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조한세 노인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방 안에는 아침 햇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동
향이어서 일찍 밝는 방이기는 했지만, 떠오른 해가 빛살을 뿜어 방 안을 가득 채우도록 아
침 잠을 자 보기는 오랜만이었다. 더욱이 아들네 식구를 떠나 보내기 전후해서 조한세 씨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잠에서 깨어나곤 했었다. 밤 깊도록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으로 잠못 이
루고 뒤척거리다가 겨우 잠들었는가 하면, 여명의 희미한 빛 한 줄기에 몸을 크게 흔들리운
듯 깨어나게 되곤 했었다. 오랫동안 잠이 모자랐다. 남는 것만 쌓이지 않고 모자라는 것도
쌓이는 모양이었다. 잠이 모자라고 또 모자라고, 그 되풀이되는 모자람이 쌓여 머리 속에 눈
앞에 안개를 피워 놓았었다. 모든 사물이, 자신의 일과 자신의 생각마저 안개로 흐려진 듯
희미하게 아슴프레 느껴졌다.
그날 아침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조한세 씨는 안개가 걷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잘
닦은 유리처럼 투명한 빛 속에서, 맑게 개인 가을 하늘 아래 드러난 잔주름처럼 방 안의 이
모저모가 분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장롱과 화장대와 벽시계와 형광등 따위는 물로니옥, 벽과
벽, 벽과 천정을 잇는 구석구석, 그리고 벽과 천정에 묻어 있는 때 색깔의 농담마저도 확연
하게 부려되어 보였다. 희미한 것이라고는 달력의 잔글씨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늙어 시력
이 약해진 탓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한세 씨는 두 팔을 머리 위로 한껏 뻗어 기지개를 펴며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8시, 지난
밤 10시경에 잠자리에 들어 11시 치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잠이 들었으니 못해도 아홉 시
간은 잔 셈이었다. 아홉 시간을 중간에 한 번도 깨어나지 않고 내처 잤으니 그 동안 모자랐
던 잠을 어지간히 봉창했대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잠을 충분히 잤다는 생각이 문득 상쾌함을 가슴에 안겨 주었다. 의지할 곳을 잃고 허공에
떠올라 끝없이 헤맬 것 같던 마음이 이제 자리를 찾아 앉으려나 보다. 조한세 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마음을 편히 먹어야지 별수 있는가. 조한세 씨는 몸을 일으켜 세워 이불 속
에서 빠져나왔다.
"일어나셨어요?" 이부자리를 개 얹고 방에서 나가자 주방에 있던 마나님이 인사 삼아 물
었다.
"늦잠을 잔걸." 조한세 씨는 화장실로 향하면서 대답을 했다.
"어떻게 달게 주무시던지 깨워 드릴 수가 있어야지요." 마나님의 말이 뒤쫓았다. 아들네
식구가 떠나기 직전 얻어 준 여자였다. 쉰 여덟 살. 조한세 씨와는 십이 년 차이다. 건강하
고 서글서글했다. 무엇보다 조한세씨와 인연을 맺고 부부로서 살게 된 일에 만족하고 다행
스러워하는 마음이 드러나 보였다. 마흔 다섯에 재산도 자식도 없이 혼자 몸이 된 이래 먼
조카네 집에서 부엌일을 돌봐 주며 지내 왔다고 했다.
"이노옴, 네가 애비를 떼놓구 달아날라구 잔꾀를 부리는구나." 조한세 씨는 처음에는 아들
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었다. 아들네 식구가 떠나가고 얼마 동안 집안이 텅 빈 것만 느껴
질 뿐 여자는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았다. 며칠 전에야 떠나간 아들네 식구를 대신해서 빈 자
리를 메워 줄 사람임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세수를 끝낸 조한세 씨는 마나님과 겸상해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된장찌개가 입맛을 돋
우었다. 오랜만에 되찾은 입맛이었다.
"된장지개 맛있구만." 조한세 씨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칭찬을 했다.
"영감님하구 함께 산 뒤루 첨 들어 보는 칭찬이예요." 마나님이 대꾸했다.
"내가 그렇게 인색했던가?"
"인색하신 게 아니라 그 동안 제정신이 아니셨어요. 오랜만에 잘 주무시구, 입맛도 찾으신
걸 보니 인제야 맘을 가랑앉히신 모양이지요?" 마나님이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얼굴의 주
름골을 깊게 파 놓았다. 조한세 씨는 마나님의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늙었다기보다
늙어 간다고 말해야 알맞을 얼굴에 무늬처럼 흔적처럼 세월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늘어
진 살갗, 붙박힌 주름살, 자잘한 점들, 검버섯, 사마귀…. 늘 어두운 곳에서만 보다가 처음
햇볕 속에서 대할 때처럼 새삼스럽고 조금은 낯설게 여겨지기도 하는 그 얼굴에 수줍은 웃
음이 피어나 있었다. 조한세 씨의 아물어 가는 상처를 긁어 덧나게 하려는 뜻이 추호도 베
어 들어 있지 않은, 다행스러워 가슴을 쓸어 내리고 함께 기뻐하는 말이고 웃음이었다.
"가라앉지 않으믄 별 수 있나?" 조한세 씨는 자신의 방황하는 마음을 가랑ㄴㅈ혀 준 것이
다름아닌 체념임을 얼결에 드러내 보여 주었다.
"그러믄요. 그렇구 말구요. 더구나 요즘은 바다 건너 미국두 하룻길밖에 안 된다잖아요?
전화를 걸믄 옆에서 말하듯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기두 하구요. 자식 떨어지기 싫어 낯선
나라에까지 따라갔다가 뉘우치는 노인이 많대요." 마나님은 조한세 씨가 불쑥 뱉아 놓은 말
뜻을 새겨 들었는지 어쨋는지 다독거리듯 말했다.
아들네 식구는 조한세 씨에게 열 세 평짜리 아파트와 두 식구아 이 년 남짓 살아갈 수 있
을 만한 돈을 남겨 주고 떠나갔다. 이 년 안에는 바다 건너 낯선 나라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을 테니 데려가겠다는 말도 함께 남겨 놓았다.
"그래, 가거들랑 부지런히 돈 벌어 자리잡거라. 애비야 아무데서 살믄 어떠냐?" 조한세 씨
는 아들 며느리 손주들 앞에서 의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가슴 속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아
들네 식구가 떠나가고 나면 다시는 얼굴을 맞대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었다.
"느이들과 떨어지구 나서 이 늙은 애비가 이태 동안이나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으리라구
어떻게 장담하느냐?" 이런 말을 하고 싶어 혀 끝이 자꾸만 꼼지락거렸었다. 정말이지 이 년
은커녕 두 달을 제대로 견뎌 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한데 어느덧 아들네 식구가 떠나간 지 두 달이 지났다. 그 동안 아들 내외와 손주들에게
서 편지가 여덟 통이나 왔고 전화도 두 통이나 왔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뫼셔 올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힘껏 노력하구 있습니다. 무엇보다 건
강에 유의하십시오.'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할아버지만 남겨 놓고 왔다고 저희를 미워하지 않으셨나요? 아버
지가 이 년 안에 할아버지를 모셔 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이 년 안에 틀림없이 할아버지와
다시 한 지붕 아래서 살게 될거에요.'
