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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호미곶 일출.
한반도 최동단에 위치한 호미곶은 일출이 아름다워
육당 최남선은 이곳을 '조선 십경'의 하나로 꼽았다.
1908년 건립된 호미곶 등대와 국내 유일 등대박물관,
이육사 청포도 시비, '청정 해수' 대보 해수탕 등이 있다.
포항은 갓 잡은 흰살 생선을 잘게 썰어
각종 야채를 넣고 깨소금과 김 가루를 뿌린
다음 고추장을 풀어 비빈 후 냉수를 부어 먹는
포항물회가 유명한데 어부들이 뱃일을 하다가
바쁠 때 재빨리 해먹을 수 있도록 고안해 낸 것으로
지금은 '포항물회'가 포항의 대표음식으로 유명하다.
포항 영일만은 해초가 많아
겨울철에는 청어 떼가 몰려와
산란하는 장소라 그물만 던지면
청어가 한가득 올라오는 황금어장.
청어는 중요한 식량이었으나,
한 철에만 잡혀 두고두고 먹을 수
있도록 보관하는 방법이 문제였다.
그러다가 누군가에 의해 통풍이 잘되는
작은 부엌 살창에 청어를 걸어 놓았는데,
여기는 부엌의 연기가 빠져 나가는 곳이라
훈제효과가 생겨 고기가 쉽게 상하지 않았다.
그 뒤로 사람들은 모두 부엌 살창에
청어 몇 두름(1두름은 20마리)쯤은
걸어 놓고 겨울을 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매달아놓은 청어들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얼었다가도,
다시 밥 짓는 따뜻한 연기를 쐬며
녹았다가를 반복하면서 반(半)건조.
이를 먹어 보니 꼬들꼬들하게
씹히는 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이렇게 해서 ‘냉훈법(冷燻法)’
천연의 동결건조방법을 터득한
영일만 사람들은 이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 낮에는 해가 쨍쨍 내리쬐고
밤에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부는 구룡포
바닷가에 청어를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또한 많은 청어를 한 번에 매달기 위해
긴 나뭇가지에 청어 양눈을 뚫어 줄줄이
꿰었는데, 처음에는 이를 ‘관목어(貫目魚)
즉, "눈을 꿰뚫은 물고기"라고 불렀다는데.
차츰 ‘과메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1960년대 이후 영일만에 청어가 급격히 줄어들어,
그 대신 많이 잡히는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었는데
맛이 청어에 뒤지지 않아 차츰 꽁치로 만들게 되었다.
꽁치 한마리를 통째로 말린 ‘통마리’와
내장과 뼈를 발라내고 말린 ‘배지기’ 등
꽁치 과매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한다.
과메기는 고기 한 점에 마늘, 쪽파 등을 얹어
미역줄기로 돌돌 감은 뒤 초장에 찍어 먹어야
비린내도 덜 나고 맛깔스럽다는데 구룡포에서는
과메기의 고소한 맛을 즐기려 말린 그대로 먹는다.
호미곶.,상생(相生)의 손.
호미곶 해맞이광장은 새천년 한민족해맞이 축전 개최장소.
만여평 부지에 상생의 손, 성화대, 불씨함, 연오랑세오녀상,
햇빛채화기, 공연장, 그리고 유채꽃단지( 매년 4월~5월 만개).
20세기, 마지막 해넘이 행사.
그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명소.
'구(舊)천년' & '신(新)천년.'.,상생.
떠나가는 천년의 햇빛을 담기 위해
변산반도 끝자락 격포에서 채화하고
새천년 첫번째 불씨를 호미곶에서 채화.
서해 낙조.,격포.
동해 일출.,호미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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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 끝자락.,격포.
해가 가장 오래 떠 있는 곳.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
격포 솔섬.,낙조.
거기에다가 날짜변경선.
'피지섬'의 새천년 첫햇빛.
날짜 변경선.,피지섬.
남태평양 낙원.,피지섬.
1.'변산반도 천년대 마지막 햇빛.,불씨
2. 날짜변경선 피지섬 새천년 첫햇빛.,불씨.
3. 호미곶에서 새천년 첫햇빛으로 채화한.,불씨.
3곳에서 채화한 불씨를 합화한.,성화대 불씨는
각종 국제대회 등에서 성화의 씨불'로서 사용된다.
