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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平壤城)이 장안성(長安城), 장안성(長安城)이 평양성(平壤城) [제1편]
2024년 01월 20일
○「평양성(平壤城)은, 장안성(長安城)이라 하고, 고구려(高駒驪) 도성(都城)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는데, 더불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도 “평양성(平壤城)은,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한다”라고 ‘당서(唐書)를 인용(引用)’하여 말했다. 그렇다면 당서(唐書)는 왜, 무엇 때문에 “평양성(平壤城)은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한 것일까?”
“장안성(長安城)”은, 바로 “당서(唐書) 당사자(當事者)”들의 도읍지(都邑地)가 아니었던가? 결국(結局) 당서(唐書)에서 말하는 바는, 「“당(唐) 왕조(王朝)”는 “장안성(長安城)에 도읍(都邑)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후인(後人)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당(唐) 왕조(王朝)는, ‘돌궐(突厥)•선비(鮮卑)’의 혼혈족(混血族)이라고 한다.
【李淵 : 李淵是隋文帝楊堅皇后獨孤伽羅的外甥,也是隋煬帝楊廣的表兄.[因李淵母親為隋文帝獨孤皇后姐姐(所以李淵是隋文帝楊堅的外甥] 當時稱為八柱國家,仍賜姓大野氏】[저저(姐姐) : 누이 外甥 : 사위. 表兄 : 외종 사촌형] ➨ [李淵是隋煬帝楊廣的姨表兄弟。北周明帝的明敬皇后、李淵生母元貞皇后、隋文帝的文獻皇后分別是西魏八大柱國之一獨孤信的長女、四女、七女]
【隋文帝楊堅(541年7月21日∼604年8月13日), 因父親楊忠被西魏恭帝賜鮮卑姓,又名普六茹堅[1], 小字那羅延(梵語:नारायण/nārāyaṇa) / ‘漢太尉楊震十四世孫’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후대(後代)의 가필(加筆)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은,
① 평양성(平壤城)은, 한반도(韓半島)에 있고,
② 장안성(長安城)은, 대륙(大陸) 옛 고도(故都) “장안성(長安城)”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 ‘동국(東國)의 지리지(地理志)’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말하기를 :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며, 호경(鎬京)이며, 유경(柳京)이며, 낙랑(樂浪)이다.』라고 하였는데, 즉(卽),
➥〈王儉城,古記:檀君名王儉。箕城,樂浪,長安,【唐書:“平壤亦謂長安】 西京,西都,鎬京,柳京。【崔滋 : 三都賦】 : 왕검성(王儉城)은, 옛 기록에, 단군(檀君)의 이름이 왕검(王儉)이라고 하였다. 기성(箕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 【당서(唐書)에, “평양(平壤)을 또한 장안(長安)이라 한다”라고 했다】 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京)ㆍ유경(柳京)【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 있다.】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평양(平壤)”이란 “평안(平安)한 땅(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 고유명사(固有名詞)가 아닌 일반명사(一般名辭)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당서(唐書)의 내용(內容)이다. 곧 『당(唐) 왕조(王朝)는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에 황도(皇都)를 두고 있었던 나라였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
『고구려(高駒驪)와 당(唐), 두 나라가 “장안(長安)”의 장안성(長安城)에 황도(皇都)를 두고 있었다』라는 역사(歷史) 이야기가 전개(展開)된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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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古朝鮮)」을 우리는 통칭(統稱)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 하는데, “단군(檀君)”이란 “고조선(古朝鮮)의 첫 임금”을 말하는 것이니만큼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는 말을 “나라 이름(國名)이다”라고 하기에는, 뭔가 모자라는, 뭔가 부족(不足)한 느낌이 온다.
「고조선(古朝鮮)의 첫 번째 임금이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라고 해야 올바른 것이 아닐까?
즉(卽),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는 이가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이름하니, 시기는 요(堯)임금 때와 같다고 한다. [출처(出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라고 하였으니, 올바른 명칭(名稱)은 “조선(朝鮮)”이며, 사가(史家)들이 구분토록 한 것은 “고조선(古朝鮮)”이라 하는데, 이게 올바른 표현(表現)일 것 같다.
이때의 도읍지(都邑地)가 “왕검성(王儉城) 또는 왕험성(王險城) 또는 험독성(險瀆城)”이라고도 하는데, 사서(史書)에서는 두리뭉실 “평양(平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대로라면 : 평양(平壤)은 수천(數千) 년 영욕(榮辱)의 세월(歲月)을 조선(朝鮮)의 도읍지(都邑地)로 있었다는 전무후무(前無後無) 역사(歷史) 도시(都市)로 이곳은 수많은 역사(歷史) 유물유적(遺物遺跡)으로 도시(都市)의 기능(機能)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이 나와야 정상적(正常的)인 곳이다.
과연(果然) 그런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자.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유언비어(流言蜚語)일 뿐으로, 허허벌판이요, 제대로 된 유적(遺跡)조차 찾아볼 수 없는 땅이다. 옛 황성(皇城)의 발자취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해동(海東)」이란 「발해(渤海)의 동(東)쪽에 있어 해동(海東)」이라고 했으니, 그 “발해(渤海)”는 「북사(北史)에 의하면 지중해(地中海)와 흑해(黑海)다.」 이런 북사(北史)의 기록(記錄)을 반박(反駁)할 수 있는 자료(資料)가 없다.
「고조선(古朝鮮)의 도읍지(都邑地)는, 평양(平壤)이다」라고 하였다. 현재(現在)까지 고조선(古朝鮮)과 관련(關聯)되는 기록(記錄)이 없다. 신화(神話)적인 얘기만이 나열(羅列)되어 전설(傳說)처럼 회자(膾炙)되고 있을 뿐이다. 이게 못내 아쉽다.
「지중해(地中海) 동안(東岸), 흑해(黑海) 연안(沿岸)으로부터 “백두산(白頭山)인 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알타이(Altai) 山)=벨루하산(Belukha Mt)”에 이르기까지에 “초기(初期) 고조선(古朝鮮)”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思料)되지만, 그것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 사료(史料), 유적(遺跡), 유물(遺物) 등이 없다」라는 것이 가장 큰 약점(弱點)이다.