편지에는 죄송해 하는 글이 씌어 있었고, 전화를 통해서 듣는 목소리에는 혈육의 정이 넘
치도록 배어 들어 있었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야. 하지만 너무 믿지는 말게. 거짓말이 아니라구 해서 뜻만으로 일이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우리 아들두 건너가서 얼마 동안은 번질나게 편지를 한다 전화
를 건다 야단이더니 차츰 뜸해지구 묽어지데 그려. 바다 건너 땅은 정신 없이 손발을 굴려
야 견뎌 낼 수 있다더구만. 요즘 와서 우리 아들은 데려가겠다는 말 대신 생활비를 보내 주
구 있다네." 경로당에서 사귄 친구인 김부일 씨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어쨌든 아들네 식구들이 보내 준 편지와 전화, 그리고 김부일 씨가 들려준 이야기가 조한
세 씨 마음 속으로 스며 들어 진정제 역할을 했다.
"임자두 경로당에 놀러 갑시다. 문 걸어 놓고 가믄 될 게 아니오?" 아침을 먹고 나서 한
동안 조간신문을 뒤적거리던 조한세 씨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미안해 하실 것 웂이 어서 놀러 가세요. 난 혼자 집 지키구 있어두 하나 심심치 않으니
까요. 점심때 놓치지 말구 들어오시기나 하세요. 노인은 제때에 음식을 드셔야 원기를 부지
할 수 있어요." 마나님이 대꾸했다.
"그럼 다녀오리다." 조한세 씨는 구두를 꺼내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오층짜리 아파트의
맨 아래층이었다. 승강기도 없는 저층아파트에서 노인이 드나들기에 편한 데가 아래층이라
면서 아들이 골라 주었다. 그래도 대여섯 개의 층계를 내려가야 아파트 출입문에 닿을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 처지가 결코 비참하다고는 할 수가 없어. 조한세 씨의 머리 속에 그
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조한세 씨는 떠오른 생각을 행복감에 연결시키려 노력하면서 층
계 난간을 손으로 짚었다.
조한세 씨가 층계를 밟고 내려와 출입문을 마악 지났을 때였다. 따, 따, 따, 탕! 탕! 총소
리가 들렸다. 따따따 하고 연속적으로 들린 것은 기관총 소리였고, 탕 하고 단발로 울린 것
은 소총 소리였다. 그 총소리들은 바로 옆에서 나지는 않았지만 제법 가까이에서 울려 조한
세 씨는 문득 걸음을 멈추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뿐 귀기울여 보아도 총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총이 흔한 세상이니 총소리라고 해서 때 없이 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조한세 씨는 귓바퀴에 남은 총소리의 여운을 털어버리듯 하고는 경로당 쪽으로 걸음을 옮
겼다. 경로당은 아파트 단지 안 조한세 씨의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조한세 씨는
경로당 정문 쪽으로 꺾여 들어간 길모퉁이에서 배씨 성 가진 노인을 만났다. 밥 먹을 때와
잘 때만 빼놓고 날마다 같이 지내다시피 하는 처지여서 말없이 눈길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인사가 되었다. 배 노인은 빙긋 웃음을 만들어 보냈다. 이편에서도 그렇게 웃어 보이면 고만
이었다. 하지만 조한세 씨는 잠과 입맛을 되찾고, 머리 속과 눈앞에 끼어 있던 안개가 걷힌
개운함 때문인지 배 노인의 웃음에 말로 대꾸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좀 전에 총소리 났지?" 조한세 씨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래,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더구만." 배 노인이 이렇게 대꾸하면 그 총소리는 아침인사
말로 바뀌어 소멸해 버릴 판이었다. 한데 배 노인은 입가와 눈가에서 웃음을 걷어 내며,
"총소리는 웬 총소리? 난 듣지 못했는걸?" 영문 모르겠다는 눈빛을 했다.
"총소리를 못 들었다구? 따, 따, 따, 하는 기관총 소리하구 타앙! 하는 소총 소리가 섞여서
났는데? 그것두 제법 가까운 데서 울린 총소리였어."
"못 들었는걸. 그렇다구 내가 귀가 어둔 것두 아닌데 말여. 난 아직 귓속말까지두 빠뜨리
지 않구 들을 수 있다구." 배 노인은 총소리에 관심이 있지 않고 자기의 청력을 의심받을까
마음이 쓰이는 태도였다.
"정신을 다른 데다 쏟아 놓구 있으믄 절간처럼 조용한 방 안에 앉아서 벽에 걸린 시계 치
는 소리두 듣지 못할 때가 있으니까." 조한세 씨가 말했다.
"그럴 때두 있기는 해." 배 노인이 대꾸했다. 두 사람은 경로당 안으로 들어갔다. 바둑판,
장기판을 벌여 놓은 사람, 화투판을 벌여 놓은 사람, 신문을 펼쳐 든 사람, 잡담을 나누는
사람, 누워서 잠을 자는 사람…, 벌써 모일 만큼은 모여있었다. 어느 단체에서 기증한 벽시
계가 열 시를 가리켰다. 조한세 씨는 럽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김부일 노인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들네 식구가 떠나가고 나서 같은 처지에 놓인 탓으로 전보다 친밀감을
느끼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조한세 씨는 잡담을 나누고 있는 패거리 쪽으로 합세했다. 구기
자, 영지버섯, 알로에, 벌꿀 등 뛰어난 효능을 가진 건강식품에 얽힌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
니 하고 있었다. 이미 수없이 되풀이된 이야기였지만 처음 입에 올린 화제처럼 열을 올렸다.
경로당에서는 온갖 인간사 세상사가 노인의 입 안에 들어간 단단한 음식물처럼 천천히, 그
리고 오래 씹히고 녹여져서 삭아 없어졌는가 하면 다시 새로워져서 입에 올려지곤 했다. 조
한세 씨는 이어지던 이야기가 그럭저럭 마무리지어지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좀 전에 총소리 난 거 들었지?"
"총소리? 못 들었는데?"
"십 분쯤 전에 기관총 소리하구 소총 소리가 제법 크게 났는데 못 들었단 말여?"
"못 들었는데. 왜? 무슨 일이 일어났나?" 모여 앉은 노인들은 새로운 사건, 새로운 화제에
대한 기대를 품으며 물었다.
"아니, 그래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따, 따, 따, 타앙! 하구 귀청을 뚫을 만큼 울린 총소릴
들은 사람이 하나두 읎단 말여?" 조한세 씨는 목청을 높이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잡담하는
패거리 속에 총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으면 바둑 장기 화투판 벌인 사람들 가운데서라도 총
소리 들은 사람을 찾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둑 장기 화투에 열중해 이TDj
서 조한세 씨의 물음을 듣지 못한 듯했다.
"여보게들, 좀 전에 기관총 쏘는 소리가 났다는데 들은 사람 있는가?" 조한세 씨 옆에 앉
은 배 노인이 방 안을 둘러보며 소리질렀다.
"기관총을 쐈다구? 왜 무슨 일이 일어났나?" 돋보기를 끼고 신문을 읽고 이TEjs 심 노인
이 돋보기 너머로 눈을 치켜뜨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바둑, 장기, 화투에 빠져 있던 노인들
도 하나 둘 눈길을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누가 어디다 대구 기관총을 쐈다는 게여? 그래서, 상한 사람이 있나?" 하나 둘 쳐들려진
노인들의 눈길이 조한세 씨와 배 노인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기대와 의문을 품은
눈들이었다. 뭇 눈길이 힘을 지니고 관자놀이를 조이며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게 아니구, 그냥 총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자구 한 말이여." 조한세 씨는
위축당하며 대답했다.
"그럼 아무 일두 읎었다는 게야?"
"그냥 총소리가 들린 것뿐이여."
"싱겁기는? 총소리를 들었으믄 어떻구 안 들었으믄 어떻다는 게야?" 노인들은 툴툴대며
눈길을 걷어들이고 바둑판, 화투판으로, 신문으로 다시 빠져 들어갔다.