호미곶광장 '상생의 손' 앞에 보관되어 있는.,3곳 불씨.
호미곶광장.,'상생의 손.'
상생의 손은 바다와 육지에 각각 설치한.,청동조각 .
서로 마주보는 형상으로 상생과 화합을 상징하고 있다.
이곳은 신라 아달라왕 4년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의 고향.
'신라때, 고래등(돌배)을 타고 왜로 가서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연오랑과 세오녀.
호미곶은 한일 문화 교류의 시발점인 곳이다.
귀신고래 등처럼 생긴.,바위섬.
'연오랑과 세오녀'.,전설의 고향.
≪삼국유사≫에 의하면 157년(아달라이사금 4)
어느날 연오랑은 해조류를 채취하러 바다로 나갔다가
배바위를 타고 왜로 건너가 그곳의 왕이 되었다는.,설화.
태양신으로 신격화된
'연오랑 세오녀' 부부는
'일본 천황의 시조'.,설화.
신라시대 장보고.,해신.
일본은 제주도와 다를 바 없이
'1만 8천' 신들이 존재하는 나라.
조상도 신격화하여 집안에 모신다.
호미곶 해맞이광장.,'연오랑과 세오녀.'
돌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 신화.
삼국유사- 세오녀와 연오랑.,설화.
일본에서 해와 달이 되었다는.,전설.
허황옥이 배에 싣고온.,파사석탑(婆娑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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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종교적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을까?
오늘날 불교에 수월관음상,암호관음보살상.
파도치는 해안가 바위돌 안에 모셔진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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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오녀가 일본으로 타고 갔다는.,돌배.
'허황옥'이 배에 싣고 왔다는.,파사석탑.
동굴 안, 성모마리아상과 같은 이유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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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오녀(細烏女)는 신라에서 태양의 여신.
왜국으로 가서 태양이 된.,세오녀(細烏女).
왜국으로 건너가서 달이 된.,연오랑(延烏郞).
신라시대 세오녀는 '태양의 여신'이었던 것.
세오녀(細烏女)가 바위를 타고 간 것이 아니라
'태양의 여신'이 신라에서 왜국으로 전파된 흔적.
시마네현 이즈모 지역 '카라카마 신사'.
'연오랑과 세오녀가 타고 왔다.'는.,돌배.
'이즈모'지역 일본에서는., 고래길 답사코스.
48년에 야후타국 허왕옥이 돌배를 타고 도래.
가야 김수로왕이 마중 나갔던 곳이.,진해 망산도.
돌배는 인도문명이 한반도에 유입되었다는 상징물.
'일본에서는 태양신으로서
신격화된.,'연오랑과 세오녀.'
'일본 최초의 선진문명.,전수자.'
'한반도 최동단.,호미곶.'
2015년 1월 1일.,호미곶광장
'상생의 손' 일대의 일출 인파.
16세기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남사고(南師古)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 설명.
호미곶(虎尾串)
동외곶(冬外串),
장기곶(長鬐串).
동의어.
'2010년부터
"호미곶"으로
부르기로 합의.'
포항 지역
주민대표들.
조선시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金正浩).
국토 최동단 측정을 위해 호미곶을 일곱번 답사 측정
가장 동쪽임을 확인하여, 호랑이 꼬리 부분이라고 기록.
............................호미곶..............................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ㆍ동해면ㆍ호미곶면에 속하며
서쪽은 영일만, 동쪽은 공개산(214.6m) 산계로 이어진다.
구룡포 급경사해안에는 모식적인 해안단구가 발달된 농경지.
한반도에서 가장 일출 명소로 유명한 곳으로,
일출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구룡포.
일출 관광명소이며, 호미곶 등대로도 유명하다.
...............................................................
포항.,'호미곶~구룡포'(해파랑길 14코스)
동해의 '떠오르는 해 & 푸른 바다'.,해파랑.
'동해안 탐방로' 해파랑길의 총길이는 688km.
아홉마리 용의 전설이 있는.,구룡포.
구룡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늬바람, 해풍 피해가 극심한 고장.
그리하여, 사막화 현상이 일어나는 곳.
해질 무렵에는 중국에서 불어오는.,서풍.
