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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4일 [연중 제2주일]
요한 1,35-42
메시아를 진정으로 만날 때 일어나는 일
죄의 원인은 한 마디로 ‘불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시러 오신 것이 ‘평화’입니다.
미국에서는 건전하게 살던 청년들이 베트남 전쟁 때 20% 정도가 헤로인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쥐 실험에서도 쥐 한 마리를 가두어두고 일반 물병과 마약이 든 물병을 두면 대부분 쥐는 약물이 들어있는 물병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1970년에 심리학자 브루스 알렉산더는 쥐가 과연 마약에 중독된 것인지, 환경 탓인지를 고민하여 새로운 실험을 합니다.
그는 인턴으로 일할 때 만났던 한 환자를 떠올렸습니다.
그 환자는 크리스마스 때 쇼핑몰에서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가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기에게 맞지 않았던 그는 헤로인의 힘을 빌려 무대에서 여섯 시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독은 중독 자체가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쥐들의 천국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놀이기구들과 친구들, 짝짓기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쥐들은 약물이 든 물을 섭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베트남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어땠을까요? 미국으로 돌아온 군인들은 95%가 자발적으로 헤로인을 끊었습니다.
헤로인으로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제 아주 자명합니다. 천국을 만나면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는 천국을 맛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두렵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고 상처받을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제자는 예수님께 ‘선생님’이라 부르며 묵으시는 곳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묵은 다음에는 동료들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외칩니다.
그들에게 천국이 시작된 것입니다.
TVING에서 방영된 ‘이재, 곧 죽습니다’는 우리가 메시아를 만나는 과정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 최이재는 대기업 입사 면접을 보러 갈 때 차에 치여 자살을 한 남자가 죽어가며 자신을 부여잡는 바람에 면접을 망칩니다.
7년간 갖은 고생을 하며 다시 도전하곤 했지만, 월세도 내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애인 앞에서도 더는 당당할 수 없어서 헤어지자고 하고 “죽음은 내 고통을 끝내주는 수단일 뿐!”이라고 하며 빌딩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지만, 늦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납니다.
자기를 ‘죽음’이라고 말하는 한 여자를 만납니다.
그는 죽음을 한낮 자기 고통을 끝내는 도구로만 여긴 최이재에게 벌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두 번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살게 합니다.
다양한 삶을 겪으며 그는 모든 삶은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심지어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니 누구도 자신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비참함 속에 가장 비참한 한 가장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열한 번째 몸도 빨리 끝내버리려고 도로로 뛰어듭니다.
그때 죽어가며 7년 전의 자기가 걷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손을 붙잡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저주했던 그 사람이 바로 죽음을 하나의 고통을 끝내는 도구로만 여겼던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열두 번째는 엄마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엄마가 자기를 키우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리고 자기 죽음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깨달으며 죽음 앞에서는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엄마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만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주님을 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교만하니 사람을 대하기가 두려웠고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나의 비참함을 깨닫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 신학교는 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게 되자 신학교는 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스트레스가 적으니 그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빼앗는 죄는 멀리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외치고 싶다면 죽음과 같은 존재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고, 생명 자체이신 분 앞에서 ‘무’(nothing)이 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4일 [연중 제2주일]
요한 1,35-42
세상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공동체를 통해 과연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언젠가 공동체 차원에서의 큰 행사를 치른 적이 기억납니다.
의미 있고 소중한 행사였지만, 다들 학업과 사목을 병행하는 중인지라, 행사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준비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책임자 입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이리 뛰며 저리 뛰었지만, 생각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능력은 감안하지 않고 너무 크게 일을 벌인 것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행사 당일, 너무나 송구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꼭 와주십시오. 와서 자리를 빛내 주십시오.” 라고 외치며 적극적으로 초대했기에, 많은 손님들이 오셨지만, 정작 차린 것도 부실했고, 보여드릴 것도 부족했습니다.
성소 급감 현상이 일반화되고 있는 이 시대 수도회 본부에서는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들끼리만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지 말고 청소년들에게 외치십시오. 와서 보시오! 라고.”
그래서 요즘 저는 적극적인 초대에 우리 공동체를 찾아온 청소년들에게 과연 보여줄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쁨을 주는 그 무엇인가를 준비해놓고 그들을 초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와서 보아라.”라고 적극적으로, 자신감 충만한 목소리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따라 그분이 묵고 계시는 곳을 찾아온 제자들은, 과연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 그분 자체에서 뿜어나오는 강력한 영적 광채를 목격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극진한 환대와 친절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건네시는 생명의 말씀에 그 오랜 갈증도 말끔히 해소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머무시는 공간이 곧 하느님 나라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잠시나마 예수님과 초기 제자 공동체에서 그 특별한 맛, 지상 천국을 체험했던 안드레아는
형 시몬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세상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수도 공동체, 본당 공동체,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를 통해 과연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와서 보시오!”라는 우리의 초대에 우리 공동체를 방문한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사는 모습을 보고
과연 어떤 느낌을 받을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겠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한 성소자가 우리 공동체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딱히 보여줄 것이 하나도 없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망설임과 공들임 끝에 겨우 한 예비자를 우리 본당 예비자 반으로 등록시켰는데, 우리 공동체가 그에게 건넬 감동과 기쁨이 하나도 없다면 이 얼마나 난감한 일이겠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주일 강론>
(2024. 1. 14.)(요한 1,35-42)
<무엇을 찾느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 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한 1,35-4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이 부르심에 응답한 과정을 좀 더 잘 살펴보려면,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이야기와 루카복음 5장에 있는 이야기를 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루카 5,4-6).”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0ㄴ-11).”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이야기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이고, 루카복음 5장에 있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이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난 일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일 사이에는 몇 달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묵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되었지만,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고 본래의 생업인 어부 일을 하면서 지낸 것이 됩니다.
그 ‘몇 달’이라는 기간은, 제자들 쪽에서 생각하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그들을 정식으로 부르시기 전에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킨 기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제로 서품을 하기 전에 먼저 일정 기간 동안
신학생으로서 준비하고 수련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정식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들으면서, 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따를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준비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무엇을 찾느냐?” 라는 질문은, 루카복음에 있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에 연결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은, 두 이야기의 시간적인 순서와 상관없이, 신앙인이 되기 전에는 아무리 애써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사도들의 고백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바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찾느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습니다.”, 또는 “허무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와서 보아라.” 라는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깊은 데’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을 상징합니다.
허무하지 않은 인생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와서 보아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찾는 것을 내가 주겠다.” 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하룻밤을 지냄으로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어부들이 ‘고기잡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룻밤을 함께 지낼 때 두 제자가 무엇을 들었는지, 또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은 ‘머리로만’ 믿는 단계였습니다.
그랬다가 몇 달의 준비 기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더 듣고, 또 여러 가지 기적들을 직접 체험하거나 목격함으로써,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는 단계로 올라서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는 단계로
올라섰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는 지금까지는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사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 그 인생에서 벗어나서,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도로서 살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낚을 것이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사도들처럼 살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는 신앙을 통해서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은 모든 신앙인들이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1