설령(設令), “그러한 것이 실존(實存)한다”하더라도 “이런 것이 바로 고조선(古朝鮮) 것이다”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그런 능력(能力)이 있는 자(者)가 있는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현(現) 실정(實情)으로 보면 이는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친일(親日)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이 득세(得勢)하고, 친미(親美)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한, 이러한 일은 요원(遙遠)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은 자주(自主)와 자립(自立)을 원(願)하지 않는 자(者)들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와의 관계(關係)다. 삼황오제(三皇五帝)가 고조선(古朝鮮)과 그 이전(以前)의 한민족(韓民族)과 어떤 관계(關係)가 있는 것인가? 「고씨(高氏)는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후손(後孫)이기 때문에 고씨(高氏)라 했다」 하고,
「금씨(金氏)【뒤에 김씨(金氏)?】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서 “금씨(金氏)”【뒤에 김씨(金氏)?】라고 했다」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결과적(結果的)인 해설(解說)’이지만 “삼황(三皇), 오제(五帝)의 ‘후손(後孫)=후예(後裔)’들이 바로 한민족(韓民族)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요(唐堯)와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동일(同一)인인가? 아니면 전혀 관계(關係)없는 인물(人物)인가? 왜 조선사(朝鮮史)와 중국사(中國史)는 개국(開國)과 소멸(消滅)이 같은 시기에 동일(同一)하게 이어져 왔을까?
「조선사(朝鮮史)와 중국사(中國史) 중에서 하나는 분명(分明) “짝퉁”이다,」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는? 「서로 다른 왕조(王朝)가, 서로 다른 땅에서, 반만년(半萬年) 이상(以上)을 이어오면서, 개국(開國)과 소멸(消滅)이 같은 시기(時期)에 함께 벌어졌었다」라는 역사(歷史) 해설(解說)은,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삼황오제(三皇五帝)’는 한민족(韓民族)의 역사(歷史)다. 그 내용(內容)이 각색(脚色)되었든 아니든 한민족(韓民族)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족(漢族)’ 이야기는 20세기(世紀) 초(初) 손문(孫文)에 의한 ‘정치적(政治的) 구호(口號)’로 탄생(誕生)되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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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平安道 平壤府
•《郡名 / 朝鮮,居東表日出之地,故名朝鮮。: 조선(朝鮮), 동(東)쪽 해 뜨는 땅에 있기 때문에 조선(朝鮮)이라 이름하였다. 史記 注索隱曰:朝音潮,鮮音仙,以有汕水故名。: 사기(史記)》 주(注) 색은(索隱)에 이르기를 : ‘조(朝)는 음이 조(潮)요, 선(鮮)은 음이 선(仙)이니 선수(汕水)가 있으므로 이름하였다’라고 하였다.》
➥『居 東 表 日 出 之 地 : 동(東)쪽 해 뜨는 땅에 살기 때문에“조선(朝鮮)”이라고 했다』라는 말은, 참으로 민망(憫惘)스러운 이야기다.
➂ 구라파(歐羅巴)에서 보면 : 동구라파(東歐羅巴) 땅은, ‘동표일출지지(東表日出之地)’다.
➃ 동구라파(東歐羅巴)에서 보면 : 중아세아(中亞) 땅은, ‘동표일출지지(東表日出之地)’다.
➄ 중아(中亞)에서 보면 : 신강(新疆) 땅은, 해 뜨는 ‘동표일출지지(東表日出之地)’다.
➅ 신강(新疆)에서 보면 : 하서회랑(河西回廊) 땅은, ‘동표일출지지(東表日出之地)’다.
➆ 감숙(甘肅)에서 보면 : 중원(中原) 땅은, ‘동표일출지지(東表日出之地)’다.
➇ 중원(中原)에서 보면 : 한반도(韓半島) 땅은, ‘동표일출지지(東表日出之地)’다.
➈ 한반도(韓半島)에서 보면 : 일본열도(日本列島) 땅은, ‘동표일출지지(東表日出之地)’다.
➉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보면 : 태평양(太平洋)은, ‘동해일출지지(東海日出之地)’다.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이게 논리(論理)라고 생각할 수 있나?
➥➥➥ 여기서 한 가지 확실(確實)한 것, 즉(卽) ‘천지(天地)간의 이치(理致)’는 : 〈⑪ 해가 뜨는 동(東)쪽 땅(地)과 ⑫ 해가 지는 서(西)쪽 땅이 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표지지(東表之地)와 서표지지(西表之地)”를 나누는, 가르는 곳이 어디냐? 하는 것인데, 이곳이 바로 “서토(西土)와 동토(東土)를 가르는 곳”이다. 이곳이 바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땅이자, “총령(葱嶺), 오랍산맥(烏拉山脈 : 우랄(Ural, 山脈)”이다.
『동국(東國)과 조선(朝鮮)이란 같은 나라(國家), 같은 땅(地)을 다르게 부르는 별칭(別稱)일 뿐이다.』 이걸 자꾸 꼬이게 만들고, 해설(解說)을 덧붙이고, 반도(半島) 땅으로 몰아넣으려 하다 보니, 바다(海)에서 떠다녀야 하는 ‘배(舟)’가 산맥(山脈)과 산맥(山脈)을 타고 날아다니는 ‘비행선(飛行船)’으로 둔갑(遁甲)되어 버리는 것이다.
➊ 《王儉城,古記:檀君名王儉。箕城,樂浪,長安,【唐書 : 平壤亦謂長安】西京,西都,鎬京,柳京. 【崔滋: 三都賦】 : 왕검성(王儉城), 옛 기록에, 단군(檀君)은 이름이 왕검(王儉)이라고 하였다. 기성(箕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 【당서(唐書)에, 평양(平壤)을 또한 장안(長安)이라 이른다고 했다.】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京)ㆍ유경(柳京)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 있다.】이다.》라고 하였다.
➨ 이런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 “당(唐)”이란 옛 왕조(王朝)의 정체(正體)는? 하는 문제(問題)가 대두(擡頭)된다.