새벽 녁부터 동해에서 불어오는.,바다바람.
남과 밤의 기류가 바뀌면서 일기변화가 극심.
그 사실을 대변해주는
'구룡포(九龍浦).,전설'.
동해 바다 속.,해저산맥(海
구룡포 어시장.
영덕대게
껍질이 얇고 살이 많으며 맛이 담백한., 영덕대게
그 발이 대나무 마디와 같이 이어져 있다하여.,대게.
영덕군 대진(大津) 앞바다에서 감포 앞바다에 걸쳐 서식.
"바다인삼"이라 불리우는.,대게.
수심 150∼250m, 수온 2.3∼10.3℃,
비중 31.37∼33.53%가 적합한 서식처.
'12월~ 다음해 3월' 잡힌 것이 맛이 있다.
1930년대는 무진장이라 할 만큼 많이 생산되었고,
1950년대만 하여도 그런대로 상당한 생산을 올렸다.
1960년대에 와서는 생산이 점차적으로 줄어들기 시작.
현재에는 어획고가 극히 감소하였고,
거기에다가 외화획득을 위한 통조림제조로
일반인은 품질이 좋은 게를 맛볼 수 없게 되었다.
포항 운하.
형산강 입구에서 송도교 인근 동빈내항까지
1.3㎞ 구간 막혔던 물길을 40년 만에 복원한 것.
본래, '신라 ~조선'시대까지도 있었던 물길이었다.
특히, 동빈내항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포항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내항.
풍랑이 일때 대피하거나 배를 안전하게 정박하기 좋은 곳.
조선시대 포항창진.
옛 물길.,'포항운하'.
....................포항창진...............................
조선초, 포항은 반농반어(半農半漁).,한적한 마을.
1732년(영조 8) 포항창진(浦項倉鎭)이 설치되었다.
포항창진은 곡식을 저장해 기근을 대비하는 곡물창고.
1731년, 삼남지방 전역의 혹독한 기근.
포항창진 설치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관아에는 연일 '살려달라.'는 울부짖음 아우성.
"굶주린 어미가 자식을 삶아 먹었다."
흉흉한 소문이 나돌만큼.,혹독한 기근.
그해 경상감사 조현명은 영조에게 장계(狀啓)를 올려 보고.
죽은 자들의 사정을 기록, 산 자들의 처지를 상세히 아뢰었다.
그리고, 조정에 비축해 둔 미곡을 나누어 줄 것과 공명첩을 요청.
공명첩은 부유층에 벼슬을 주는 대신,
돈이나 곡식을 받는 일종의 백지 임명장.
즉, 공명첩은 명예직 벼슬을 팔 수 있는 권한.
조현명은 공명첩을 발급해 백성들을 구제할 요량이었다.
아울러, 함경도 진휼용 영남곡(嶺南穀)을 돌려 줄 것을 간청.
그리하여, 백성들은 굶어죽지 않고 그해 기근을 넘길 수 있었다.
“기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삼남지방뿐만 아니라
함경도는 잦은 기근에 백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곡물 창고를 지어 굶어죽는 백성이 없도록 대비해야 합니다.
영일현 포항이 창진을 설치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입니다.
포항창진에 곡식을 저장해 두었다가 봄 가을로 빌려 주면
흉년이 들어도 백성을 구제할 수 있고 포항은 해로가 발달해
삼남지방과 함경도까지 곡식을 운반하기 유리합니다.” -조현명 -
조현명은 바닷물을 이용한 자염(煮鹽)사업 등을 통해
얻은 수만섬 곡식을 밑천 삼아 1732년 포항창진을 설치.
삼남지방과 함경도 백성을 구휼하기 위한 곡물 전담 창고.
곡물 집결 및 수송을 담당하는., 조창(漕倉) 기능.
그와 더불어 훗날 군사목적 진(鎭)의 역할까지 담당.
하지만, 이 시기에는 세곡 수송하는 조창 기능이 강했다.
1737년(영조 13), 삼남지방과 함경도에 또다시 큰 기근.
이때, 포항창진 곡식 1만5천섬을 이송해 백성을 구제했다.
포항에 창진이 설치될 수 있었던 것은 동해안 해로의 중심.
해운을 통해 경상도는 물론 전라도의 곡물까지 집결지.