아무도 그 총소리를 듣지 못한 태도였다. 조한세 씨는 고개를 갸웃해 보았다. 어떻게 된
노릇일까. 조한세 씨의 귀에 그토록 뚜렷하게 들린 소리가 어떻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귀
에는 들리지 않은 것일까. 잘못 들은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한세 씨는 입을 다물자고 생각했다. 다른 노인들과 조한세 씨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극복하기 어려운 커다란 공백지대가 끼어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젊
은 사람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조한세 씨는 고집하듯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그 때 김부일 씨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부일 씨의 얼굴을 보자 조한세 씨는 한번 더
총소리를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김부일 씨는 두리번거리다가 바둑판 옆에 가 자
리를 잡았다.
"김부일 씨, 혹시 기관총 소리 못 들었나?" 그렇게 물은 사람은 조한세 씨가 아니라 배
노인이었다. 조한세의 얼굴에서 묻고 싶어하는 마음을 읽은 것일까, 아니면 심심 파적으로
그 일을 껌 씹듯 씹고 있는 것일까.
"기관총 소리? 못 들었는데. 왜? 무슨 사건이 일어났나?" 급히 추켜든 김부일 씨의 얼굴
에는 호기심을 넘어서서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게 아니구, 여기 조한세 씨가 기관총 소리와 소총 소리가 나는걸 들었다면서, 그 소
리를 같이 들은 사람을 찾구 있구만." 배 노인의 말을 따라 김부일 씨의 눈길이 조한세 씨
에게로 옮겨졌다.
"아까, 이리루 올라구 집을 나서다가 가까운 데서 나는 기관총 소리랑 소총 소리를 분명
하게 들었어. 열 시 좀 못 미쳐서."
"열 시쯤? 한데 나는 왜 못 들었을까?" 김부일 씨는 조한세 씨의 진지한 표정에 이끌린
듯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부일 씨만 못 들은게 아니야. 조한세 씨 혼자만 총소리를 듣구 나머지는 모두 듣지 못
했다구." 배 노인이 말했다.
"젯트기가 속력을 낼 때 폭음이 난다던데 혹시 그 소리를 총소리루 잘못 알아들은 건 아
닌가?" 김부일 씨는 조한세 씨에게 동정적으로 말했다.
"아니야, 젯트기가 속력 낼 때 나는 소리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거나 대포알 터지는 소리
같잖아? 내가 들은 소리는 기관총 소리하구 소총 소리였다니까. 내가 폭탄 터지는 소리와
기관총 소리를 구별하지 못할 줄 아는가?" 조한세 씨는 김부일 씨의 동정을 물리쳤다.
"헛갈리구. 구별하구 할 것두 읎어. 열 시쯤에는 폭탄 터지는 소리 같은 것두 난 일이 읎
는걸 뭐." 배 노인이 말했다.
"작은 소리가 큰 소리루 여겨질 때두 있구, 옆에서 난 큰 소리를 못 들을 때두 있어. 총소
리는 정말루 났는데 조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작은 소리였기 쉽구 다른 사람들두 총소리
를 듣긴 했지만 다른 일에 정신을 파느라 금새 잊어버렸기 쉽다는 얘기야." 김부일 씨는 싸
움이라도 말리듯 이쪽 저쪽을 고루 쓰다듬었다.
"그래, 그렇게 판결을 내면 되겠네." 누군가의 말에 좌중에는 가벼운 웃음이 일었고, 배
노인도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한데 이북놈들은 심심하믄 고기잡이배를 끌어가니 무슨 억하심정인지 도무지 알 수가 읎
구만 그래." 누군가 화제를 바꾸었다. 노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 이야기 속으로 빨
려 들어갔다.
하지만 조한세 씨는 총소리에서 쉽사리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울리지도 않은 총소리를
들었단 말인가. 울리지도 않은 총소리가 그토록 귀에 생생하게 들릴 수도 있단 말인가. 도무
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 이상하다는 느낌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한세 씨는 마
음을 가다듬고 새 화제에 끼어들어 이러쿵저러쿵 말참견을 했지만 전같이 재미를 느낄수가
없었다. 자기와는 어디가 좀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한세 씨는 자꾸 벽시계로 눈길이 갔다. 시간이 늦게 흐른다고 느껴졌다. 경로당에 들어
오면 일정한 시간이 경과되어야 나갈 수 있다는 규정은 없었다. 아무 때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한세 씨는 정해진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듯 연방 벽시계를 바다보
다가 시계바늘이 열 한시 오십 분을 가리키자 몸을 일으켜 경로당을 나왔다.
오층짜리 아파트 단지 위로 새파란 가을 하늘이 넓고 깊게 펼쳐져 있었다. 조한세 씨는
신선한 공기에 주린 듯 하늘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다가, 저 허공 속에 갖가지 소리들이
소리없이 흐르고 또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생각해 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이민을 떠
난 아들에게서 얻어들은 지식이었다. 지구상의 허공에는 사람의 귀로 직접 들을 수 없는 소
리들이 가득 차 있다고 했다. 우선 방송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고 말했다. 라디오나 텔
레비전을 틀면 말과 음악이 들린다. 방송국에서 송출한 소리였다. 하지만 사람의 귀는 그 소
리를 직접 잡을 수가 없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사람의 귀에는 직접 들리지 않는 그 소리
들을 들리도록 중개하는 기계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허공 중에는 방송국에서 송출한 소
리들로 가득 차 있는 셈이었다. 국내 방송국은 물론이고 외국 방송국에서 송출한 소리도 함
께 뒤섞여 흐르고 있다고 했다. 아니, 외계에서 온 소리도 허공을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
들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일 년 전에, 아니 십 년 전에 우리가 한 말두 없어져 버린 게 아니구, 대기층의 맨 꼭대
기에 올라가 소리의 입자루 남아 있대요. 그러구 앞으로 언젠가는 그 소리의 입자에서 말을
재생시키게두 될 거래요."
새로 만들어 낸 소리가, 말이, 지금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대기를 진동시키고
있으며, 그전에 만들어진 온갖 묵은 소리들도 없어져 버리지 않고 허공에 저장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말을 되살려 낼 수가 있다니…. 그런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
을 게다. 조한세 씨는 그 때 아들에게 했던 말을 입속에서 다시 중얼거려 보았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일찍 들어오셨네요." 아파트로 돌아온 조한세 씨에게 마나님이 한
말이었다.
"때 놓치지 말구 들어오래는 임자의 당부를 지킬라구 서둘러 들어왔지." 조한세 씨는 애
써 농을 섞어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국을 데울 테니까요. 시장하세요?" 마나님의 표정과 태도가 곰살스러
웠다.
"시장하지 않으니 천천히 해요. 그런데 혹시 아침에 내가 경로당에 간다구 집 나간 뒤 총
소리 난 거 듣지 못했오?" 조한세 씨는 잊어버리자고 생각했으면서도 참지 못하고 입 밖으
로 내어 물었다. 마나님의 대답이 어느 쪽이든 그것으로 이 일을 일단락지으리라.
"총소리가 났어요? 난 못 들었어요. 무슨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났어요?" 마나님은 경
로당 사람들과 같은 얼굴빛이 되어 되물었다.
"아니야. 총소리 비슷한 게 들렸기에 그냥 물어 본 거여." 조한세 씨는 경로당 사람들과
마나님에게 던졌던 질문을 지워 버리듯 대답하면서 다시 한번 자신에 대한 회의에 잠겼다.