➋ 樂志:崔滋賦:衆水所匯,名爲大同。皛溔滉漾,抱鎬斂灃。淨鋪素練,皎若靑銅。解錦纜浮蘭舟,中流回首,怳然如在畫屛中也。 : 최자(崔滋)의 부【賦 삼도부(三都賦)】에, “뭇 물줄기 모였으니 이름이 대동강(大同江)이라, 해맑고 넘실넘실, 번쩍여 출렁출렁, 호경(鎬京)을 안고 풍수(灃水)를 모아온 듯, 깨끗하긴 흰 비단을 깐 듯, 해맑기는 청동(靑銅 거울) 같은데, 비단 닻줄을 풀고 목란(木蘭) 배를 띄워 중류(中流)에서 머리를 돌리니 황홀하여 병풍 속에 있는 듯하네.” 하였다.
➨ 〈抱 鎬 斂 灃 : 호경(鎬京)【주무왕(周武王) 발(發)의 소도(所都),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을 품에 안고, 풍수(灃水)【섬서성(陝西省)의 강(江) 이름, 장안(長安)을 지나 위수(渭水)로 흘러든다】를 모은 듯하다〉라고 하였다.
➌ 〈鎬京地勝景雖多,遊賞偏憐帶郭河。初放牙檣輕信浪,忽傳羽斝快隨波。黃鸎囀處杜工部,白鷺飛邊張志和。澤畔恐遭漁父笑,朱顔頹玉莫辭酡! : 호경(鎬京) 승지(勝地)에 좋은 경치 많다 해도, 구경하며 놀기에는 성(城)을 띤 이 강물이 난 좋아라. 처음엔 돛을 달고 배 가는 대로 맡겼더니, 문득 술에 취해서는 물결대로 따라가네. 노란 꾀꼬리 우는 곳에, 이 몸이 두 공부(杜工部)인가,흰 해오라기 날아가니, 내사 장지화(張志和)로세. 연못가에서 어부(漁父)가 웃을까 염려되나, 주안(朱顔)에 곤드레만드레 취하기를 사양치 마소〉하였다.
➨ 〈鎬 京 地 勝 景 雖 多 : 호경(鎬京)에는 아름다운 경승지(景勝地)가 아주 많다〉라는 뜻이다,
➥➥➥ 위의 글 “➊+➋+➌”의 글을 보면 :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었음이 확실(確實)하게 고증(考證)해 주는 내용(內容)으로 되어 있다.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과 “중원(中原) 장안(長安)”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아주 유사(類似)하다든가 또는 그 땅(地)의 여러 가지 조건(條件)이 유사(類似)하여 장안(長安)을 빗대어 비교어법(比較語法)을 사용한 것도 아닌 「기정사실화(旣定事實化)하고 있다」라는 것은, 「장안(長安)이 곧 평양(平壤)이요, 평양(平壤)이 곧 장안(長安)이다」라는 뜻이다.
더더구나 “호경(鎬京)”은, 주무왕(周武王)의 도읍지(都邑地)요, “호(鎬)” 자(字)는 : “호경(鎬京) 호(鎬)” 자(字)로, “호(鎬)”라는 지명(地名)은 단 한 곳에 밖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고유명사(固有名詞)다.
또한 풍수(灃水)의 “풍(灃)”자(者) 역시(亦是), “강(江) 이름 풍(灃)” 자(者)로,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강(江) 이름 풍(灃)”자(字)다.
【풍수(灃水)의 서안(西岸)과 동안(東岸)에는 : 주(周)의 ‘풍(灃), 호(鎬)’ 두 서울이 모두 풍수(灃水)를 끼가 동서(東西)로 있었다.】
이같이 중원(中原)의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 땅에 있는 호경(鎬京)이나 풍수(灃水)가 ‘하 심심’하여 반도(半島) 땅, 평양(平壤)으로 나들이를 온 것을 아닐 터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를 새롭게 정립(正立)할 때라고 본다. ‘서세(西勢)와 일제(日帝)와 서남(西南)’인들이 만들어 놓은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을 과감(果敢)하게 깨뜨리고 “한민족(韓民族)과 한국(韓國)을 위한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를 새롭게 정립(定立)해야 한다.
새롭게 정립(正立)되는 역사(歷史)는,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에 의한,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을 위한,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의 역사(歷史)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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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사(高麗史)
定宗 2년[AD 947] : 二年, 春, 築西京王城 : 2년 봄에 서경에 왕성을 쌓았다.
光宗 11년[AD 960] : 改開京爲皇都 ; 西京爲西都 : 개경(開京)을 고쳐 “황도(皇都)”라 하고,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라 했다.
穆宗 [AD 998] 癸未改西京爲鎬京 : 서경(西京)을 호경(鎬京)으로 고쳤다.
穆宗 [AD 1,007] 是歲鎬京地震 : 이때 호경(鎬京)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穆宗 [AD 1,008] 冬十月幸鎬京齋祭 : 호경(鎬京)에 행차하여 제례를 지냈다. 冬十月幸鎬京齋祭赦存問耆老賜物.
顯宗 [AD 1,011] : 是月, 增修松嶽城, 築西京皇城 : 서경(西京)에 황성(皇城)을 쌓았다.
顯宗 [AD 1,015] : 甲午王宴群臣於長樂宮誅金訓崔質等十九人 : 갑오, 왕이 장락궁(長樂宮)에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김훈(金訓)과 최질(崔質) 등 19인을 처형하였다.