배를 띄워 삼남지방과 함경도로 곡물을 이송할 수 있었다.
특히 바닷물이 흘러드는 형산강은 겨울에도 쉽게 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추운 겨울철에도 곡식을 이송하기에 유리.
포항창진이 설치되면서 포항은 농지개간 및 상업이 발달.
도시 모습을 갖추면서 다른 지역보다 성장 속도가 빨라 번성.
특히, 곡물 저장 및 운송을 위해 배가 자주 드나들었고,
이 때문에 물자를 교환하고 판매하는 유통이 활발해졌다.
포항에 장시가 서고, 객주 및 상권이 형성된 것도 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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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포항창진은 물가에서 100보 떨어진 곳
부지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1784년(정조 8)에 포항창진은 폐지되었다.
그대산, 영일지역의 지방창으로 축소 운영.
그러던 중에 경상감사 김세호가
군사·방어목적 진(鎭) 설치를 요청.
1870년(고종 7)에 포항진 설치 결정,
수군 첨사(水軍 僉使)를 두게 되었다.
특히 이때는 전국적으로 외세침략에 대비한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시기였다.
포항진이 다시 설치되면서 포항은 다시 한번
영일만 흥해지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포항창진과 포항진이 설치될 수 있었던 것은
도심 깊숙이 이어진 '동빈내항'의 역할이 컸다.
신라시대부터 문물교류의 관문이었던 동빈내항.
군사용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천혜의 입지이자.
조선 3대 시장으로 불리우던 부조시장(扶助市場).
역사적으로 볼 때 포항 발전의 시발점이자
현재, 포항을 있게 한 모태가 동빈내항이다.
포항운하 물길은.,'영일만 르네상스' 시발점.
포항제철.
조선시대 20리 모래사장 황무지였던., 어룡사(魚龍沙).
하늬바람, 모래바람이 세차게 불면, 눈을 뜰 수 없던 곳.
조선시대 "이곳이 번성할 것."이라 예언한.,이성지(李聖至).
조선 숙종 때 관상감에 근무하던.,이성지.
친구를 만날 겸 포항 어룡사 근처를 찾았다가
이 일대를 둘러본 뒤 예언을 남겼다는 풍수학자.
그당시 선비들은 그 알쏭달쏭한 예언에 고개를 갸우뚱.
하지만, 그후 오랫동안 어떤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던 곳.
1970년대 어느 날부터, 어룡사 모래사장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포항 어룡사(魚龍沙).
어룡사가 포스코 포항제철소 부지로 선정되었기 때문.
그곳에 들어선 포항제철소 굴뚝은 마치 대나무 같았고,
포스코 포항제철소 그 주변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포스코 역사박물관.
포스코박물관., '김홍도 그림' 대장간.
박정희가 유일하게 믿었던 인물,
위대한 기업인이자, 철강왕.,故 박태준.
박태준(朴泰俊, 1927.9.29 ~ 2011.12.13)
포항 '영일만의 기적'을 일궈낸.,인물.
.........................포항..........................
1959. 3. 12 해병대 1사단, 교육 훈련단 주둔.
대한민국 해병대의 요람이자 거점이 되었다.
교육 훈련단에서 모든 해병대원 교육훈련 담당.
해병대 이외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
해군 6 항공전단, 포항 항만 방어대대 등
포스코, 월성원자력발전소 같은
시설을 지키기 위한.,해병 1사단.
포항특정경비지역사령부 등을 설립.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이 있어
대구·경주·부산·서울로 통하며,
또한 경주에서는 경부선과 연결.
간선도로망이 해안과 내륙으로 뻗어 있고,
항구는 1962년부터 국제개항장으로서
국내외의 각 항구로 통할 수 있다.
또한 근래 국내 항공로가 개설되어
'수륙공'의 교통이 모두 편리한 포항.
.................................................
1930년대 포항.
조선시대 영일군. 장기군. 청하군. 흥해군 등이 있었으며
1731년, 난민을 구제하기 위해 '포항창진'을 설치하였던 곳.
오늘날, 포항이란 지명은 포항창진에서 유래한 것이라 전한다.
1871년 영일만 앞바다를 지키기 위해 설치된.,포항진(浦港鎭).