아무도 듣지 못한 총소리를 혼자 들었다. 어렸을 적 같으면 신기하고, 재밌고, 자랑하고 싶
은 마음마저 생길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가 못했다. 오히려 자기 속에 감추어져 있던 빈 틈
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어쨌든 조한세 씨는 자기가 총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한 것이 착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헛소리까지 귀에 들리는 걸 보니 나도 이제 별수 없는 늙은이로구나. 그런 생
각은 서글픔을 가슴에 안겨 주었다. 그날 오후 조한세 씨는 경로당에 나가지 않았다.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 일쯤 가지고 애태울 게 뭔가 하는
생각이었다. 늙어서 몸과 마음이 허술해졌기 때문에 헛소리가 귀에 들린 것은 아닐 게다. 싱
싱한 젊은이들한테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하고 평범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조한세 씨는 아침을 먹고는 조간신문의 못 다 읽은 부분을 마저 읽고는 집을 나섰다. 발
걸음이 가벼웠다. 경로당 친구들과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가슴을 뿌듯
하게 했다. 조한세 씨는 층계를 내려와 출입구 밖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맑은 날씨였다.
구름 한 점 없는 짙푸른 하늘이 아파트 단지 위로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하늘 끝으로
이민 간 아들네 식구와 고향의 모습이 잠시 떠올라 보였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자. 즐겁게
살아가기에 힘쓰자. 평범한 일에서도 고마움을 품자. 조한세 씨는 마음을 추스르며 경로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때였다. 따, 따, 따, 탕! 짙푸른 하늘을 찢고 흩어 놓듯 총소리가 울
렸다. 조한세 씨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벽처럼 늘어선 아파트
건물들 사이로 뻗은 회색의 포장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조한세 씨는 초조감을 느끼며 돌아
섰다. 총소리의 여운이 귓가에서 아주 사라져 버리기 전에 증인을 확보해 두어야 한다는 생
각이었다. 조한세 씨는 마나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오십 미터쯤 떨어져 있는 자신의 아파트
를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 때 리어카에 가을 과일을 가득 실은 과일 장수가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나타냈다. 조
한세 씨와는 불과 열 댓 걸음쯤의 간격이었다. 간격은 금세 좁혀졌다. 조한세 씨는 리어카를
막아서듯 하며 멈춰 섰다. 과일 장수도 기대를 품으며 리어카를 세웠다.
"과일 색깔들 한번 곱구만. 홍시 잘 무른 걸루 천 원어치만 주시우." 조한세 씨는 생각지
도 않던 말을 했다.
"예, 예, 입에 넣기만 하면 저절루 녹습니다요." 과일 장수는 홍시를 비닐 봉투에 담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방금 난 총소리는 뭐요? 이 근방에 군대가 주둔해 있기라두 하우?" 조한세 씨는 슬
그머니 물으며 과일 장수의 표정을 살폈다.
"방금 총소리가 났읍니까요? 과일 사라구 소리치느라구 저는 총소리를 못 들은 거 같습니
다." 과일 장수는 돈을 받아 아랫배에 찬 손가방에 집어 넣고는 리어카를 밀며 소리질렀다.
"과일이 왔읍니다아. 과일 장수가 왔어요."
조한세 씨는 홍시 봉지를 들고 마나님에게로 갔다.
"어제 밤에 홍시 먹는 꿈을 꾸었는데 정말루 홍시를 먹게 되네요." 마나님이 흡족한 표정
으로 말했다.
"마침 과일 장수가 지나가기에…, 근데 이 근방에 군대가 있나 봐. 좀 전에 총소리 났지?
조한세 시는 그렇게 물으며 긴장하는 자신을 느꼈다.
"오늘두 총소리가 났어요? 내 귀가 아직은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멀리서 난 소리여서
작게 들렸나 보지요?"
마나님은 감을 씻어 가지고 와서 조한세 씨와 마주 앉았다. 조한세 씨는 맛이 좋은 줄도
모르고 감 한 개를 목구멍 안으로 넘기고는 밖으로 나왔다. 손이 윗주머니로 올라가 담뱃갑
을 끄집어냈다. 담배는 반이나 남아 있었다. 조한세 씨는 한 개비를 뽑아 불을 붙여 물고는
담배가게로 갔다. 담배가게는 식품점을 겸했고, 좌우에는 각기 쌀가게와 문방구가 있었다.
"담배 한 갑 주시우" 조한세 씨는 천 원짜리 지페를 가게주인에게 내밀며 말했다. 가게주
인은 조한세 씨가 피우는 담배 이름을 알고 있었다. 가게주인은 머뭇거리지 않고 담배와 거
스름돈을 조한세 씨에게 건네 주었다.
"조금 전에 총소리 난 거 못 들었소?" 조한세 시는 담뱃갑과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넣으며
옆 가게에도 들릴 만큼 큰소리로 물었다.
"못 들었는데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가게주인이 되물었다.
"나두 어디서 울린 총소린지 몰라서 물어 보는 게요. 근방에 군대가 주둔해 있지는 않
소?" 조한세 씨는 그렇게 물으며 옆 가게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옆 가게 사람
들은 그 일에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군대가 이 근방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 못 들었는데요." 담배가게 주인은 고개를 외로 꼬
았다.
"기관총 소리와 소총 소리가 섞여서 들렸는데…."
"기관총 소리두 났어요? 파출소에서는 알구 있을지두 모르지요."
"파출소까지야 뭘." 조한세 씨는 가게를 떠나 경로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정말 파출
소에라도 가서 확인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한세씨는 아파트 경비실로 갔다. 한 번만 더
물어 보리라. 하지만 경비원들 가운데도 총소리를 들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두 번씩이나 똑같은 소리를 헛소리로 들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나지도 않은 소리가 그렇
듯 실감나게 고막을 울릴 수도 있는 것일까. 마치 무엇에 홀린 느낌이었다. 어떻게 된 노릇
일까.
어쨌든 조한세 씨는 의기소침해져 가지고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긴다기보다는 몸과 마
음이 두 다리에 실려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조한세 씨의 걸음이 가 닿은 곳은 경로당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바둑 장기
화투판이 벌어져 있었고, 판에 끼지 않은 노인들은 구경을 하거나 따로 떨어져 잡담을 나누
거나 신문 잡지를 읽고 있었다.
조한세 씨는 방 안을 둘러보고 나서 바둑구경을 하고 있는 김부일 씨 곁에 가 앉았다.
'바둑판은 천하야. 바둑판을 앞에 놓구 내려다보노라면 천하를 한눈에 내려다보구 있는 듯
한 기분이 들어. 바둑판 위에서 온갖 세상사가, 그것두 사내 대장부가 경영해 봄직한 세상사
가 벌어진다네. 정치가 있구, 기업이 있구, 용병이 있구…, 승리가 있구, 패배가 있구, 희노애
락이 있네. 한 판을 둘 적마다 한 번의 생애를 거친 듯한 느낌이 들기까지두 한다네. 인생이
다 갔다구 서러워 말구 바둑에서 새 인생을 찾게나. 바둑에서 다시 시작할 수가 있어.'
조한세 씨의 눈은 바둑판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흑백의 대결을 지켜 보고 있었지만, 귀는
잡담하는 노인네들 쪽으로 열려 있었다. 총소리에 대해서 그들에게 다시 물을 용기는 없었
다. 그러나 조한세 씨는 그들이 총소리에 대해서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들은
총소리가 아니라 오늘 들은 총소리에 대해서. 누군가 오늘 울린 총소리를 들었다면 어제의
총소리도 되살아나게 될 것이었다.