➥➥➥ 「서경(西京)=서도(西都)=호경(鎬京)」은 곧 “평양(平壤)”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① “서도(西都)란 : 서(西)쪽에 있는 도읍지(都邑地)란 뜻이고, ② 서경(西京)이란 서(西)쪽에 있는 서울을 뜻하는 말이고, ➂ 호경(鎬京)이란 주무왕(周武王)의 도읍지(都邑地)를 말하는 것이므로, 「① 서도(西都) = ② 서경(西京)은 즉(卽), ➂ 호경(鎬京)」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問題)가 대두(擡頭)되고 있는 것은 방위(方位)다. 「송경(松京)=송악(松嶽)=개봉성(開封城)=개봉부(開封府)=황성(皇城)」에서 어떤 명분(名分)이나 핑계를 대더라도 「평양(平壤)은 북(北)쪽의 서울 즉 북경(北京)」이 되는 것이지, 「서(西)쪽의 서울 서경(西京)이 될 수 없는 최악(最惡)의 경우(境遇)다.」
이는 ‘고려(高麗)의 영토(領土)’가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넓게 광활(廣闊)하게 분포(分包)되어 있었음을 증거(證據)하는 것으로, 「서경(西京)과 송악(松岳)과 동경(東京)」은 동서(東西) 방향(方向) 즉(卽), 횡축선상(橫軸線上)에 존재(存在)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반복(反復)되는 말이지만 : 북경(北京)을 서경(西京)이라고 하고, 남경(南京)을 동경(東京)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한민족(韓民族)을 능멸(凌蔑)하는 행위(行爲)다. 한민족(韓民族)은 방위(方位) 하나도 모르는 어리석은 민족(民族)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런 논리(論理)를 펴는 놈들이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 식민사관(植民史觀), 친일사관(親日史觀)’을 신봉(信奉), 추종(追從)하는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다.
호경(鎬京) : 이 호경(鎬京)에 대해서는 지리지(地理志)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말해주고 있는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며, 호경(鎬京)이며, 유경(柳京)이며, 낙랑(樂浪)이다.』의 호경(鎬京)과 같은 것이다. 수십(數十) 번도 더 설명(說明), 소개(紹介)한 것이나, 우리의 역사(歷史)에서 중복설명(重複說明)이 될 수밖에 없다.
➊ 長安(장안) :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이다. “한도장안(漢都長安)”이라는 말이 있다.
➋ 鎬京(호경) : 장안현(長安縣) 서남(西南)쪽에 있다. 周武王(發)의 所都다.
➌ 柳京(유경) : 長安 地域을 서동(西東)으로 흐르는 위수(渭水) 가에 많은 버드나무(柳)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장안(長安)의 별칭(別稱)이다. 특히 당대(唐代)의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단골 주제(主題)였다. 이 정도(程度)는 기본상식(基本常識)에 속(屬)한다.
➥ ➍ 주(周) 호경(鎬京)은, 위수(渭水)의 남(南)쪽 풍수(灃水)의 동(東)쪽에 자리 잡고 있다. ➎ 호경(鎬京)의 북(北)쪽에 한(漢) 장안(長安)이 있고, ➏ 한(漢) 장안(長安)의 바로 북(北)쪽에 진(秦)의 함양(咸陽)이 자리 잡고 있다. ➐ 당(唐)의 장안(長安)은 한(漢) 장안(長安)의 바로 동남(東南)쪽에 있다.
특히 「당대(唐代)의 장안성(長安城)」 안(內)에는 「불교사원(佛敎寺院)과 도교사원(道敎寺院) 및 조로아스터(Zoroaster)교 사원(寺院) 및 경교사원(景敎寺院) 등이 있었다」라고 전해지는데, ‘고구려(高駒驪)의 평양성(平壤城)도 많은 사원(寺院) 또는 사찰(寺刹)로 덮여있었다’라고 하였다.
➑ 장락궁(長樂宮) : 〈高麗史 世家 顯宗[AD 1,015] : 甲午王宴群臣於長樂宮誅金訓崔質等十九人 : 갑오(甲午), 왕(王)이 장락궁(長樂宮)에서 신하들에게 연회(宴會)를 베풀었는데, 김훈. 최질 등 19인을 주살(誅殺)하였다〉라고 하였다.
장락궁(長樂宮) : 장안(長安) 서북(西北)의 옛 성(城)안에 있다.
〈漢書高祖紀. 五年. 治長樂宮. 七年宮城. : 한서(漢書) 고조기(高祖紀)에는, 5년(年)에 장락궁(長樂宮)에서 다스렸고, 7년(年) 궁성(宮城)으로 하였다. 雍錄. 未央在漢城西隅, 而長樂乃其東隅也, 漢都長安. 兩宮初城, 朝諸侯君臣及於長樂, 不在未央也. : 옹록(雍錄)에 이르기를, 미앙궁(未央宮)은 한성(漢城) 서(西)쪽 모퉁이 있고, 장락궁(長樂宮)은 그 동(東)쪽 모퉁이다. 한(漢)나라 도읍지(都邑地) 장안(長安)의 양궁(兩宮)은 처음에 성(城)이었는데, 제후(諸侯) 및 군신(君臣)들이 장락궁(長樂宮)에서 조회(朝會)하였으며, 미앙궁(未央宮)은 없었다. 自惠帝以後皆居未央宮, 以長樂常奉母后. 故凡語及長樂者多曰東朝. : 혜제(惠帝) 이후 모두 미앙궁(未央宮)에서 살았다. 장락궁(長樂宮)에서 항시 모후(母后)를 받들었다. 장락궁(長樂宮)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기를 “동(東)쪽의 조정(朝廷)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글 “➑”에서 설명(說明)한 것처럼 : “장락궁(長樂宮)”이 반도(半島) 평양성(平壤城)에 있었다고 한다면, 이곳에 “한성(漢城)”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곧『한성(漢城)의 서쪽 모퉁이에 미앙궁(未央宮)이 있다』하였으니, 본래(本來)는『한성(漢城)』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城)이었다는 것이다.
「한성(漢城)은 한성부(漢城府)의 줄인 말」이라고 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한성(漢城)”이란 곧 “구(舊) 서울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본시(本是) ‘장안(長安)’에는「한성(漢城)」이라는 성(城)이 있는데, 그 성(城)의 서(西)쪽 모퉁이에 “미앙궁(未央宮)”이 있었고, 동(東)쪽 모퉁이는 “장락궁(長樂宮)”이 있었다는 것이다,
➥➥➥ 장안(長安)에는 본시(本是) ‘한성(漢城)’이 있었고, 이를 조선사(朝鮮史)로 보면 : 이는 한성부(漢城府)였다는 뜻이다. 그러면 반도(半島)의 한성(漢城)은 “모조품(模造品) 곧 짝퉁”이라는 얘기다. 웃기는 이야기가 아닌가!