1910년 한일합방 후 장기.영일.흥해.청하의 4개 군이 통합되어
단일화된 영일군이 되었으며, 1949년에 포항읍이 포항시로 승격.
포항 장기면.,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한 곳.
'민속촌을 조성하여 '관광자원화' 계획이 있다.
포항시 기북면 오덕리에 자리한 '덕동마을'은
임진왜란 후 400년간 이어온.,여강 이씨 집성촌.
이곳 경북 민속자료.,애은당·사우정 고택과
경북 유형문화재 용계정 등 옛 건물들이 있다.
덕동숲, 호산 연못 등 한해 10만 관광객이 방문.
포항.,죽도 시장.
구룡포 근대문화 역사거리..죽도시장
포항 죽도시장에서 개복치에 고래 고기, 상어고기.
실컷 구경한 후에, 싸고 맛있는 물회 한 그릇을 먹고
포스코 박물관과 보경사 경내, 내연산 계곡 구경도 좋다.
포항 죽도시장.
구룡포 수협 직판장.,수산물 경매.
귀항하는 어선을 배경으로 솟아오르는
겨울철 해돋이는 보기 드문 장관인.,구룡포.
구룡포.,대게, 꽁치잡이 배.
호미곶에서 감포로 내려가는 길목.
구룡포 항구는 영덕대게 집하장이다.
구룡포항 배 밑바닥에 가득 들어찬 대게.
구룡포는 대게를 비롯하여
호미곶 돌문어, 오징어, 과메기 등
싱싱한 수산물을 직접 맛볼 수 있는 곳.
........................과매기............................
겨울철에 냉동상태의 꽁치를 내다 걸어 3~10일 동안
얼고 녹길 반복하여 말린 것으로, 주로 경북 지방 음식.
'과메기는 청어의 눈이 나란하도록 놓은 후 꿰어 말린다.'
그 의미의 관목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과거 청어를 많이 사용했으나 근래에는 많이 잡히지 않고
청어가 비싼데다, 건조기간이 오래 걸려 지금은 꽁치로 만든다.
주로, 경상북도 포항, 울진, 영덕 등지에서 생산.
................................................................
과매기 맛있게 먹는.,방법.
포항 구룡포.,과매기 덕장.
겨울철 별미.,과매기.
포항 죽도 구룡포 덕장
'과매기'의 맛이 유명하다.
구룡포 해수욕장.,오징어 덕장.
겨울철.,구룡포 해수욕장.
여름철.,구룡포 해수욕장.
구룡포.,장길리 낚시공원.
2009년 착공하여, 바닷길 데크 산책로와 넓은 주차시설,
부유식 낚시터, 해상펜션, 오리배, 희망등대 등 편의시설.
바다 쪽을 향하여 길쭉한 모양으로 길이 170m.,'보릿돌교량'
독특한 외형으로 바다 위를 걸으며 바다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학꽁치와 감성돔 등의 다양한 어종들이 잡히고 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하얀 집 해상펜션.
바다 위에서 여가를 즐겨볼 수도 있고,
오리배를 타며 추억을 만들 수도 있는 곳.
구룡포 항구.
1930년 구룡포'어선 선착장' .
1923년 일제시대 만들어진 구룡포항.
동해 최대 어업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
구룡포가 가장 번성한 시기는.,1930년대.
1910년경 어확량 감소로 배고픔에 시달리던 일본 어부들.
'하시모토 젠키치'와 '도가와 야스브로' 두 사람을 필두로
'풍부한 어확량' 구룡포로 건너와 개척 정착한.,일본인마을.
1910년, 일본 어민들이 구룡포에 정착할 당시
이곳 한국인은 2~3가구에 불과하였던.,구룡포.
일제시대 한반도 어업 전진기지로 번성한 구룡포.
사실 상, 일본인들에 의해 건설되고 운영된 구룡포.
이곳이 차츰 커지면서 이주해 오기 시작한 한국인들.
일본인이 운영하는 조합, 어선에서 일하며.,생계 유지.
하시모토 젠키치(橋本善吉) & 도가와 야사부로
그당시 구룡포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다.
하시모토의 집은 현재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구룡포.,근대역사관.
1910년에 한국으로 이주한.,하시모토.
어민들을 동원하여 구룡포 앞바다를 메우고
동해 어업전진기지 구룡포에 일본인마을 조성.