바둑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고, 또 끝나고 다시 시작되고, 그렇게 서너판이 이어지는 동안
조한세 씨는 눈은 바둑판 위에 얹어둔 채 귀는 방 안의 온갖 말소리를 주워듣느라 신경을
갈아세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한세 씨의 몸과 마음에 피로와 실망과 체념과 회의가 쌓여
갔다. 정오가 지나자 판을 벌였던 사람들은 중국음식점에다 짜장면이나 우동을 시키느라 법
석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 둘 흩어져 경로당을 나갔다. 조한세 씨는 김부일 씨의 뒤를
슬그머니 따라나섰다.
"여보게, 점심 같이 드세." 조한세 씨가 말했다.
"자네네 집에서?" 김부일 씨가 물었다.
"집에서야 날마다 먹는 밥밖에 더 있나? 우리두 바둑 구경 열심히 했으니 짜장면이나 우
동 같은 거 먹어 보세."
"오늘이 자네 귀빠진 날은 아닐 테구."
"아니야. 자네하구 얘기두 하구 싶구 해서. 내가 사겠네."
조한세 씨는 아파트 단지 안 상가 이층에 자리잡은 '남경'이란 이름의 중국음식점으로 김
부일 씨를 데리고 들어갔다.
"아들에 관한 얘긴가?" 자리를 잡고 마주 앉자 김부일 씨가 물었다.
"아니야, 총소리 얘길세." 조한세 씨는 대답하면서 문득 겸연쩍어지는 자신을 느꼈다.
"총소리?"
"다른 사람한테 이런 얘길 하믄 웃음거리, 놀림거리 되기 알맞겠지. 하지만 자네한테는 의
논삼아 얘기하구 싶네."
김부일 씨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조한세 씨의 얼굴을 살피듯 건너다보았다.
"어제 자네가 들었다는 소리가 총소리에 틀림이 없단 말이지?" 김부일 씨는 진지하게 물
었다.
"난 오늘두 어제와 같은 총소리를 들었다니까."
"오늘두? 몇 시쯤인가?" 김부일 씨의 눈에 의아해 하는 빛이 떠올라 보였다.
"내가 경로당에 갈라구 집을 나섰을 때니까 아홉 시 반쯤 되었을 게야."
"그거 이상한데? 난 오늘도 듣지 못한걸. 그래 그 시간에 총소리를 들은 사람이 자네 말
구 또 있는지 알아보았나? 자네 부인이라든지 자네 이웃사람이라든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믄 자네와 의논하구 싶다는 생각이 들었겠는가?"
"오늘두 자네 혼자서만 총소리를 들었단 말이렸다?"
"그렇다네. 한데 먼데서 희미하게 들린 소리가 아니구 제법 가까이서 커다랗게 들린 소리
였네. 흠칫 놀래서 발걸음을 멈췄을 만큼 뚜렷한 소리였다니까. 따따따 하구 연발루 쏴 제끼
는 소리하구 탕, 탕, 단발 소총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어.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가 없는 총소
리였어. 한데 그 분명한 소리가 어째서 내 귀에만 들린단 말인가?" 조한세 씨는 가슴이 답
답해져 옴을 느꼈다.
"이상한 노릇이기는 하지만 대수로울 건 읎어. 문제는 자네가 그 일을 대단치 않게 여기
지를 않구 무슨 변이나 생긴 듯 치부하는 데 있어. 내일부터는 자네 귀에 들리는 총소리면
내 귀에두 들리구, 내 귀에 안 들리는 총소리면 자네 귀에도 들리지 않을 걸세. 내일 하루
더 지내 보구 얘기하세." 김부일 씨는 조한세 씨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려는 듯 담담한 표정
으로 말했다.
"그걸 증명하자면 내일은 이른 아침부터 자네가 나와 함께 있어야 하질 않는가?" 조한세
씨의 대꾸였다.
"어려울 것 읎지. 내일 아침밥 일찌감치 먹구는 자네 집으로 가겠네." 김부일 씨는 그렇게
말하고 얼굴에 밝은 웃음을 실어 보였다.
이튿날 아침 여덟 시 반에 김부일 씨는 조한세 씨에게로 와서, 두 사람은 조한세 씨의 마
나님이 끓여 내온 인삼차를 마시며 총소리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바람결이 제법 싸늘했지만 총소리가 잘 들리도록 하기 위해 참을 수밖에
없었다. 조한세씨는 오늘도 총소리가 울려 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김부일 씨와 함께 있는 자
리에서 총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이틀 동안 들렀던 총소리는 거짓이거나 도깨비장난으로 취
급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둑판이나 꺼내 놓게.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자면 바둑이나 두어야지." 김부일 씨가 말했
다.
"바둑에 정신이 팔리면 천둥치는 소리두 못 듣는다잖는가?" 조한세 씨가 대답했다.
"그두 그렇구만. 그럼 그냥 앉아서 조용조용 얘기나 하세." 김부일 씨는 선선히 양보했다.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소음이 들려 왔다. 삼백 미터쯤 떨어진 간선도로를 달리는 차소리였
다. 소음은 끊이지 않았찌만 다른 소리를 삼켜 버릴 만큼 시끄럽지는 않았다. 먼 천둥소리.
그것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우르릉, 우루릉…. 그러나 조한세 씨는 그 소음
이 신경에 거슬렸다. 총소리가 크게 울린다면 상관없을 테지만, 작은 총소리라면 소음의 헤
살에 흩어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조한세 씨와 김부일 씨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
느 때 울릴지 모를 총소리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다. 다른 방에서 시계 치는 소리
가 들렸다. 아홉 시였다. 조한세 씨가 두 번 총소리를 들었던 시간은 아홉 시 반에서 열 시
사이였다. 앞으로 삼십 분 내지 한 시간 동안은 각별히 귀에 신경을 써야 할 판이었다.
"우리 총소리 얘기나 하세. 총소리 얘기를 하면서 총소리를 못 듣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
김부일 씨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입을 다물고 하는 일 없이 앉아 있기가 지루한 모양
이었다.
"총소리 얘기? 그래, 하세나." 조한세 씨도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으흠―." 김부일 씨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때였다. 따, 따, 따, 타앙 탕! 크고 뚜렷한
총소리가 창문을 뒤흔들 듯 울렸다. 감히 누가 이렇듯 확실한 총소리를 부인할 수 있을 것
인가.
"여보게. 틀림없는 총소리지? 자네두 들었을 테지?" 조한세 씨는 끓어오르는 기쁨을 감추
지 못하며 물었다.
"총소리?" 김부일 씨는 이야기를 시작하려다 말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방금 따따따 탕탕 하구 커다랗게 울리지 않았나?"
"방금 총소리가 났다구? 난 못 들었는걸."
"못 들었다구? 여보 마누라. 이리 좀 와 봐요." 조한세 씨는 옆방을 향해 소리질렀다.
"부르셨어요?" 마나님은 손님을 의식해서 조심스러운 태도로 얼굴을 디밀었다.
"임자, 방금 총소리 난 거 들었지?" 조한세 씨는 말을 더듬었다.
"총소리요? 못 들었는데요. 요즘 왜 총소리 얘기는 자꾸 하세요?" 마나님의 눈 사이로 그
늘이 스쳐 지나갔다.
"뭘 하구 있었길래?"
"대림질하는 중이에요." 마나님은 다음 분부를 기다리는 듯 다소곳이 서 있었다.
"가서 하던 일 해요." 조한세 씨는 밀어내듯 말하며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몸을 일으
켜 열어 놓은 창문을 닫았다.
"여보게, 자네 귀검사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나? 큰길 네거리에 내가 단골루 댕기는 병
원이 있어." 김부일 씨는 조한세 씨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말했다.