➒ 유경(柳京)
『버드나무(柳)』가 대동강(大同江) 변에 10 ∼ 20리에 펼쳐져 있어 장관(壯觀)을 이뤘다는 의미(意味)자, 특징(特徵)으로 곧 평양(平壤)에 대한 별칭(別稱)으로 불린 것이다.
➨『유경(柳京)에 대한 고사(古事)』는 : 그 유명(有名)한 양귀비【楊貴妃 : 당(唐)나라 현종(玄宗 : 712~756 재위)의 귀비(貴妃)를 말하며, 본명(本名)은 옥환(玉環)이며, 현 산서성(山西省) 출신(出身)이라고 한다.】와 당(唐) 현종(玄宗)의 애정행각(愛情行脚)으로 유명(有名)한 화청지【華淸池 : 당(唐)의 궁내(宮內)에 있었다.】가에 심어진 버드나무(柳)가 유명(有名)하다.
장안(長安)을 흐르는 위수(渭水) 변에는 많은 버드나무(柳)가 있었다. 그래서 『장안(長安)을 별칭(別稱)으로 “유경(柳京)”』이라고 한 것이다.
고사(故事)를 보면, 「장안(長安)의 서(西)쪽에 있던 위수교(渭水橋)에서 서(西)쪽 땅으로 출정(出征)하는 연인(戀人)과 이별(離別)할 때, 서(西)쪽 지방(地方) 임지(任地)로 떠나는 남편(男便)이나 정혼자(定婚者)를 떠나보낼 때, 여인(女人)들은 버드나무(柳) 가지를 꺾어 그리운 임에게 주며, 반드시 돌아오라며 약속(約束)했다고 전(傳)해지고 있는데, 이는 버드나무(柳) 가지를 구부려서 떠나는 이에게 주는데, 버드나무(柳) 가지의 구부러진 가지를 펴면 원래(原來)대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런 풍속(風俗)이 생겼다고 하였다.
수많은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의 주제(主題)였음은 주지(周知)의 사실(事實)이다.
• 왕유(王維)의 “送 元 二 使 安 西”를 보면, 〈渭 城 朝 雨 昐 輕 塵 : 위성(渭城)의 아침 비는 가벼운 먼지를 적시고, 客 舍 靑靑 柳 色 新 : 객사에는 푸르고 푸른 버드나무 색이 새롭구나〉라고 하였으며,
‘왕유(王維)’는 버드나무(柳)를 “유랑(柳浪)”이라고 하였으며, 「임금(王)이 임지(任地)로 떠나는 신하(臣下)에게 궁성(宮城) 개천가의 버드나무(柳)를 꺾어 주었다고 전(傳)할 정도로 이곳의 풍속(風俗)이 되었다」라고 전해진다.
• 당대(唐代)에는 소위 “절양류(折楊柳)”라고 하여, 이별(離別)할 때 버드나무(柳) 가지를 꺾어 주었으므로 “이별(離別)”을 원망(怨望)하는 노래를 말하는데, 많은 곡(曲)이 있다.
• 왕창령(王昌齡)의 “규원(閨怨)” 에서는, 〈문득 길가의 버들 빛을 보고 : 忽 見 陌 頭 楊 柳 色〉라고 하였다.
장안(長安)을 흐르는 위수(渭水) 변의 버드나무(柳)를 노래한 것이다. 특히 “당대(唐代)에 많은 고사(故事)와 시인(詩人)들의 노래로 사랑을 듬뿍 받았던 “유경(柳京)”이다.
또 『지나가는 손님이 물을 청하면, 물속에 버드나무 잎 하나를 따서 물그릇에 넣어 준다고 하는데, 이곳은 급하게 마시지 말고 천천히 마시라.』는 뜻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그만큼 “버드나무(柳)”가 많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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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사(朝鮮史)」【史書, 王朝實錄, 文集, 地理志 等】에서는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역대전고(歷代典故) 기자조선(箕子朝鮮)」편을 보면 : 《旬五志 【홍만종(洪萬宗) : 1643~1725】 : 世傳箕子見鮮俗强悍, 以柳樹性柔, 悉令民家鍾柳, 故平壤一名, 柳京云 : 세상에 전하기를, “기자가 조선(朝鮮)의 풍속(風俗)이 억세고 사나운 것을 보고, 버드나무의 본성(本性)이 부드럽다는 이유로 백성(百姓)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버드나무를 심게 하였다. 이 때문에 평양(平壤)을 일명‘유경(柳京)’이라고 한다.”》라고 한다. 또 전하기를,
《平壤大同江東岸, 其長楡林, 擁路左右, 橫亘十里, 世傳箕子使民種植, 以備救荒 : 평양(平壤) 대동강(大同江) 동쪽 기슭에 긴 느릅나무 숲이 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데, 가로로 10리나 뻗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기자(箕子)가 백성(百姓)들에게 심게 하여 흉년(凶年)의 굶주림에 대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경(柳京)」이란 말은 : 최소(最小)한 3,000여 년(餘年) 전(前)부터 유래(由來)된 말이며, 「당대(唐代)의 장안(長安)을 유경(柳京)이라고 했다」라는 말은 조작극(造作劇)이다.
이를 또 고증(考證)하듯,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편을 보면, 『平壤(평양)은 長安(장안)이며, 鎬京(호경)이며, 柳京(유경)이며, 樂浪(낙랑)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 유경(柳京) 곧 “버드나무【柳 = 楡】서울”이라는 말은: 기자(箕子)의 뒤로부터 유래(由來)된 것이니 최소한(最小限) ‘삼천여년(三千餘年)’ 전(前)의 일이다. 이로 보면 “한도장안(漢都長安)”이라는 말은 가소로운 일이다.
(5) 조선인(朝鮮人)들은 “장안(長安)”에 대해 말하기를 :
➊ 난중잡록1(亂中雜錄一) 壬辰年, 上, 宣祖 25年【AD 1,592, 萬曆 20年】 : 《三 十 日。車 駕 西 幸。初 三 日. 賊 入 長 安 城 中。: 30일, 거가【車駕 : 임금의 수레】가 서(西)쪽으로 행차하였다. 초(初) 3일. 적(賊 : 倭)이 장안성(長安城) 안(中)으로 들어왔다.》라고 하였다.