1930년대 일제 구룡포 어업조합장.
선어운반업을 하던 하시모토 젠키치.
일본에서 자재를 가져와 지었던 가옥.
현재, '근대역사관'은
'하시모토' 가옥 옛터.
함석지붕에다 정원을 갖추었고
흙, 나무, 종이를 주로 이용하였고,
채광을 위해 많은 창문을 낸 일본식 건물.
아직도 일본식 주거지 옛모습을
보존한 2층 구조, 건축면적 210㎡.
하시모토 집무실과 안방(다다미방)이 있는
1층 부엌 아궁이는 바깥으로 툭 튀어나왔다.
한국 재래식 아궁이 모습과는 대조적인 구조.
방 안에는 안녕을 기원하는 ‘불단(佛壇)’이 있다.
이 건물에는 평민가옥에서 볼 수 없는 폭 1m 툇마루.
이는 재력이 있는 일본인의 집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1,2층 각각 3개로 나뉜 방 사이에는 중간 방문을 설치
손님이 많으면 이를 떼내고 대형 집회장으로 사용됐다.
방과 방 사이 경계를 이루는 윗부분에 설치한, ‘란마(爛間)’
공간의 연속성을 주면서 통풍과 채광을 잘 할 수 있게 하였다.
하시모토 집의 2층 서재에는 액자나 족자 같은 장식품과 함께
위엄을 상징하는 흑단목 재질 ‘도코바시라’라는 장식기둥이 있다.
특이한 점은 대문 입구에 놓인 목재 재질의 ‘간독’.
“수산업 종사자의 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이 간독은
소금에 절인 생선을 보관하여 일본으로 유통하기 위한 것.”
구룡포가 가장 번성했던 1930년대에는
포구 인근 470m 중심도로 옆에 220여가구.
즐비한 적산가옥 중 현재 보존된 가옥은 28가구.
대부분 적산가옥 앞면 쪽 만
일본식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신사 일본인 공덕비가 있던.,구룡포공원
구룡포 번영기 사진은 대도시 중심가를 옮겨놓은 듯.
관공서, 학교, 병원, 백화점, 미용업소, 술집 등이 즐비.
이 거리에는 게이샤들이 운영하는 주점들도 많았다 한다.
일본과 한국 기생 150여명이 터를 잡았을 정도.
그당시,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일본인 학교를 다녔다는 옛 주민.
“번화가에는 극장 당구장까지 있을 만큼
전국의 어느 유명한 도회지보다 못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고향을 떠난 삶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
이를 떨치기 위해 주변에 공원을 만들고 신사와 절을 세웠다.
공원에는 27살 때 구룡포에 정착.
일본 어민들의 정주기반을 닦았던
도가와 야사부로의 공덕비가 서 있다.
일본인들이 '도가와 고향' 오카야마현의 규화석을 운반.
1944년 세운 이 공덕비는 기단부 3m, 비석 7m 크기이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시멘트로 발라 버렸기에 비문은 없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120 돌계단 옆에 세워진 돌기둥에는
구룡포 성장에 기여한 일본인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이 역시 대부분 시멘트로 뭉개졌고,
한국인들은 1960년 이곳 공원을 정비하면서
돌기둥을 뽑아 돌려 한국인 공헌자 이름을 새겼다.
‘신숙주’라는 한국인의 이름 뒷면에 있는
‘도가와 야사부로’ 만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가 구룡포에 기여한 사실을 인정하는듯..
구룡포 공원.
구룡포 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룡포 공원
구룡포 해수욕장을 지나면, 일출명소 호미곶.
공원에는 일제때 4곳 신사 & 2곳 절
지금은 그 옛흔적마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신사 앞 탑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기단부.
신사에 들어가기 전 손씻던 석재 재질의 세숫대야,
신사 건축 기초로 사용된 돌기둥 일부만 남아 있다.
신사가 있던 자리에 서있는.,한국의 ‘충혼탑.’
구룡포의 일본인 이주민이었던 1세대는 모두 사망했지만,
일본인 2, 3세들이 어릴때 구룡포 향수를 달래기 위하여
1978년에 ‘구룡포회’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구룡포 근대역사문화거리와 공원은
일본 관광객이 포항을 찾을 때 반드시 들르는 곳.
