 분열과정이었다고 보여 지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귀족과 신흥 부르주아의 갈라섬은 프랑스 혁명(1789)으로 무수한 귀족들이 황제와 함께 단두대에서 사라졌으며 기독교에서의 구교와 개신교의 종교적 갈라섬은 30년간의 종교전쟁(1618-48)으로 지금의 독일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불사하는 투쟁은 자신들의 신념을 달성하려는 고지탈환의 영광이었지 가문의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사상으로 塗褙(도배)된 세계관속에서 자라온 온실 속 화초였던 동양과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과감히 중세시대를 마감하는 용단을 고딕과 르네상스라는 분열의 이질감으로 이룩하기도 했습니다. 고딕은 프랑스에서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났습니다.
르네상스가 지나가고 매너리즘이 시작되는 분열의 종착역에서 서구 근대는 시작합니다. 그곳에서는 데카르트의 主觀主義(주관주의, subjectivism)적 관점이 적나라하게 근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나 자신 즉 생각하고 있는 나는 확실하다는 주관적 관점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눈에 이질감이 느껴지는 외국인들은 근본 없고 예의 없는 상것들이었으며 상종 못할 천한 금수만도 못하게 비쳐졌습니다. 분명 처음 대하는 서양인들을 그처럼 바라봄은 순진한 우리의 시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양반으로서 체통이 있지 어찌 짐승 같은 놈들과 감히 담화를 섞을 수 있단 말인가를 외쳤습니다. 천한 야만인들에게는 그런 동정을 줄 수도 없었지만 베풀 수도 없었습니다.
둘 >>>
가문을 유지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사회적 안정이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조상전래의 본분에 따라 근본을 유지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애써온 조상들입니다. 그처럼 원초적인 본능을 우리는 대대손손 가문의 혈통으로 이어왔으며 자신의 얼굴을 보존하려는 족보의 집착으로 이어왔습니다. 우리에게 자손은 적자(嫡子)에 장남이라야만 했으며 딸은 남의 식구였습니다. 공동체적 삶과 자연의 어울림은 농업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은 농사꾼들의 두레라는 모임이었습니다. 양반들에게는 통치차원의 모임인 서원(書院)이나 향회(鄕會)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골마다 작은 마을단위로 살아가면서 관념적 동질감의 열악한 환경에 처해 살았습니다. 결국 자연의 선물인 농사일을 통해 자연과의 투쟁과 극복의 과정을 반복하며 거기에서 위안과 절망의 면역력을 키웠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들에게는 그처럼 삶을 통한 자연에 대한 본능적 면역력이 내성으로 자리 잡고 있었으나 양반계급에서는 그런 내성이 전혀 발견될 수 없었으니 오직 쇄국(鎖國)만이 유일한 오염제거의 방식이었을 뿐입니다.
양반사회에서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예의범절에서 벗어나는 약간의 내비침도 바로 가문에서의 퇴출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마치 서구 중세사회에서 로마 가톨릭에 밉보여 파문당하는 꼴이었습니다. 과거 로마시절에 그리스로 도주한 암살자 브루투스를 누구나 죽여도 죄가 안 된다고 하는 로마시민권에서 퇴출명령을 옥타비아누스가 내리자 그리스로 피신했으나 그에게는 자살만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사문난적과 같이 서구 중세시대의 파문(破門)은 사회적 불명예라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극형이자 명예로운 공동체에서의 퇴출이었습니다. 결국 사회적 동물에서 강등된 야수이자 투명인간이 되는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절을 이기는 장사(壯士)가 없듯이 우리의 조상들도 개화의 조짐을 보였으니 결국 이질감의 세계를 향한 염탐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 첫 도전자는 수재였던 유길준이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개화(開化)한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그는 1881년 1월 떠났습니다. 명칭이 의미심장합니다. 다음해 12월 귀국했고 1883년 7월에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보빙사의 수행원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귀국길을 유럽으로 해서 세계를 일주하며 1885년 12월에 홍콩을 거쳐 입국했다고 합니다.
유길준이 의미 깊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나라 근대 최초로 국한문혼용의 글을 양반가문의 수재(秀才)가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썼다는 것입니다. 양반의 수치를 감내하며 썼다는 것은 그가 가문의 체통이라는 전통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최초로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충정어린 애국적 시각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서구문명이 우리 국민들에게도 얼마나 절실한가를 경험한 안타까움을 절절하게 대변해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지 일본의 교순사라는 출판사에서 1895년에 출간되었다는 것이 그 시절을 간접 증언하기도 합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1890년 초고를 고종에게 받침)은 모두 20편으로 곳곳에서 직업과 나라에 대한 자신의 경험적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은 대한제국의 여명기를 절절한 시대적 소망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서해문집, 허경진 옮김)
“국민은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에든지 생사를 돌보지 않게 된다. 관직에 있는 자와 학문에 힘쓰는 자는 자연히 나라를 위하려는 뜻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겠지만, 농사를 짓는 자도 나라를 위해서 하고, 장사하는 자도 나라를 위해서 하며, 물품을 만드는 자도 역시 그러하다. 민간에서 하는 모든 일 가운데 나라를 위하지 않는 일이 없다.”(323쪽)
“사람이 학업을 닦지 않으면 사람으로서의 사람다운 직업과 직책을 다할 수 없다.”(367쪽)
절체절명의 위기감에서 깨달은 국력신장의 필요성을 유교적 학문의 수재였던 그는 배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사농공상의 위계적 질서를 직업이라는 가치로 평준화시켜 발전하고 있는 붉은 머리와 푸른 눈의 서양 야만인들의 힘을 사회과학적이고 제도적인 학문의 발전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라를 위해 생사를 돌보지 않음을 당연시하는 당시의 애끓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시각을 절절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는 한국사 용어 수정안에 따라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는 신사 유람단이라는 명칭은 당시 조선 내에서 외래 문물 수용에 부정적인 목소리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이를 숨기기 위하여 사용된 명칭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의 예의범절에 따른 절충하려는 모습이 보여 집니다. 실체에 직접 접촉하려는 개념의 사용이 얼마나 힘든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화상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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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님 감사~
고은 삶 멋과 맛 향기로 즐건 시간 행복하시고 늘 건강 조심하세요~
신 실사구시(新 實事求是)
많은 배움 하고 나갑니다.
긴글 올리시느라고 수고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늘~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