➋ 은봉전서(隱峯全書)【安邦俊 : 1,573∼1,654】混定編錄續集. 仁祖朝, 乙亥丙子 :《若 大 駕 西 行。當 出 謁 路 次。以 竢 進 退 之 命。而 旣 而 去 邠 之 計。決 於 一 夕。卽 到 臨 津. : 대가(大駕)가 서(西)쪽으로 갔다. 원래부터 빈(邠)을 떠나는 것은 계획(計畫)이 있음이다【而 旣 而 去 邠 之 計】》라고 하였다.
➨「빈(邠)」은, “장안(長安) 북(北)쪽 근교(近郊)의 현(縣)”으로, ‘빈(邠)’은 ‘빈(豳)’과 같고, ‘빈(彬)’과 같다. ‘빈(邠)’은 주(周) 문왕(文王)의 조부(祖父)인 태왕【太王 : 고공단보(古公亶父)】이 살던 곳으로, 융적(戎狄) 침입(侵入)으로 기산(岐山)으로 옮겼다는 고사(古事)가 전해지고 있다.
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동요(童謠) 편에서 이르기를 : 《 壬 辰 倭 亂, 聞 賊 勢 甚 急, 以 四 月 三 十 日, 去 彬 大 雨 : 임진왜란(壬辰倭亂), 적(賊)의 세력이 강(强)하다는 말을 급히 듣고, 4월 30일, 빈(彬)을 떠나는데 큰비(大雨)가 내렸다.》라고 하였는데,
「빈(彬)」은 「빈(邠)」을 말하는 것이다. 【빈(邠)=빈(豳)=빈(彬)】
➍ 선조대왕(宣祖大王)의 시(詩)에서 이르기를 : 《去 邠 存 大 計, 恢 復 仗 諸 公 : 빈(邠)을 떠남은 큰 계책을 위함이요. 회복(回復)은 여러 공(公)들을 믿는다. 慟 哭 關 山 月, 傷 心 鴨 水 風 : 관산(關山)의 달에 통곡(慟哭)이요. 압수(鴨水)의 바람에 상심일세. 朝 臣 今 日 後, 尙 可 更 西 東 : 조정의 대신들아! 금일 이후(以後)에도, 이러고도 또 서인(西人)이니 동인(東人)이니 하려는가》라고 하였다.
➥➥➥ 「큰 계책(計策) 곧 대계(大計)」가 무슨 얼어 죽을… …군주(君主)가 군주(君主)답지 못하니 신하(臣下)들이 작당(作黨)하여 패를 가르고, 매관매직(賣官賣職), 부정부패(不正腐敗)가 만연(蔓延)하고, 백성(百姓)들의 고휼(顧恤)을 짜내니 민심(民心)이 흉흉하니, 내란(內亂)이 일어나는 것은 세상(世上)의 이치(理致)요, 감당(堪當)하지 못하고 도주(逃走)하는 주제에 무슨 대계(大計)가 있었다는 말일까!
현대사(現代史)의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보면 : “역사(歷史)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라는 말은, 진리(眞理)다.
➥ “선조(宣祖)”는, 도성(都城)과 팔도(八道)의 수많은 백성(百姓)들을 ‘나몰라라’하고, ‘지 혼자 살아 보겠다’고 ‘야반도주(夜半逃走)’한 군주(君主)답지 않은 군주(君主)가 아니었나!
➥ 그럼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뭔가? ”지 혼자 살아보겠다“고 수많은 서울시민(市民)을 내팽개치고, 그 나이에 부인(婦人) 손을 잡고, 야반도주(夜半逃走)한 대통령(大統領)답지 않은 대통령(大統領)이 아니었나! 그게 칭송(稱頌)할 일인가? 그걸 기리자는 것인가?
이런 사람을 칭송(稱頌)하자는 사람들은 뭐냐? 기념관(記念館)을 만들자는 사람들은 뭐냐? 자유(自由)가 넘쳐 홍수(洪水)가 날 지경이라고 하더라도 ”지도자(指導者)가 ‘지’ 혼자 살겠다고 구성원(構成員)들을 내팽개치고 “야반도주(夜半逃走)”한 사람을 기리고, 칭송(稱頌)하여, 기념관(記念館)을 세우자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차 있을까?
이런 사람들이 보수우파(保守右派)라고 자칭(自稱)한다. 보수우파(保守右派)라면 이런 유형(類型)의 인물(人物)들에 대해서 가차(假借)없는 평가(評價)와 함께 내쳐야 되는 것 아니었나! ‘보수우파(保守右派)’란 이런 인물(人物)들을 옹호(擁護), 보호(保護)하는 주의자(主義者)들인가?
➥ 이래서 「“대한민국(大韓民國) 보수우파(保守右派)”를 “사이비(似而非) 보수우파(保守右派)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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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륙사(大陸史)【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중국사(中國史)】는?
➊ 북사(北史) : 《其王好修宮室, 都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與新羅每相侵奪, 戰爭不息. : 그 나라 왕(王)은 아름다운 궁실을 짓고, 평양성(平壤城)에 도읍(都邑)하였는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부른다. 동서(東西)로 6리다. 산(山)의 굴곡(屈曲)을 따랐는데, 남(南)쪽은 패수(浿水)에 임한다.》라고 하였다.
➋ 주서(周書) : 《其地, 東至新羅, 西渡遼水二千里, 南接百濟, 北鄰靺鞨千餘里. 治平壤城. 其城, 東西六里, 南臨浿水. 其外有國內城及漢城. : 그 땅은, 동(東)쪽으로 신라(新羅)에 닿고, 서(西)쪽으로 요수(遼水)를 건너 이천(二千)리이고, 남(南)쪽으로는 백제(百濟)에 접(接)하며, 북(北)쪽으로 천여(千餘) 리에 말갈(靺鞨)과 이웃한다. 평양성(平壤城)에서 다스렸는데, 그 성(城)은 동서(東西)로 6리이고, 남(南)쪽은 패수(浿水)에 임한다. 그 외(外)에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다.》고 하였는데,
➥ 여기서 말하는 “한성(漢城)”은? 바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불리기 전(前), 성(城)의 이름이 바로 “한성(漢城)”이라고 하였다. 바로 “한고조(漢高祖) 본기(本紀)”에 나오는 말이다.