적산가옥에는 지번에 따라 ‘요리집’ ‘쌀집·과자상점’
일제시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표기.
구룡포.,모리국수.
'가가와현 어촌' 오다(小田) 출신
이시하라 히데오 구룡포회장(80)은
구룡포 근대역사관 홍보영상을 통해 언급.
“일본 해역에 고기가 잡히지 않으면서
옛 선조들이 구룡포로 가자 하여 이주했는데,
아직도 나는 어릴 적에 그곳에서의 기억이 생생하다.”
구한 말, 일본인 수산업자와 어민들이 정착하여 거주한
포항시 남구 구룡포.,근대역사문화거리 내.,적산가옥 골목.
그 왼쪽에 일본 전통복장 체험과 일본 차(茶)를 팔고 있는 가게.
구룡포.,적산가옥.
..................적산가옥(敵産家屋)........................
1945년 8월 15일 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여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정부에 귀속된.,일본인 소유의 주택.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 의미이며, 해방후 일반인에게 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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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 구룡포항 일대의 적산가옥(敵産家屋).
구룡포 읍내 밀집된.,일본식 가옥 200 여채를 복원.
현재, '일본인 유치' 관광자원으로서 활용하고 있다.
동해(東海)의 이어도.,왕돌잠.
2300만년전 동해가 열리면서
지각변동으로 솟은.,백두대간
그무렵에 정동진 언덕은 해수면.
한반도는 10만년에 10m씩 융기.
정동진 언덕 위., 단곡리, 곰두리
해안 단구에서 발견된.,조개 화석.
설악산 화강암은 지각변동의 흔적.
그당시 동해 밖으로 떨어져나간 일본.
동해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울릉도와 독도.
백두대간과 나란히 솟은 해저산맥에서 최고봉.
동해 바다 속 지각변동의 흔적.,대륙붕 해저산맥.
대륙붕은 플랭크톤이 많이 살아 옛부터 황금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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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에서 배로 두 세시간 달려나가면.
유난히 흰거품이 일고 있는 망망대해.
그물에 가득 고기가 잡히는.,황금어장.
그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어부들은 '동해의 이어도.'라 말했고
옛날부터 이름하여 왕돌잠이라 불렀다.
경남 영덕군 강구항에서 북쪽으로 축산항까지
아름다운 해안도로 20km를 달리다보면 축산항
축산항 조금 못미쳐 축산면 차유리 작은 섬.,죽도.
.
대나무가 빼곡한 죽도(竹島) 옆.,한적한 어촌.
커다란 바위들로 뒤덮힌 왕돌잠.
영덕 대게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
.
'왕'은 매우 크다는 뜻이고,
'돌'은 땅이나 들 또는 산을 뜻하고
'잠'은 바다 속에 잠겨 있는 바위를 뜻한다.
수심 300미터 대륙붕., 왕돌잠 해안은 깨끗한 모래밭
옛부터 정결한 곳을 좋아하는 대게 자생지로 알려졌다.
영덕에는 이곳 왕돌잠과 영덕대게에 얽힌 설화가 전해온다.
조선시대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랐다는 대게.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임금님은 체통도 아랑곳 없이
게살이 코와 입에 덕지덕지 묻어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본 신하들은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후 한동안 수라상에는 대게를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맛있는 대게의 맛을 잊을 수 없었던 임금님.
이제나 저제나
대게가 상에 오르기를
기다리다 참다 못한 임금님.
"대게를 당장 올리라" 불호령.
신하들은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다.
전국을 누비며 대게 찾아나서길 수개월.
영덕군 축산면 죽도(竹島)에서 찾아냈다.
마침 다리 생김새도 대나무처럼 꼿꼿하고,
잡은 곳도 대나무섬 인근이어서 이름도 '대게'
그렇게 다시 수라상에 올린 대게는 최고의 진상품
왕돌잠이 영덕대게의 고향이 된., 설화.
영덕 사람들은 영덕대게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이 설화를 빌어 왕돌잠을 '영덕대게 원조마을'로 선포
영덕 죽도 연안에서 잡은 대게는 역사 속에서 유명해졌다.