"귀가 아프거나 안 들려야 병원엘 가는 거지, 아프지두 않구 잘 들리는데두 병원엘 가는
가?" 조한세 씨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나, 아주 먼데서 울려서 보통 사람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특별한 귀가 있다는 말을 언젠가 들었네. 자네 귀가 그런 특별한 귄지 검사해 보자는
거야. 도깨비에라두 홀린 것처럼 꺼림칙해 하기보다는 한번 가서 속시원하게 검사를 해보는
게 좋지 않은가? 꾸물거릴 것 없이 지금 나랑 같이 가세." 김부일 씨가 말했다.
"여지껏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는 귀였는데 별안간 특별한 귀가 되겠나? 경로당 친구들이
알면 두구두구 놀림감 되겠네." 조한세 씨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걱정 말게. 내 마누라한테도 이런 소리 안할 테니까. 자 어서 일어서게나" 김부일 씨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조한세 씨는 연해 입맛을 다시며 김부일 씨를 따라 몸을 일으켰따.
아파트 단지 옆 번화한 네거리에 흰 타일을 붙인 삼층 건물이 기다랗게 서 있었다. 종합
병원은 아니지만 여러 전문의원이 한 건물 안에 골고루 들어앉아 있었다. 김부일 씨가 조한
세 씨를 데리고 들어간 곳은 이층에 있는 '강동내과의원'이었다.
"오셨습니까? 아주 건강해 보이십니다."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의사가 김부일 씨에게
친절하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건강해 뵈는데 병원에는 뭣하러 왔느냐는 말씀이지요? 잘 보셨어요. 오늘은 내 친구 때
문에 왔어요." 김부일 씨가 얼굴에 점잖은 웃음을 담으며 조한세 씨를 돌아보았다.
"그러십니까? 어디가 편찮으셔서 오셨습니까?" 의사는 조한세 씨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게 말이에요." 조한세 씨는 멋적음을 느끼며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남들
귀에는 안 들리는 소리가 유독 내 귀에만 들린단 말예요."
"네?" 의사는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그저께부터 그랬어요." 조한세 씨는 그 동안 겪은 일을 주욱 털어놓았다.
"의사 선생, 우리 친구 귀가 천리안 같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귀는 아닌지요?" 김부일 씨
가 끼어들어 물었다.
"그 문제라면 이비인후과 의원으로 가셔야겠습니다. 가만 있자. 이리 오십시오. 제가 이비
인후과에 뫼셔다 드리겠습니다." 의사는 경로심을 발휘하듯 안내를 자청했다.
이비인후과 의원은 강동내과의원과 복도를 사이에 두고 문을 마주하고 있었다. '강동이비
인후과의원'이었다. 내과의사는 잘 진찰해 드리라는 부탁을 해주고는 돌아갔다. 친구 사이로
보였다.
"제 친구한테 간단히 얘기를 들었읍니다마는 다시 한번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비인
후과 의사는 진료카드를 앞으로 끌어당겨 놓으며 말했다. 조한세 씨는 내과 의원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했다. 의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청력검사를 해드리겠습니다." 의사는 몸을 일으켜 조한세 씨를 병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니 외부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듯 조용했다. 조한세 씨는 오
디오미터기 앞의자에 앉아 양쪽 귀에 이어폰을 부착했다. 의사의 조작에 따라 여러 크기의
음향이 들리고, 계기판의 바늘이 숫자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아주 정상이십니다. 양쪽 귀의 청력이 거의 제로데시벨에 가깝습니다." 의사는 조한세 씨
의 귀에서 이어폰을 떼어 내며 말했다.
"보통 사람의 귀보다 유난히 잘 들리도록 되어 있다는 말씀인가요?" 조한세 씨는 제로데
시벨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물었다.
"보통 사람의 귀보다 유난히 잘 들려두 정상이라구 할 수가 없지요. 할아버지 귀는 보통
사람의 건강한 귀와 같습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건강한 귀라는 말이 실감나게 와 닿지 않
았다. 총소리를 설명해 주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다.
"근데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어째서 내 귀에는 들리나요?" 조한세 씨는
길을 떠나 한참을 헤매다가 보니 처음 떠났던 자리로 되돌아온 사실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글쎄올습니다. 저로서는 뭐라구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어쩌면 귀와 상관없는 일인
지두 모르겠습니다." 의사는 조심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귀하구 상관 읎이두 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조한세 씨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간혹 그런 경우가 있는 걸루 알구 있습니다. 어떤 소리가 사람의 머리 속에 박혀 있다가
어떤 기회에 되살아나는 겁니다.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구 할까요?" 의사의 표정은
담담했다. 조한세 씨의 문제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선 느낌이 들었다. 다음 환자를, 하고 말
하듯 간호원을 돌아보았다.
"병은 아닌가요?" 조한세 씨는 시간에 쫓기는 심정으로 물었다.
"병이라구까지야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마음에 걸리적거리시거든 총소리를 뽑아내는 치
료를 받아 보시는 것두 좋습니다."
"총소리를 뽑다니요?"
"제가 그 방면의 전문가를 소개해 드릴 테니, 할아버지 머리 속에 총소리가 박혀 있어서
소리를 내는 건지 아닌지 상담을 해보십시오." 의사의 얼굴에 다정다감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까운 덴가요?" 조한세 씨는 의사의 미소에 뭔가 안도감이 가슴에 안겨지는 것을 느끼
며 물었다.
"가깝구 말구요. 이 건물 안에 있습니다. 제가 소개장을 써서 올리겠습니다." 의사는 메모
지를 꺼내 무슨 말인지 적어 가지고 간호원에게 내밀었다.
"이 할아버지, 삼층 홍 박사 방에 뫼셔다 드리구 와."
간호원이 앞장섰다. 조한세 씨는 간호원을 따라갔다.
"신경정신과 의원이잖아?" '강남신경정신과의원'이라는 간판을 앞에 대하는 순간 조한세
씨는 가벼운 충격을 받으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요즘엔 건강 상담하시러 신경정신과를 찾아오는 분이 많아요." 간호원이 말하며 문을 열
었다.
"간호원 말이 맞아. 들어가 보세." 김부일 씨가 뒤에서 밀 듯 말했다. 조한세 씨는 간호원
에게 끌리고 김부일 씨에게 떠밀리듯 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이비인후과 원장이 조한세 할아버지께 정성껏 상담해 드리라구 써 보냈군
요. 상담이라는 게 다름아니라 마주 앉아서 얘기를 주구받는 것입니다. 이리 오셔서 앉으십
시오." 의사는 이비인후과 원장이 보낸 메모지를 들여다보던 눈길을 들어 올려 조한세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넉넉한 몸집, 너그러운 표정, 부드러운 목소리가 잘 조화를 이루어 편안하
고 믿음직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조한세 씨는 의사가 가리키는 대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사와 마주 앉아 자신이 겪은 총
소리 이야기를 또 한번 되풀이해야 했다.
"뭐 흔히 있는 일이구만요." 조한세 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나서 의사가 말했다. 대수
롭지 않은 증세라는 말로 들렸다.
"흔히 있는 일인가요?" 조한세 씨는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며 복창하듯 물었다.
"예, 대단치 않은 충격을 받구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총소리 듣게 되시
기 얼마 전에 예사롭지 않으신 일을 겪으신 적은 없으십니까." 의사는 슬그머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담이 시작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조한세 씨는 별로 긴장이 되지 않았
다. 잠시 기억을 더듬은 뒤 입을 열었다.
