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관산성 축성
(1) 관산성의 위치
관산성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에 ‘백제왕 명농(성왕)이 가야와 함께 관산성을 공격해왔다’(주석 1) 참조) 에서 관산성이 처음 언급되었고,
삼국사기 권 41 열전 3 김유신 하 에서 ‘문무대왕이 영공(이적)과 함께 평양을 격파하고 남한주에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백제의 명농왕(성왕)이 고리산(古利山)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 유신의 조부 무력 각간이 장수가 되어 그들을 맞아 싸워 이겼으며, 승세를 타고 그 왕과 재상 네 명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세력을 꺾었다.’ 주50) 에서 고리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관산성과 고리산이 같은 지역이라고 볼 수 있으며, 삼국사기 권 34 잡지 3 지리 1에 관성군은 원래 고리산군인데 경덕왕이 개명 후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이 둘이다. 이산현은 본래 소리산현이었는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현진현(안정현)은 본래 아동호현이었는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현재는 안읍현이다. 주51) 로 되어 있어 관성군의 전(前)지명이 고리산군으로 관산성과 관성군이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가 1861년 이후부터 1866년경 사이에 편찬한 32권 15책의 필사본 전국 지리지이자 역사지리서인 대동지지에서 옥천군 (일운 대산군 , 일운 관산성 ) 연혁 본래는 신라 고리산이였다가 경덕왕 16 년 관성군으로 고쳤다 ((一云岱山郡一云管山城 )沿革本新羅古尸山景德王十六年改管城郡)라고 되어 있어 관성군과 관산성이 같은 지역임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대동지지에서 옥천군이 고리산, 관성군, 옥천으로 개명되어 왔음을 말해주고, 특히,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 (1454년(단종 2)에 옥천군 본래 신라의 고리산군인데, 경덕왕이 관성군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무오(9년)에 경산부 임내(관할)로 속했고 인종 21년 계해에 처음 현령을 두었다. 충선왕 5년 계축(즉 송나라 인종 황경 2년)에 지옥주사(知沃州事)로 승격하고, 경산부 임내(관할)에서 분리되었다. 이산 안읍· 양산등 3현이 이에 속했다. 본조(조선)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옥천군으로 고쳤다. 주52)
지도 04 옥천주변
고리산군, 관산성에서 관성군 그리고 조선 태종 13년(서기 14313년) 옥천군이 되어, 현재까지 옥천군으로 내려오므로 현재의 옥천군이 관산성으로 속현을 제외하면 이원의 옛지명이 이산이므로 이원이 제외되고, 안읍이 제외되니 안남, 안내가 제외되고, 군서면 은행리 무중골에 백제군이 주둔 전설을 감안, 금강의 서쪽과 서화천의 동쪽이 대략적인 관산성 지역으로 사료됩니다. 지도04 참조
옥천읍 대골(마항리) 전설에 관산성 전투 시 신라 김무력 장군이 대골(마항리)에서 군사를 모아 정비 후 관산성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주53) 지도04를 참조하면 대골(마항리, 대천리)이 관산성 지역 안에 있으므로 이 때의 관산성은 삼거리토성, 서산성, 삼양리토성, 삼성산산성으로 좁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 05 옥천군 문화유적분포 지도, 2005, 옥천군과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행한 지도(고속철도 설치 및 금구천 직선화 정비되기 전 지도), 지도 8번 삼거리토성, 5번 서산성, 10번 삼양리토성, 15번 삼성산성 임
지도05는 삼거리토성, 서산성, 삼양리토성, 삼성산 산성이표시된 지도입니다. 천태산, 대성산, 장령산, 삼성산으로 이어지는 장령지맥이 금구천에 의해 끊어지고, 금구천이 지도05와 같이 굽이 흐르다가 서화천과 만나니, 금구천과 서화천은 자연스럽게 삼거리토성과 삼성산 산성의 북으로부터의 방어하는 해자 역할을 합니다.