또 「고구려(高駒驪)의 서(西)쪽은, “요수(遼水)”를 건너 ‘2 천리(千里)’ 까지였다」라는 말이고, 「신라(新羅)는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의 동(東)쪽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 「요수(遼水) 서(西)쪽 ‘2 천리(千里)’까지 “고구려(高駒驪)” 땅이었다」라고 한다면 :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연경(燕京)】까지 고구려(高駒驪) 땅이었다는 것이고,
• 평양(平壤) 동(東)쪽에 “신라(新羅)”가 있었다는 말은, 오늘날의 열도(列島) 본주(本州)【혼슈】의 동경(東京)【도쿄】땅에 있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신라(新羅)인들 또한 인간(人間)이기 때문에 동해(東海) 속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周)【선비계(鮮卑系)】는 고구려(高駒驪)와 함께 공존(共存)했던 왕조(王朝)였다」는 것을 상기(想起)하면 : 이 기록(記錄)은 ‘사실(史實)로 입증(立證)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
➌ 수서(隋書) : 《其國東西二千里, 南北千餘里. 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復有國內城. 漢城,並其都會之所, 其國中呼為三京. 與新羅每相侵奪, 戰爭不息. : 그 나라는 동서(東西) 이천(二千)리, 남북(南北)은 천여(千餘) 리(里)이며, 도읍(都邑)은 평양성(平壤城)이다.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 부른다. 동서(東西) 6리이며, 산(山)을 따라 이리저리 꺾이고 굽어 있으며, 남(南)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한다. 다시 국내성(國內城), 한성(漢城)이 있는데, 그곳은 나란히 도회지(都會地)로써, 그 나라 안에서는 삼경(三京)이라 부른다. 신라(新羅)와 매양 서로 침탈(侵奪)하니 전쟁(戰爭)이 끊이질 않았다.》라고 하였다.
➨ 「평양성(平壤城)은 곧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하였으며,
➨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고 하였다. 【한성(漢城)은 ➋ ➥참조(參照)】
➍ 구당서(舊唐書) : 《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渡海至於新羅,西北渡遼水至於營州,南渡海至於百濟,北至靺鞨。東西三千一百里,南北二千里。: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는데,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옛 땅으로, 경사(京師) 동쪽 5천 1백 리에 있다. 동(東)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신라(新羅)에 닿고, 서북(西北)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닿고, 남(南)쪽 바다를 건너면 백제(百濟)에 닿고, 북(北)은 말갈에 이른다. 동서(東西)가 3천 1백 리요 남북(南北)이 2 천리(千里)이다.》라고 하였다.
➥ 「경사(京師) 동(東)쪽 5천 1백리(百里)에 있다」라는 것은, 역설적(逆說的)으로 「장안(長安)으로부터 서(西)쪽으로 ‘5천(千) 1백리(百里)’에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땅이 있었다」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서안(西安)】으로부터 서(西)쪽 ‘5 천리(千里)’는 어디일까?
① 장안(長安)에서 반도(半島) 평양(平壤)까지는 1,560㎞ : 약(約) 4 천리(千里)다.
② 장안(長安)에서 구자국성(龜茲國城) 까지는 2,600㎞ : 약 6,500리(里)다. 장안(長安)에서 5,100리(里)가 되는 곳은, 정확(正確)하게 투루판[吐魯番 : Turpan]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장안성(長安城)과 똑같은 도성(都城)이 없다. 그러나 그 서남(西南)쪽에 있는 「“구차국성(龜茲國城)”은 장안성(長安城)과 똑같은 구조(構造)로 만들어져 있었다」라고 사서(史書)는 말해주고 있다.
구당서(舊唐書)에서도 “평양(平壤) 동(東)쪽 바다를 건너면 신라(新羅)에 닿는다”라고 하였으며, 「고구려(高駒驪) 영토(領土)는, 동서(東西) 3,100리, 남북(南北) 2,000리였다」라고 하였다.
➎ 신당서(新唐書) :《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為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 그 나라의 임금(君)은 평양성(平壤城)에 사는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곧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이다. 경사(京師)에서 5천여(千餘) 리 떨어져 있으며, 산(山)의 굴곡(屈曲)을 따라 감싸며 외성을 쌓았다. 남(南)쪽은 패수(浿水)의 물가이며, 그 왼편으로 왕(王)이 궁(宮)을 지었다. 또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어 별도의 서울(都邑)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 「경사(京師) 동(東)쪽 5천 여리(餘里)에 있다」라는 것은, 역설적(逆說的)으로 「장안(長安)으로부터 서(西)쪽으로 5천(千) 1 백리(百里)에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땅이 있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서(唐書)의 말에 따르면 : 〈“당(唐)”의 도읍지(都邑地) “경사(京師)”는 곧 “장안성(長安城)이 아니었다.”〉리는 뜻이다. 「‘장안(長安)과 경사(京師)’는 전혀 다른 뜻」이기 때문이다.
장안(長安)이란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또는 장안군(長安郡)의 지명(地名)이고, “경사(京師)”란 말은 “나라(國)의 서울 즉(卽) 도성(都城)”을 말하기 때문이다.
➏ 원사(元史) : 《東寧路,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漢滅朝鮮, 置樂浪、玄菟郡, 此樂浪地也。: 동녕로(東寧路)》는, 본래(本來) 고구려(高句驪) 평양성(平壤城)이다.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부른다. 한(漢)이 조선(朝鮮)을 멸하고, 낙랑(樂浪), 현토군(玄菟郡)을 두었는데, 이곳은 낙랑(樂浪) 땅이다.》라고 하였다.
➐ 명사(明史) :《漢末,有扶余人高氏據其地,改國號曰高麗,又曰高句麗,居平壤,即樂浪也. : 한말(漢末)에, 부여(夫餘)인 고씨(高氏)가 그 땅에 거하고, 국호(國號)를 고쳐 고려(高麗)라고 하였는데, 또 고구려(高句麗)라고도 하고, 평양(平壤)에 살았는데, 곧 낙랑(樂浪)이다.》라고 하였다.