"두 달 전에 아들네 식구가 이민을 간 일밖에는 없는데요." 조한세 씨는 대답하고 나서
그 일과 총소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
"자녀가 몇 분이나 되십니까?"
"그애 하나뿐이에요." 조한세 씨의 머리 속에 갓 태어났을 때부터 이민을 떠나기까지의
아들의 여러 모습이 차례로 떠올라 보였다. 아들이 성장해 가는 여러 모습은 조한세 씨의
가슴에 애틋한 정을 안겨 주었다.
"어떻게 혼자 남게 되셨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의사가 말했다.
조한세 "씨는 의사의 말 속에 아들을 헐뜯으려는 꼬챙이와 갈퀴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
껴졌다.
"이 년 안에 애비를 데려간댔어요. 첨에는 고생을 해야 되니까 자리잡구서 데려가겠다구
말했지요." 조한세 씨는 아들을 감싸듯 말했다.
"그러면 지금 혼자 계십니까?"
"아들이 계모를 얻어 주구 갔지요. 아들의 생모는 5년 전에 세상을 떴어요. 조그만 아파트
한 체하구 둘이서 몇 년 동안 살아갈 수 있는 돈을 주구 떠났기 때문에 불편한 줄 모르구
지내지요."
"아드님 가족을 떠나 보내시면서 생전에 다시는 만나 보지 못하게 될지두 모른다는 생각
이 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구 몹시 서운하다거나 야속하다는 느낌을 지니시지는 않으셨습
니까?"
"내 나이가 있으니까 이 년 동안 기다리지 못하구 죽게 될지두 모른다는 생각이 나기는
했지요. 그렇지만 아들을 야속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억지로 꾸며서 한 대답은 아니라
고 생각했다. 아들이 응석받이로 자라기는 했지만 저만 알고 인정머리 없는 위인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까 문득 야속함이 미움이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고
고여 오르는 것을 느꼈다. 새어 나올까 봐, 터져 나올까 봐, 겹겹으로 싸서 꽁꽁 묶어 깊숙
히 집어 넣어 두었던 감정이 뜻밖에 버르집어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들네 식구가 이민 떠난 것과 총소리와는 아무 상관두 읎는걸요." 조한세 씨
는 새어 나온 감정을 긁어 담아 다시 겹겹이 싸고 꽁꽁 묶어 깊숙이 꾸겨 넣어 두자고 생각
하며 이의를 제기하듯 말했다.
"참 총소리 얘기를 깜빡 잊구 있었군요." 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비인후과 의사선생은 어느 땐가 들은 총소리가 머리 속에 백혀 있다가 소리를 내는 것
인지두 모르니, 그게 사실이라면 총소리를 뽑아내라구 말씀하시더군요." 조한세 씨는 아들네
식구 이야기에서 의사의 관심을 총소리 쪽으로 끌어낸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이상스럽게도
의사와 마주 앉아 아들네 식구 이야기를 왈가왈부하는 것이 싫었다.
"제 의견두 그렇습니다. 총소리 박혀 있는 데를 찾아내기만 하면 아주 쉬운 일일 수두 있
습니다." 의사는 밝은 표정으로 아주 쉽게 말했지만, 조한세 씨의 귀에는 그 말이 좀 애매하
게 들렸다.
"총소리는 머리 속에 백혀 있다구 말씀하셨는데요."
"네, 한마디로 머리 속입니다만, 실상 머리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갈피와 골짜기가
있습니다. 총소리가 어느 갈피, 어느 골짜기에 들어가 박혀 있는지 찾아봐야 압니다. 하지만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쉬운 일일 수두 있습니다."
조한세 씨는 의사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의사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나 그늘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 하나요?"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쉬운 일일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
이,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는 말로 바뀌어 조한세 씨의 귓가에 맴돌
았다.
"저와 할아버지가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저절루 찾아집니다. 그러니까 저를 믿으시구 허
심탄회하게 대해 주시면 됩니다. 혹시 자제분이 둘이었는데 총소리와 관련된 사건으로 해서
한 분을 잃어버리시진 않으셨습니까?" 의사는 다시 아들 이야기로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렸
다.
"아닌데요. 애초부터 아들 하나였어요. 그 애가 삼대독잔걸요." 조한세 씨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고개를 자신있게 가로저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가벼운 쾌감을 느꼈다.
"그럼 총소리와 관련된 사건으루 귀한 물건을 잃어버리신 일은 없으십니까?"
조한세 씨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잊어지지 않을 만큼의 특별한 물건은 없었다.
"없는데요."
"고향은 어디십니까?"
"휴전선 이북이에요. 가고 싶어두 갈 수 없는 곳이지요." 조한세 씨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문득 날카로운 무엇을 훑어 내리듯 명치 끝에 통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의사의 눈이 빛을
발하며 조한세 씨의 표정을 날쌔게 살폈다. 하지만 빛을 반사하는 안경알처럼 번쩍하던 눈
빛은 곧 잦아 들었다. 마치 의사의 눈 속에 감추어진 무엇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모습을 드
러냈다가 다시 숨어 버린 느낌이었다.
"고향에 남겨 두구 오신 가족은요?" 의사는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조한세 씨의 눈앞에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보였다. 부모님을 남겨 두고 왔다.
해방 다음다음 해였다. 조한세 씨는 38선 남쪽으로 넘어가자고 마음을 정했다. 그해 조한
세 씨는 서른 두 살이었고, 부모님은 두 분 다 육순이었다.
"아버님, 아무래도 남쪽으로 넘어가야 할까 봅니다." 조한세 씨는 처자식과 함께 떠날 준
비를 은밀하게 해 놓고는 부모 앞에서 말했다.
"세상이 하두 어수선하니 고향 떠나지 말잔 소리두 할 수 읎구나. 근데 이 집은 네 누이
한테 맽기랴?"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부모님은 으레 아들네 식구와 함께 고향 떠나 남쪽으
로 내려가게 되려니 생각하는 투였다.
"아버님, 삼팔선을 넘자믄 산길 백 리를 밤에 걸어야 한답니다. 아버님 어머님한테는 무립
니다. 삼팔선이 영영 막혀 있겠습니까? 이삼 년 후면…."
"아니다. 아직은 나두 그렇구 느 어머이두 그렇구 젊은 사람들에 뒤지지 않게 산길 밤길
잘 걸을 수가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허리띠를 잔뜩 움켜잡고 매달리듯 말했다.
"그런데 남쪽에 내려가더라두 한동안은 방 한 간 세 읃어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해야 할 처
지입니다. 그러니 아버님, 이렇게 하시지요. 불편하시구 외로우시더라두 이삼 년 동안만 고
향에 눌러 앉아 기십시오. 제가 남쪽에 가서 자리잡구 있다가 이삼 년 안에두 삼팔선이 뚫
리지 않으믄 아버님 어머님을 뫼셔 올 사람을 구해 보낼 테니까요. 많은 식구들이 별안간
객지에 가서 길거리 헨매 다니는 신세될까 봐 걱정돼서 그럽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노경에 접어든 부모를 모시고 삼팔선을 넘어 객지로 향하는 험한 길
을 떠날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어쨋든 조한세 씨는 완곡한 표현으로나마 부모를 고향에 떼
어 놓고, 처자식하고만 남쪽으로 떠나 가겠노라고 태도를 분명하게 밝힌 셈이었다.
"형편이 그렇다는데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이윽고 아버지는 체념한 듯 말했다. 하지
만 실제로는 체념하기가 무척 힘든 듯 눈을 꽉 감고 오랫동안 뜨지를 않았다.