4개의 성이 각각의 작전권을 갖고 독자적으로 독립된 성으로 존재했다기 보다 각각의 성에는 역활이 있어, 삼거리토성은 옥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전망하고, 통행을 통제하는 관문 역활을, 삼성산성과 서산성은 삼거리 토성쪽으로 정면 공격을 하다가 실패하면 우회 공격을 하는데 이 우회 공격을 막는 역할을, 삼양리토성은 전투의 일선에서 뒤에 있어 3개 산성의 역할을 뒤에서 통제하고, 명령을 하는 지휘소 역할 및 이 성에 대해 차용걸 교수는 산성의 형태나 옥천의 어느 성곽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곽으로 옥천 초기 지역을 다스리는 치소로 역할한 것으로 추정 주54) 하였으니 각 성끼리 서로 보완을 하며, 하나의 명령체제로 운영이 된 하나의 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차용걸 교수는 관산성 위치에 대해 대략 옥천읍 삼양리 삼양리토성 일대와 군서면 서정리 일대의 서산성을 포함한 서화천일대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주55)
(2) 관산성의 축성 시기
앞부분 지도01을 참조하면 백제의 왕도가 공주일 때 신라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공주, 보은, 상주를 경유하면 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진으로 세종시 부강면 부강리 남성골을 점령으로 신라와 교통하기 위해 옥천(관산성)으로 우회하여야 했고, 486년 굴산성을 개축했는데, 이는 관산성(옥천)에서 청산 경유 상주까지 직선거리이고, 보은을 경유하는 것이 우회하는 길이기 때문에 옥천, 청산의 교통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굴산성을 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486년 신라가 보은 삼년산성과 청산 굴산성을 개축한 것은 나제동맹 기간 고구려의 남진을 공동으로 방어 및 백제와의 교통을 위해 백제와 협의 하에 개축한 것으로 보이며, 관산성 역시 고구려의 남진의 방어 및 신라와 교통을 위해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시기는 백제는 관산성(옥천)을 축성하고 신라는 삼년산성과 굴산성의 개축하면서 나제동맹을 유지했을 것으로 보이며, 486년 전후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주50) 三國史記 四十三. 列傳第三. 金庾信 下 文武大王旣與英公 破平壤 還到南漢州 謂群臣 曰 昔者 百濟 明襛王 在 古利山 謀侵我國 庾信之祖 武力 角干 爲將逆擊之 乘勝俘其王及宰相四人與士卒
주51) 三國史記卷第三十四 雜志第三 地理一 管城郡 本古尸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利山縣 本所利山縣 景德王 改名 今因之 縣眞縣 本阿冬號縣 景德王 改名 今安邑縣
주52) 世宗實錄地理志 5집 627쪽 沃川郡 本 新羅 古尸山郡 景德王 改爲 管城郡 高麗 顯宗 戊午 屬 京山府 任內 仁宗 二十一年癸亥 始置縣令 忠宣王 五年癸丑(卽 宋 仁宗 皇慶 二年) 陞爲知沃州事 割 京山府 任內 利山 安邑 陽山 三縣以屬之 本朝 太宗 十三年癸巳 例改爲 沃川郡
주53)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2003, 옥천군, 충북대학교중원문화연구소, 68쪽; 옥천의 마을 유래, 2008, 옥천문화원 28쪽
주54)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2003, 옥천군, 충북대학교중원문화연구소, 78
주55)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2003, 옥천군, 충북대학교중원문화연구소, 58
첫댓글 古尸山을 왜 고리산으로 읽으시나요?
바로 전 목록인 고구려 남진 3) 옥천 고리산을 참조하세요
古利山(고리산)과 古尸山(고시산)이 같은 뜻일지도 모른다는데는 동의가 되는데 같은곳이라는것은 동의가 안되네요. 같은곳이라면 비슷한시기에 뭐할려고 다른한자를 쓰겠습니까? 오히려 서로 다른곳이라고 보는게 옳을듯 한데요?
한자와 구분되게 한글이전에 우리민족이 사용했던 이두, 향찰, 구결에 대해 공부해보세요
그리고 같은 시기라기보다는 삼국사기가 만들어진 시점이 고려시대이니 이점도 고려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