이곳 대게는 다른 곳에서 잡은 대게 보다 다리가 길고
속살이 알차고, 담백하고 쫄깃쫄깃한 맛이 소문이 퍼져
일제 때부터 상인들이 강구항이나 축산항으로 몰려들었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영덕대게는
영덕군 해안 모래밭까지 나와 돌아다녔고,
마을 아낙들이 찐 대게를 망태에 담아 팔았다.
하지만 요즘은 그 수확량이 뚝 떨어져
일제 때의 10%인 한해 300톤만 잡힌다.
.
오늘날 대게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은
영덕이 아니라 울진이나 구룡포 앞바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생겼다.
울진 사람들이 '영덕대게' 상표를
'울진대게'로 바꿔야 한다고.,주장
1996년 재판으로 번져
'울진대게'와 '영덕대게'를
함께 쓰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
이후 울진의 대게 음식점은
간판을 '울진대게'로 바꿨지만,
'영덕대게'에 익숙한 관광객에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울진이나 구룡포에서 집힌 대게도
영덕의 대게 집산지 강구항으로 실려와
'영덕 대게' 특산물로서 팔려나가고 있다.
막상 요즘 왕돌잠에서는
대게다운 대게는 잡히지 않는다.
주로 잡히는 대게 500~600g 크기 뿐.
그래도 '원조'는 '원조'.
영덕군에서 세운 원조대게 기념비
'대게의 고향'에 얽힌 내력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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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대륙을 달려온 산맥이
바다를 만나서도 멈추지 않았고
바다 속에서 솟구쳐오른 해저산맥.
태백산맥에서 울릉도까지
더 나아가 일본까지 이어진
동해 속 거대한 해저산맥 일부
그 해저산맥 일부에서도
'동해의 이어도'.,수중 왕돌잠은
가장 풍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곳.
백두대간의 한쪽 사면이 바다로 내달려
웅장한 해저산맥을 이루는 울진군 앞바다
경북 울진군 후포면 후포리 소재 후포항에서
동쪽으로 약 23Km 해상에 위치한 수중암초이다.
남북으로 길이 10km가 넘는 울릉도 규모.,해저산맥.
해저산맥 200m에서 솟아오른
대륙붕 일부 수중암초.,왕돌잠
수심이 얕은 곳은 5.3m
깊은 곳은 500 m~ 600m.
남북 2.5km 동서 700m정도.
맞잠, 중간잠, 샛잠(3 수중암초).,왕돌잠
왕돌초는 남북으로 길게 돌출된 형상으로
서쪽은 급한 경사를 이루는 반면 동쪽은 완만.
왕돌잠 어장면적은 여의도의 2배.
다이버들에게 의미있는 수심.,40m
3개 봉우리 수중암초 면적은 약 4㎢
중간잠은 수심 5~6m 수중암초,
북쪽 샛잠은 수심 6~7m 수중암초
남쪽 맞잠은 수심 9~10m 수중암초.
중간잠에는 항해를 안내하는 부표등대
수심 30m 정도 암반 위에 설치되어 있다.
후포 앞바다에 위치한 왕돌초에서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인해 연안쪽으로
남하하는 북한 한류와 그외 해역으로
북상하는 동한 난류의 교차가 이뤄진다.
동해저층수 용승현상 또한 일어나는 곳.
이러한 복잡한 해류의 영향은
풍부한 영양염의 공급과 함께
높은 해양 생산성을 뒷받침한다.
정상에서 수심 25m 까지 무성한 감태 수중림
모자반 종류도부분적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울릉도 독도 등에서 보이는 대황이나
연안지역에서 보이는 다시마는 보이지 않는다.
10m 이하 수심에는 홍합과 소라, 납작소라, 둥근성게
우렁쉥이, 바다나리, 부채뿔산호, 산호붙이 히드라 등
상업적 가치가 높은 전복 자원이 고갈된 것으로 보인다.
가시망둑 등 연중 머무는 광온성 어종이 56%,
참치와 방어 등 늘 이동하는 난류성 어종이 22%,
파랑돔줄도화돔, 거북복 등 아열대성 어종이 22%
아열대성 어종은 제주도 34%보다 적고
독도의 17%와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왕돌초 해양생태계는 후포, 울진보다
독도, 울릉도, 제주도 수중을 닮은 모습.
왕돌잠, 무화잠은
대게가 많이 잡히는
동해 해저산맥의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