➑ 통전(通典) : 《自東晉以後,其王所居平壤城, 亦曰長安城, 隨山屈曲, 南臨浿水 : 동진(東晉) 이후(以後)에, 그 왕(王)이 평양성(平壤城)에 소거(所居)하였는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였다. 산(山)의 굴곡(屈曲)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남(南)쪽은 패수(浿水)에 임했다. 【注 : 其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 東西六千里 : 그 땅은 후한(後漢) 시에 사방(四方) 2 천리(千里)였는데, 위(魏) 때는 남북(南北)이 점점 좁아지고, 겨우 천여(千餘) 리였으나, 수(隋)나라 때에 이르러 점점 커져, 동서(東西) 6 천리(千里)였다.】》
➒ 명일통지(明一統志) : 《其王髙璉居平壤城即樂浪郡地 : 그 왕(王) 고련(高璉)이 평양성(平壤城)에서 살았는데, 곧 낙랑군(樂浪郡) 땅이다.》
➓ 청일통지(淸一統志) : 《都平壤城即朝鮮國王險城也 : 평양성(平壤城)이 서울인데, 곧 조선국(朝鮮國) 왕험성(王險城)이다.》
⓫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 《自東晉已後, 其王所居平壤城, 卽漢樂浪郡, 王儉自慕容慕來伐後, 徙國內城, 移都此城. 亦曰長安城. : 동진(東晉) 이후(以後)에, 그 왕(王)이 평양성(平壤城)에 소거(所居)하였는데,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이다. 왕험성(王險城)은 모용(慕容) 씨가 와 친 뒤에,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다. 도읍지를 옮겼는데 이곳 성(城)이다.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其城隨山屈曲, 南臨浿水, 在遼東南東千餘里. 其外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 그 성(城)은 산(山)의 굴곡(屈曲)을 따라 만들어졌고, 남(南)쪽은 패수(浿水)에 임하는데, 요동(遼東) 동남(東南) 천여(千餘) 리에 있다. 그 밖에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는데, 또한 별도(別途)의 서울이다. 其地後漢時二千里, 至後魏南北漸狹, 境纔千餘里, 至隋漸大, 東西六千里 : 그 땅은 후한(後漢) 때에 2 천리(千里)였는데, 후위(後魏) 때에 이르러 남북(南北)이 점점 좁아지고, 지경(地境)이 겨우 천여(千餘)리였는데, 수(隋) 때에 이르러 점점 커져, 동서(東西) 6 천리(千里)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장안(長安)」에서 「위수(渭水) 북안(北岸)에 함양(咸陽)이 있고, 한(漢) 장안(長安)은 남안(南岸)에 있고, 그 남(南)쪽에 호경(鎬京)이 자리 잡고 있다.」
평양성(平壤城) 남(南)쪽에 패수(浿水)에 임(臨)한다면 : 「함양(咸陽) 자리가 곡 평양성(平壤城) 터다.」
➨ 한성(漢城)에 대해서는 위의 글 “➋”의 ➥ 여기서 말하는 “한성(漢城)”은? 바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불리기 전(前), 성(城)의 이름이 바로 “한성(漢城)”이라고 하였다. 바로 “한고조(漢高祖) 본기(本紀)”에 나오는 말이다.
또한 고구려(高駒驪) 영토(領土)는, 「수대(隋代)에 이르러 점점(漸漸) 커져 동서(東西) 6 천리(千里)가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수양제(隋煬帝)가 2백만(百萬) 대군(大軍)을 출정(出征)시켰으나, 궤멸(潰滅)되어 “수(隋)”나라가 망(亡)한 원인(原因)이 된 것이다.
여기서 ‘동서(東西) 6 천리(千里)’는 한반도(韓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대륙(大陸)의 땅에서 벌어졌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 ‘장안(長安)과 평양성(平壤城)’에 대한 ‘글’은 여러 편(篇)이 우리 카페에 게재(揭載)되어 있다. 새로운 사료(史料)가 있을 때마다 추가(追加), 보완(補完)하면서 설명(說明)하다 보니, 여러 편(篇)이 된 것이다. [제2편으로 계속(繼續)]
2024년 01월 20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다음 [2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도성이었던 '한양=한성부'를 장안(長安) 또는 빈이라고 했다는 기록에 따라 선조대왕시절의 도성이었던 '한성(漢城)=장안(長安)'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도록 합니다.
*** 장안에 대한 여러 고시가 일치되는 곳을 찾고 지세를 찾아봐야 그 일치되는 곳을 찾아내면 되는 일인데, 이게 쉽지않은 일이겠죠!
오늘날 우리가 중국사라고 말하는 여러 왕조들은 옛 조선(총칭)의 제후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통상적으로 말하는 조선영토라는 것은 칠묘(七廟)를 보시는 천자국에서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땅을 말한다고 보아집니다.
*** 우리가 아무리 식민사학에 세뇌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칠묘(七廟)"를 모시는 것은 천자가 할 일이고, 일반 사대부는 고직 1묘(一廟)를 모셨을 뿐입니다. 이건 당시의 봉건왕조 시절에서 있어 철칙처럼 여겨졌던 '례'입니다.
조선왕조(총칭)는 칠묘를 모셨다는 것은 이미 다 밝혀진 일입니다. 그걸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선택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근세기 형편을 보면 우리가 제사를 지낼 때 고조까지 제사를 모셨는데, 이는 사대부가에 한이 맺힌 서민들이 어거지로 만들어 놓은'예' 아닌 '예'인 셈이죠.
*** 예를 들어 "이성계"가문을 보면 "고조 이안사"로부터 군벌호족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이성계 조선은 일게 제후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식민사학의 왜곡, 조작이라고 봅니다.
*** 어떤 어리버리한 자가 천자국을 뒤엎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성공하고 역성군주를 탄생시켰는데 제후국으로 만들었나?를 생각하면 고려왕조와 조선왕조가 천자국이었음을 숨기려했다는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 기록입니다.
*** 2편으로 끝낼지, 3편, 4편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사료를 바탕으로,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