"누님한테 부탁드렸습니다. 누님이 정성껏 보살펴 드릴 겁니다." 조한세 씨는 누을 꽉 감
은 채 숨길을 고르고 있는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며 찐득찐득 매달려 오는 정을 끊어 내듯
말했따. 부득이한 노릇이다. 그놈의 삼팔선 때문이야. 조한세 씨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중얼
거렸다.
그렇게 부모와 헤어져 고향을 떠나온 이래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 보지도 못했고, 부모와
만나지도 못했다. 북쪽 군대가 삼팔선을 허물고 남쪽으로 쳐내려와 남쪽땅을 짓밟고 있던
여름 석 달 동안, 조한세 씨는 월남한 사람들을 색출하러 다니는 북쪽 기간원을 피해 다니
느라 눈코 뜰 사이가 없었고, 정작 유엔군이 반격에 성공해 북쪽땅 깊숙이 진격해 들어가
있을 즈음에는 몸살인지 열병인지 알 수 없는 병으로 몸져 누운 처지가 되어 있었다. 조한
세 씨가 병에서 헤어나왔을 때는 유엔군은 다시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다.
고향에 남아 있던 부모님 소식은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고향 사람을
통해 나중에서야 들을 수가 있었다.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해 올라가 고향땅이 수복되면서
부터 부모님은 조한세 씨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엔군의 후퇴로 고향땅이 다시 북
쪽 경계 저쪽으로 들어갈 위험성이 짙어져 고향 사람들이 다투어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을
때도 아들과 길이 어긋날까 걱정되어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다. 결국 부모님은 피난을 떠나
지 못한 채 고향땅에 주저앉은 것이 분명했다. 그 소식을 전해 준 고향 사람도 설마설마 하
다가 인민군 패잔병들이 고향 마을을 덮쳤을 때에야 허겁지겁 고향을 떠나 왔고, 그 때까지
조한세 씨의 부모님은 고향집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은 안 계십니까?" 의사가 다시 물었다.
"없습니다." 조한세 씨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물론 고향에 남은 부모님은 제대로 천
수를 누린대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은 아닐 것이다. 구십이 넘은 나이이니 말이다. 하지만 조
한세 씨의 대답은 정직한 것은 아니었다. 정직하게 대답하자. 조한세 씨는 마른 침을 모아
꿀꺽 삼키며 자신의 등을 떠밀어 보았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정직한 대답을 가로막고 있었
다.
"고향을 떠나 남쪽에 오셔서 피난 생활 하시는 가운데 할아버지나 가족들이 겪으신 특별
한 사건은 없으십니까?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거나 실종되었다거나 납치되어 갔다거나 하는
일 말입니다."
"읎는데요. 마누라가 죽었지만 그건 난리통이 아니라 오 년 전이었지요." 조한세 씨 부인
의 죽음과 총소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병으로 죽었을 뿐이었다. 부모님을 고향에서 모
시고 나오지 못한 일도 그랬다. 총소리와는 직접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 왜 정직하게 대답을
못했을까. 조한세 씨는 의사의 물음에 어째서 거짓 대답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한세
씨는 조금 전부터 자신의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또 한번 의사의 눈이 빛을
내며 조한세 씨의 얼굴을 날쌔게 살폈다.
"할아버지. 제가 갑자기 여쭈었기 때문에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으셨을 겝니다.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보시면 총소리와 얽힌 사건을 찾아 내실 수 있을 겝니다. 육이오 전쟁을 겪
은 우리 나라 사람치구 총소리와 얽힌 사건에 맞닥뜨려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장
생각해 내지 못하셔두 좋습니다. 댁에 가셔서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그 동안 잊어 버리구
계셨던 사건을 하나하나 찾아내 종이에 적은 다음 다시 오십시오. 친구분들과 자리를 함께
하시구 난리통에 겪으셨던 이런저런 일들을 회상해 보시는 것두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노라
면 총소리가 할아버지 머릿 속 어느 갈피에 박혀 있늕지 알게 될 겝니다." 의사는 조한세
씨의 표정에서 어떤 기미를 찾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바싹 줄여 잡아당겼던 끈을 넉넉
하게 늦춰 주는 꼴이었다. 조한세 씨는 그렇게 해보겠노라고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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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뭐라던가?" 아파트 단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김부일 씨가 물었다.
"난리통에 총소리를 들으며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내 적어 가지구 다시 오라더
구만. 그렇게 되믄 총소리가 내 머리 속 어느 갈피에 백혀 있는지 알 수가 있대. 총소리 백
혀 있는 갈피만 알아내믄 총소리 뽑아내기가 쉽다는구만." 조한세 씨는 남의 말하듯 말했다.
"그 숱한 총소리, 그 숱한 일들을 무슨 수루 다 찾아내 적을 수가 있겠나. 병이 아니라면
됐네. 총소리 좀 들리면 어떤가? 그러다가 제물에 지쳐 잦아들어 버리겠지 뭐." 김부일 씨는
막연해 하며 말했다. 그러나 조한세 씨의 머리 속에는 선명한 모습이 떠올라 보였다. 색채와
형상이 훼손되지 않은 채 선명한 모습 그대로 보존된 옛 동굴 속의 벽화 같은 모습. 고향에
떠어 놓고 온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세월이 날라다 쌓은 모래더미 속에 파묻혀 과거의 갈피
속으로 온전히 모습을 감췄다고 생각해 왔었다. 한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모래더미를 파
헤치고, 동굴 속 벽화를 햇볕 아래 드러내 놓으라는 것이다.
안 돼! 조한세 씨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려 오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는 이민 떠난
아들의 얼굴이 떠올라 보였다. 아들의 얼굴이 아버지의 얼굴과 가지런히 놓였다가 겹쳐졌다
가 했다. 이놈, 네가 애비를 버렸지? 조한세 씨는 아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문득 아들의
얼굴 뒤편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드러나면서 조한세 씨를 노려보았다. 이놈, 네가 애비 에미
를 버렸지? 아닙니다. 고의적으로 부모님을 떼어 놓고 떠나온게 아닙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었습니다. 조한세 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귓가를 맴
돌았다. 아닙니다.… 부득이한 형편이었습니다. 아들이 조한세 씨를 바라보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조한세 씨는 문득 정신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저어 눈앞에 머리 속에 떠오른 아버지의 얼
굴과 아들의 얼굴을 지워 버렸다. 총소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 조한세 씨는 고집
하듯 정리하듯 그렇게 생각하며 뒤늦게 김부일 씨 말에 대답했다.
"나두 자네같이 생각하겠네. 총소리 따위, 날래믄 나래지. 제물에 주저앉을 날이 있겠지
뭐." 조한세 씨가 말을 끝낸 순간이었다. 따, 따, 따, 탕, 탕! 총소리가 울렸다. 대기의 진동이
손가락 끝에 찌르르 와 닿았다. 조한세 씨는 김부일 씨의 얼굴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김부일 씨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얼굴로 걸음을 옮겨 놓기만 했다. 조한세 씨는 묻고 싶
은 것을 꾹 참았다.
'어쨋든 고향에 남으신 부모님이나 이민 떠난 아들네 식구와 총소리는 아무런 상관두 읎
어.'
조한세 씨는 완강하게 고집부리듯 그렇게 생각하며 김부일 씨와 나란히 걸음을 옮겨 놓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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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화에관한 모든 것은 다 좋습니다 시나리오만 아니라 ㅋㅋ 초고속 등급업이 되어버렸네요 ㅋㅋㅋ
숙제하다가 같이 하고 싶은 과제 있으ㅜ면 기초스터디에 오려주세요 아마 해주고 싶은 사람 많을 걸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