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경북 김천시 대덕면에서 출발하여, 혼자 걸어서 우두령 고개 넘습니다. 경북과 경남이 경계를 이루던 이 길은 지난 40년 차도 사람도 다니지 않던 길입니다. 적화 마을 쪽으로 새 도로를 내면서 자연스레 폐쇄된 길입니다. 그러나 내 어릴적 외가를 갈 때는 이 우두령을 넘어 가는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그 분위기 마음에 품고 나는 오늘 우두령을 걸어서 갑니다.
정말 몇 십년만에 내 외가 마을을 걸어서 찾아갑니다. 내 어머니 나서 자랐던 경남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 외가집을 찾아갑니다. 해발 580미터 우두령 넘으며, 걸은 시간은 총 4시간 10 분, 3만보 걷습니다. 옛길을 지우고 왕복 8차선 도로 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가세 기울어진 집의 후예가 된 내 이모들, 웅양중학교 건물 지나며 이 학교 졸업을 최종 학력으로 지니고 평생 어려운 삶을 사신 막내이모를 떠올립니다. 어릴 때 외가를 가면 무한정 사랑을 주셨던 그 이모들입니다.
외할머니 사랑이 더욱 각별한 것은 시집가서 고생하는 딸에 대한 안스러운 사랑이 고스란히 외손주에게 투사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여리고 선하셨던 외할머니, 다듬질하던 대청마루는 지금은 없습니다. 구천 먼곳으로 윤회를 하려나요.
밤마실 가실 때 나를 업고 가셔서 할머니들 모인 마실 자리에서 나더러 고본 춘향전 읽게 하시고, 외손주 총기있다고 자랑해 주시던 외할머니, 별 총총하던 하늘 보며 집으로 돌아올 때도, 어둔 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날 업고 오시던 외할머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습니다.
그런 추억들이 오늘 외갓집 있던 산포마을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이모들 운명과 삶이 고단하고 고통스러우니 내 마음도 아프고 아립니다. 나의 외가 산포(山圃) 마을, 산간에 있는 채마밭을 산포라고 한다는데, 나는 얼마나 산이 둘러 쌌으면, 마을 이름이 山圃일까라고 생각도 해 봅니다.
마을 입구에 드니 어린 시절 어머니와 드나들던 자취는 그대로입니다. 다만 마을 앞으로 왕복 4차선 큰 도로를 낸다고 이 산골에 토목 공사 한창입니다. ㅁ자형으로 된 큰 기와집이었던 외가집은, 이후 안채는 사라지고 사랑채와 본채만으로도 위엄이 있었는데, 그 모습 모두 사라지고 수상하고도 낯선 건물들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외갓집 있었던 그 자리에 서서 문밖 두리번거리니 개들 요란히 짖고, 젊은 주인장은 경계의 빛이 완연합니다. 이곳을 찾게 된 사정을 말해보지만, 다 내 마음 같을 리가 없습니다. 어린 나를 표나게 사랑해 주시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정겹던 이모들, 설을 쇠고 외가에 가서 대보름 명절에 만나 즐겁게 놀았던 외사촌들...
외가는 불운 겹치는 세월속에 영락하였습니다. 어른들 모두 돌아 가시고, 후손들 불운의 세파에 밀려 서로 다가가 다독거릴 틈도 없이 멀리 흘러왔는지. 그 무상 무정의 세월 가운데는 나도 끼어 있습니다.
이 무상함에 나는 오늘 혼자 걸으며 여러번 울칵해 집니다. 아마도 修泉 아우와 함께 왔더라면 이 '눈물의 자유'도 없었을 겁니다. 마을 돌다가 80대 착한 할머니 만나서 대화를 나눕니다. 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 대해서는 자기도 부모님께 들어서 안다며 나를 반겨줍니다.
내 막내이모를 대니 안다고 합니다. 내가 기억하던 내 외갓집 앞집에 살던 삼순이 누나(선영 이모의 친구)이야기를 하니 이 할머니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바로 그 옛날 삼순이 누나 집이랍니다. 물론 건물은 바뀌었습니다. 2년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만약 오늘 어머니를 모시고 이 친정마을에 욌으면 어머니도 속 마음으로는 얼마나 우실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외가 있던 산포 마을을 나그네처럼 돌아 나옵니다. 거창군 웅양면사무소 소재지(노현리)로 다시 1.5킬로를 걸어가서, 오늘 출발했던 경북 김천시 대덕면으로 가는 시골 버스를 기다립니다.
한 시간 뒤에 온다는 버스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한달을 이곳 외가에 와서 있었는데, 외할아버지는 내게 매일 오전에 면사무소에가서 외갓집으로 오는 신문을 찾아서 가지고 오게 합니다. 대개는 3일 정도 늦게 받아보는 신문입니다. 허허 벌판길이라, 엄청 추운 길을 다녀옵니다. 가는 데 1.5킬로 오는 데 1.5킬로, 냇가 방천 둑길을 따라 갔다오던 생각이 납니다. 그길을 오늘 다시 걸어가 봅니다. 신문을 찾아오면 할아버지는 신문에 연재되는 월탄(月灘 ) 박종화 선생의 역사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내게 낭독하라고 하시고, 눈을 감고 듣습니다.
그런 추억을 되살리며 산포에서 웅양면사무소까지를 걸었습니다. 냇물과 나란히 가는 뚝방길 따라서 걸었습니다. 추억이란 옛날을 헤집어 본다는 점에서 퇴행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추억이 따뜻한 눈물 고이게 한다면, 그건 생에 대한 감사에 다가갔음이 아닐까, 근원을 알 수 없는 은혜를 알 듯 모를 듯 깨닫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웅양면사무소 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해도 설핏 기울었습니다. 거창에서 오는 버스는 여기서 나를 태우고 김천으로 갈 것입니다. 어머니가 시집가던 길, 바로 그 행로입니다.
첫댓글 외가집 하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이모 가 생각나지요
네 외가집 은 경남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이고 외할아버지 는 양조장 운영하면서 3남3녀 자식을 진주 서울 에서 교육을 시키신 분이시지요
노년에는 배화여전 출신이신 장녀인 제모친 께서 수유리 에서 이웃에 모시고 10여년 외손주 하고 많은 추억을 남겨 주시고 가셨어요.
박교수 외가가 대덕면 사촌거리 이네요.
외가의 아련한 추억여행이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